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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군의 피해도 컸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내내 국군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여 대승을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다. 산의 높이가 1미터 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고지는 황폐화하였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을 얻게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는 초산의 원통함과 현리의 망신을 일거에 회복하였다. 특히 백마부대는 현리전투 당시에 그가 지휘하였던 3사단과 함께 3군단 소속으로 사상 최대의 굴욕을 당한 부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9사단이 겪은 수모의 기억도 함께 날려 버린 셈이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투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6·25전쟁 기간 동안 커다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김종오는 역사에 당사자로 굵게 획을 그었다. 전쟁 초기의 춘천대첩과 전쟁 말기의 백마고지 전투는 위대함을 후세에 길이 전할 위대한 승리였고 전략적 효과까지 컸다. 또한 충주, 음성, 신령에서 보여준 방어전은 놀라운 지략 싸움이었다. 반면 초산의 패배는 아쉬움이, 현리의 망신은 믿지 못할 참담함으로 기록되었다
"조국 통일도 못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다"
뼛속부터 무인이었던 인물
6·25전쟁 당시 활약한 가장 인상적인 국군 지휘관을 거명하라면 제일 먼저 손꼽는 것이 다부동 전투와 평양 점령을 이끌었던 백선엽(白善燁)과 김종오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거대한 대승보다 전쟁 내내 부대의 편제를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은 작전 구사로 패배를 기록하지 않은 끈질김이 강점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종오는 대체로 모가 많았지만 어처구니없게 도도 던졌던 장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부관이었던 진종채(陳鍾埰) 예비역 대장의 회고를 보면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무슨 일을 하던 빈틈이 없고 또한 책임감이 강해 모시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희비의 내색도 없고 화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더불어 자상한 성격이어서 초산전투에서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20여명의 사병을 직접 구출하여 차량에 탑승하고 함께 후퇴하였다.
김종오의 신화가 시작된 춘천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제공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을 완수하고 나아가서는 결코 싸워서 패하지 않고도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칠 수 있는 모든 전략, 전술을 구사하였고 되도록이면 불필요한 출혈을 막아 부하와 부대의 전력을 보호하려 하였다. 전쟁이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아군의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겼어도 아군의 피해가 크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아마 세계 전사를 뒤져보아도 한사람의 지휘관이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며 굵은 발자취를 남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초산 전투의 아픔보다는 춘천 전투 위대함이, 현리 전투의 굴욕보다 백마고지의 영광이 더욱 컸다. 그는 군단장, 군사령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고루 거친 후 육군대장으로 전역하였으나 1966년 불과 45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타개하였다.
김종오는 역사가 일천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던 창군 초기에 국군의 명예를 높인 명장이었다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 그는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관제 홍보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막상 현실에서 찾기 힘든 것이 바로 김종오처럼 죽는 순간까지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것인데, 그는 살아 생전에 통일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죽는 순간까지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뼛속 깊은 곳부터 무인이었던 그를 최고의 명장으로 칭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