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인 이민자는 언제 처음 호주에 도착했을까?
멜버른 대학교 송지영 교수가 새로운 연구를 통해
약 150년 전에 호주에 온 존 코리아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밝혀냈다.
송지영 교수가 말하는 존 코리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Highlights
송지영 교수에 따르면 1876년 호주에 도착한 존 코리아는 호주 최초의 한인 이민자로 추정된다.
송지영 교수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19세기 호주에 온 초기 한인 이민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존 코리아 씨는 1924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호주연구재단 (Australian Research Council)의 지원으로
올해 초부터 ‘호주 한인 이민 역사’를 연구하던 중에,
19세기 말 호주에 도착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을 발굴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1876년 로키엘호(Lochiel)를 타고 호주에 도착한
존 코리아(John Corea)이다.안타깝게도 이 배의 승객 명단이 존재하지 않아
본명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배가 중국 상하이와 호주를 오가며
차를 나르던 무역선이라는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존 코리아의 한국 이름은 알 수 없지만 1894년 그의 귀화 자료(아래 사진 참조)를 살펴보면
그는 뉴사우스웨일스주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 ‘골골(Gol Gol)’에서 양털깎이로
일을 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이 자료에 의하면,
그는 35세의 ‘코리아 출신자 (native of Corea)’로 명시돼 있다.
1894년 당시 조선의 영문국가명은 Corea, Coree, Cauli 등 다양한 표기법으로 쓰이다가,
일제 강점기(1910-1945)를 거치면서 Korea로 굳어지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알파벳 순서에서 앞서기 위해 일본이 한국의 영어 국가명을
C에서 K로 바꿨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존 코리아의 발견은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 뿐만 아니라
호주 역사학계에서도 획기적으로 19세기말 동아시아인 노동이민 연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 시작부터, 존 코리아가 이탈리아 꼬레아가 아닌
조선에서 온 사람임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한인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등지에서 온 다른 동양인 노동자들에 대한 역사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존이 호주 한가운데 시골마을에서 양털깍이로 귀화하게 되었는지 직접 가봐야 했다.
호주에 정착한지 7년 차인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호주 아웃백을
혼자서 차로 운전하여 3주간 4,000km 가량을 달리며 자료수집을 했다.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시드니에서 뉴사우스웨일스주 골골(Gol Gol)로,
머리 강을 건너 다시 빅토리아주 밀두라로, 웬트워스에서 브로큰 힐로,
그리고 벤디고를 거쳐 멜버른으로 돌아왔다. 여행중에,
소상공인, 이민 근로자, 초기 중국과 일본 이민 전문가, 역사기록 보관 사서,
지역 역사 학회 회원 등 20여 명을 만나 추가적인 구술역사도 들을 수 있었다.
존 코리아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호주 연방 이전 시기와 19세기 말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호주 아웃백에서 양털깎기, 광부, 진주 채취 잠수부, 외륜선 선원 등으로 일을 하던
동양 출신 이민자들이 호주 지역 경제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는지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유럽 여성과 결혼하고
호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불행히도 연방정부 설립과 함께 싹트기 시작한 백호주의로 인해,
수많은 초기 동양인 이민자들은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야 했다.
존 코리아는 1876년 호주에 도착하고 1894년에 호주로 귀화했다.
귀화 전인 1879년에는 브로큰 힐 인근에 있는 실버턴에서 광산권 획득을 시도한 바 있고,
1889년까지 이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양털깍이 등을 하며 생활을 유지했던 것 같다.
코리아는 귀화한 다음 해인 1895년에 서호주 쿨가디에서 광산 면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여기[서호주]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당시 광산권 허가 담당자였던
퍼시 필딩의 정부기록이 남아있다. 인종차별이 아닌, 지역차별을 받은 것이다.
마치 전라도에 사는 외국인 귀화인이 경상도에 가서
사업신청을 했는데 거절된 것이랑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존 코리아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뉴사우스웨일스주 브로큰힐 북부 화이트클리프에서 다시 도전장을 던졌고
1903년 마침내 광산 면허를 취득했다.
그는 틀림없이 광산 채굴로 약간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1902년에는 한 지역 신문에 “미스테리 수표 분실 사건”라는 제목의
존 코리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친구들과 함께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존이
당시 돈으로 150 파운드에 달하는 수표를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이 수표가 겉과 안이 바뀐채로 접히어서
다시 같은 경기장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다.
불행히도 존 코리아는 말년에 결핵에 걸렸고 애들레이드 병원에 입원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구세군이 운영하던 한 시설에 머물렀다.
당시 병원 기록에는 존 코리아의 출생지가 ‘Japan’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은 1910년 주권을 잃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그의 출생지가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쓰여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져질 수 있다.
오히려 이 사실을 통해서 존 코리아가 한국 출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1924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그의 장례식은 이웃주민이거나 동료로 예측되는 이블린과 리처드 로버트슨 부부에 의해 치러졌다.
에블린은 1924년 8월 6일 지역 신문에 존 코리아의 장례식을 위한 광고를 냈다.
그는 밀두라에 있는 니콜스 포인트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무덤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머릿돌은 물론이고 그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지난 100년 동안 방문객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존 코리아의 묘지앞에 간촐한 밥, 김치, 김을 올리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소주를 찾을 수가 없어서 쿠퍼스 한 병을 따랐다. 그가 개의치 않았으면 한다.
존 코리아로 인해 나는 지난 몇개월간 호주 역사와 아웃백의
동양 출신 이주 노동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수 있었다.
이중에는 빅토리아주와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잘 알려진 중국인 광부들이나
퀸즐랜드주와 서호주주에서 역시 잘 알려진 일본인 진주채취 잠수부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기록되지 않은, 잊혀진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포함돼 있다.
존 코리아가 어떤 경로를 통해 호주에 왔는지 모르지만, 1876년에 그가 호주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 그가 사망한 후 남긴 재산은 니켈 시계와 전쟁 채권을
포함한 425 파운드 (현재 시가로 호주달러 3만8천불 가량)의 저축이 전부였다.
안타깝게도 존 코리아의 사진은 한 장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동시기 19세기 후반 비슷한 지역에 거주했던 동양인의 사진을 통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중국 상하이에서 온 존 에게 씨의 사진이다.
그는 영국 여성과 결혼해 10명(7명은 생존)의 자녀를 뒀으며
웬트워스에서 매우 성공적인 외륜선 선장이 된 사람이다.
만약 존 코리아에게도 생존한 자녀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호주 사회에서Corea 성을 가진 3,4 세대 재호한인을 만날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남겨준 꿈과 도전정신, 지역 사회와의 우정은 아직도 살아있다.
호주 최초의 한국인으로 여겨지는 존 코리아를 기억하며, 그가 편히 잠들어 계시길 기원한다.
호주 멜버른 대학교의 한국학 부교수로 한국학 연구소 책임을 맡고 있는 송지영 교수는
호주연구재단 (Australian Research Council)의 지원으로 ‘호주 한인 이민 역사’를 연구 중이다.
송지영 교수는 로즈마리 브루스-멀린스와 루이스 스펜서의 연구 지원에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첫댓글 대단한 발견이군요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