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坡州) 유적지(遺蹟地) 탐방(探訪)
율곡 선생 유적지 / 율곡과 사임당 석조입상 / 문성사(文成祠)
1. 율곡 선생 유적지(栗谷先生遺蹟地)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밤골)는 율곡이이(栗谷李珥)의 고향으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공부하던 곳인데 자운산(紫雲山) 기슭에는 제법 넓은 벌판에 율곡기념관(栗谷紀念館)과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 인근 산골짜기에는 율곡(栗谷) 집안의 묘원(廟院:墓地)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율곡은 외가(外家)인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6세까지 외갓집에서 살다가 강릉에서 상경(上京)하는데 다시 8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파주(坡州)에 와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율곡은 훗날 이곳 밤골(栗谷)을 따서 호(號)를 율곡(栗谷)이라 하였다는데 석담(石潭)과 우재(愚齎)라는 호(號)도 있었지만, 율곡(栗谷)으로 통칭(通稱)된다.
일찍부터 천재성을 보인 율곡은 13살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율곡은 뛰어난 성리학(性理學)의 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였고,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고관직(高官職)을 두루 섭렵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관직(官職)은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이조좌랑(吏曹佐郞),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고, 유림(儒林)에서는 퇴계(退溪)와 더불어 조선의 양대거두(兩大巨頭)로 불렸다.
퇴계이황(退溪李滉)은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꼽혔으며 율곡이이(栗谷李珥)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수장(首長)으로 꼽혔는데 퇴계(退溪)와 4단(端) 7정(情)을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4단(端)이라 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고, 7정(情)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말하며, 주자학(朱子學)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놓고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論爭)을 벌인 일, 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상소한 것도 유명하다.
율곡은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하는데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고 하는 효자이다.
<1> 율곡 기념관(栗谷紀念館)
유적지 입구의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거대한 율곡(栗谷)과 사임당(師任堂)의 석조입상(石造立像)이 세워져 있고 바로 곁에 기념관이 있다.
율곡기념관은 문을 들어서면 율곡의 어린 시절부터 장성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고 해설판도 붙어있다. 또 공부하던 한서(漢書)며 율곡이 집필한 서적들도 전시되어 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율곡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문성사(文成祠)라는 현판을 달아놓았다.
<2> 신사임당 초충도(草蟲圖)
문성사(文成祠)를 지나 다음 방으로 들어가면 내 눈에 너무도 익숙한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8폭 병풍(屛風)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도 그림들이 쭉 전시되어 있어 놀라움을 준다.
사임당이 낳은 4남 3녀 중 셋째는 너무나 알려진 율곡이고, 큰딸 매창(梅窓)과 막내아들 우(瑀)는 어머니 사임당의 재능을 이어받아 그림을 잘 그렸는데 아래 단매로 놓여있는 그림들은 매창과 우의 그림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5만 원권 지폐의 앞면에는 사임당의 초상화와 포도 그림이 배경으로 들어가 있는데 뒷면에 그려져 있는 매화도(梅花圖)는 바로 큰딸 매창(梅窓)의 그림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의문이 가는 것은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8폭 병풍(屛風)으로, 내가 예전 분명히 강릉 오죽헌에서 보았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혹시 모작(模作)이 아닐까, 사진이 아닐까 아무리 뜯어보아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사임당의 초충도 병풍에도 많은 사연이 담겨있다.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 큰 딸 매창(梅窓) 그림 / 막내아들 우(瑀)의 그림
조선 인조 2년(1624), 강릉부사(江陵府使)였던 윤안성(尹安性)이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鶴山里) 왕고개 위에 석천서원(石泉書院)을 세웠는데 1630년에 당시 부사였던 이명준(李命俊)이 이곳에 율곡 영정을 모셨다. 그 후 효종 3년(1652년),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彦別里)로 옮겼는데 효종 10년(1660년)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몇 차례의 화재를 겪었지만, 복원‧중수하여 오늘날까지 언별리에 건재하고 있다.
그 송담서원 안에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 8폭의 병풍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화재 당시 이웃 주민이 건져낸 것을 강릉시에 기증하였다가 지금은 오죽헌(烏竹軒)에 소장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