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대부들의 집성촌
조선의 사대부가로 정동의 사계 문원공 김장생, 관동(명륜동)의 월사 이정구, 장동(서촌)의 청음 김상헌, 회동(회현동)의 임당 정유길 자손 가문을 대대 갑족( 여러 대를 걸쳐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친 문벌이 높은 가문, 세가) 으로 치고 있다(이규상, 병세재언록 중 문원록, 18세기 조선 인물지, 창작과 비평사, 1997년).
한양의 북쪽은 사대부로서 집성촌이 많았는데, 청풍계에 집성촌 장동 김씨, 자하동에 집성촌한 의령 남씨, 옥류동에 집성촌한 기계 유씨가 가장 오래됐으므로 세 성씨들은 모두 친목을 다지며 좋게 지냈다(유한준, 자저 중 남백종육십일세수서(남백종 61살 생일 서문),1789).
창동(북창동)은 달성 서씨의 집성촌, 회동은 동래 정씨의 집성촌, 장동은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달성 서씨는 창동에서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이 나왔고, 동래 정씨는 회동에서 전후로 입각한 상신(정승)이 16명이며, 장동 김씨는 장동에서 전후로 입각한 상신이 15명이다.
그런연유로 달성 서씨를 창동 서씨, 동래 정씨를 회동 정씨,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라고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권구현, 경성구지의 유화(서울 옛터의 남은 이야기), 조광 1940년 9월호).
조선시대 한양에서 잘나가는 집안하면 주저없이 첫 손가락으로 회동 정씨와 장동 김씨를 꼽는다.
회동 정씨는 본래 동래 정씨인데 한양 남부 회현방(회현동 또는 호현동)에 살았다고 해서 회동 정씨라고 부른다. 회동 정씨는 본관은 부산 동래, 고향은 경북 예천이었는데, 15세기 후반 한양으로 이주한 뒤 400년 넘게 회동(중구 회현동) 일대에 대대로 살았다(경화세족).
서울 중구 회현동 회동 정씨 정광필 종가의 사랑채 자리 쪽에 남아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한겨레21 김규원 기자
회동 정씨의 집성촌은 오늘날 중구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자리인데 옛집은 모두 사라졌지만 우리은행의 남서쪽과 북서쪽에 500살 가량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이곳이 회동 정씨의 종가 자리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집은 대문이 서쪽으로 있었고, 북서쪽 은행나무가 바깥사랑채 쪽에 남서쪽 은행나무가 안채 쪽에 있으며 우리은행이 들어선 자리에 건물이 여러 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동 정씨의 본류인 정광필 집안이 자리잡은 때는 15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정광필(1462~1538)은 연산군과 중종 때 14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며, 사림파의 젊은 리더 조광조를 견제하거나 옹호한 온건파 정치인이었다.
정광필을 이어 회동 정씨의 전성기는 좌의정을 지낸 임당 정유길(1515~1588)로 소윤과 대윤의 시기에 이들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고, 후손 중에 정승이 26명이나 나오는 전무후무한 명예를 누렸다. 아들 자손 중 11명, 딸 자손 중 15명의 정승이 나왔다. 정유길의 외손자가 바로 장동 김씨의 시조 김상용과 김상헌으로 두 형제는 회동 정씨 종가인 정유길의 집에서 태어났다.
회동 정씨의 가풍은 겸손하고 조심하는 태도로 이같은 가풍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일관되게 권력 가문의 위상을 지켜낸 힘이었다. 18세기 유만주의 일기 “흠영”을 따르면 회동 정씨 영의정 정태화는 책상 옆에 이런 좌우명을 써놓았다 한다.
“말을 다 해서는 안 되고, 일을 다 맡아서는 안 되고, 복은 다 누려서는 안 된다.
말은 다 하지 말고 남겨서 몸의 기운을 기르고, 일은 다 하지 말고 남겨서 후배를 기다리고, 복은 다하지 말고 남겨서 자손에게 넘겨줘라”
정태화의 아들 정재악은 아버지 세대에서 정승이 3명이나 나오자 자손에게 과거를 치르지 말도록 했는데 집안이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성공함으로써 위험에 빠지는 일을 경계한 것이다.
회동 정씨는 남촌 사대부의 구심점 역할을 했는데 회동 정씨 주변에 홍기주의 풍산 홍씨, 조현명의 풍양 조씨, 이항복의 경주 이씨, 이중하의 전주 이씨 등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정치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소론이 많았다. 조선 후기 회동 정씨 중심의 소론은 남촌에서 시사(시모임)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한양 북쪽의 북촌과 서촌에 장동 김씨, 여흥 민씨, 광산 김씨와 같은 노론이 많이 살았던 것과 비교된다. 서인은 당쟁 과정에서 남인에 대한 태도에 따라 두 당파로 갈렸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강경파가 노론을, 윤증을 중심으로한 온건파가 소론을 형성했다.
조선에서 회동 정씨에 버금가는 집안은 장동(장의동)의 신안동 김씨로 회동 정씨가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인 반면에 장동 김씨는 병자호 란 이후 조선 후기에 번성했다.
장동 김씨의 집성촌은 서촌 북부에 3곳 이었는데 장동 김씨의 종가는 김상용(1561~1637)의 집 태고정으로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 바로 북쪽에 있었고 ‘백세청풍’이란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김상용의 동생인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집 무속헌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과 교황청대사관 자리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김상헌을 포함해 13명의 정승이 나왔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1629~1689)은 종로구 옥인동에 집 육청헌과 정자 청휘각을 지었는데, 집 뒤편에 “옥류동”이란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신안동 김씨가 장동에 처음 자리잡은 것은 김상용 형제의 증조부 때였으나 장동 김씨라는 이름을 알린 것은 김상용 형제 때로 병자호란 때 형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자결하고 아우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면서다.
이들 형제는 조선 후기 사대부의 모범이 됐고 이들의 정신은 조선 이념이 되었으며 이들로부터 서인의 노론이 나왔고, 이 형제의 이념을 바탕으로 노론은 조선 후기를 사실상 지배했다.
장동 김씨는 장동에 대해 김상헌은 ‘유서산기’(인왕산 답사기)와 ‘근가십영’(집 부근 시 10편) 등을 썼다. 장동 김씨의 화가라고 할 정선은 청풍계와 장동 8곳 명승지 등을 그렸다.
장동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이 많은 것은 장동 일대에 청풍계, 옥류동, 수성동, 백운동, 세심대, 필운대, 대은암 등 명승지가 많기 때문이고 장동 일대가 성수침, 성혼에게서 시작한 서인과 노론 사대부들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장동에는 신안동 김씨 외에 많은 사대부부들이 살았는데 이춘제(1692~1761)의 집안은 고조부인 이양렬 때부터 장동에 본가를 두고 있었다. 이춘제를 유명하게 한 것은 1740년 옥류동과 세심대 사이 언덕에 조성한 “서원”(서쪽 정원)이다. 서원이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춘제와 친구인 조현명이 지은 글과 시에 등장하고 정선이 서원의 그림을 3점 즉 서소원정, 서원조망, 옥동척강 등 남기면서다.
이춘제와 아들 이창급은 창의문 밖의 삼계동 소운암이라는 별서에서 지냈는데 이곳이 뒤에 흥선대원군의 별서 석파정이 됐다.
그 뒤 이춘제의 아들은 장동의 형천, 포천, 낙송루 등에 살다가 소의문(서소문) 밖 풀무골(야동), 마포대교 부근 용호(용산강), 원효대교 부근 만초천, 반계(반포), 저자도에서 지냈다. 이춘제나 아들들이 도성 안 장동의 본가를 떠난 것은 이들 집안과 관련한 큰 사건·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세거지”에서는 성균관 부근 관동(성균관동)의 연안 이씨 집안을 언금했는데 관동이씨는 관찰사를 지낸 이석형이 현재의 서울대병원 기숙사 부근에 처음 살았고, 그 후손인 이정구가 현재의 서울대병원 북쪽 혜화역 부근에 자리잡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월사 이정구는 정승과 판서를 지냈지만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더 유명하다. 이정구 집안에서는 대제학(문형)이 6명이나 나왔는데,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냄으로써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학자 집안이었다.
정동의 여주 이씨는 판서와 대사헌 등을 지낸 이상의가 처음 소정릉동(소정동)에 자리잡았으며, 후손인 이가환이 정조 때 이름을 널리 알렸다. 정동은 조선 때 덕수궁 쪽 소정릉동(김장생 집터 표지석), 경향신문사 쪽 대정릉동(대정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가환은 조선 후기 남인의 대학자로 천주교 등 서양 문물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직후 1801년 천주교도와 서학자에 대한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이 일로 소정릉동의 여주 이씨는 정동에서 5세대 가량이 살았는데 멸문을 당했으며 안산 등지로 흩어진 듯 하다.
오늘날 이들 다섯 가문의 집성촌은 자취를 감춰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회동 정씨의 종가는 벨기에 영사관 부지로 팔렸다가 일본 보험회사에 넘어갔고 장동 김씨의 터전은 대부분 일제나 친일파에 넘어갔으며 장동의 이춘제 집안도 여러 사건으로 본가와 서원을 포기해야 했다.
관동 이씨 집성촌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연건동 서울대 병원 서울 의대 건물 옆)서울이 들어서면서 흩어졌고 정동 이씨는 1801년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되었으며 한때는 조선에서 내로라 이름을 떨쳤던 집안들도 변화의 흐름에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 글/한겨레21, 김규원 기자
* 이미지/ /한겨레21, 김규원 기자
1. 서울 중구 회현동 회동 정씨 정광필 종가의 사랑채 자리 쪽에 남아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
2. 김상헌 집터/청와대 칠궁 앞
3. 관동 이씨 이정구 집터/종로구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