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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1. 빛이 있으라 창 1:1-5
2.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6-31
3. 안식 창 2:1-3
4. 사람됨 창 2:4-25
5. 유혹 창 3:1-8
6. 찾아오시는 하나님 창 3:9-24
7. 죄의 소원 창 4:1-15
8. 가인의 후손 창 4:16-24
9. 하나님과 동행 창 4:25-5:32
10. 죄악의 관영 창 6:1-22
11. 방주에 있던 자만 창 6:13-7:24
12. 하나님의 권념 창 8:1-22
13. 언약 창 9:1-17
14. 덮어줌의 은혜 창 9:18-29
15. 영걸 창 10:1-32
16. 바벨탑 창 11:1-9
17. 택한 백성 창 11:10-31
18. 복의 사람 창 12:1-9
19. 애굽으로 간 아브람 창 12:10-20
20. 다시 가나안으로 창 13:1-18
21. 십일조 창 14:1-24
22. 아브람의 상급 창 15:1-7
23. 언약 체결 창 15:1-21
24. 이스마엘 창 16:1-16
25.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27
26. 나그네 대접 창 18:1-15
27. 웃음 창 18:1-15
28. 아브라함의 기도 창 18:16-33
29.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 창 19:1-22
30. 롯의 처를 기억하라 창 19:23-38
3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창 20:1-18
32. 분리 창 21:1-21
33. 브엘세바 창 21:22-34
34. 여호와 이레 창 22:1-19
35. 사라의 죽음 창 23:1-20
36. 이삭의 결혼 창 24:1-67
37. 아브라함의 죽음 창 25:1-18
38. 선택 창 25:19-34
39. 장자 만들기 창 25:19-34
40. 이삭 창 26:1-35
41. 이삭의 축복 창 27:1-33
42. 벧엘 창 28:1-22
43. 서원 창 28:16-22
44. 우물가에서 창 29:1-20
45. 총이 없음 창 29:21-35
46. 경쟁 창 30:1-24
47. 야곱과 하란 창 30:25-43
48. 돌아가라 창 31:1-16
49. 얍복 나루에서 창 32:1-32
50. 얍복강 이후 창 33:1-20
51. 다시 벧엘로 창 35:1-8
52. 야곱의 허리 창 35:9-15
53. 야곱의 복 창 35:9-15
54. 라헬의 묘 창 35:16-29
55. 에서의 형통 창 36:1-8
56. 요셉의 꿈 창 37:1-11
57. 유다와 다말 창 38:1-30
58. 요셉의 형통 창 39:1-23
59. 하나님의 섭리 창 40:1-41:57
60. 죄를 깨닫게 함 창 42:1-17
61. 유다의 희생 창 44:14-34
62. 자신을 알리는 요셉 창 45:1-28
63. 애굽으로 간 야곱 창 46:1-7
64. 야곱의 유언 창 47:27-48:22
65. 야곱의 예언(1) 창 49:1-7
66. 야곱의 예언(2) 창 49:8-28
67. 유다 창 49:8-12
68. 야곱의 죽음 창 49:28-50:14
69. 요셉의 죽음 창 50:15-26
1. 창 1:1-5 “빛이 있으라”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 하셨습니까? ‘말씀’ 성경은 누구의 말씀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너무 쉬운 질문을 하였지요? 이제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 한 가지만 더 질문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말씀의 능력’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라든가 교회유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으로 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거대한 건물이 있더라도 무늬만 교회일 뿐이지 내용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창조 사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원래 있던 빛이 나타났습니까? 원래 없던 빛이 말씀의 능력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이것을 무에서 유로의 창조다 그러지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만이 가득한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 말씀의 능력으로 빛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만 말씀으로 창조 하시고 지금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를 하고 계십니까? 처음 창조한 것이 인간의 범죄로 뒤틀려 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재 창조의 작업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만 자기가 믿어 준 것을 믿음이라고 우깁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이 믿어 주었기에 믿음이 생겼다면 그럼 믿음은 인간의 신념의 산물이지 하나님의 선물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믿음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지요? 그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살아났습니까? 아니지요.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이지요! 윤형주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 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 시켜 주세요.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도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 되는 것도 주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교회 역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기 목사들도 개척을 하기도 하고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개척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큰 문제가 돈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장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모양은 교회 흉내를 낼 수 있어도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 값으로 사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특정 건물이나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바로 예수 믿는 여러분이 교회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누가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피 흘렸습니까? 목사입니까? 이 교회 개척멤버 입니까? 혹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그 말씀이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창조력이 있어서 자동차도 비행기도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무에서 유의 창조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고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키면서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류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발전이란 개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전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인류의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더 좋은 차, 가전제품, 생필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유대인 랍비는 수렁에 빠진 황새에 비유합니다. 수렁에 발이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황새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의 긴 부리를 땅에 박고서 발을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발은 빠져 나왔지만 부리가 수렁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미래는 이와 같습니다. 모두가 무너질 바벨탑을 열심히 열심히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관심 있게 보아야 하고 그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온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고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경의 끝을 잠시 보면서 말씀이 왜 이다지도 중요하며 왜 말씀대로만 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계시록 18:1-4절입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 지더라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주의 말씀으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환난 가운데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왔습니다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오시는 분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우리도 그의 말씀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의 위력이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인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그래도 뭔가 믿음의 뒷받침을 해야지 하는 분을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면 기부터 먼저 죽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오기는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믿음만을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런 식의 아브라함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그럽니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영웅적인 결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당장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안 떠나고 버틸 수 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수많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 낸 것을 보고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안 믿어집니까?
로마서 4:1-3, 17을 봅시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는데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 주시니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 한 곳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아 거의 외우는 말씀인데 사도행전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대부분 표어를 삼는데 증인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증인이 되기 싫어도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넘어가리라는 주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하여 흩어지게 하심으로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사도행전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도록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가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자 마지못해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의 역사가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8에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면 볼수록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말씀이 말씀을 당깁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이지요. 마치 술 먹는 사람들 이야기 비슷합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에 취할 때입니다. 계시록 1:3절에는 때가 가깝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주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8:11-13절입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오늘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양식과 물이 아니라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으시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의 심령이 주의 말씀을 갈급해 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한곳 더 찾아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4:12-13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살아있어 운동한다고 합니다. 어떤 살아있는 운동을 합니까?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예리한 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온갖 죄악들이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 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것도 넉넉히 이기게 하셔서 주님을 찬양케 될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2. 창 1:6-31 “보시기에 좋았더라”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몇 번이나 나왔지요? 여섯 번입니다. 1:4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까지 합하면 창세기 1장에 7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셔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세계에 잘 나타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차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만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 내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좋지 않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은 제품을 찾고 있습니다. 워낙 인위적인 농산물이 많이 나오니까 무엇이 제철에 나오는 것인지 농사짓는 사람도 모를 지경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농부들이 어떻게 하든지 농산물의 희소가치를 높여서 가격을 높게 받으려고 비닐하우스를 하고 인위적으로 농산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야! 좋다 이제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품이 모양과 빛과 맛은 낼 수 있어도 제철에 자연 상태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덜 익은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이 겉모양은 익은 것 같더라도 속은 억지로 마지못해 온도와 열을 받아 만들어 졌기에 덜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사람과 계약을 하여 농약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소출이 적고 비싸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식품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농산물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내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사람과 의논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의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적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천상의 회의를 할 때에 누가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오직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세상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이 공기를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1분에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까요? 1분에 1억이라도 정말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1분을 살기위해서 공기를 사야지요? 그러면 저는 0.1초 분량의 공기도 살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100억대의 재산이 있어도 겨우 100분 동안만 살 수 있지요? 그런데도 인생이 얼마나 교만한지 하나님의 창조를 우습게 여기며 감사치 않고 있는 자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지요? 출애굽 때처럼 얼마든지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듯이 비도 구별하여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렇게 크시니까 사람들은 으레히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공기뿐입니까?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세상에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것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망쳐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십시오. 도대체 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하지만 발전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좋음과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낸 것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좋아 합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좋아합니까?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의 원망과 불평의 거의 전부가 무엇 없음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선한 것 없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없어서 안타까워합니까? 거의 후자일 것입니다. 냉장고 세탁기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텐데 하였지만 냉장고 세탁기 사들이는 순간 소니제품이 나오니 어제까지 좋던 것이 오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의 선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사실 인간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회때 산상설교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마음이 애통하며,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기도원에서 구국 기도회 하는 곳 많지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회 보았습니까? I.M.F 극복 기도회는 보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 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좋아 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그렇다 해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만들어 놓았으니 교회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교회마저 하나님의 솜씨를 좋아하기 보다는 사람의 솜씨를 좋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창조의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당연 할뿐 아니라, 주의 피로 재창조하심으로 주시는 영생,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꾸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엄청난 일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꾸만 하나님의 일처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어떻게 구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당을 크고 멋있게 짓는 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시는 일은 누가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차 이런 구분이 안 되어 있기에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자꾸만 독려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 하자고 외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면 안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것에도 하나님의 선이 유지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좀 되십니까? 정리 보다는 혼돈이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곳 찾아봅시다.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돌단을 쌓을 경우 그 돌을 정으로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로 단을 쌓을 때 다듬으면 쌓기도 쉽고 보기도 좋을 텐데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왕궁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돌을 잘 다듬어 바닥에도 깔고 층계도 만들어 놓았습니까? 석굴암도 돌로 다듬어 만든 것이지요? 이처럼 돌로 다듬어 세우면 견고하고 멋있고 위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왕적인 권위가 드러나고 종교적인 제단에는 사람의 현란한 기술이 동원되어 그들이 섬기는 신적 권위를 높이는 일에 동원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막을 만들 때 솜씨 좋은 사람이 주의 신의 능력을 입어 성막도 성전도 짓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위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 대성당 같은 거대한 건물을 만들면서 무엇을 팔았습니까? 면죄부를 팔았지요? 헌금 한 것만큼 죄가 용서받는 다는 것 이지요 예수님의 속죄를 돈 주고 사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건축헌금 하면 복받는다는 말과 꼭 같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화랑에 가면 작품 밑에 무어라고 써놓았습니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손대면 망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깨끗이 세탁하여 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거들어 줄려면 뭐라고 하십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은혜란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아니합니다.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주님으로 받고만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한량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만 다듬어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만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칩니다. 사형 형틀입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무슨 수로 포장을 하겠습니까? 이것도 찾고 저것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든지, 아니면 적당하게 각색하고 다듬어서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영광도 함께 드러내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끝으로 예화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현주 목사라는 글 쓰는 분의 책에 다듬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면서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를 실어 놓았던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충청남도 아산에 학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학촌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곳에 박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학을 소나무 둥지에서 꺼내 와서는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학은 귀한 생물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도로 올려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울상을 하면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니 정말 죽은 것입니다. 어린 새끼를 주물렀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죽은 새끼라도 올려놓으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이들이 왁자해서 내다보니 그 학 새끼가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접 둥지에 가보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다니 하면서 그 둥지를 살펴보니 그 둥지 바닥에 주먹만 한 돌이 있었죠. 죽은 새가 저절로 살아 날리는 없고 아마 이 돌에 신통력이 있을 거야 하고 돌을 꺼내 와서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친척 박승지에게 건네주었고, 박승지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넓은 땅이니 이 돌을 알아 볼 자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들고 갔죠?
죽은 학을 살린 돌이 조선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상인 두 사람이 왔는데 돌을 보자는 겁니다. 보고서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돌이오? 천년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돌인데 서해 유사 지경에서 가끔 나오는데 죽은 자도 가슴에 이 돌을 품어두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환혼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이랍니다. 천금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하여 천금을 주시겠소 그러자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면서 며칠만 말미를 주면 돈을 장만해 오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몇 일 동안 무료하게 있는데 도대체 이 돌이 무엇인데 천금이나 하는가 하여 보자기에 싸 두었던 돌을 구경이나 하려고 꺼내어 보았는데 새똥도 묻어 있고 지저분하였지요. 그래서 이 박승지가 그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 내기 시작 하였겠죠? 며칠을 정성껏 곱게 곱게 닦다보니 드디어 깨끗하게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그 상인이 와서는 그 돌을 달라고 합니다. 천금을 마련하여 왔지요. 그래서 돌을 꺼내는 순간 낯빛이 어두어지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 아니 왜 그러시오? 누가 이렇게 반질반질 닦아놓았소? 그야 나지요. 이제 이 돌은 환혼석이 아니오. 참으로 귀한 보물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구려 하면서 돌아갔고 이제 자신의 손때로 정기를 잃어버린 환혼석만 물끄러미 내려다 봤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아산땅 학마을에 남겨져 떠돌고 있답니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이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것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이루어 내셨기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곳은 한 곳 뿐입니다. 주님 홀로 십자가 지고 가시면서 이루어 내신 그 십자가의 사건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좋다는 평가를 받는 길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3. 창 2:1-3 “안식”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안식이 무엇입니까? 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이유는 힘들어서 쉬었겠습니까? 아니겠지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잘 만드셨기에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 창조 세계가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좋더라는 표현이 그냥 눈으로 보기에 좋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힘이 들어서 쉬신 것이 아니라 더 손될 것이 없도록 완성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된 상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이 날을 복주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제 4계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율법으로 받아 자신들이 법조문처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된 그 안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날 지키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안식교인 들이지요? 이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 모여서 삼육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만들어 토요일은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를 모르고 아직도 그림자인 날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교인만 날을 붙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믿고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성수 한다니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떤 전도지를 만들었는가 하면, 교회사 역사 중에서 로마 황제가 태양 숭배하는 날을 예배하는 날로 바꾸었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이방신의 날이다 하면서 교회사 몇 페이지 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평생 훈련받은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만 하면 예수 믿는 것이고 천국 가는 것처럼 배웠으니 이들의 말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모입니까? 날마다 모이죠?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지요. 이 말을 전에 청년회에서 하였는데 마침 그 주에 친구집에 갔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날인데 당신은 무슨 날 지키느냐고 해서 나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언제 모이느냐고 해서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모인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보다는 자기가 지키는 날짜를 붙들다 보니 이런 이단들 앞에 말 한마디 제대로 대답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안식과 우리로 하여금 안식하라신 그 뜻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안식케 하신 이유는 노동을 그치고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의 활동에 둡니다. 그래서 활동을 잘하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지만, 활동을 못하는 식물인간은 인간 대접을 잘 못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엿새는 일하고 7일째는 쉬라고 하신 것은 쉼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근거가 자신들의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사람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그 상태, 보시기에 좋으신 그 상태를 쉼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이 앞으로 어떻게 영원한 안식으로 올 것인지를 나타내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안식이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안식에서 이제 재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안식이 구원의 안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이 이미 구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창조를 말씀하면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 말씀은 애굽에서 구원 받았음을 인하여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 모두가 사람의 노동과 상관없이 주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도 우리가 그 선하신 분의 일하심으로 받는 것처럼, 구원도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구원하였다는 것이 사람의 일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날 지킴을 통하여 앞으로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실 분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히려 안식일 날 지킨다고 참된 안식의 주인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안식일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이제는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 날과 달과 안식일지킴이 아닌지를 신약 두 곳의 말씀만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 하니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바울이 수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골로새서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림자의 역할은 실체가 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시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날에 붙들려 있는지, 일요일 낮예배는 많이 오면서 밤과 수요일은 등한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날을 정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법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의 교제가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날짜를 지키기 위한 모임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누구를 위한 안식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식을 먼저 생각하시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먼저 챙기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구원도 내 중심의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원되어짐으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이 최종 목표가 되어 버리면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올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천사들이 열심히 우리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공력에 따라 평수가 결정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하실 처소를 만드시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직접 거처할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 일을 위하여 구속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보신 분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이 처소도 우리가 거할 집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처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 출애굽 직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소가 완성되면 하나님은 안식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의 안식과 달리 영원한 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 역시 힘들어서 쉬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창조가 하나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완전하게 마무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처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완성되었으나 지금도 주의 처소를 찾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직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동원된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22을 봅시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거대한 건물을 연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 된 자라면 이 안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날짜를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얻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4:11, 13절에 보면 밤낮 쉬지 못하는 자와 쉬는 자가 나옵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는 쉼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자는 쉼이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안식에 참여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안식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 안식의 소중함을 알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고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4:1-11절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4. 창 2:4-25 사람됨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순서적으로 나타낸데 비하여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무리가 인간의 창조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같은 흙으로 만든 동물과 새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살피는 것을 수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이 창조세계를 다스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한 가지 기준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의 법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됨을, 즉 사람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합니까? 아니지요 지극히 당연하시고 마땅한 것입니다. 100가지를 금한들 안지키면 안되는 것이 지음받은 자의 자세이지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그러한 생각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죄된 속성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상태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게 되지요? 이때 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하는 선악의 기준을 이제 사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미가 아니라 타락한 죄인으로서 선악의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니 선악을 알아서 잘 대처를 해야 하는데 왜 선악을 아는게 잘못 되었고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름이 사람됨인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의 기쁨, 자기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악체계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증명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이 숨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한 것을 네가 먹었느냐?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해놓고는 이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진리관이 들어 나지요?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인할 수 없는 아담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담만 그렇습니까? 하와도 꼭 같이 뱀에게 전가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잘되면 자기탓 못되면 조상탓 하는 것도 역시 선악과 따먹은 후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자기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탓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대부분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이러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더러워서 내 잘못이라고 해준다는 것이지요. 워낙 세상이 남의 탓만 하다가 보니 카토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에다가 스티카를 붙여 다니는데 어디에 붙여야 내 탓이요가 됩니까? 운전적 앞에 붙여야지요 그래야 볼 때 마다 내탓이구나 할텐데 차유리 뒤에다 붙여 놓으니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에서 멀어진 그 값을 우리가 함께 주고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여 악을 행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악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다, 도덕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조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착한일 하면 복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쁜 일 하면 벌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거의다가 예수믿어서 천국가는게 아니라 자기 행위로 지옥도 천국도 간다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실감이 안되면 전도를 해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예수믿는 니나 잘해라 그러지요 니가 천당가면 나는 만당간다 그러지요 예수믿는 너보다 내가 양심 더 바로 쓰고 산다 내걱정말고 너 걱정이나 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소리를 듣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고 더 악착같고 사기꾼 거짓말쟁이가 많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좁은 문 좁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자가용타고 쑥쑥 들어가는 그런 곳 말고 좀 수그려서 겨우 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사람이 좀 적게 올는지, 어떤 사람이 불고기 집과 교회의 공통점이 주차장이 넓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 먹는 일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변하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내 죄는 내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남이 책임지느냐는 이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가 짐을 이고 길을 가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든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 주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할머니가 잘 타고 있는지 돌아보니 한 손으로는 경운기 난간을 붙들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의 짐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세요. 아이고 내가 탄 것만 해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는감.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 선악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도 하지요. 온통 세상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은혜란 너무나 낯선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뻔뻔스럽게 지옥갈 죄도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이게 세상의 윈리로는 불가능 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선악을 책임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자기행위를 믿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선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를 빼먹고 어디 가다가 교통위반으로 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받게 되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배 빼 먹었니 이랬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손해가 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때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너무 농땡이 부렸더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생각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매사를 인과율로 계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서 아무른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인과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쌓아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의 행위를 믿지 아니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조율하여 살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이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도 죽음입니다만 더욱 심각한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십니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아래 하나님께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바로 새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렘 31:31-34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은 옛언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죄를 사하되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는 그런 용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이제 원래의 하나님의 사람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욥기서입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의 논쟁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욥의 세 친구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네가 죄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 받는다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욥의 세 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논리 정연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로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욥의 너의 시련은 죄 때문에 왔으니 회개하라. 그런데 욥은 나 죄 지은것 때문에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항변 하지요 그러니 욥을 보고 너 교만하다 그러면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욥이 죄 때문에 고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말로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욥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간구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내려있는 선악체계가 뽑혀 나가고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범사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전혀 없도다 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됨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5. 창 3:1-8 유혹 1999. 8. 1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유혹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어떻게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얼마나 교묘한 질문입니까? 분명히 금하신 것이 선악과 하나인데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더냐 며 물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는데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예 아니요의 대답이 아니라 어중간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동산 나무 과실을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여운을 두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 안죽을 수도 있을거라는 여운을 두는 겁니다. 이 틈새를 노리고 들어오지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거짓 확신을 심어 주면서 왜 못 먹게 하였냐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기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유혹도 꼭 이처럼 다가옵니다. 성경에 술먹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술 취하도록 먹지는 않는다 하면서 자신의 술 먹는 것을 정당화 하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좀 더 안다는 사람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가지고 약으로 쓰도 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술을 즐기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잠언서를 한번 보셔야 됩니다. 잠언 23:29-35 한번 읽어 봅시다.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31절에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미 술을 즐기는 자는 중독된 것입니다. 이런 자는 술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보는 순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유혹 보다는 더욱 심각한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유혹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등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언제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큰소리가 나는 것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말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이나 계급이나 힘에 눌려서 그렇게 못할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기란 사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경우도 있고 무협소설 같은데서는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하나의 영웅아래 작은 영웅이 되는 것이기에 그 조직과 단체를 위하여 희생함으로 자신은 신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시작이 어떠합니까? 여자가 선악과를 보니, 보니까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유혹이 없을텐데 좋은 것을 보니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남자에게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여자에게만 돌리는데 사실 책임이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 대표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타락을 아담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함께 있는 아담에게 주었지요. 함께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자기도 함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결과 사람에게 모든 죄된 본능이 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는 선악 체계에 대하여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범죄후의 선악의 기준은 자기에게 이익이면 선 손해이면 악,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으로 자리 잡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금요일 저녁에 세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본 첫째 느낌이 무엇입니까? 먹음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봅시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첫째가 먹음직이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이지요. 이것은 비단 밥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하지요 저속한 표현이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남자들이 뭐라고 하나요? 따 먹는다고 그러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적인 표현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다른 경쟁업체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잡아먹어야 한다고 그러지요?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먹음직한 유혹, 육신의 정욕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욕망 속에 살다가 한평생을 보냅니다. 이것을 경제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둘째가 어떤 유혹입니까? 보암직하지요.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배고픈데 무슨 금강산 입니까? 그러므로 경제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만 보암직한 것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인 욕망이라고 하는데 예술이 보암직한 행위이지요. 특히 순수예술을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예술 행위를 보암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중이 인정을 하지 않아도 아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자신의 예술성을 스스로 미화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국산 영화 치고는 아주 돈을 많이 들인 영화 가운데 ‘쉬리’와 ‘이재수의 난’이 있는데 전자는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에 성공하였고 후자는 흥행에는 참담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실패한 감독이 자신은 시장성을 염두에 두는 감독이 아니라 작가주의 감독이라면서 볼 줄 아는 자만 보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예술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보암직한 유혹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주업으로 하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자들도 남을 위해 멋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들을 인하여 스스로들 보암직해 하면서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주님의 일인 양 알고 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고 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에 붙들려 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를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이야 많이 하였지요. 교회를 위해서도, 노회를 위해서도, 총회를 위해서도 총회장도 지내고 크고 굵직 긁직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장유에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얼마 전에 장로 투표를 하였는데 예배드리고 나서 투표하는데 갑자기 살벌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교회안의 일만이 아니라 총회 안에서 총회장 되기 위하여 수억 원을 쓴다는 말이 다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는 것이지 어찌 주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먹는 문제 해결되고 나면 무엇에 관심을 가집니까? 멋에 관심을 가지지요. 어떻게 보암직하게 보일까? 겉멋만이 아니라 속멋까지 내려고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중,고등학생 중에 교회를 나오다가 안나오는 아이가 있어 왜 안나오느냐고 알아보니 입고 나올 옷이 없어서 못 온다고 그럽디다. 정말 옷이 없어서 벗고 있을 정도는 아니지요. 멋있는 옷이 없어서 그렇지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멋내는 일에 관심을 많이 둡니까?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실 때 너무 좋은 옷 안입고 오셔도 됩니다. 앞으로 저도 양복 안입고 강단에 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도 또 다른 안목의 정욕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양복 안입고 설교하더라 멋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 되면 역시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지요. 결국은 자신이 신의 지혜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잘먹고 잘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은 많은 선행을 쌓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 자기를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안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합니다. 절제하고 금욕하고 세상의 것들과 차별화된 종교의 영역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는 점점 집단화 하여 이 집단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여 나갑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욕구가 이생의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신처럼 되고자 하고 자신이 신이 못되면 특별한 신적인 자 앞에 엎드림으로 그 신의 후광을 입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P.D수첩에서 사이비 종교 들추어내어도 그들은 여전히 이탈하는 자 없이 건재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명석 교주에 대하여 다루었지요. 그런데 몇주 전에 제가 창원대 앞에 주보 복사하러 갔더니 그 집에 새벽말씀이라는 표지의 책을 만들어 놓았길래 누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기도 설교내용까지 책으로 만들어 보는가 하고서 잠깐 보았는데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골키퍼를 8명을 세워 놓고 공을 차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이 매일 새벽에 수천 번씩 연습하고 또 자신이 모든 부분에 통달하듯이 말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런 것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있으니 젊은 여자들 몇 명이 그 책을 찾아갑디다. 이러한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하여 종교적인 욕구에 붙들려 있기에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금하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1,2,3계명이 어떠한 종교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본능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본능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떠한 종교적이 규칙과 고행을 제시하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 있기에 다 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종교 단체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죽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의 구원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을 잘 알지요. 처음 아담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 가지 유혹을 모두 이겨내신 것입니다.
첫째, 40일 주리신 후에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먹음직 이지요. 육신의 정욕이지요, 경제적인 욕구를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지요. 둘째, 산위에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노라. 보암직 이지요 안목의 정욕이지요, 정치적인 욕망입니다.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시지요. 셋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요, 종교적인 욕구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이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후의 본능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주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믿음도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에게 계속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 유혹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죄된 본능들이 사실은 서로 서로 묶여 있는 한 덩어리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 교회의 이슈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하듯이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분석하여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사람은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뜬다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미 미국에서 오래전에 시행하는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지요. 뒤에 있는 교계신문을 보시면 잘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교회 컨설팅을 해주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안그래도 욕망 덩어리에 욕망의 불을 붙이니 불나방이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달려 들 듯이 달려들고 있는 그러한 유혹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2:15-17까지 한번 더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6. 창 3:9-24 찾아오시는 하나님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이 범죄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범죄한 인간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찾아오시지 않고 범죄하였으니 그대로 벌받아 죽으라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삭개오 이야기를 잘 압니다. 세리장 삭개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다르게 설교가 되는지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삭개오 이야기를 하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한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도순 목사님이라고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어느 부흥회를 참석하였답니다.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이고 또 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하여 한번 참석하였는데 그 본문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모든 초점이 삭개오에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준비 하였으며 어떤 자세였는지 그렇게 열심히 만나려 하였기에 주님을 만났다는 설교를 듣고서 분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죄인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 놀라운 복음의 사건이지 어떻게 죄인이 만나기로 한 그 일만을 그렇게 부각시키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부르지 않고 지나가셔도 할 말이 없는 자가 삭개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기를 작정하시고 삭개오를 부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삭개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주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관점이 옳다고 보십니까?
삭개오가 준비를 잘 하였기에 그 준비에 주님이 감동되어 삭개오를 만나 주셨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지은 인간은 결코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거저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어떤 신을 찾아 나간다면 그런 신은 우상입니다.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천주여 라고 부르든지간에 스스로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사람이 찾아가는 신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신은 결국 자기를 위한 신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 집을 지켜주고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그런 수호신으로서의 신을 찾아가는 종교적인 본능을 성경은 거부합니다.
십계명의 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 내가 덕을 보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복 안주나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벌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따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밑에 숨는 일입니다. 죄 지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재주를 가지고 자신을 가리워 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실합니까?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들 제대로 가리워지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나마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문명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다수 속에서 힘을 가지고자 합니다. 홀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스스로 군중속에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전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는 것이 범죄 이후에 자신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라도 자신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데도 이러한 스스로의 가리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남 기독교 연합회에서 8월 15일 창원 공설 운동장에서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공문이 두 번이나 왔습니다. 그 제목이 ‘광복 54주년 기념 경축예배 및 단군신상건립 저지 기도회’ 라는 것입니다. 이 제목으로 모이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광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연합하여 예배를 해야 합니까? 올 봄에 부산 사직 실내체육관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해 보았더니 이건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수를 결집하여 세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는 시장이 와서 무슨 경축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단군신상 건립한다고 사람들이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교회가 단군신상보다 더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대적을 친다는 것은 사람의 수나 힘의 결집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세상의 여우같은 헤롯을 세력 규합하여 대적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곳에 관심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주님의 택한 자들만 들어가는데 이들의 특징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경남기독교연합회의 공문에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많이 참석하여 힘을 모아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힘을 모아 단군상 건립을 저지 하겠다는 발상이 이미 비성경적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런 힘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형집회를 계속 마련합니다. 여의도에 몇십만 명이 모였다 기독교의 세력을 보라 하니까 천주교에서 더 많이 모였다 그러니 불교에서도 연합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만이 모아놓는 것이 세상에는 통하지만 주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아니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이 넘었습니다. 60억 인구 중에 예수님 재림시까지 단 한명만 예수 믿었다고 하면 재림을 연기 하실까요? 그대로 집행 하실까요? 나머지 59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모두 예수 안믿었다면 주님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너무 적다 전도 열심히 해라 재림연기 한다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단 한 가정 외에는 몽땅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 있지 아니하면 수에 치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수를 모아 힘을 모아달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가리는 힘으로 가리려는 죄된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나뭇잎 갈아입느라고 세월 다 보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리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힘을 모으고 멋진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우리가 한 일은 나무 잎사귀로 가린 것임을 알고 오직 주님 가리워 주시는 것으로만 가리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이 찾아 오셔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인데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뱀의 후손으로 한쪽은 여인의 후손으로 서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은 뱀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받은 그 특징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 신은 필요없다 우리가 신이다 자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여인의 후손은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으로 나가는 길은 차단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지키는데 누가 생명나무로 나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생명나무와 단절입니다. 이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생명을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주시는 분에 의하여만 생명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여인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여자를 뭐라고 이름을 부릅니까? ‘하와’라고 합니다. 하와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고 말합니다. 이 이름이 범죄후에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약속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은 차단되었지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길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정복하게 될 때 일어날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 씨에 대하여 구약은 계속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자손이 등장하는 것을 사탄은 방해 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서로의 배후 세력이 다른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러한 싸움이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은 자에게서 주의 백성들을 끊어 내려고 합니다. 이 세력이 여호와의 백성을 무고히 괴롭힙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대별되는 것은 의인은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약속의 자녀이며 여인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란 자기의 선악체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가 계속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속에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 신약에 가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이 이미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갈라디아 4장4절에서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렇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랍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3:8에서는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귀를 이깁니까?
골로새서 2:15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의 일입니다. 이것을 이미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주신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사람들이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 하셨는데 왜 아직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뱀의 머리가 십자가에서 깨어짐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이미 확정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틀되는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이 십자가에서 깨어졌는데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속히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이 결국에는 불과 유황못에 던지워질 것을 계시록 20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머리를 상하여 꿈틀되는 정도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복된 자리로 불러내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의 백성들은 마귀의 후손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모신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7. 창 4:1-15 죄의 소원 1999. 8. 15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오늘이 광복절입니다. 광복절 되기 전까지 이 나라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독립이었지요. 그러나 자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아니기에 남북으로 분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북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만유의 통일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에서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유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에 방해세력이 있으니 그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인이란, 사람이 원래는 죄인이 아닌데 환경과 상황으로 죄를 짓게 됨으로 죄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죄의 소원입니다. 죄도 인격처럼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소원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된 모습이 오늘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울 것을 말씀합니다. 여인의 후손이 궁극적인 승리를 하지만 서로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뱀의 후손과 여인이 후손의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떠한가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고 가인 즉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는데 한 명은 뱀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고 한 사람은 여인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15절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아닌 아벨의 제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아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간구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벨은 정성껏 드렸으니 받아 주셨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자 아마 그런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나의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미이지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드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성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 합니다. 비록 제물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빌지라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빕니까? 심지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목욕재계까지 합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려면 제주를 마을의 어른 가운데 뽑습니다. 제주로 뽑히면 그 기간동안 술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이발하고 목욕재계한 다음에 동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형태가 신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화는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은 불러들이자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내용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먼저 내장되어 있기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 그러면 앞 뒤 말씀을 보지도 않고 그저 정성껏 예배하라 최선을 다하라 그런식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덮쳐온 죄의 소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데도 자꾸만 사람의 드림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보는 경우 -즉 사람의 조건으로- 어떻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합니까?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어린양의 의미를 아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물이 율법으로 주어졌을 때에도 곡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신명기 26:2절을 보면 모든 토지 소산물 즉 땅의 소산물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맏물이라고 하였기에 가인은 땅의 소산이지 첫 소산 즉 맏물이 아니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물의 내용과 방법을 계시하기 전이기에 제물의 내용과 방법 때문에 받고 안받으신다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한 가지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은혜로 열납하여 주셨다는 것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어떤 조건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15년전쯤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 이 말씀의 설교를 보고서 많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가인이 첫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장남 선호하듯이 우리 장남 우리 큰 아들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고집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아들이었다는 가정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전부 자기가 왕자요 공주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요구사항을 안들어 주면 마구 때를 쓰는 것입니다. 그저 오냐 오냐 키워 놓으니 거절당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거절되어 지면 얼마나 많이 화를 냅니까? 그러므로 김용옥씨 같은 경우는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모두가 잠재적인 독재자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안에 수백만의 독재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왕따와 학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학교다니면서 한두 번은 왕따도 당해보고 맞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자녀가 보통 5-6명입니다. 형에게 맞아가며 형제간에도 따돌림 당해가며 그렇게 지냈기에 그러한 문제는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두 명이니까 그리고 현대 교육을 받았다는 신세대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 거절당해 보지 않은 가인이 자기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후천적인 교육과정과 환경으로 보기에 죄로 인한 것임을 보여 주기는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체계에 붙들려 있는 죄인된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 나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이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자 왜 자기의 제물은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제물이 무엇이 부족하여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 것은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받으시는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과 행위에 메이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정성을 안바쳐서 그렇지 정성을 바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을 받고서 복주는 그런 신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세상은 싫어합니다. 안색이 변합니다. 이것이 뱀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너보다 내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내개 나은데 왜 너만 하나님이 선택하고 나는 버리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공평을 자신들의 행함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어떠한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색이 변하는 이유입니다.
TV프로그램 중에 멋진 만남이라는 프로가 있지요. 이휘재, 남희석이 한 여인을 상대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데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여인이 하게 합니다. 이 때 선택당하지 못한 남자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안색이 변합니다. 단지 벌칙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멋진 데이트 코스를 정하여 맛있는 것 사 먹여가면서 공을 들렸는데, 왜 나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안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의 책중에 당신의 기도가 하늘나라 창고에서 잡동사니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안해서 그렇지 많이만 하고 정성만 바치면 어떤 기도도 응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든 제물이든 받고 안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성과 나의 드림이 당연한 것이지 나의 드림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안색이 안변합니다. 그러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이 있기에 그 소원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며 사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너의 실력으로 죄의 소원을 다스려보라 스스로 죄짓지 않고 선을 이루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죄의 소원에 지고 맙니다. 가인을 돌로 쳐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말씀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이까? 하는 가인입니다. 얼마나 죄의 소원이 무서운지를 아시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 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 피의 고발을 근거로 악의 소원에 붙들려 사는 뱀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다가 성경이 관심하지 아니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습니다. 야곱의 꿈에 하늘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보았다고 하니 그게 몇 계단인가 하는 생각을 하듯이 가인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셨을 때 그 벌이 너무 중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보고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이 가인이면 아벨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합니다. 아담이 몇 년 살았습니까? 창 5:3-6절입니다. 아벨후에 셋을 낳은 것이 130세인데 이때부터 800년을 지내며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몇 명을 낳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약 이름만 기록하여도 다 기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그렇게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표를 주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표도 어떤 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표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사람에게 죽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도 죄인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뱀의 후손에 의하여 여인의 후손이 먼저 침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피에 근거하여 뱀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 머리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승리입니다. 오늘날 주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바른 믿음을 가진 자를 핍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28-29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왜 나의 이 정성을 몰라주고 안받는단 말인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나의 제사는 나의 공로가 아님을 아는 자가 아벨의 계통을 따라 예배하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히브리서 12:18-24절까지 읽어 봅시다. “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 창 4:16-24 가인의 후손 1999. 8. 22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이 싸움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서로 다른 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21절을 봅시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사망의 왕노릇과 생명의 왕노릇이 나옵니다. 이러한 두 세력의 모습을 구약에서 모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런 식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이 두 편의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그 벌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수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하며 그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는지 오늘 말씀에 보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여기서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 에녹입니다.
가인이 아내를 취하고 자녀를 낳고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성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왜 성을 쌓았을까요? 성이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이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는데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가인이 최초로 성을 쌓은 것은 도시 문명의 시작입니다. 도시가 형성되는 이유는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만들었는데 그 후손들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봅시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루어 내는 사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고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77배라고 합니다. 자신은 과격한 복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을 헤치는 자는 벌이 77배라고 임의로 정하여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방법과 꼭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성을 쌓고 스스로 보호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 계통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를 의지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에녹같은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살고 있습니까? 에녹처럼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주를 의지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사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9. 창 4:25-5:32 하나님과 동행 1999. 8. 29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셋이 아벨 계통을 이어가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5:1절부터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면서 소개되는데 가인의 족보는 4장에서 따로 소개함으로 아담의 후손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벨대신에 셋을 주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기에 여기에서 가인의 계통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벌써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가 소개되고 그들의 나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수 있는 것은 그 당시의 환경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좇겨났지만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히 수명이 짧아지는데 그 이유를 과학자들이 하늘의 물층이 없어져서 그렇다, 육식을 하게 되어 그렇다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단지 참고로만 들으시면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장수의 비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록 천년 가까이 살았지만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었더라’입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아담의 계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계보 속에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이 에녹인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969세를 살아도 므두셀라는 죽었는데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계보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면서 이어지는 계보에서 무슨 말이 없습니까? 죽었더라 하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분명히 죽었는데 죽었더라는 말은 없이 ‘낳았더라’는 말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기에 사망의 권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새로운 계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이기는 권세가 아담의 후손가운데서 다 ‘죽었더라’는 계보 가운데서 에녹은 예외가 됨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간 에녹의 그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에녹에게 오셔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사망의 권세도 이기는 것입니다.
창5:21-24을 다시 봅시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65세 되기 까지는 동행 하였다는 말이 없다가 므두셀라 낳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므두셀라 낳을 때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았기에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유다서 14절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언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심은 뭇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신약성경에서 동일하게 계시를 받은 유다가 에녹이 심판을 예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창던지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이 말합니다. 창을 던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창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처럼-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결혼과 자녀 이름과 벌거벗고 다니는 것과 모로 누워서 지내야 하는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므두셀라는 자신의 삶이 마감하는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이 날아가서 꽃히는 것을 생각하면 므두셀라가 죽는 때에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계산해 보니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숫자를 이상하게 해석하여 성경을 푸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3으로 풀어내고 4로 풀어내고 7이나 12등등의 수를 가지고 성경을 다 푸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숫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수자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떤 숫자풀이에 메이면 이상한 종말론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에녹은 언제 심판이 임할지는 그 날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소개된 사람들의 나이를 추정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다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볼 수 있느냐하는 의문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들의 나이를 한번 계산해 봄으로 므두셀라가 죽든 해에 노아홍수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므두셀라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노아 몇 세에 홍수가 납니까? 7:11절에 보면 노아 600세에 홍수가 납니다. 이 세 숫자를 더하면 므두셀라 나이가 나오는 것이지요. 얼마입니까? 969. 므두셀라 죽는 해에 노아홍수가 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자 계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어떤 자세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잠시 안보이거나 조금만 이상이 있어 보여도 오늘이 심판하시는 날인가 하는 자세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신앙이란 주님의 재림을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항의 어느 집사 말을 듣고 자기를 따라 가야 종말을 대비한다고 집단 가출 하는 그런 종말론이 아닙니다. 에녹은 기도원에 가거나 집단 공동체를 이루어 종말을 기다린 사람이 아닙니다.
5:22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받고서도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심판이 있을 텐데 자녀는 왜 낳느냐 학교도 직장도 그만두라는 그런 종말론과 전혀 다릅니다. 자녀만 놓고 맨날 기도하러 기도원에나 다니면 자녀는 누가 돌봅니까? 그런 삶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동행하는 삶 이것이 죽음을 이긴 힘입니다. 이러한 동행은 우리가 동행하여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라는 말씀이 6:9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다로 번역 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사람은 언제나 종말론적으로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5:28-29절을 봅시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노아라고 이름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에게 안위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이 안식의 뜻입니다. 이러한 안식이 어떻게 옵니까? 놀랍게도 노아 홍수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저주아래 심판을 받고 있는데 안식을 누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역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심판의 땅입니다. 이곳에서의 안식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청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심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