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55)
오늘 복음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된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이야기하는 마태오 복음 13장의 마지막 부분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시작된 마태오 복음 13장은 오늘 복음의 말씀으로 그 끝맺음을 맺게 되는데 어제 복음으로 비유가 정리되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말씀으로 13장의 내용이 마무리되는데, 그 분위기와 내용이 이전과 전연 다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난 고향 마을로 돌아가 그곳에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받은 홀대와 무시를 당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마을 나자렛으로 가시어 그곳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마을, 곧 부모와 형제들이 있는 곳, 자신이 나고 자란 나자렛 마을로 향해가셨을 때, 예수님 역시 그들을 다시 본다는 마음에 기분이 들떠 계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있는 그곳으로 가며 그곳에서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통해 그들을 더욱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어야지라고 마음먹고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놀라워하였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 인간적 생각이 자리하기 시작하자 그 놀라움은 예수님을 향한 홀대와 무시로 변화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던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예수님의 대하는 태도가 급변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5-56)
이런 마음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예수님의 말과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 같은 마음, 곧 예수님을 홀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분명 처음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와 새로움에 놀라워하다가 돌연 예수님이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갑작스레 예수님께 보이던 반응이 돌변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 자신들과 같은 시골마을 나자렛 출신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저런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너는 분명 우리가 같은 비천한 출신인데 어디서 그런 비범한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처음의 놀라움의 감정을 넘어 왜 나는 갖고 있지 못한 것은 너만 갖고 있는지 시기 질투하는 마음으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폄하하고 부정하기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과 능력을 보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아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 그 모든 것을 가두어 두려는 편협한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내 곁에 오셔서 당신의 능력을 내 눈 앞에서 보여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려 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하느님의 능력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더욱 배가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을 체험한 예수님은 그 진리를 다음의 한 문장으로 잘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거부하는 고향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ㄴ)
한편,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가 겪은 상황 역시 복음의 예수님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아니 복음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고 위중합니다. 죄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였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의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와 다르다는 이유로 예언자를 죽이려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달려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예레 26,9)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 목이 뻣뻣해진 이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보여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를 오늘 복음환호송의 베드로 1서를 인용한 다음의 말씀이 잘 표현해 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1베드 1,25)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 곧 믿지 않는 이들, 그들이 설사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서는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고 떠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전해줄 놀라운 사랑의 은총을 그들은 스스로 거부하고 그것을 전하려는 하느님의 아들을 몰아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예수님의 저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보인 그 우를 범하지 않도록,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죽이려 든 이스라엘 백성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 안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그리하여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마음의 기쁨의 샘이자 원천으로 삼아 그 말씀으로 행복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1베드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