아녜스 성녀의 순교에 관한 기록은
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동정에 관하여]와
[교회 직무에 관하여]라는 저서 안에 나타나고,
교황 다마소가
아녜스를 위해 만든 묘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박해가 일어나자 성녀 아녜스는
집을 떠나 순교하기로 마음먹었다.
성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어느 청혼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나 총독에게 끌려갔다.
불과 만 13세에 지나지 않았던 성녀 아녜스는
온갖 고문 기구를 진열해 놓고 위협하는
총독의 직접 심문에 정면으로 맞섰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아녜스는 우상에게 향을 바치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성호를 긋는 것 외에
절대로 그녀의 손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고 한다.
평생 동정을 지키고
일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한 아녜스는
“그리스도는 나의 배우자” 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굽히지 않는 것을 본 재판관은
이번에는 이교도 군중 앞에서 그녀의 옷을 벗게 했다.
정결하고 신앙심 굳은 아녜스는
“그리스도는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격노한 총독은
그녀를 로마의 어느 매음굴로 보냈으나,
성녀 아녜스는
그녀의 영웅적인 용덕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정결을 성공적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아녜스 성녀는
“당신은 칼로써 나의 피를 더럽힐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된 나의 육체를
절대로 더럽힐 수는 없을 것”이라고 용감히 말하였다.
자신의 뜻이 좌절된 데 몹시 화가 난 총독은
다시 그녀가 총독 앞으로 이송되자
참수를 명하여 그대로 실행되었다.
암브로시오는 아녜스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이들보다도
더 기쁘게 사형 집행장으로 갔다”고 전하고 있다.
형장에 끌려간 아녜스는
똑바로 서서 기도 드린 후 휘두르는 형리의 칼에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같은 생명을
하느님께 바쳐 순교했다.
아녜스의 시신은 노멘타나 가도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녜스의 축일은
354년부터 로마성인축일표에 나타나고,
로마의 동정 순교자들 가운데
4세기경부터 가장 많은 공경을 받는 성녀였다.
당시 교부들과 신자시인들은 아녜스 찬미가를 불렀고,
고문을 받으며 보여 준 영웅적인 용기와
끝까지 지켜낸 동정성을 칭송하였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성녀 아녜스는 동정녀의 상징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성녀를
‘어린 양’(Agnus 아뉴스 ;Agnes 아녜스)으로 묘사하였다.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 외에도
마르티노 성인도 아녜스를 각별히 공경하였으며,
[준주성범]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아녜스 성녀의 전구를 통해 받은
많은 기적들과 은총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아녜스의 동정성’은
성모 마리아와 성녀 테클라와 함께 높이 공경받고 있다.
6세기 경부터 아녜스 성녀의 상본에
어린 양을 팔에 안고 있거나,
발밑에 두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린 양’은 아녜스의 순결함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아녜스 축일 때 성 아녜스 성당에서는
두 마리 새끼양을 축복하고, 그 양에서 깎은 털로
교황이 관구장 대주교에게 수여하는
팔리움을 만드는 전통이 생겨났다.
성녀는 특히 중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이 칭송되었는데,
교회의 많은 성녀들, 즉 성녀 발바라,
도로테아,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따 등과 같이
한 신화처럼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덕행과 동정의 순결성으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바친 교회의 동정녀들이다.
4세기 말에 교황 다마소 1세가
성녀의 묘비에 비문을 썼는데,
그것이 1792년의 발굴 때에 드러나기도 하였다.
교황 다마소 1세의 비서를
3년 간이나 역임했던 성 예로니모는
성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 성녀 아녜스는 문학, 사람들의 연설,
특별히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데,
성녀는 나이와 폭군을 둘 다 이겨냈으며,
아울러 자신을 순결한 순교자로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의 축일을
1월 21일에 지낸다.

글...청주주보 3면, 장인산 베르나르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