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임병식 rbs1144@daum.net
모판의 마련은 한해농사의 시작이다. 해동이 되어 논바닥 지열이 오르기 시작하면 모판을 마련하는데 농부들은 정성을 다한다. 볍씨 뿌리기에서부터 피사리하는 일까지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판을 생각하면 꽂히는 데가 있다. 지금 내가 쓴 글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판에 씨뿌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소년이 늙은 농부와 겨루기를 하는데 결국 소년이 이기고 만다. 나는 이글을 통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만해서는 안 되며 꾸준히 절차탁마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담아놓았다.
모판의 벼가 어느 정도 자라 푸른색으로 물결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피사리이다. 벼와 피는 밀과 가라지만큼이나 구별이 잘 안되서 신경을 써야 한다. 물론, 열매가 익을 때는 쉽게 가려지지만 자랄때는 잎모양과 줄기가 비슷해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혼란을 겪는다. 우선 구분하는 방법은 눈으로 보아서 피는 조금 연한 색이며 만지만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
농촌에서 가장 큰 바루판은 모내기다. 이때는 보리수확이 끝나고 모내기 시기가 겹쳐서 농번기이다. 이때를 맞아 마을 사랑방에서는 중요한 일정이 잡힌다. 뉘댁부터 모내기를 할 것인가 정하는 것이다. 모내기를 하자면 손포가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은 돼야 해서 총동원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순서에 따라 차례로 일정이 잡히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모심기는 줄잡이를 잘 해야 한다. 그래야만 능률도 오르고 바르게 잘 심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때는 주인집에서 줄잡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대개는 아버지와 아들, 부자(父子)가 그 일을 맡는다.
“자-”
“저-”
이것은 못줄을 떼면서 외치는 소리다. 세상에 부자간에 터 놓고 맞먹는 소리라니. 세상천지에 부자가 노골적으로 맞먹기로는 이것밖에 없을 것이다. 대략 15미터에서 20미터 사이를 두고 못줄을 떼는데 이때는 팽팽하게 당겨야 해서 호흡을 맞춰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금에 걸린 붉은 헝겊이 물에 잠기게 되어 모심을 자리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다.
이때는 모포기를 별리는 일도 중요하다. 너무 간격이 벌어지면 끌어오느라 시간이 걸리고 너무 바짝 놓아두면 걸리적거려서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이런 일은 대개가 아이들 몫이다.
모를 심고 나면 논 귀퉁이에는 남은 모를 갈무리해둔다. 나중에 뜬 모를 하기 위해서다. 모를 심다보면 빠지거나 뜬모가 생기는데 이 보충작업은 모내기를 한 후 열흘나마 지나서 하게 된다.
건중건중 걸으며 뜬모를 하는데 이때는 황새도 우렁이를 잡아먹기 위해 건중건중 걸어 다녀서 그렇게 평화로운 광경이 연출될 수 가 없다.
나는 평소의 일꾼이 고봉밥을 먹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모내기에 동원되면서 노동은 밥 심으로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전에 새참을 먹고 났는데도 점심때가 되니 금방 배가 고파왔던 것이다.
세상에 못밥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이때는 감자가 수확이 되는 시기여서 국속에 서대나 갈치를 넣고 끓이는데 밥맛이 꿀맛이었다.
벼농사는 심어놓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항상 자박하게 물이 고이도록 해주어야 하고 김매기를 해야한다. 어느 사이 동방사니와 고마니대, 마름과 개구리밥, 물옥잠화가 벼 뿌리를 감고 돌아 제거를 해주어야 한다. 이런 작업은 3-4차례 이루어진다.
노동중에 김매기처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손에 토시를 끼기는 하나 까칠한 벼줄기에 노출되다보면 팔은 어느새 상처투성이가 된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등허리에 나뭇가지를 꽂아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벼멸구, 흰잎무름병까지 겹치면 물에 석유를 풀어 중발로 끼얹어도 달리 대책이 없다. 그야말로 하늘의 운수에 맡길 도리밖에 없다.
벼농사는 흔히 여든 여덟 번의 손포가 가야만 수확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일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그런데 농가에서는 그렇게 힘들어 생산한 쌀을 마음껏 먹지도 못했다. 돈 마련을 위해서는 내다 팔아야 해서 농부들은 흰쌀밥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보리 반식기가 아니면 잡곡이나 고구마로 배를 채웠다.
어려서 보면 농촌의 시계는 벼농사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었다. 유월 유두에 보리농사지어 놓고 밀개떡을 해먹고, 칠월 백중에는 모처럼 김매기를 끝내고 허리를 폈다. 추석은 그야말로 한해의 첫 수확물을 맛보는 시기다. 그 이전에 농가에서는 올벼신미를 한다.
이때는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사위어가서 무궁화 꽃이 함초롬이 피어나 선을 보인 때이다. 이때가 되면 농가에서는 벼을 두어 뭇 배어온다. 이것을 가마솥에 넣고 쪄서 말린 다음에 절구통에 넣어 찧어서 올벼쌀을 만든다. 이것으로 짓는 밥이 올개심니다.
나는 한때 농가에서 문지방에 달아놓은 씨앗다발을 무엇이라 일컽는지를 알지 못했다. 다산선생이 강진 어느 고을을 들여서 문지방에 개꼬리끝은 서숙이 걸렸더라는 것을 읽을 때도 명칭을 몰랐다. 그런데 이것도 공히 ‘올개심니’라는 것을 알아내고서 기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올개심니는 농부의 보람의 산물이면서 정신적인 삶의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고향을 떠나와 60여년을 산 지금도 가끔 고향의 논을 생각한다. 그냥 알탕으로 빈 논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라던 벼를 많이 그려본다. 성장해가면서 보이던 변화는 얼마나 풍요롭고 신비했던가.
벼가 수잉기를 맞아 쑥쑥 자랄 때는 갈증이 난 마소가 물을 들이키듯이 물탐을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다 마침내 배동을 하여 고개를 쑥 내밀때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잔꽃술을 무수히 달고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순박하기 조차 하다.
벼 잎이 양분을 빼앗기고 누르스름해지면 메뚜기가 깃든다. 한낮에는 콩튀듯 분주하던 녀석도 조석으로는 얌전해진다. 이때는 대두병을 들고 나가 그것들을 잡는 재미도 쏠쏠했다.
벼가 마련한 부산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락을 베어낸 자리에서 물꼬를 더듬으면 미꾸리지며 붕어가 잡히는데 그것은 가위의 소독이다.
벼는 버릴것이 없다. 짚은 새끼나 소쿠리, 가마니 짜는 재료로 쓰고 찌푸리기는 메주를 띄우는 용도로 사용한다. 소의 먹이가 되고 지붕을 이은 재료가 되며 땔감과 함께 일부는 다시 땅으로 돌아가 거름이 된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것이 볏짚이다.
돌이켜 보니 못자리를 마지막 본지도 수십 년이 더 된 것 같다. 돌아오는 봄에는 만사 젖혀놓고 모판을 구경하고 싶다. 꼭한번 구경을 하고 싶다. (2025)
첫댓글 벼농사에 대한 선생님의 경험을 대하니 옛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못날을 받는 것, 모내기 정경과 벼의 성장에 따라 농부들이 기울이는 온갖 정성.. 곡식은 농부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진리죠.
지금은 못자리를 만드는 일도, 못줄을 잡아 모내기를 하는 광경도, 못밥도 다 사라져버렸군요.
선생님께서 보고싶어하시는 모판은 기계화영농단의 비닐하우스 안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벼농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에 젖어 들지 않을 수 없는 듯합니다.
벼농사를 짓는 농촌에서 자라서인지 벼논에 대한 추억이 많고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쑥쑥 자라오르는 광경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불러왔지요.
추수를 끝내고 둠벙이며 고랑에서 물고기 잡던 추억도 새롭습니다.
왜 그때는 뱀도 그리 많았는지, 논둑길을 걸으면 몇마리씩은 꼭 만나곤 했지요.
논뚝에서 삘기 뽑던일, 메뚜기 잡이, 물이잡이 논에서 우렁이를 잡던 일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모판이 지금은 하우스에서 길러지니 예전의 노천 모판은 구경하기 어렵겠군요.
한겨울 무논에서 썰매를 타고놀던 일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때가 참 근심걱정없던 화양연화의 시절이었습니다.
벼농사에 대한 정경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저도 7~9세까지 모내기 할 때 어른들이 모를 심으면 뒤에 서서 묶어진 못짐을 갔다 주었던 추억이 남니다. 10 세 부터는 어른들과 함께 모를 심고 했는데 어찌나 허리가 아프고 힘들 던지 고단했던 그 때가 생각 남니다. 벼 김매기는 적어도 세 번은 해야 하는데 벼잎이 꺼끄럽고 힘든 것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농사가 하도 힘들어 고교는 객지로 진학했습니다. 그 후 농사 하고는 담을 쌓은 지 수십 년이 지났군요.
벼농사에 대한 자세한 모습을 꼼꼼히 잘 그렸군요. 농사를 모르는 문외한도 이 글을 읽으면 잘 알 것 같습니다.
벼농사를 짓는 과정을 그려놓고싶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옛날의 광경을 모르고 지낼뿐 더러
그런 경험조차 없으니 적어도 벼농사의 작업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옛날사람들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짐작도 못합니다.
수천년동안 살아온 우리네 조상들이 삶의 모습인데 지금은
그야말로 전설로나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