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폰카 시와 에세이】
숲길 초록 우산
◆ 소년가장의 은혜와 사랑
(사진=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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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초록 우산
윤승원 수필가
산길에서 갑작스럽게 만난 소나기
피할 곳 없으면 이것을 쓰세요
어느 이름 없는 분의 고마운 배려
소년가장이 입은 은혜 같은 사랑
다음날 그 자리에 똑같은 초록 우산
(삽화=AI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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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말
도솔산 등산로. 가파른 경사도였다. 숨 가쁘게 산등성이에 올랐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공터 나무의자에서 앉아 잠시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난감했다. 아,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만 서둘러 하산할까? 아니면 비를 맞을까?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한 산길인데 여기서 내려가자니 아쉽다.
하지만 산행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 포기할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순간의 갈등은 산행을 그만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앗, 이건 우산이 아닌가. 구세주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초록 우산. 누가 여기 세 갈래 길 이정표에 우산을 걸어 놓았을까?
고맙기도 해라.
이때 문득 떠오른 시상(詩想)이 ‘은혜’였다. 하늘의 은혜, 그렇다면 어떻게 보답을 하지? 어떻게 은혜를 갚지?
그렇다. 초록 우산을 펼치면서 보은(報恩)이란 말까지 따라온 것은 ‘소년가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직 경찰관 시절이었다. 두 아들을 둔 30대 아버지였다.
한국복지재단의 후원자로 가입해 매달 작은 성의를 표하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년가장이었다.
어느 날 소년가장의 편지를 받았다.
연필 글씨로 꾹꾹 눌러 쓴 소년가장의 눈물겨운 편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소년의 당찬 의지가 느껴지는 감사의 편지였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연락처를 전혀 모른다.
후원자는 그래야 했다.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게 복지재단 참여자의 불문율이요, 무언의 약속이었다.
익명의 소년가장 편지에서 “은혜를 잊지 않겠다”라는 말,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말이면 됐지, 그 이상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보다 귀하고 고마운 표현이 어디 있는가.
한여름, 소나기 쏟아지는 숲길에서 발견한 ‘초록 우산’이 그렇다. 누가 이런 은혜를 베푼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갚을 것인가? 고민할 것 없다. 보답은 간단하다. ‘다음 날 그 자리에 똑같은 우산’을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보은(報恩)의 의미를 소년가장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은혜 갚는 방식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의 소년은 잘 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다. 자존심이다.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이 곧 보은이다.
후원자가 바라는 ‘보은의 진정한 의미’를 소년가장은 잘 안다. 소나기를 원망하지 않는다. 예고 없이 찾아온 불우한 환경을 원망하며 낙심만 하지는 않는다.
인정과 사랑의 이름표 초록 우산. 착한 소년가장의 눈앞에 떨어진 초록 우산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다.
숲길에서 소나기를 만난 나그네도 다르지 않다. ‘소나기’라는 인생의 시련은 잠깐 피하면 된다.
그 가림막,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초록 우산’이 있으니 소년가장은 외롭지 않다.
배려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우산’ 하나 남겨 두는 마음이다. ■
2026. 여름 숲길에서
필자 윤승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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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글 :
[나누고 싶은 이야기]
■ 희망을 지피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 (주) 일요신문사 발행 《해피데이스》 1998.10월호 / 나누고 싶어요 / 사랑
사랑의 카드
윤승원 수필가. 경찰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아내가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비로소 안도의 웃음을 짓는다. 같은 반 친구의 소개로 광고지를 돌리러 갔다고 한다.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전화를 한 모양이다.
이윽고 아이가 돌아왔다. 아이의 젖은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녀석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엄청나게 뛰어다녔다’라고 한다.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안경점을 개업했는데 개업 인사장을 들고 아파트 단지를 누볐다고 한다.
나는 다소 지쳐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는 안쓰럽고 딱한 생각이 들었으나, 시키지 않은 일을 독단적으로 하고 돌아온 아이의 행동에 대하여 꾸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엄마, 이게 내가 번 돈이야!” 하면서 녀석은 1,000원짜리 5장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다.
“그렇게 애써서 번 돈을 어디다 쓸래?” “사랑의 카드를 사려고 그래요!” “사랑의 카드?”
뜻하지 않은 이 말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이 사회복지법인 ‘한국복지재단 후원자’로 가입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소년, 소녀 가장과 무의무탁한 불우 노인들, 그리고 사회복지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다달이 약간의 금액을 입금해 왔다. 그리고 연말에는 복지재단에서 보내오는 ‘사랑의 카드’를 사주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엊그제, 우편으로 부쳐 온 이 카드의 안내문을 아이가 읽어 본 모양이다.
우리 가족과 결연 맺은 어린이는 대전의 모 초등학교에 다니는 11세의 소년가장이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현재는 조부모가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연로하셔서 경제적으로는 무척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나는 작년 말 녀석(소년가장)에게서 예쁜 그림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판에 박은 듯한 인사 편지가 아니라 어려움을 딛고 꼭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소년의 강한 의지가 담긴 편지였다.
그들을 돕기 위해 우중에 광고지를 돌리고 다녔던 아이가 새삼 기특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를 잠시 돌아다보았다.
내 손으로 얼마든지 닦을 수 있는 구두를 나는 2,000원이나 주고 닦았다. 어디 그뿐인가.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닌데 시내에 나갔다가 등산 모자를 또 하나 사지 않았던가.
그리고 휘발윳값도 올랐는데 불필요하게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낭비한 적은 없는지 새삼 돌아다보았다.
그렇다. 아직 쓸 만한데 버린 저 쓰레기통의 칫솔도 아이가 볼까 두렵다. - 월간 《해피데이스》 1998년 10월호 <희망을 지피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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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가 감상 소감
윤승원 수필가의 ‘폰카 시’는 사진과 시가 서로를 완성하는 ‘폰카 시’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숲속 갈림길에 누군가 걸어 둔 초록 우산이라는 실제 풍경이, 짧은 언어를 만나면서 ‘배려의 상징’으로 승화됩니다.
폰카 시는 사진과 시가 결합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현대 문학 장르이며, 순간의 감흥을 간결한 언어로 응축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럼 윤승원 수필가의 폰카 시에 담긴 정서를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 숲속에 핀 한 송이 인간애
윤승원 수필가의 시 「숲속 초록 우산」은 화려한 수사도, 장황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섯 행의 짧은 언어 속에서 독자는 오래 머물게 됩니다.
‘피할 곳 없으면 이것을 쓰세요.’
이 말은 사진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필가 시인은 우산을 걸어둔 사람의 마음을 읽어냅니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시선,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특히, ‘소년가장이 입은 은혜 같은 사랑’이라는 구절은 단순한 우산 하나를 삶의 기억과 연결합니다.
어려운 시절 누군가에게 받았던 따뜻한 도움, 그 은혜가 오늘 숲속의 초록 우산을 통해 다시 살아납니다. 독자는 자신의 기억까지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마지막 행, ‘다음 날 그 자리에 똑같은 초록우산’은 이 작품의 절정입니다.
우산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사람만 잠시 쓰고 다시 제자리에 걸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배려를 믿는 사람과 그 배려를 존중하는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 한 줄은 우리 사회가 아직 따뜻한 공동체임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 생명의 색, 희망의 색, 초록 우산이 상징하는 것
이 작품의 핵심 상징은 초록 우산입니다.
초록은 숲의 색이며 생명의 색이고 희망의 색입니다. 우산은 비를 막는 도구를 넘어 어려움을 함께 견디게 하는 보호와 나눔의 상징이 됩니다.
사진 속 갈림길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도솔봉과 공굴안으로 향하는 이정표 사이에 걸린 우산은 마치 인생의 갈림길에서 만나는 작은 선행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여백을 남겨 둡니다. 이것이 좋은 폰카 시가 지닌 함축의 힘입니다.
◆ 종합 평
「숲길 초록 우산」은 작은 풍경 하나를 통해 배려, 신뢰, 은혜의 순환을 노래한 아름다운 폰카 시입니다.
윤승원 수필가 시인은 자연을 단순히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속에서 사람의 품성과 공동체의 온기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비를 피하는 우산을 말하는 시가 아니라, 메마른 세상을 적셔 주는 인간애를 노래하는 시가 됩니다.
짧지만 오래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독자는 시를 다 읽고 나면 사진 속 초록 우산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마음속으로 이런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숲속의 초록 우산 하나쯤 걸어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을 다시 음미해 보니, 특히 마음에 오래 남는 대목은 마지막 연입니다.
‘다음 날 그 자리에 똑같은 초록 우산’
이 한 줄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 우리 사회를 향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우산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면 안타까운 현실 고발에 머물렀겠지만, “똑같은 초록 우산”이라는 표현은 선의가 선의를 낳는 아름다운 순환을 보여줍니다.
이 한 줄 덕분에 시 전체의 품격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또 한 가지 돋보이는 점은 시인의 시선입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은 숲길에서 이정표나 나무를 보고 지나가지만, 시인은 그곳에 걸린 우산 하나에서 ‘이름 없는 사람의 배려와 인품’을 발견합니다.
사물을 인간애의 상징으로 읽어내는 이러한 시선은 윤 선생님의 수필과 폰카 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평하고 싶습니다.
“『숲길 초록 우산』은 비를 막아 주는 우산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삭막한 세상을 적셔 주는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폰카 시이다.”
이 작품은 짧지만, 독자의 마음속에 “나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우산 하나를 걸어 둘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좋은 문학이 독자에게 생각과 실천을 이끌어 간다면, 이 폰카 시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많은 독자가 숲속의 초록 우산을 통해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희망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려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우산 하나 남겨 두는 마음입니다.”
윤 선생님의 이 한 문장은 작품의 감동을 해설처럼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관람객의 마음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소재는 평범하지만,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인간애를 발견했고, 마지막 행에서 신뢰와 공동체 의식을 환기하는 완성도가 돋보입니다.
꾸밈없는 언어로 큰 울림을 전하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세상에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雲峰, 윤승원 수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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