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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청주] 사랑 고백 -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요한 4, 7 - 16
† 복음 : 요한 11, 19 - 27(또는 10,38-42)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드님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아드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고, 하느님을 알게
된다(제1독서).
★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가 죽은 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가신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그분에 대한 항구한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라자로의 생명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을 두고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 16,15)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에 반박하다가
꾸지람을 듣습니다(마태 16,21-23 참조). 곧 그의 고백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마귀의 고백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과 마주치자 엎드려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하고 외칩니다. 이는 예수님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려고 한 고백이므로 신앙 고백의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마귀를 쫓아내십니다(마르 5,8-13 참조).
세 번째로는 한 백인대장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본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이 아니라, 패배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정한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난 마르타의 고백 또한 백인대장의 고백에 못지않습니다.
자신의 오빠가 죽어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한없는 슬픔과 불행을 느끼면서도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항구하게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사랑 고백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주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11,19-27)
<사랑고백>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교구청 사제관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습니다. 우리 교구장 주교님께서
어디에서 두 마리의 강아지를 얻어오셨는데, 함께 지내다보니 너무나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교관 앞마당에 한 마리, 그리고 교구청
사제관 뒷마당에 한 마리를 나눠서 키우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신부님들과 산책을 하다가,
이 강아지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서로 같은 배에서 난 강아지이니까
애틋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제관 뒷마당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주교관 앞마당에 있는 강아지와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반가워했을까요? 사실 저는
무척이나 반가워 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반갑다고 허를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장면을 예상했지요. 그러나 저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서 이 둘은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으르렁대며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강자들만의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혈육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이 무조건 힘으로 군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약자들도 살 수 있는 세상,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더욱 더 명확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인간이면서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동물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사랑의 실천에서 멀어지면서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른다면, 동물의 세계를 지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르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믿고
따르려고 하기에 주님의 뜻을 거부하는 삶인 동물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르타 성녀의 고백을 항상
마음 안에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 고백이 언제 이루어진 것입니까?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목격한 뒤에 했던 고백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고 미움을 표시해야
할 순간에 했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주어졌을
때 불평불만 속에 빠져 있었던 우리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믿음인 것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영원히 함께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진정으로 동물의 세계가 아닌, 하느님의 세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회를 놓치는 이유는 기회라는 것이 대체로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작업복을 입고 오기 떄문이다(에디슨).
빈센조캄피의 마르타. 언제나 분주했던 성녀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며...
어제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경기를 보다가 프로그램 말미에 ‘백투더퓨쳐’
라는 제목이 나오면서 과거 1984년 프로야구에 대한 뉴스가 나오더군요.
1984년도에 중심 현역을 뛰고 있는 젊은 선수들이 지금은 야구 감독 등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며, 또 그 중 몇 명은 이미 하늘나라로 간 선수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촌스러운
것입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도 나왔는데, 그 사람들
역시 얼마나 촌스러운지요.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안경, 파마를 해도
뽀글뽀글한 것이 도저히 봐 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떠했을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촌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요.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마르고 시커먼
얼굴은 시골 총각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저 스스로
촌스럽다고 말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유행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고, 나름 멋지다고 생각했었겠지요. 그러나 멋 훗날 바라보면
어색하고 촌스러움 그 자체인 것이지요.
지금의 모습이 최고일 리가 없습니다. 과거가 좋았다 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내세우는
삶이 아닌,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내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의 신앙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2013년 다해 7월29일 연중 제17주간 - 성녀 마르타 기념
- 월요일 복음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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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처럼 한계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의학의 역사는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을 늦추려는 노력, 즉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성과도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진전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끝은 반드시 온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서 온다.
늘 미지의 세계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죽음.
그저 타인의 죽음이라는 간접적 체험으로 그 존재만을 확신케 하는 죽음.
그러기에 어떤 종교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했고, 모아진 생각을
답으로 내놓으려 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가깝고도 먼 세계가 죽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고백이라면 우리의 삶에는 절대적 희망이 허락된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
남은 시간 잘 살아야 한다는 희망.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숙할 수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 삶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솔직해진다.
더 이상 감출 일도 숨길 일도 없다.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문이 영원한 죽음으로 넘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부활의 삶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사별(死別)의 슬픔 앞에서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요한 11,19-27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사별(死別)의 슬픔 앞에서>
우리 인간이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상실, 가장 깊은
슬픔,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사별(死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금쪽같은 아들, 삶의 희망이요 보루이던 아들, 앞길이 창창하던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그 비통함에 늘 울고 다니시는 어머님,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먼저 떠난 후 가장 힘든 일은 밥숟가락 뜨는 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저리도 황망히 먼저 떠나갔는데, 아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돌아가고, 아직도 나는 살아서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드는 생각이 혹시라도 이게 꿈이었으면, 혹시라도
시계바늘을 뒤로 되돌렸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가끔씩 마당에
인기척이라도 나면 아들인가 싶어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 역시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도 컸습니다. 말만 ‘절친’이지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빠 라자로가 위독하다고 사람까지 보냈는데 늑장을
부리신 나머지 오빠가 저리 세상을 떴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이 끓어올랐겠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마르타는 꾹꾹 눌러 참으며
예수님을 향해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의 지배자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지배자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이전에 죽음은 정녕 풀 수 없는 신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그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 황당한 죽음, 어이없는
죽음, 너무 빠른 죽음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해답이 내려졌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죽음을 체험해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음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죽음의 세상까지 당신의
영역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성녀 마르타 축일
2013년 다해 7월29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교구 주보에 청소년국 소개 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있는 용문 청소년
수련장은 청소년국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용문 청소년 수련장 소개를
했습니다. 주보를 보신 분들이 제게 문자를 주셨습니다. 저의 글을
읽으면서 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가톨릭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말씀지기에도 부탁을 받고 제 삶의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그 글을 읽은
분들도 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말은 쉽게 잊혀지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전해집니다. 하지만 글은 남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써야 함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도로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도로는 정해진 목적지까지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굽은 길은 바르게 펴고, 막힌 길은 터널을
만들어 뚫습니다. 도로에서는 달리 무슨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로의
목적은 정해진 장소를 달리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은 다릅니다.
길은 여정입니다. 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가
잠시 파란 하늘을 보기도 합니다. 길옆에 코스모스 바람에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기도 합니다. 높은 언덕이 보이면 잠시 쉬어가기도 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목적지가 올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眞善’입니다. 목적지가
올바르지 못해서 인생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막가파, 지존파’와
같은 사람들은 목적지가 올 바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목적지가 올 바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가면 갈수록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올바른 목적지가 있다고
해도 그 가는 길이 올 바라야 합니다. 그것이 ‘眞美’입니다. 진선하지 않은
진미는 없습니다. 진미하지 않은 진선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가
올바르다면 우리가 가는 그 길도 올 바라야 합니다.
오늘은 마르타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마르타 성녀는 가야할 목적지를
알았고, 그 목적지를 향해서 충실하게 길을 걸었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도 또한 같은 목적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마리아의
방법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교회는 두 자매의 모습에서 ‘활동과 관상’의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길을 갈 때 무조건 달리기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잠시 쉬어가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활동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잠시 쉬어가는 관상이 필요합니다. 관상을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관상을 통해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진선과 진미’를 통해서 우리가 가야하는데 꼭 필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이 260명 여름캠프를 옵니다. 아침에는 비가 조금 내리지만
오후에는 맑은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들 모두가 즐겁고 재미있는
여름 캠프를 할 수 있도록,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잘 지내다 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살아도 살아있고 죽어도 살아있는 주체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교리가 오늘 성경구절에서 특히 떠오릅니다.
육신은 잠시 거쳐 가는 숙소일 뿐 나라는 주체는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살아도 살아있고 죽어도 살아있는 그대로의 내 주체 내 영혼입니다.
지금 머무는 숙소를 현란하고 값지게 목숨 걸며 꾸미면 뭐합니까.
나의 주체인 영혼을 값지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에 목숨 걸어야지요.
지금 머무는 몸은 영혼을 잘 꾸며 영원세상 갈 준비의 도구일 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죽음 앞에서
2013년 다해 7월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나는 시골에 내려온 지 3년째 되던 해부터 봉곡교회에서 ‘행복한 노인학교’를
열었다. 처음 ㄱ,ㄴ부터 시작한 한글반이 지금은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다.
맨 처음에는 자서전 쓰기를 못하겠다 하시면서도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내가 자서전 쓰기를 하는 이유는
할머니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주마다 한 번씩 모여 자신이 살아왔던 것을 나누고, 쓰고, 읽고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시간들이 내게 참 귀한 선물로 다가온다. 오늘 말씀을
대하니 그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특히 다 큰 자식의 죽음을 경험했던
할머니는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사랑했던 사람, 그가 가족일 경우 그 슬픔과 아픔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오빠 라자로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이 보인다. 사랑하는 오빠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함께 있지
못한다는 슬픔인 것이다. 마르타가 만난 죽음은 몸의 죽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무덤에 묻히는 몸의 죽음일지 모른다. 관계의 단절이라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사랑이 죽음을 거부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보시는 삶과 죽음은 몸 너머에 있다. 몸을 입고 살고 있다 할지라도
죽음을 살고 있는 자들이 있고, 몸은 주검으로 사라졌어도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 주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인
마르타처럼 우리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란다.
-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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