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개미마을’을 걷다
인디언촌에서 개미마을까지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그곳
2022.1.21(금). 지인들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불리워지는 홍제동 ‘개미마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소위 ‘달동네’라고 부르는 곳은 강남구 ‘구룡마을’ , 중랑구 ‘백사마을’, 그리고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이다. ‘달동네’는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말한다. 하늘이 가까워 달이 더 잘 보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구룡마을이나 백사마을은 평지에 있는 판자촌이기 때문에 달동네라고는 볼 수 없고, 개미마을 만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 할 수 있다. 암튼 이제 서울의 경우 그런 동네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산비탈 마을은 아니지만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인 구룡마을이나 백사마을도 머지않아 재개발이 될 것 같다.
개미마을은 서대문구 홍제도 산 1-100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07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그곳이 바로 개미마을이다. 마을버스 승강장 아름도 ‘개미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마을버스는 인왕시장-문화공원 입구-인왕중을 거쳐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간다. 이른바 ‘하늘로 가는 길’같다.
필자 일행은 차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직접 마을버스 종점까지 올라갔다. 인왕중학교를 지나니 우측으로 개미마을을 소개하는 안내도가 보인다. 차에서 내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 모양의 안내도에는 동네슈퍼, 노인정, 놀이터, 약수터, 화장실 등 만 표시되어 있는 아주 간단한 약도다. 어쨌든 처음 가는 방문객들에겐 화장실과 슈퍼 만 알려줘도 고마울 뿐이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승강장 표지판, 화장실, 인왕산 등산로 입구 표시 이외 개미마을추진위원회 연락처도 눈에 띈다. 재개발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모양이다. 마침 주민 한 분이 계시길래 개미마을 재개발에 대해 주민들의 분위기를 물어보니 “개발되면 좋지요”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실제로는 주민들 사이에 재개발을 찬성하는 쪽이 있는 반면 반대하는 주민들도 적지않은 게 현실이다. 달동네든 판자촌이든 늘 그게 재개발이 늦어지는 이유가 된다. 이곳 사정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또, 개미마을 올라오는 길이 매우 가파른데 겨울에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어떻게 다니느냐고 물으니 말없이 도로바닥을 가리킨다. 이곳 도로에는 일반도로와 다르게 작은 줄이 촘촘히 그어져 있다. 이곳에 ‘열선’이 깔려져 있어 눈이 와도 바로 녹아버린다고 귀띔해 주신다.
인왕산 허리에 위치한 마을이니 우선 마을 조망부터 궁금하다. 좁은 계단을 따라 제일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 봤다. 마을 곳곳 담벽에는 예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2009년 8월부터 금호건설이 후원하고 건국대·상명대·성균관대·추계예대·한성대 등 다섯 개 대학의 미술전공학생 128명이 참여해 마을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낡은 벽과 길에 낙서 대신 그림이 들어차니 마을이 화사해지고 마을 분위기도 밝아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벽화마을인 통영의 ‘동피랑’을 비교해 이곳 개미마을을 ‘서울의 동피랑’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하필 개미마을인가? 이름의 유래도 궁금하다. ‘홍제역 일대 도시재생 주민기자단’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던 1960년대 초반, 홍제동 산 1-100번지 일대에는 농촌을 떠난 이농인들이 도시의 변두리에 거주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서울 시내 산비탈 곳곳에 무허가주택이 급속도로 난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부분 무허가 주택들이다 보니 생활환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동변소는 아침 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마을에 단 두 곳 뿐인 공동수도에서는 물을 받기 위한 소란이 이어졌다. 일당벌이의 마을 남성들은 하루 일이 공치는 날이면 마을 가게 앞에서 윷판을 벌였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로 인해 크고작은 시비와 싸움이 그치지않았다. 이에 경찰들이 당시 유행하던 서부극을 떠올리며 마을 이름을 ‘인디언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1973년 무렵 개미마을은 1차 정비지구로 지정되어 높은 지대의 주민들은 철거대상이 되어 상당수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또, 1988년에는 서울시에서 점유한 사유재산에 대해 5년 분할상환이라이라는 조건으로 불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게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마을 이름이 문제가 되자 당시 추진위 총무였던 이문용이라는 분이 마을사람들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살고 있고 개미집처럼 얽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즉석에서 ‘개미마을’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마을 높은 지역에서 내려다 보면 조망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홍제동 고층아파트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북한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감이 오지않는다.
무작정 안가본 길을 찾아 골목을 누빈다.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마치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도 한다. 부산의 감천마을도 이와 비슷하다.
겨울나기를 위해 장작을 높게 쌓아놓은 집도 있고, 한참 연탄 배달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띈다. 개미마을은 대부분 구식부엌이다보니 연탄이 겨울난방의 주 연료가 될 수 밖에 없다.
좁은 골목이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벽화도 보고 주민들의 삶을 기웃거려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주민들 역시 별로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궁금사항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답해준다. 그동안 내린 눈이 아직 녹지않고 남아 있어 마을풍경이 더욱 정취가 있다.
체육시설이 있는 정자쉼터에서 마을 산책을 하고 있는 여자 두분을 만났다. 몇마디 가벼운 대화를 나눠보니 여행을 무척 즐기는 분들 같다. 필자가 사진작가임을 밝히고 배경이 괜찮은 장소에서 잠깐 포즈를 취해줄 수 있는지를 물으니 기꺼히 응해준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좋은 배경을 만났을 때 누군가 모델이 되어준다면 금상첨화일 때가 많다. 고맙다. 당연히 찍은 사진은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동행하게 됐다.
잔설이 남아 있는 골목길을 걸어가는 뒷모습, 가파른 곡선계단을 오르는 모습 등 한 점 한 점이 귀하고 아름답다. 가능하면 연출 느낌이 나지않는 자연스러운 포즈이면 최고다.
마을 주민들이 일하거나 돌아다니는 모습도 스냅 샷으로 담아본다. 물론 정면사진은 당사자의 사전허락이 필요하지만 뒷모습이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옆모습이라면 별 문제는 되지않는다. 소위 ‘캔디드(Candid)’사진이다. 사진에서 캔디드 기법은 피사체인 상대가 의식하지못하는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표정을 찍는 사진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진계의 대원로이신 육명심 (전)서울예술대 사진과 교수(89)는 학생들에게 사진실기를 가르치면서 한국화가들의 그림을 숱하게 소개했다고 한다. 육 교수는 풍경을 찍을 때 세계적인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Ansel Adams)의 풍경사진도 많이 봐야 하지만 오히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더 유심히 많이 보기를 역설했다. 그리고 ‘캔디드 사진’을 찍는 학생들에게는 프랑스의 유명 사진작가 브레송(Bresson)의 사진도 많이 봐야 하지만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는 것이 더 큰 공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다시 개미마을 이야기로 돌아가자. 높은 담벽 위 곧 쓸어질 것 같은 낡은 집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바람개비도 돌아간다. 개미마을엔 태극기를 걸어놓은 집이 여러집 눈에 띈다.
골목 전신주에 삽 세개를 걸어놓은 것도 보인다. 눈이 오면 눈을 치울 도구가 필요하다. 마을사람 누구든 나와 함께 눈을 치우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을 것이다. 네것 내것 가리지않는 마을인심을 엿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 나뭇가지들이 얽히고 섞인 담벼락 아래에는 돼지 두 마리가 뾰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실제 돼지가 아니라 화분에 조각한 인공조형물이다.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담을 친 판자집도 때로는 예술이 된다.
낡은 도시를 문화적으로 재생하는 과정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나오곤 한다. 집 담벽에 문양 모양의 글씨도 붙어 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그럴 듯 해 보이기도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한 해 채소나 고추, 토마토 등을 키웠을 것 같은 채전밭 땅골에는 잔설이 하얗게 줄무늬를 그리고 있다. 정겨운 풍경이다. 도시에서만 살다보면 흙냄새가 그립고, 고향의 초가집과 낡은 대문이 보고싶어질 때가 많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달동네가 계속 사라지고 그곳에 현대식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 이 또한 아쉬울 때가 있다.
그동안 나는 사진을 한답시고 ‘낡은 판자촌과 달동네’, ‘옛모습이 남아 있는 오지(奧地)마을’, ‘버려진(廢) 땅·집과 시설’ 등을 적지않게 찾아다녔던 것 같다. 상도동 밤골마을, 거여마천동 옛마을, 구룡마을, 백사마을, 정릉 옛골목, 군산의 옛모습, 부산 감천마을과 아미동 비석마을 등, 그리고 강원도 폐광들, 폐학교 및 폐교회, 폐터널, 폐기차역, 폐촌(마을), 폐항구, 섬의 무수한 폐가들, 심지어는 산불현장의 폐허모습 등이 그것들이다.
난 왜 ‘폐(廢)’자가 붙거나 붙을 예정인 곳들을 그토록 집착하고 마음을 쏟아왔을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내고싶은 집념 때문일까?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거나,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영화로운 때의 기억이거나, 암튼...(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