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번째 인가?
늘 그랬었다.
내가 타고난 습성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밥을 먹다가 이사를 다녔다.
“밥 먹다 이사 다니면 이담에 살아가면서 이사를 많이 한단다.”
아마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어린 아이들이 밥을 먹게 되면 그만큼 밥풀을 많이 흘리고 그것을 치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단속하기 위한 소리였을 것이다.
옛 어른들은 그렇게 지혜롭게 살았었다.
어린 며느리를 데려다 기르면서 일을 가르칠 때에도 그런 식으로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친정 생각이 간절하고 무섭게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부모가 좋을 이가 없는데 그런 며느리의 심리를 이용하면서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말은 아주 많았다.
“빨래를 잘 두드리면 시어미가 죽는단다.”
옛날 한복은 빨래 한번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
옷을 뜯어내서 빨고 다시 풀을 먹여서 다드미질을 해야 했다.
저녁이면 이집 저집에서 다드미 소리가 울 밖으로 들렸다.
힘든 부엌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하는 어린 며느리는 보기 싫은 시어머니가 죽는다고 하니 그 소원이 이루어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방망이질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하면 시어머니가 눈이 멀고 무엇을 하면 시아버지가 돌아가고 그런 말들이 많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은 어린 며느리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그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밥 먹다 이사를 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사를 많이 다니게 된다는 것은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는 것이었을까?
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이사를 다니는 것이 번거롭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할 것인데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밥 먹다 이사를 다니기만 하면 어른이 되어서 이사를 다닌다고 야단을 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맞는 말인 거 같았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삼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녔었다.
어느 때는 삼년에 서너 번 씩은 이사를 다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어렸을 때 밥 먹다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끈기가 없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고 그런 성격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성격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뒤돌아보면 물론 거기에는 내 적성과 맞는 직업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일을 시작해서도 그 일을 오랫동안 끌고 나간 적이 없는 것 같다.
때로는 후회를 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길게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일이거나 그 일에 빠지고 나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성격이다 보면 그 일에 금방 지쳐버리는 것이 원인일 수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한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그렇게 말끔하고 확실하게 한 것 같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남에게 그렇게 보인 것은 내 능력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최선을 다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 최선을 다 했다.
왜냐하면 남도 하는데 나라고 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정말 버거운 일이지만 열심히 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와서 보고는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정말 내게 버거운 것 같은 일을 거뜬히 소화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급여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제하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 적은 돈이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일이란 누구나 자기가 능숙하게 되기까지는 힘든 일이다.
옆에서 보면 저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해 낼까 생각하는 일도 늘 하는 사람에게는 거뜬하게 하는 일이다.
그만큼 손에 익숙해지고 몸에 인이 박히고 나면 어려운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일이다.
물론 그런 일에 적성이 맞아서 쉽게 배우는 사람과 늦게 배우는 사람의 차이는 있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그런 일을 했을 뿐인데 이제 내게 익숙 해 지고 나니 내가 지치고 만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하는 내 분야에서 멀어진 일에 따르는 그런 어려움이 다시 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일에서 손을 떼고 나면 또 어떤 일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닦달해 낼 것인지 사뭇 궁금해 지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