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오카에서 출생한 마스도미(富左衛門, '승부'로도 불림, 1880-1934)는 시모노세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청일전쟁(1894~95) 당시 경리장교로 조선에 머물렀다. 동경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우에무라(植村)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후시미쪼교회(富士見町敎會)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마스도미는 청일전쟁 때 접했던 조선에 이상촌을 건설하고 싶은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8년 29세 나이로 한국에 입국한다. 곧바로 전북 김제 봉월리로 가서 농토를 개간하고 봉월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부안면 오산리에 사과농장을 개설하고 정착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백성들이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 나라를 찾고 독립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당시 일본인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면서,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과수원에 예배당을 세워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산교회(1912.10.5)의 시작이다. 그리고 한국인 청년 3명(윤치병, 김영구, 양태승)과 함께 일본 교배신학교에서 수학하여, 1917년에는 윤치병 목사를 오산교회 담임으로, 김영구 목사는 선교를, 양태승 선생은 교육을 전담하게 하여 조선인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8년 4월 1일 교회당을 교실로 한 오산학당에서 학생 8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1919년 4월14일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의 인가를 얻어 현 부안초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지어 개교했다. 한편 마스도미는 떨어진 사과를 모아 사과잼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판로를 개척해 주는 등, 오산 사과는 지역의 새로운 특산물이 되었다. 조선인들을 위한 그의 노력과 인격에 오산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오산교회와 김제의 봉월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그러나 1921년 말, 일본의 본격적인 대 한국 식민지정책 수행 상, 총독부의 깊은 간섭을 받게 된 마스도미는 학교경영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까지 처한다. 그의 절박한 입장을 알게 된 고창군민들은 군민대회를 열어 학교를 인수하기로 결의한다. 당시에는 한국인이 학교 인가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부득이 일본인 경영의 이 학교를 인수하기로 하였고 또한 마스도미도 고창 사람들의 높은 기개에 감복하여 경영권을 무상으로 양도하고 1만5천원의 거금까지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고창 군민들이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였고, 고창읍으로의 이전과 건물 신축을 위함 모금에도 적극 동참하여 마침내 2층 벽돌로 된 학교 건물을 완성하고 1922년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고등학교)로 개칭 인가받게 된다.
1923년부터 교장에 오른 양태승 선생은 마스도미 장로의 기독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교육이념으로 정하고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심 고취와 애국심 함양을 위해 민족적 색채가 짙은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마스도미 장로는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독립운동의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요주의 학생이 이 학교에 전학을 와도,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라는 이유로 총독부의 철저한 감시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비롯해 항일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공립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들을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전원 입학시킨 것도 마스도미 장로였다. 이 일로 인해 고창고등학교는 명실상부한 민족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고창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때의 역사가 새겨진 비석과 문헌이 남아 있다. 한편 오산교회를 맡았던 윤치병은 서울 안동교회, 기숙사 사감이었던 김영구 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각각 목사로 사역을 하였다.
고창고등학교는 비록 일본인 장로가 세웠지만 예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곳이다. 마스도미 장로는 김제와 고창, 일본을 오가며 매년 성탄절이 되면 고창에서 온 유학생 및 조선 유학생들을 동경에 있는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대접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장학금도 지원하였다. 또한 승동교회에서 목회하던 김영구 목사의 뇌출혈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유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김 목사의 아내 박세라 여사는 그가 보내준 돈을 모아 서울 봉화산 아래에 먹골배밭을 구입하였고 이후 김영구 목사의 아들 김종수 목사는 이곳 먹골(현 묵동)에 영세교회를 설립한다. 지금은 김종수 목사의 아들 김충렬 목사가 대를 이어가면서 마스도미 장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매년 추모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처럼 신앙제일주의 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으로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고창고등보통학교는 의식 있는 한 일본인 기독교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마스도미 장로(부인 데루코 장로)는 1920년대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대에 일본의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통절하게 인식하고 사죄의 뜻으로 예수님의 정신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우리나라의 복음화와 근대화의 기초를 놓기 위해 ‘한 알의 밀’과 같이 살아간 한국의 은인이다. 한국정부는 최초로 일본인에게 199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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