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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개요와 서론-
에베소서 개요
1. 교리: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축복/ 1-3장
-핵심 사상:축복
-핵심 절:1장 3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소유/1장 1-14절
(1)아버지(성부)로부터 온 소유/1장 1-6절
(2)아들(성자)로부터 온 소유 /1장 7-12절
(3)성령으로부터 온 소유/1장 13-14절
-교화를 위한 기도/1장 15-23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 /2장
(1)부활하여 보좌에 오름 /2장 1-10절
(2)화목케 되어 성전을 이룸 /2장 11-22절
-능력을 위한 기도 /3장
2. 의무: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행위 /4-6장
-핵심 사상:행하라
-핵심 절:4장 1절
하나됨으로 행하라 /4장 1-16절
순전함으로 행하라 /4장 17-32절
사랑함으로 행하라 /5장 1-6절
빛으로 행하라 /5장 7-14절
주의깊게 행하라 /5장 15-17절
조화되게 행하라 /5장 18-6장 9절
(1)남편과 아내 /6장 18-33절
(2)부모와 자녀 /6장 1-4절
(3)주인과 종 /6장 5-9절승리함으로 행하라 /6장 10-24절
교리와 의무에 관한 책으로서 본 서신이 얼마나 균형을 잘 유지하는지 보라.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상기시킨 다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교훈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우리를 부르심에 달려 있다.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1-3장대로 살기를 원하고 교리를 연구하지만, 우리는 4-6장에 따라 움직이며 그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 에베소서 서론
▣ 도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대도시들 중의 하나로서 로마의 이 지역 수도였고 아데미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부요한 상업 중심지일 뿐 아니라 광대한 항구로서 세계 무역을 초치하고 있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고, 아데미 숭배는 열성적으로 신봉되고 있었다(행 19:23- 참조). 에베소는 그 지역의 중심 도시였으므로 바울이 3년 동안이나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나(행 20:31), 또는 전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을 퍼뜨린 도시였다는 점은(행 19:10)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 교회: 바울은 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이 도시를 잠깐 경유해 가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의 조력자로 남겨 두었다(행 18:18-28). 그 후 3차 여행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돌아와(행 19:1-41) 3년 동안 머물렀다(행 20:31). 그의 사역은 유대인 회당에서 시작되었으나, 동족들로부터 그의 멧세지가 거부당하자 그는 두란노라고 불리우는 학교로 옮겨 약 2년 동안 전파하며 가르쳤다(행 19:9).
에베소서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 도시의 마술사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술에 관한 책들을 불태웠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인도되었으며, 아데미 신상을 팔던 은장색들에게는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울의 불명한 가르침과 전도는 적들을 매우 자극하게 되어 그는 그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행 20장)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만났다.
▣ 서신: 바울은 이 편지를 기록할 때에 죄수의 몸으로 있었다(3:1/4:1). 그가 어떻게 죄수가 되었는지는 사도행전 21장 15절 이하를 참고하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그는 거짓 고소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의 재판은 분명치 못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었다(행 21:27-26:32). 그는 황제의 재판을 요청하여 로마로 보내어졌다(행27-28장). 자기의 집에 거주하는 죄수로서, 그는 자유롭게 방문객을 맞을 수 있었고, 이 때에 에베소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두기고에 의해 전해졌는데,(6:21) 아마도 이 사람은 오네시모와 함께 골로새서를 전하는 일 또한 도왔을 것이다(골 4:7-9).
이 서신은 에베소교회로 보내어졌으나,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회람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서신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진리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이는 고린도전, 후서나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지교회의 특정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어느 면으로 보나, 에베소서는 교회서신이며, 하나님의 심중에서의 교회란 무엇이며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어떤 기관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바울의 논점은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있다.
본 서는 영원 전에서 영원한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신자가 천국에 앉아 있으며 또한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는 것을 본다.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에 대하여 알리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본 서신만큼 교회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실제 생활에 대해 고양시키는 부분은 없다.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과, 에베소서에 제시된 교리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에베소서에 제시된 교회: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신부, 성전으로 비유하여 집합적인 개념으로 나타내며, 또한 디모데전, 후서나 디도서와 같은 목회서신에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지체로서 다루고 있다. 이 두 가지 강조점은 균형잡힌 사역을 위해서는 모두 필요하다. 확실히,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전체의 몸으로서 보신다. 그러나 사역에 관한 한, 지교회를 통하여 일하신다.
성령의 세례(침례)를 받은 신자들로 이루어지는 “보편적 교회“는 정당한 개념이지만, 이 “보편적 교회“가 지교회의 개념을 대신할 수는 없다. “보편적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선교 병원을 세우고, 성찬을 집행하거나, 가난한 가정을 구제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에서 지교회는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만약 각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인식한다면 지교회의 사역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엡 1:1-6
▣ 놀라운 이야기-에베소서 1장-
이 장에서의 핵심 사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소유하는 “축복“ 즉 우리가 소유하게 된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기인한다는 사실이다(1:3). 바울은 하나님의 삼위가 각각 우리를 축복하셨음을 알리며, 이 축복과 능력을 우리가 이해하여 우리의 삶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15-23절).
1.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1-6)
우리를 택하심(3-4절)-이것은 선택에 대한 놀라운 교리로서, 우리가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즐거워할 수는 있는 교리이다. 은혜의 신비한 비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보아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고전 1:26-29/살후 2:13-14/요 6:37 참조).
우리를 양자로 삼으심(5절)-선택이란 사람에 대한 말이며 목적에 따라 예정하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들(따로 분리되어진 사람들)이 되도록 선택하셨으며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예정하신다(롬 8:28- 참조).
신약에서 “양자“란 미성년인 아들을 온전한 성인의 지위에 두는 아버지의 공식적인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는 외부에서 맞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가족을 성년의 특권과 축복의 지위에 두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어린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를 용납하심(6절)-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납되어졌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예화를 빌레몬서에서 읽어 보자. “너의 노예 오네시모를 영접하되 나를 영접하듯 하라“고 바울은 썼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를 영접하듯이 이 성도를 받아 주소서“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을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하여 추적해 보라. 감동을 느낄 것이다!"
엡 1:7-12
2.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7-12)
우리를 구속하심(7상반절)-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값주고 사셨다. 우리는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현재 구속되었으며, 죄의 면전에서 우리를 구원하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의 미래의 구속도 소유하고 있다(4절).
우리를 용서하심(7하반절)-“용서한다“는 단어는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죄는 무거운 짐이며,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향할 때 멀리 보내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짐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벧전 2:24). 속죄일에 광야로 보내어지는 속죄 양은 이것을 상징한다(레 16:20-22 참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심(8-10절)-“비밀“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모으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는 서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전쟁이 있고, 대립과 분열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실 것이다.
우리를 상속자로 만드심(11-12절)-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주셨을 뿐 아니라(벧전 1:3-4) 우리를 그리스도의 기업으로 삼으셨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성전이며 신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주님의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미래를 소유하고 있다!"
엡 1:13-14
3.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13-14)
우리를 인치심(13절)-이 중요한 구절은 구원을 요약해 준다. 죄인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을 받고, 영원히 인침을 받는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믿고 난 후)“라는 말은 “너희가 믿을 때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그의 마음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의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뜻한다. 아무도 하나님이 인치신 것을 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보증이 되심(14절)-사업상 “보증금“이라고 하면 구입한 소유물에 대해 지불하는 돈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미래를 사셨지만 우리는 아직 그 모든 축복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체험하고 영광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을 받을 수있음을 확신하도록 “보증금“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이 세 부분의 끝절마다 자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왜 우리들을 축복하셨는지에 대해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바론 주의해서 살펴 보자.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6, 12, 14 하반절)라고 귀결되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죄인을 구원하실 때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엡 1:15-23
4. 이해를 위한 기도(1:15-23)
에베소서에는 “너희가 알게 되기를 원하노라“(1:15-23)와 “너희에게 있게 되기를 원하노라“(3:13-21)는 두 가지 기도가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교화를 위한 것이며, 두번째는 능력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알게 될 것과, 두번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축복이 적용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이 기도하는 바를 살펴 보자.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해를 주실 것(17-18상반절)-영적인 진리들은 영적으로 분별되어야 하며(고전 2:9-16), 이러한 이해력은 오직 성령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셨으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될 것(18 중반절)-하나님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우리는 영원에 대한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4-6절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요약하고 있다.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빌 3:14)과 거룩한 부르심(딤후 1:9) 하늘의 부르심(히 3:1)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기업의 부요함을 알게 될 것(18 하반절)-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기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기업이 된다(11절). “부요함“이란 단어는 에베소서에 종종 나오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음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게 될 때 어느 정도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주님의 능력을 알게 될 것(19-23절)-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능력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죄와 죽음과 세상과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다. 우리는 승리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승리로부터 싸움을 시작한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앉아 있으며, 그 곳에는 능력과 평화와 승리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축복들은 1-2절에서 설명한 조건들을 갖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확실히 바울은 죽은 성도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러한 성도들은(구별된 성도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이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도“라 이름지운다고 가르치는 곳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하나님만이 죄인을 성도로 만들 수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성도가 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엡 2:1-10
▣ 놀라운 기관(몸)-에베소서 2장-
1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하여 강조하였는데, 2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지위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인간의 지위는 그의 소유와 능력을 결정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육체적으로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없이 백악관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지위로 말미암아 권력과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디에 있거나 상관없이(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로 말미암아 영적인 영역에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1. 부활하여 보좌에 앉음(2:1-10)
우리의 과거의 상태(1-3절)-잃어버린 죄인의 모습을 보라.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속 사람이 죽어 있으므로 영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예들을 보자. 12세 된 소녀(눅 8:49-55), 젊은이(눅 7:12-15), 노인(요 11:1-) 등 이들은 모두 죽어 있었지만 부패의 상태는 달랐다. 나사로는 장사된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 모든 죄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죽어 있다. 구원받지 못한 교인과 부랑자 소굴의 주정뱅이에 차이가 있다면 다만 주정뱅이의 악취가 좀 더 심하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죄인은 영적으로 죽은 자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노예로서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위해 산다. 만일 그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으므로 거기서 떠나라“고 말하면 그는 비웃을 것이다. 그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 사단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삶에 역사한다. 이 말은 사단이 그들을 주정뱅이나 살인자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방법이란 “자기 의“를 통하여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이고 훌륭한 시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지식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 그러나 책임 있는 나이에 도달한 이후 그리스도를 알기를 거절할 때는 고의적인 선택에 의해 불순종의 아들이 되어진다.하나님이 행하신 일(4-9절)-“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말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마귀와 더불어 영원히 살도록 버려두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편을 택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소생시키심) 죄의 무덤에서 일으키셨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게 하셨다는 점이다! 우리는 함께 소생되어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며, 천국에서 함께 앉아 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자비가 풍성하시며 사랑이 크시기 때문이었다. 자비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데 내게 주시지 않는 것을 뜻하며, 은혜는 내가 받을 만하지 못한데 나에게 주시는 것을 뜻한다.
현재의 우리의 상태(10절)-우리는 주님의 솜씨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담대히 믿으라! 미래에 어떤 일들이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를 쥐고 계신 분을 알고 있다.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동일한 분이신 사랑의 아버지께서 내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나타내셨다. 참으로 우리는 얼마나 은혜에 빚진 자인가! 늘 숨이 막힐 듯한 은혜가 아닌가!"
엡 2:11-22
2. 화목케 되어 성전을 이룸(2:11-22)
본 장의 전반부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반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제 특별한 부분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과는 메시야의 언약을 맺지 앉으셨으나, 유대인에게는 왕국을 약속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는 어떠한가?
이방인의 산분(11-12절)-하나님은 항상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있어서 종족적으로는 구별하셨으나(고전 10:32) 개별적으로는 구분하지 않으신다(롬 10:11-13).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로서, 다시 말하자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사실상 구약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큰 간격을 두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보다 동맹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참 하나님도 없는 나그네들이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로마서 9장 4-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위치와 대조해 보라. 13절은 이것을 “멀리 떨어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죄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죽음“인데 비해 이방인들의 특정적인 문제는 “거리“였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도우실 때에는 거리를 두었던 점에 유의해 보자(마 8:5-13/마 15:22-28 참조).하나님이 하신 일(13-17절)-13절의 “그러나 이제“는 4절의 “그러나 하나님은“과 유사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서 있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유대인의 성전에는 성전의 여타지역과 “이방인의 뜰“을 구분하는 벽이 있었다. 이 벽은 이방인이 이것을 넘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경고의 표시였다. 예수께서는 그 벽을 헐어 버리셨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육체의 벽을 무너뜨리셨다(15절/ 갈 3:28-29 참조). 또한 주님은 영적인 벽을 헐어서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을 가까이 데려오셨다(13절). 주님은 율법의 벽을 허셨다. 그가 몸소 율법을 성취하시고 십자가에서 모세의 율법의 통치를 끝내셨기 때문이다(14-15절).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를 이루셨을 뿐아니라(롬 5:1)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악된 유대인과 죄악된 이방인들을 “새 사람“ 즉 교회로 만드셨다.
3장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교회의 “비밀“이 바울을 통하여 계시되었음과,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었을 것임을 명심하자.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분리해 놓으셨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인이 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인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둘 다 정죄한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또한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을 나타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현재 신분(18-22절)-이들은 둘 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한다. 유대인의 조직에 의하면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창조를 통해서 모든 신자는 지성소에 들어갈 특권을 가진다(히 10:19-25).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둘 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속해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제 더이상 “보다 나은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의롭게 된 것은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바울은 교회를 성전으로 비유하며 본 장은 끝맺는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적절한 상징일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거룩한 성전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베소 사람들은 그 시에 아데미를 섬기는 큰 신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도 역시 이해하기 쉬운 비유였을 것이다(행 19:21-41).
실제로 각각의 각 신자는 살아 있는 성전을 세우는 살아있는 돌이다(벧전 2:4-8). 사도들과 선지자들(신약 선지자들, 4:11)은 기초석이 아니다. 이들은 기초를 놓는 사람이며 처음으로 멧세지를 선포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신 동시에 기초석이시다(고전 3:11).오늘날 교회는 살아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성전이다. 그 성전이 완성되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것이며, 그 성전을 영광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장막(출 40:34)과, 솔로몬의 성전(대하 7:1)과,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거하셨으며(요 1:14/요 2:18-22), 이제는 각 신자 안에(고전 6:19-20), 그리고 교회 안에 거하신다(엡 2:21).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엡 3:1-12
▣ 놀라운 건물-에베소서 3장-
본 장은 에베소서의 전반부를 끝맺고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우리의 부요함을 설명하였다. 이제 그는 실천적인 부분(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행함)으로 이동해 가려 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잠깐 멈추어 기도를 한다. 그는 1절에서 기도를 시작하고는 13절에서 다시 기도를 잇고 있다. 그 사이에 끼어든 삽입 구절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몸된 기관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자신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설명(3:1-12)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첫번째 내용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갇힌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에 그가 갇혀 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도행전 22장으로 돌아가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귀를 기울여 경청했으나(행 22:21) “이방인“이란 말이 나오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사실상 이것은 사도행전 10장과 15장에 나타나 있는 대로 초기의 유대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문제가 되어 왔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고 경륜에 관한 특별한 직분을 맡기셨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계시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본 서신의 설명과 사도행전 서론 부분을 다시 복습하면 좋을 것이다.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을 계시하셨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왕국을 건설해 주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세례(침례)요한을 통하여 왕국을 제공하셨으나(마 3:2) 유대인들은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 두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하셨을 때는 그를 죽이라고 요청하였고, 사도들과 스데반을 통하여 제공하셨을 때는 사실상 그들 스스로 이들을 죽였다.
세 차례에 걸쳐 이 민족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였고, 성자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며,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신 성령을 거절하였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왕국의 제공은 끝이 났다. 멧세지는 사도행전 8장과 10장에서 사마리아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로 넘겨졌고, 사도행전 9장에서는 바울이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었다. 바울의 멧세지는 은혜요 바울의 특수 사역은 한 몸의 진리, 곧 교회의 비밀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엡 6:19/롬 16:25-26/골 1:26-27/골 4:3-4 참조). 그는 여기 6절에서 그 신비한 비밀을 명백하게 언급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이와 같은 비밀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도들과 신약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열 두 사도가 교회의 이러한 비밀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곳에 기록된 바울의 영감받은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베드로조차 이방인들에게 가기 앞서 하늘로부터 특별히 알리는 말씀을 들어야 했다. 한 몸의 진리는 바울에게 주신 계시였으며, 초대교회에 그 의미의 중요성이 점차적으로 부각되었다.
8절에 나오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란 말을 직역하면 “추적할 수 없는 풍성함“이란 뜻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됨의 비밀을 추적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비밀이었다. 9-10절에서 우리는 이중의 사역을 본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비밀의 경륜“을 알렸으며, 교회는 천사들에게(정사와 권세들, 6:12)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한다. 천사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우고 있었다(벧전 1:10-12).
사단도 역시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의 계획을 감추어 두심으로써 사단이 이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고 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을 운명에 인을 쳤다. 오늘날에도 이 시대에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 없이 방황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을 보게 됨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사도행전 1-6장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로 이동할 수 있다면 시간과 재능과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엡 3:13-21
2.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재(3:13-21)
에베소서에 나오는 두 가지 기도(본문/ 1:15-23)가 상호 보충적임을 기억할 것이다. 첫번째 기도는 교화를 위한 것이며, 두번째는 실현 능력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원하며, 다음으로는 그들이 알게 된 대로 생활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바로 주님의 가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땅 아래“ 있지 않다(빌 2:10). 이것은 연옥을 뜻하거나, 지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속 사람이 영적인 능력을 알도록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속 사람을 얼마나 부주의하게 취급하고 있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내면에서 능력을 주신다. 20-2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기도할때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지적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입혀 주신다고 가르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하였으며(행 6:4),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위대하게 역사하셨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였다. 물론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신자의 마음에 거하신다. 그러나, 모든 마음이 그가 계시기에 편안한 집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베다니에 가기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 곳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으로 배부르며 그를 섬겼기 때문이다. 창세기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러 오셨을 때도 천사를 앞서 보내어 롯을 방문하게 하셨다(창 19장). 왜냐하면 세상적인 신자의 집에서는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편안함을 느끼실 수 있겠는가?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서 편안함을 느끼신다. “뿌리가 박히고“란 굳건한 위치, 믿음과 사랑의 습성을 암시한다. 영적인 일들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18절의 “알아“는 “파악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미 그들이 이해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이제 그는 이 놀라운 일들에 대해 그들 스스로 이해하게 될 것을 기도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한다. 바울은 특히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모든 것을 충만케 하는 사랑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하게 되기를 원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가 아닌 성난 심판자나 또는 엄격한 주인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한다“(19절)는 말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요 1:16/골 2:9-10 참조). 골로새서 2장 10절에서도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충만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구호대상자처럼 산다. 공허한 생활은 실의에 빠진 위험한 생활이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채우시지 않으면 불순종의 영이 와서 역사하며 죄에 빠뜨린다.
20-21절은 감동적인 축복 기도이며 이 편지의 첫부분을 끝맺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가! 이 능력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열 때, 내적인 교제를 구할 때, 기도할 때, 말씀에 순복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을 때(2:6),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져 있을 때 “쓰레기더미 안에“ 있을 이유가 없다.이 전반부를 끝마침에 있어서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자세는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었고(2:6)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2:20), 그의 무릎을 꿇었다(3:14). 이로 인하여 바울은 걸을 수 있고(4:1), 성장할 수 있으며(4:15) 사단에 대항하여 설 수 있었다(6: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지위는 이 땅 위에서 우리로 승리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