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황제 시대는 기원 후 235년부터 284년까지 로마 제국 각지의 로마군과 근위대가 멋대로 황제를 폐립한 시대를 일컫는다. AD 235년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되고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라인강에 주둔한 로마 군단병들은 신병훈련 책임자였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추대되는 일이 벌어졌다. 막시미누스는 군단장도 아닌 일개 대대장에 불과한 인물로 로마 황제로 선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마음에 들지않았지만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로써 로마 황제를 지목하는 권한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군단으로 넘어가게 됐다.
오로지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만 있으면 곧바로 황제가 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황제 즉위 후에 수도 로마 보다도 라인강에 머물며 게르만족 격퇴에 몰두했다. 병사들의 신망도 좋고 용맹도 뛰어난 만큼 제위 3년 동안은 계속해서 승전보를 수도 로마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막시미누스는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부유한 북아프리카 지방, 아시아 속주 등 동방 일대에서는 가혹한 세금 징수로 여기저기서 폭발하였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막시미누스 대항마로 고르디아누스 1세와 2세를 황제로 승인해 준다.
그러나 누미디아 속주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1세와 2세 간에는 앙숙지간이라 반대하였다. 고르디아누스 1세와 2세는 카펠리아누스와 전쟁을 벌이지만 전사하거나 자살로 끝난다. 이렇게되자 로마 원로원은 당혹해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한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지자들의 폭동과 협박에 못이겨 고르디아누스의 1세의 어린 외손자를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린다. 로마 원로원의 이러한 선택은 고육지책이었지만 큰 효과를 발휘한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는 분노하여 즉각 로마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 병사들의 식량이 떨어지고 같은 동포들 끼리 자신들을 원수로 취급하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를 배신한다. 막시미누스 황제는 후계자인 아들과 함께 AD 238년 자신을 추대한 병사들에 의하여 살해된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살해당하면서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제는 로마의 공동 황제인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두고 로마 원로원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뉜 채 정쟁에만 몰두한다.
발비누스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훨씬 많은 공을 세운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를 시기했고 막시무스 역시 발비누스를 싫어했다. 이런 와중에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개입하여 프라이토리아니가 황궁으로 쳐들어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납치해 살해한다. 이로인하여 고르디아누스 3세가 황제에 오른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3세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했다. 따라서 어머니가 대리 통치하게 된다. 그리고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인 티메시테우스는 자신의 딸을 소년 황제와 결혼시키고 여러 정적들을 제거하여 권력을 키운다.
그러나 제국 안에서 자연재해가 터지고 고트족이 다시 침법하는 등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하에서 AD 242년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동방 속주를 다시 공격한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와 함께 동방으로 향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한다. 이후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격하는데 테메시테우스가 갑자기 사망한다. 후원자를 잃은 고르디아누스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근위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3세는 AD 244년 페르시아군과 교전 중 살해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자 원정군 병사들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황제로 옹호한다.
아라부스는 아랍 출신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의 베두인 출신인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AD 249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넘어서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한 데키우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필리푸스는 자살하고 만다. 데키우스는 집정관을 역임한 후 로마 원로원을 지낸 인물로 도나우강을 방어하는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고트족을 방어하는 전공을 세웠다. 마침내 AD 249년 무능한 필리푸스 황제를 대신해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데키우스는 황제가 된 직후인 AD 250년 1월에 모든 로마 시민들은 로마신을 경배하고 신성한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반발하자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이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침범해오자 그리스도교 탄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트족을 토벌하러 나서야 했다, 데키우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성년이 된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그중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수도 로마에 남겨둔 채 큰 아들과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AD 251년 흑해 연안의 늪지대에서 벌어진 '아부리투스 전투'에서 큰 아들과 함께 전사한다. 데키우스의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고트족을 막아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모이시아 속주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갈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자 고트족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강화를 추진했고 자신의 후임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임명한 뒤에 수도 로마로 향했다. 호스텔리아누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갈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는 행운을 얻었고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이 갈루스와 강화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AD 253년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반도로 쳐들어 왔기 때문에
모이시아 속주의 로마 군단병들이 자신의 지휘관인 아밀리아누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해 버렸다. 아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인 리키니누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발레리아누스는 먼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발레리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에 이은 두번째로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이어받아 카르타고 주교와 로마 주교를 처형하였다.
발레리아누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제국의 서부지역 통치를 위임하고 자신은 돔부지역 통치에 전념한 채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에 포로로 잡힌다. 로마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인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하느라 아버지을 구출작전을 포기하였다. 서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갈리에누스 혼자서 로마 제국의 모든 국경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분할해 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발레리아누스의 예하 장군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고 나서자 시리아 팔미라의 귀족인 셉티미우스 모데나투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마크리아누스르 토벌한 후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갈리에누스는 오데나투스를 로마의 속왕으로 임명하고 동방 속주의 방어를 일임했다. 오데나투스는 AD 260년부터 AD 267년까지 사신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AD 267년 승리 축하연에서 큰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만다. 이에 오데나의 후처였던 제노비아가 암살범을 죽인 뒤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가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삼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공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으로 분리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갈리에누스는 국경에 주둔한 로마 군단으로는 기병위주의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버거워지자 기병위주로 편성한 상설 예비대를 편성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이 예비대는 기동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기병의 비율을 3배 이상 높였고 기마투창병과 외인 기병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오리엔트 궁수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쫴기골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 다양한 병종이 혼합하였다. 실리주의자인 갈리에누스는 더나아가 기병대장을 오랜 전통을 깨고 전문 군인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로마의 중심 병과가 중장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되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후보자가 대부분 군단장이었던 것과 달리 갈리에누스 이후에는 황제 후보자가 기병대장으로 변경되었다. 갈리에누스는 라인강 방어를 게르만족에 맡기고 도나우강 방향으로 군대를 집중하여 게르만족을 바깥으로 몰아내었다. 게르만족에게 라인강을 맡긴 것은 후대 역사가에게큰 혹평을 받았다.
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던 갈리에누스지만 아버지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를 구출하려는 시도를 하지않아 빈축을 샀고 제국 여기저기에서 반란 독립 움직임으로 확산된 원인이었다. 결국 제국은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이라는 3갈래로 쪼개졌다. AD 268년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갈리에누스는 큰 위기에 처했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지이자 이탈리아가 수입하는 밀의 3분의1 이상을 공급하던 주요 곡창지대였다. 이를 상실한 것은 갈리에누스의 가장 큰 실책이엇다.
그나마 그를 따르던 일리아나 출신 기병대장들까지 갈리에누스에게 등을 돌렸다. 로마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채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를 제거한 진압군은 그 후임 황제로 기병대장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발레리아누스의 친모와 유족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과 협력해 무너져가는 제국을 안정화 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고트족이 침공하였지만 로마의 통제를 받는 범위 내에서 정착을 허락하여 고트족은 더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다.
클라우디ㅣ우스 고티쿠스는 제위 1년 반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