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기가 막히도록 재미 있는, 그리고 유익한 책을 단숨에 讀破했다. 著者는 한국소설가협회 元老 회원 박경석 예비역 장군이다. 월남 전 초대 재구대대장이었으며,우리협회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한 분!
제목에서부터 리더십이 뿜어져 나온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내일 다시 박경석 장군(대전 거주)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다. 내가 할 말은 바로 이거다.
"將軍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한 票 주신 것만도 너무나 고마운데(나는 그가 '將軍'이라 下士의 기백으로 편안하게 부탁드린다는 호소를 선거 前에 했었다.), 채명신 장군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은혜이고도 남습니다."
먼저 지난 6년 동안의 군대 추억담.
나는 大韓民國 보병1사단과 26기계화보병사단에서 안보 강연을 했었다. 1사단엔 연대 본부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번(93분) 갔다 왔고, 사단 성당에서 주임신부 대신 강론을 한 게 전부지만, 26사단은 만만찮다. 내 기록을 깨 주는 老兵이 생기면 나는 그와 어깨를 겯고 여생을 더불어 지내겠다. 아니 그를 모시고 다니겠다.
단 한 시간이라도 군부대에서 무료로 장병들에게 강의를 한 친구? 있긴 하다. 바로 우리 소설가협회 장덕영 회원이다. 고등학교 校長 출신인 그는 부산 교육계에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난 내 동지다. 당연히 그와는 끈끈한 정으로 우정을 이어나갈 결심이다. 바로 <오리 궁둥이의 춤> 著者라면 회원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가 三星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서의 강연 逸話는 앞으로도 인구에 膾炙되어야 한다.
사실 부대 강연이란 게 힘들다. 하물며 나처럼 學識과 德望이 부족한 사람에게랴.. 막춤 잘 추고, 노래 신명나게 뽑는 것만으로 강사의 자격이 된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기야 내가 가진 特有의 끼에다 안보나 戰史를 꿰뚫는 體驗을 갖춘 이가 장병들 앞에 섰다 치자. 더 이상 덮을 게 없는 환상의 그림을 그는 그릴 수 있고말고.
. 내친 김에 여태까지의 내 行態를 고백해 보자. 확 줄여서 이야기한다.
한국 전쟁 때 '양갈보' 고지에서 치열한 彼我間의 공방이 전개되었다. 뺏고 빼앗기기 數十 차례,. 어느 병사가 포탄 파편을 맞고 重傷을 입었다. 두 눈/ 두 귀/ 네 팔다리를 다 잃은 것이다. 병사는 울부짖었다.(양갈보 고기는 박경석 장군의 저서에서 임의로 끌어다 쓴다/ 웃으려고)
"엄마---!"
그와의 疏通 방법이 없었다. 야전 병원에서 지프가 출발하여 병사의 고향으로 달려간다. 러닝 셔츠도 없던 시대 병사의 멈마는 저고리 하나 위에 걸치고 들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아들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 茫然自失한 엄마는, 집에까지 가서 옷 갈아 입을 엄두도 못 낸다. 그대로 지프에 同乘하여 野戰 병원으로 간다. 병사는 그때까지 계속 엄마만 찾는다. 하지만 軍司令官과 軍團長- 師團長 -연대장- 大隊長- 중대장 -小隊長 중 어느 누구도 엄마가 왔다는 걸 알릴 수 없다. 병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 엄마는 땀에 젖은 저고리를 벗는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않고, 쪼그라든 젖꼭지를 병사의 입에 물린다. 다시 터지는 병사의 絶叫
"엄마 왔나? 그래도 양갈보 고지는 우리가 빼앗았데이."
나는 그때 청승맞게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한국 전쟁 때 미아리 고개에서 적의 포탄에 딸을 잃은 작사가 고 반야월 선생의 노래다. 그의 딸뜰의 근황은 나도 듣고 있다. 만나야지 않겠는가?)
내가 맺는 말
"몇 시간 뒤 兵士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장병 여러분! "
한숨 돌리고 나서, 나는 이어서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졌더라는 고사성어 '斷腸'을 풀이하고 같이 눈시울을 적신다. 물론 전신을 쥐어짜며 어미 원숭이의 연기도 해내고, 희희낙락하며 강 하류에서 가무에 흥청대는 군졸들의 모습도 그려내야 한다. 전쟁(戰場)이라 해도 좋다)에서는 내 몸을 바치지만, 군대 내의 일상 생활 중 다쳐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늘상 들먹이지만 너무 자주 써 먹는 것 같아 自愧之心을 가질밖에.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 어느 성당 노인대학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다가 난 내 인생을 망쳐 버렸다. 웃기려고 한 말
"그 못된 병사의 성이 뭔지 압니까? 빼 씨입니다. 裵 씨는 아니고요. 제 아내가 배 가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이소오."
그런데 그날 밤 전화가 온 것이다.
"보소, 와 그 나쁜 놈의 성이 배 哥란 말잉교? 배 가가 만만하나?"
"아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 아내과 같은 성 씨이고 버는 뺴 씨라고 말씀드렸어요."
"시끄럽다 마. 넌 정말 나쁜 선생이다."
123 직할 공병중대에서 그렇게 열을 내다가(배 씨 할머니 관련된 내용은 빼고), 폭소가 터진 적이 있다. 어떤 병사 하나가 훈련 중, 숲속에서 독사한테 물려 몇 달 고생했다는 것이 아닌가! 왜 구두 끈을 느슨하게 맸을까?
난 이제 안보 강연의 소재와 주제의 窮乏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경석 장군(소설가)의 <채명신 리더십 '나를 따르라'>에서 적어도 여남은 개의 感動 이야기를 추려 '엄마 젖꼭지'를 대신할 수 있어서다. 그 중에서 하나의 傳說, 즉 '장병들의 가슴을 적시기 위한 픽션'으로 널리 알려져 왔던 적장 서원팔 중장의 自決 이야기를 각색하여, 장병들에게 전할 결심이다. 여기선 짧게 줄여서 적어 본다. 小題目 '참군인' 재구성--!
채명신이 26살 소령 시절 , 3월 어느 날 敵陣깊숙이 들어갔다. 인민군 복장을 하고서. 偵察나간 백골병단 단원이 인민군 한 명을 사로잡아 온다. 捕虜로부터 뜻밖의 어마어마한 情報를 입수하게 된다. 조금 떨어진 마을에 인민군 '왕별'이 묵고 있다는 거다. 채명신은 놀란다. 왕별(우리로 치면 將軍)이라도 이만저만한 왕별이 아니고, 朝鮮共産黨 제2비서 겸 人民軍 현역 中將이며 대남 유격대 總司令官인 길원팔 중장이라는 게 아닌가! 채명신은 智略을 총동원하여 많은 적을 射殺하고, 무전기 문서 등을 압수한다. 거의 혼자 남은 적장을 겹겹이 포위!
마침내 채명신과 길원팔이 방에서 마주앉았다. 당당한 적장을 채명신도 鄭重하게 대했다.
"나는 대한민국 대북 遊擊隊 사령관 체명신이다. 귀하는 對南司令官이다. 歸化하면 생명을 살려 주겠다."
"나는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 썩어 빠진 리승만 傀儡 徒黨 중에 이곳까지 온 놈은 한 놈도 없었다. 보아하니 넌 인민군 反亂軍이구나!"
是非는 계속 이어졌지만, 적장 說得은 실패한다. 도무지 살아날 可望이 없다고 판단한 길원팔이 하는 말이다.
"이왕이면 自決하고 싶다. 김일성 수령님이 주신 拳銃으로 말이다. 어떠냐? 내가 죽은 뒤에 그 권총은 네가 가져도 좋다."
채명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권총에 실탄 한 벌을 裝塡하여 건네 주었다.. 그리고 뒷모습을 적장에게 보이며 돌아나왔다. 문을 닫자 금세 들려 오는 총성 한 방! 길원팔은 그렇게 壯烈하게 戰死한(?) 거다. 채명신이 그의 屍身을 수습하여 묻어 준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擧手敬禮!
길원팔이 졸장부라면 얼마든지 채명신의 뒤통수를 향해 총알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적장도 散華의 의미를 안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後聞이 나돌아다니는데 이건 참 興味津津하다 못해 눈물겹다. 그게 그 흔한 '팩트'인지 모른다. 길원팔의 유언 중에 이런 게 있었단다. 자기가 돌보는 전쟁 孤兒 각각 남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채명신에게 그들을 잘 키워 달라는 게 아닌가? 적장이지만 너무나 훌륭하고 당당한 그의 말을 채명신은 잊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채명신은 그 둘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가 보호해 오다가 전장에서 여자애는 일어버렸다. 남자애는 키워서 서울대학교에까지 입학시킨다. 그리고 동생으로 입적, 공부를 더 계속하게 했다. 동생은 마침내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철저한 비밀로 지켜졌던 이 美談도 채명신이 죽고 나서는 밝혀지고 만다. 박경석 장군은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그게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로 무게가 실린다.
나는 이거 하나로 장병들을 120분 동안 이끌고 나갈 수 있다. 도중도중에 '전우야 잘 자라'/ '진짜 사나이'/ ''나의 자랑'(이상하게 지하철 안에서 만난 병사 중 이 군가를 모르는 녀석들이 더러 있었다)으로 양념을 치면 금상첨화다.
다행히 사단장, 연대장 혹은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들을 만나서 어느 군 先輩를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대개기 채명신이라고 대답하더라. 나는 이번에 날개를 하나 단 셈이다, 박경석 장군 덕분이고말고!
덧붙임/ 우연의 일치 치곤 너무나 우연한 일치!
<그 1>
나는 기자로서 우리 <실버넷 뉴스>에 황재영 예비역 육군 대령과 함께 장경석 장군(99세) 이야기를 보도했었는데, 조회수가 만만찮다. 1000회를 돌파하고 한참 앞섰다. 그런데 장군 중의 장군인 채명신의 이야기를 쓴 또 다른 장군 중의 장군 이름이 박경석이다. 그런데 또 다른, 서 씨 성을 가진 경석이라는 이름의 장군이 있다.
박경석 장군이 전하는 채명신 이야기는 몇 번 더 쓸 생각이다. 그리고 세종시에 내려가서 박경석 장군의 近況을 접해 보는 것도 기자로서의 소명이다.
<그 2>
1사단 어느 연대(안보를 암안해 밝힣 수 없다.) 연대장과 어제 통화했다.
"전진! 박경석 장군님을 압니까?"
"우리 연대장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저는 그분을 잘 알지요. 전진!"
다시 박경석 장군님과 통화(그끄저께 장경석 장군 댁에 소설가협회 윤정옥 전 이사와 함께 찾아 갔었다.)
"1사단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습니까?"
"내가 군대 생활을 가장 오래 한 부대가 1사단이지요. 방금 전 이야기한 그 연대의 연대장을 내가 맡았었지요."
난 지금 JSA성당을 찾는 게 소원 중 하나다. 거기서 미사에 參詣하여 領聖體를 하고, 내가 아는 주임신부(지난해 11월 20일 인사를 나눈)의 이야기를 우리 신문에 싣고 싶다. 이름을 알지만 밝히지진 않는다. 신문에도 다 나와 있다.
자녀가 장군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들이여, 그들의 이름을 경석이라고 지을지어다(웃음)! 살아 있는 경석이라는 장군만 네 분이지 않는가--.
//
첫댓글 예비역 이원우 육군하사 한국 최장수 99세 장경석 장군을 만나 거수 경례! 우리 본당에도 이근양 장군이신자다.
채명신 장군의 생전 모습
그는 삼성 장군이면서 죽거든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병들이 그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