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매일신문 2026년 8월 25일 수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의자가 많은 골목
김영원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의자는 있어도 한 번만 앉아본 의자는 없는 골목이다
불타는 염색머리로 정직한 거울을 감쪽같이 속여먹는 여왕벌미용실, 잔술도 마다 않고
빈속을 채워주는 배불뚝이네 순대 좌판, 그리고 급한 김에 주방바닥에 엉덩이 까고 오줌
을 싸다 생쥐총각에게 들켜 에구머니나 어쩔 줄 모르던 조개구이집 여사장이 바로 저 의
자들의 다른 이름인데
누구의 행복은 누구의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어 대문이 필요 없는, 그것을 자유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하루의 기운 허리에게 믹스커피 한잔 타주는 골목이다
골목 식구들보다 더 시장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때가 되면 찾아와 국밥 한 그릇, 꼬치
어묵 몇 개 팔아주고 사진 찍고 가는 골목, 혼자가 아니고 여럿일 때 가장 힘이 세고 비
오는 날에도 해가 뜨는 골목, 몰라도 되는 명함보다 의자가 많아서 좋다.
♦ ㅡㅡㅡㅡㅡㅡ 결핍을 비극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명함보다 의자가 많아서 좋은 골목,
체면보다 삶이 앞서는 골목, 화려한성공이 아니라, 삶의 온기와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골목이다. 믹스커피 한잔에도 존재들의 관계가 쌓이는 시장골목에는 여왕벌미용실,
배불뚝이네 순대 좌판, 조개구이집 여사장처럼...겨운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있다.
‘때가 되면 찾아와 국밥 한 그릇, 꼬치어묵 몇 개 팔아주고 사진 찍고 가는’ 누군가에게
는 소비되는 풍경이기도 한 골목이지만, 사회적 지위나 관계의 형식보다는 몸을 맡기고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골목이다. 가난하고 소박하지만 같이
앉을 자리가 있고, 서로를 앉게 해주는 삶,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힘이 생기는
골목이다.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
☞ 서울매일 '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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