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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히브리서 제 1 강 ‘말씀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1:1-3절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In the past God spoke to our forefathers through the prophets at many times and in various ways,
2-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he made the universe.
3-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Point: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Introduction: 요즘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소통의 부재’니, ‘소통회복 방안’이니, 그런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우리나라 리더쉽에 위기가 있는데, 그 원인이 ‘소통’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그 극복방안으로 ‘친서민, 중도실용의 강조’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고, 그 방향의 방법들이 등장합니다.
소통이 안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서로 간에 이해, understanding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서로가 본심이 있고, 진심이 있어도, 이게 통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괜한 갈등을 초래합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습니다. 단체나, 공동체에도 이런 경우가 흔하게들 생깁니다.
얼마 전 한 개그 프로그램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엄청 인기가 있었지요. 여기서 스타 개그우먼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신모양! 소통이 부족한, 그래서 대화가 필요한 가정, 사회, 공동체의 모습을 너무 실감 있고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대화를 종료시키는 한 마디, ‘자, 이제 그만 밥 묵자.’
성경은 ‘소통’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난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도 분명하게 잘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구구 절절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oint 1: 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의 첫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히브리서 전체의 방향과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전체주제는 간단히 말하면 ‘대제사장 예수’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레위기가 있습니다. 좀~~ 답답한 말씀이지요. 초신자들이 이 부분 읽다가 인내가 바닥나 건너뛰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의 내용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서와 상통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신약의 레위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둘 다 인간의 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며,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그 주제가 됩니다.
레위기가 어떤 내용입니까? 레위기를 보면 사람들의 이런 저런 죄를 죽~~ 나열합니다. 이런 죄 저런 죄 구구절절이 죄인인 사람의 죄들을 보여줍니다. 별 별 죄가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들에 대해 드려야 할 제사들이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옵니다. 제사의 정신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다섯 가지가 나오고, 또 제사의 방법에 따라 화제, 요제, 거제, 전제,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제사를 제사장이 사람들의 죄를 위해 드리는 세세한 모습이 레위기에 나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대제사장이면서 또한 제사의 제물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대제사장 예수가 제물이 되어 자신이 죽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때, 인간의 모든 죄가 해결되는 길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죄의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주어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제사적 기능을 상세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보면 명확한 게 있고, 명확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우선 명확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이 부분에 대해선 성경의 그 어느 부분보다 명확합니다. 그러나 다른 신약의 서신서들과는 달리 받는 교인들이 누구인지, 또 저자가 누구인지 이런 부분은 명확한 게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히브리서의 수신자가 유대인들 그룹임을 인정합니다. 물론 이들이 어디에 살던 유대인들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예루살렘이나 팔레스타인, 혹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이라는 나름의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들은 구약의 제사, 즉 모세 제사법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 신앙으로 그들에게 핍박이 왔습니다.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외부의 이방인이나 로마권력으로부터 온 핍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핍박 때문에, 이들 가운데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자세히 설명한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복음이 모세의 제사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구약 제사의 완성임을 주장할 급박한 환경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을까요? 사도 바울이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해박한 구약지식, 구약의 정수를 신약화하는 탁월한 논리전개, 너무 바울적입니다. 그러나 바울이라고 말하기에는 2장 3절,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이 말씀이 걸립니다. 여기 보면 저자 자신을 사도가 아니라, 사도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들은 자들(사도들)이 우리(저자)에게 확증한 바니’ This salvation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the Lord.
그래서 어떤 이는 사용된 헬라어가 알렉산드리아 색채가 강함을 강조하면서, 그쪽 사역자로 얘기합니다. 또 어떤 이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어로 쓴 것을, 누가가 헬라어로 번역한 것 아닌가라고 얘기합니다. 또 아볼로나 바나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이 저자 후보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본문이 말하지 않으므로 누가 저자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인 것만을 정확하게 말합니다.
얼마 전에 여기 말레이시아에 놀러온 조카를 데리고 근처 바닷가의 씨푸드식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 크렙을 좀 시켰습니다. 물론 크렙만 먹기에는.... 그래서 새우도, 조개도, 오징어도, 깐꽁이라는 야채반찬도, 해물볶음밥도 시켰습니다. 여기다가 크렙 세 마리 정도 제법 큰 것으로 시켰습니다. 엄지 집게 발가락이 아주 컸습니다. 껍질도 단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크러셔(crusher)로 조각 조각을 내 주었습니다. 그 속살!!! 아이들이 얼마나 잘 먹던지... 다음에는 순수하게 크렙만 좀 사줘야 하는데....
이 크렙을 보며 히브리서 생각이 났습니다. 직업병이지요. 히브리서가 이 단단한 껍질의 크렙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내용이 아주 하드(hard)합니다. 아주 수준이 높습니다. 단단한 음식이지요.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껍질을 깨고 속살을 맛보기 시작하면 딴 게 보이질 않습니다. 얼마나 부드럽게 살살 넘어가는지!!
사람의 죄는 깊습니다. 아주 아주 깊습니다. 보면 볼수록 깊습니다. 알면 알수록 깊습니다. 살면 살수록 그 깊음을 체감하게 됩니다. 우리 밖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많은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제사를 드리고 또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제사의 제물이 되어야만 용서되고 해결되는, 그런 깊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친히 몸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이가 세상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찢었습니다. 바로 그 때 죄의 담은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죄가 아무리 깊고 커도 그보다 더 크신 이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고 없어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선포되고 말씀되어졌습니다.
구약시대 제사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저마다 자기 죄를 생각하며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모입니다. 이 동네 K씨는 산비둘기를 가지고 옵니다. 뭔가 죄가 있었겠지요. 같은 동네 H 아줌마는 고운 곡식 가루 한 바가지를 가지고 옵니다. 뭔가 쪼끔 욕심 낸 게 있는 모양입니다. 또 저 동네 L씨는 집비둘기를 들고 있네요. 그런데 건너 동네 B씨는 염소를 끌고 옵니다. 잘 따라오지 않는 염소를 끙끙대며 끌고 옵니다. 뭔~~가 좀 큰 죄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소가 한 마리 나타납니다. 저쪽은 제사장님 댁인데! 아니나 다를까 제사장님이 큰 황소를 한 마리 몰고 오고 있습니다. 음~~메 음~~~메 소리가 온 동네에 다 퍼집니다. 어쩌다... 아깝다.... 저게 얼마짜린 데...
그럴 수 있지요. 제사장도 사람인데. 또 제사장들은 죄에 더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들이기에, 딴 사람들이 별 거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큰 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것인데도, 그것 때문에 몸부림치는 그런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창피하지만, 많이 아깝지만 소 한 마리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죄용서를 받고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제물의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제물로 들어간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단 한 번이면서, 영원히 제물된 하나님의 아들을 찬양합니다. 그분께 감사드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분의 십자가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함을 믿는 믿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 본문 1절을 보세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여기 보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옛적에’ 말씀하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In the past God spoke! 누구를 통해 말씀하십니까? 선지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하십니다. at many times and in various ways!
이 1절 말씀은 히브리서의 제일 처음 독자요 청중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선지자가 나오고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들이 구약을 웬만큼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임을 짐작케 합니다. 이들의 선조는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시기를 통해 여러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들은 전통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시나? 왜 이 때도 말씀하시고 저 때도 말씀하시시고 또 말씀하시나? 왜 이런 모양 저런 모양 갖은 모양으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나?
우리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이 말씀하시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라는 말이 대표하는 많은 인생들은 그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의 전달자가 소위 ‘선지자들’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여러 시기에 여러 장소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전합니다. 이삭과 야곱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말씀을 전하고, 다윗이 전하고, 솔로몬이 전하고, 오고 오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합니다. 그 선지자들이 수없이 많은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잔소리’입니다. 좀 불경한가요?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잔소리’입니다.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하나님의 ‘잔소리’이기도 합니다.
보세요. 정상적인 가정에는 꼭 ‘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남편은 엄마와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듣게 됩니다.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까? 행복한 가정일까요? 아닙니다. 이상한 가정입니다. 이 잔소리가 있는 가정이 정상적입니다. 가정을 바로 세우려는 끊임없는 어머니의 열정과 노력이 바로 이 ‘잔소리’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 집에서 이런 말이 들립니다. ‘이놈의 황보씨들 징글징글하다.’ 그럼에도 이 징글징글한 이들을 향한 어머니의 잔소리는 계속됩니다. 가정을 알고, 가정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잔소리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실까요? 인생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면, 이상한 데로 가는 것이 인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인생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혼 못하는 남자’라는 드라마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우리 아이들이 봅니다. 저도 슬쩍 낍니다. 대장금의 훈남 ‘지진희’가 거의 지진아 수준으로 변합니다. 결혼 못하는 이유가 수십 가지 됩니다. 제가 봐도 왠만하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나아보입니다. 괜히 여자 고생하고 서로 불편하고 그런 스타일의 남자입니다. ‘토이남’이라고 할까요? 그냥 자기 세계에 빠져 그게 더 편한 남자입니다. 여자는 오히려 침입자지요. 거기 여자 주인공 엄정화와 양정아가 만나 식사하면서 이런 대화를 합니다. ‘남자요, 정말 지긋 지긋하게 안 변해요. 그게 남자예요.’ 야, 이 말에 큰 은혜 받았습니다. 제가 남자지만, 안 변하거든요. 여자가 수없이 많이 노력하지만, 안 변하는 게 남자거든요. 진리를 말하니까 당연히 은혜 받지요.
인생이 그렇습니다. 잘 안 변합니다. 정말 안 변합니다. 지긋 지긋 하게 안 변합니다. 얼치기들이 변화 변화를 외칩니다. 큰 변화, 엄청난 변화를 강조합니다. 반드시 변한다고 떠듭니다. 초짜들이 격변을 얘기하고, 전적인 쇄신을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노련한 사람들은 인간의 변화를 잘 신뢰하지 않습니다. 안 변한다는 것을 기초로 깔고 무엇이든 계획합니다. 그래서 실망도 적고, 잃는 것도 적습니다. 변화를 믿는 얼치기들이 엄청난 상실과 좌절을 경험하지요.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많은 잔소리’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인간 상황과 조건에 대한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많습니다. 많은 잔소리처럼 많습니다. 사람이 안 듣기 때문입니다. 못 듣기 때문입니다. 안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깊습니다. 죄인된 인생은 죄와 분리될 수 없는 인생입니다. 뼈 속에 죄가 박혀 있고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죄인이라 부릅니다. sinner! 만약 인생이 죄를 극복할 수 있다면, 또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인생의 문제들이 심각할 게 없습니다. 죄의 해결책이 분명하다면, 인생의 문제들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죄의 해결책이 없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죄의 해결이 나오질 않습니다. 다 임시변통들이요 응급처방일 뿐입니다. 대충 묻어두고 덮어두고 그냥 그냥 넘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죄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죄의 깊이와 심연을 토로하고 고백합니다.
이 죄는 창조자와 인생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 장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막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거절했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공급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만들어내고 견고화시킨 인간의 무지와 고집은, 위로부터 오는 수없이 많은 복되고 좋은 것들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마치 도시에 전기가 갑작스레 끊긴 것과 같습니다.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분별이 되질 않습니다. 혼란이 오고, 갈등이 오고, 온갖 이상하고 더러운 것들이 마구 튀어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시시 때때로 말씀하십니다. 여러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시켜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 시켜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 내세워 말씀하십니다. 저런 사람 내세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이..’ God spoke!
그런데 이제 2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씀되신 아들이 말씀하도록 인생 한 복판으로 그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자, 여기서 질문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시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심각함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이신 아들을 보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한국으로 자료들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대개는 이메일을 통해 자료를 보냅니다. 사진이든지 그때 그때 리포터들은 이메일로 합니다. 요즘은 첨부기능이 너무 발달되어 있어서 보내기가 아주 쉽습니다. 다만 UCC는 여기 인터넷이 너무 느려 보내다가 자꾸 중단되어서 아쉽습니다. 그런데 가끔 중요한 서류들이 있습니다.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노출되면 저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염려가 되는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여기도 종교국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거든요. 한국어로 검색하기도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돈이 몇 만원씩 들어도 EMS를 이용합니다. 이것은 왠만해선 오픈하지 않거든요.
이렇게 우리는 중요한 자료나 정보는 소중하게 전달합니다. 배달사고가 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면 무슨 재산과 관계된 자료는 꼭 등기로 합니다. 또 내용증명을 해서 무슨 중요자료를 보냅니다. 또 중대사건에 대해선 실무진이 아니라, 고위책임자가 직접 사건을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흐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너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육신으로 와서 전달해야 할 만큼, 그 말씀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전해야만 제대로 전달되는 지극하고 극진한 하나님의 심정이 말씀에 담긴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전달하는 이 말씀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의 현실이 급박하고 절박하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인 인생에게 죄가 왜 심각한가? 그것은 죄가 인간의 생명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인생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타격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죄는 치명적이고 심각한 것입니다. 생명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고, 현 세계에서 생명의 끝은 곧 인생의 끝입니다. 그래서 죄는 치명적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는 인생에게 사망을 끌고 옵니다. 그래서 사망은 심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죄는 생명의 끝장을 가져오고, 인생은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아들이 온 것입니다. 죄를 중단시키고, 다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생명의 근원에서 아들이 온 것입니다. 그가 와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와서 자신의 생명으로 죄를 막습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생명의 길을 엽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아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많은 인생들에게 생명의 길을 엽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세상의 죄들을 다 끌어안고 해결합니까? 아들이 대체 누구길래 지독히 악한 죄인도 구원받았다고, 또 죄의 사슬을 끊었다고 얘기합니까?
저는 간증집회에 알레르기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목회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오케이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레이시아의 로칼 교회들을 보면 간증이 많은 편입니다. 좀~~ 많은 편입니다. 한국교회에 비해 상당히 많습니다. 어떨 때 예배시간이 간증 퍼레이드 같은 분위기입니다. 간증하라니깐 손들고 나와서 ‘예배시간에 늦을 뻔 했는데 누가 오토바이를 태워줘서 제 시간에 왔다. 하나님의 천사다. 할렐루야!’ 모두다 ‘할렐루야~~~’ 이런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게 뭔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도 잔뜩 간증식으로 얘기하고 성경해석은 찔끔하고 끝나버립니다. 거의 간증설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간증에 좀 어색한가하면, 이런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간증자들 보면 많은 경우 독~~한 죄인들이 나타납니다. 전직 주먹, 전직 암흑의 왕자, 전직 사기꾼... 규모가 클수록 인기도 올라갑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드라마틱한 인생이 감탄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조금 깨치고 나서 들었을 땐, 왜 하나님은 저런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고 저렇게 감격하며 간증까지 시키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깔끔하고 정갈하게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데!
그러나 복음은 죄인은 누구나 다 오라고 합니다. 큰 죄든, 작은 죄든, 상관이 없습니다. 죄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다 가지고 오라합니다. 세상보다 크고 우주보다 더 크신 이가 세상에 온 이상, 와서 자기 생명을 걸고 죄를 해결한 이상, 무슨 죄든 다 오라는 것입니다. 다 해결하고 생명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왔습니다.
자 그러면,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2절 후반부를 보면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인생도 지구도 우주도 천사도, 심지어 마귀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물이며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피조물을 생명 되게 하시는 창조자입니다. 본질이 피조물과 다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우주보다 큽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아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을, 이 창조자를, 이 우주보다 크신 이를, 인생을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아들과 죄인된 인생을 바꾸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는 죄를 받고 인생들은 생명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내어주고, 인생에게는 죄에서 자유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기 보면 ‘후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heir,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가문의 대를 잇는 자녀, 법적으로 재산 상속권을 가지는 자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지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 소유권을 부여받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논쟁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이 언제부터 모든 피조물의 주인인가, 창조 전인가, 아니면 부활하신 후인가? 그러나 논쟁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아들은 창조 전부터 주인이고, 부활하신 후는 더더욱 주인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고, 또 아들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이 ‘후사’라는 말이 왜 중요합니까? 왜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을 ‘후사’로 소개할까요? 보세요. 분명 세상에는 죄가 많습니다. 세상 역사가 길어질수록, 인생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 아름답고 복되고 순결해지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질 못합니다. 오히려 죄가 많아집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아들을 소개합니다. ‘이 아들이 나의 후사이다, 상속자이다, 나의 소유권과 통치권이 이 아들에게 다 있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면 왜 아들을 ‘후사’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죄를 책임지는 아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보세요. 세상에 죄가 넘쳐납니다. 인생의 안에서도 죄는 가득합니다. 인생의 밖에서도 죄는 가득합니다. 이렇게 많은 죄가 어떻게 해결됩니까? 저 용서할 수 없는 죄들을 어떻게 해결됩니까? 저렇게 천인공노할 죄를 누가 해결합니까? 최근 ‘나영이 사건’을 보세요. 어떻게 인간이 그래요? 그러나 그것도 인간의 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죄가 이렇게 크고 많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해결한다. 나의 후사된 아들이 책임진다. 아들이 그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한다. 그래서 죄를 내가 해결한다.’ 이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후사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만유의 후사된 아들이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유보다 크고, 우주보다 크신 후사된 아들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데 누가 무슨 말을 합니까? 책임져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겠다는데, 십자가마저도 감당하겠다는 데, 누가 뭐라합니까? 그래서 그 아들을 믿을 때, 그 후사를 믿음으로 살 때, 그 누구에게도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든지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 아들이, 그 후사가, 자기 생명으로 용서하기로 작정하였는데 누가 정죄합니까? 누가 죄사함을 못 받습니까? 우리가 용서할 수 없다고, 용서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납할 수 없다고, 죄사함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후사된 그 아들이 작정하고 책임지셨으므로, 그 누구든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No condemnation! 바로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3절을 보세요. 그 아들을 더욱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자, 여기 이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 성격, 본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왜냐? 그만큼 아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아들이 누구냐가 인생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구원에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 2절에서 아들을 ‘후사’, 상속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시종일관 동참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세상은, 나아가 우주는, 그를 위해, 또 그를 통해 창조된 것이란 뜻입니다. 바로 그 아들이 말씀의 주체가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3절에서 이 아들을 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먼저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얘기합니다. the radiance of God's glory! ‘영광의 광채’라는 말은 가장 빛나는 부분을 말합니다. 이 광채라는 뜻은 말은 그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의 의미도 있고, 또 외부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영광의 광채’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당신 스스로 근본 하나님이시므로, 신적인 영광스런 광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그 인격과 교훈을 드러내시므로, 성부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를 세상에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또 3절은 이 아들을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표현합니다.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여기서 ‘형상’이란 카라그마라는 원어를 사용하는데, 쉽게 말하면 원형카피입니다. 원형 그대로의 조각품이나 초상을 말하는데, 본체의 본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말씀대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 이대로 입니다. 유대인이나 회교도들이 들으면 돌 던질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본체의 형상입니다. 예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3절 말씀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두 가지를 더 얘기합니다. 하나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일’입니다.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또 하나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입니다. purification for sins! 이 두 가지를 예수의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소개합니다.
우리는 자주 세상을 당연하게 바라봅니다. 세상사를 당연하게 여길 때도 많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또 가을, 겨울이 오고! 계절을 변화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너무 오래된 자연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맞추어 온갖 날들이 있고, 절기가 있습니다. 무슨 때, 무슨 때, 온갖 때들이 있습니다. 언제는 뭘 해야하고, 언제는 뭘 준비해야 하고.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게 자꾸 변합니다. 제때 있어야 할 것들이 제 때 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구 온난화 얘기를 많이 합니다. climate change, 기후 변화가 주요한 회의 의제가 됩니다. 당연한 것들이,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그렇지 않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가끔 바닷가엘 갑니다. 우리는 그 바다가 거기 그만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때가 되면 썰물로 빠져나갔다가, 때가 되면 밀물이 되어 들어옵니다. 몬순이 되면 바닷물이 좀 탁해졌다가, 몬순이 지나면 맑은 바닷물이 됩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쓰나미 피해 현장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다 복구가 되었지만 메모리얼을 위해 남겨둔 지역을 보았습니다. 또 무슨 기념관처럼 당시 흔적들이나 사진들을 모아둔 곳도 가보았습니다. 아수라장 그 자체입니다. 순식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해운대’ 영화가 최근에 수입되었습니다. 제목이 ‘쓰나미’입니다. 높아도 너무 높은 파도를 만들었더라구요. 또 이 글을 쓰는 지금 사모아섬쪽의 쓰나미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게 뭡니까? 바닷물이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말씀으로 거기 있으라고 하니까 거기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붙잡고 있기에, 거기에 그대로 늘 있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sustaining power! 만물을 붙잡고 계신 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붙잡길 싫어하시거나, 귀찮게 여기면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우리 마음대로 할래요. 귀찮게 마세요.’ 그래서 죄악이 관영해진 세상을, 그 분이 통째로 손놓아 버렸습니다.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분이 계신 것입니다.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분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 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그분이 뭘 하십니까?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purify the sins! 세상에는 죄가 많습니다. 또 더 많아집니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인생이 연차를 더할수록, 죄가 사라지고 죄가 줄어들면 좋은데, 그게 그렇질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는 더 정교해지고 교묘해집니다. 인생 안의 죄도 더 치밀해지고 세련되어져 갑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가려져서 오히려 더 커져가고 많아져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죄들을 아들이 ‘정결케’한다고 하십니다. 그 아들의 사역은 이 죄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생의 축복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여서 축복을 막습니다. 은혜를 막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귀하고 복된 것들을 가로 막습니다. 그래서 죄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관계라는 것을 보면, 과거가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현재의 나와 너가 팰로우쉽을 가지려고 할 때, 여기에 과거의 뭔가가 끼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과 내가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해도, 과거의 그 일, 그 때 바로 그 일,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던 그 과거의 일이 걸리면, 관계에 발전이 힘듭니다. 그 과거에 묶여서 현재의 시간을 괴롭게 지내게 됩니다. 과거의 그 일이 현재에 끼어들어, 현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물론 합당한 이유들은 많습니다. ‘그런 일을 했으면 사과를 하든, 해명을 하든, 뭔가를 해야 할 것 아냐? 어떻게 입을 싹 닦을 수가 있어?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뭔가를 조치해야 나도 뭐를 할 것 아냐?’ 그런데 보면 이런 상대가 먼저 뭔가를 잘 안합니다. 또 보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신경질 나게! 남은 그것 때문에 죽어 넘어가는데... 괜히 기대하면, 나만 속이 썩습니다. 내가 그냥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냥 과거를 건너뛰어야 합니다. 내가 현재에 살기위해서 과거를 과거로 여겨야 합니다.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면, 과거에 살게 됩니다. 과거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에 묶이게 됩니다. 끼여 있는 과거를 덮던지, 건너뛰든지, 뛰어넘든지, 넘어가야 비로소 관계가 관계가 됩니다. 현재가 미래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와 죄라는 것이 성격이 비슷합니다. 둘 다 끼여 있습니다. 끼여 있어서 가로막습니다. 은혜를 막습니다. 축복을 막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을 다 가로 막습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정결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죄들을 깨끗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죄들을 해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끔히 청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끼여 있는 죄들을 다 없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흐르게 하고, 축복도, 위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도, 다 흘러넘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엣지’있게 질문합니다. 어떻게요? 어떻게 예수가 이렇게 많은, 점점 더 많아지는 이 엄청난 죄들을 해결해요? 무슨 수로 해결합니까? 한 인격이 어떻게 세상의 이 많은 죄를 책임집니까? 온통 자기 죄도 자기가 해결 못해, 남에게 펑펑 떠넘기는데! 상당히 엣지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해 봅시다. 대통령이 성탄절이나 광복절 같은 때에, 특별사면을 단행합니다. 대개는 민심을 잡기 위해 민생사범들을 많이 합니다. 어떤 때는 분위기가 좋으면 정치사범, 경제사범도 막 사면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부시 전대통령과 체니부통령이 퇴임을 얼마 앞두고, 기밀누설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한 참모의 사면을 두고 옥신각신했다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일국의 대통령에게는, 국가가 헌법조항을 두어 사면권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비록 한 개인이지만, 국가가 부여한 권력으로 세상의 여러 죄를 덮어주고 없애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이 아들의 성품과 지위를 설명하고, 또 그의 사역들을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이 과연 누구며 어떤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세상보다 크다면, 세상의 그 많은 죄보다 더 크다면, 우주보다 더 크다면, 그리고 그 아들이 ‘내가 죄들을 책임진다. 내가 죄를 다 덮는다. 내가 죄를 다 청소하고 정결케 한다. 내가 다 깨끗하게 한다. 대가를 치루어야 하면, 내가 치룬다. 내가 감당한다. 내가 다 걸머진다.’ 이렇게 아들이 나온다면, 죄가 아무리 큰들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책임진다면, 죄들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인생 사이에 끼여 있질 못하게 됩니다. 은혜를 막지 못하게 됩니다. 축복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위로부터 오는 갖은 좋은 것들을 가로 막지 못하게 됩니다. 아들이 다 책임지고, 끼인 것을 청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들의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들에게 나의 죄들, 나의 과거를 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들이 끼인 것들 다 덮고 다 털어내고 다 청소해서, 은혜와 축복이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로부터 오는 좋고 귀한 것들로 다시 채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의 마지막을 보세요. 아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오른편에 계시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 모든 것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있으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자신이 있으신 것입니다. 죄문제의 해결도 자신이 있으신 것입니다. 인생이 무슨 문제를 가져와도 다 감당할 길이 있고, 방법이 있고, 해결책이 있으시다는 말씀이십니다. 뭐든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너의 죄가 뭐냐? 너의 문제가 뭐냐? 어떤 상황이냐? 어떤 환경이냐? 어떤 조건이냐? 외부의 넘쳐나는 죄냐? 아니면 내부로 깊고 깊은 문제냐? 다~~~~ 가지고 오라. 아들이 세상에 갔고, 세상에서 고난을 감당했고, 피를 흘렸고, 십자가를 졌다. 그 아들이 죽기까지 순종했다. 이제 내가 그 아들을 다시 살려 이 위엄의 오른편에 앉게 했다. 그에게 모든 영광과 권세와 능력이 다 있다. 인생의 문제가 뭐냐? 세상의 문제가 뭐냐? 어떤 죄가 문제냐? 다 가지고 오라. 빠짐없이 가져오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의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들은 높은 곳에 계십니다. 보좌에 계십니다. 위엄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 아들이 바로 나의 주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을 둘러싼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뿌리내리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명 죄는 우리가 짓지만, 우리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죄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죄는 파괴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만유의 후사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세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분입니다. 영광의 광채시며,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죄도 정결케 하십니다. 바로 이 아들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아들이 위엄의 우편에 앉아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늘 있습니다. 죄도 늘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죄가 늘어가고, 죄가 일으키는 문제들도 늘어갑니다. 그러나 문제들을, 죄들을, 믿음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죄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 분은 위엄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에는 길이 있다고. 믿음에는 방법이 있다고. 그 분의 말씀을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듣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복된 믿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ayer: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이제 또 아들을 통해 말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인생의 죄를 정켤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더욱 믿음을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말씀의 능력을 깊이 경험케 하시고, 크게 체험케 하시옵소서. 우리의 문제들과 장벽들을 말씀따라 믿음으로 이겨가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듣겠사오니 말씀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나를 붙드시고, 나의 죄를 정결케 해 주신 주님을 오늘 이 시간 다시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요즘 한동안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주님~ 저 이제 참을성이 다 닳아진 것 같아요' 라구요. 오늘 이 말씀으로 또 넘기고 넘어가도록 해야겠지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