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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효 목사
북극 탐험가인 노르웨이의 <난센> 이란 분은 북극 근방에 있는 바다의 깊이를 측량하려고 했습니다.
동아줄에 추를 달아서 바다 속으로 내려 보냅니다. 너무 깊어서 아무리 내려도 닿지 아니합니다. 그날 일기에 “여기는 동아줄 보다 더 깊다” 적었습니다. 그 다음날 더 긴 동아줄을 가지고 와서 시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닿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일기에다 “역시 이 동아줄 보다 더욱 깊다” 적었습니다. 그 다음날 더 긴 동아줄을 가지고 시도 했는데, 아무리 내려도 바다의 밑이 닿지 아니했습니다. 그날 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만큼 깊다.”
유치부 찬양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하늘 그보다 높고, 바다 그보다 깊고, 우주 그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이란 노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왜 오래 참고 기다실까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다리실까요? 마침내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오래 기다리십니다.
베드로후서3:9절에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구약 [열왕기상17장부터 22장] 까지 북이스라엘 왕 아합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쪽이스라엘 왕 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왕이 아합 왕이었고 가장 악한 왕도 또한 아합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21:25,26절]에는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음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선지자를 보내어 그에게 재앙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교만하고 완고했던 아합 왕이 회개합니다.
[27절]“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절)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짓을 하던 왕이었지만 그가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또 남쪽 유다나라에서 가장 악한 왕은 므낫세 왕이었습니다.
성경 역대하 33장에 보면 그는 그의 부친 히스기야와는 달리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성전 두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해 제단들을 쌓고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가까이 두고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습니다.
[역대하33:9절]에는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고 하여 므낫세가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대상33:10~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라고 하여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포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역대상[12~13절]에 보면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악한 왕일지라도 회개할 때 다시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나타나시어 가인의 죄와 죄로 인한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애걸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시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해 주십니다.
요나서 3장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성에 들어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자 앗수르의 니느웨성 사람들은 포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이었지만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시고 그 성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열왕기상13장에 보면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온갖 죄를 저지릅니다. 그러자 유다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그 징조로 재단이 갈라지면서 그 재가 쏟아져 내릴 것이라고 하자 듣고 있던 여로보암이 재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고 하자 그의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즉시 자신이 잘못하였음을 깨닫고 부르짖습니다.
[열왕기상13:6절]에 보면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도록 전과 같이 되니라”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여전히 악한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줄 알고 계셨지만 그가 그 순간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자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이나 삶속에도 하나님께 죄로 인하여 말라버린 현장이 없나요
진퇴양난 사면초가가 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닌지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다시 회복되기를 구하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을 건져내시고”(느9:28)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9:31)
느헤미야서에서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 한 소중한 그림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밀라노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사람이 문을 막아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이 가로막은 사람이 당시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입니다. 주교는 상당히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당장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AD 390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1세는 반란군을 진압한다고 데살로니가 시민 1500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어느 날 황제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밀라노예배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밀라노의 주교였던 그 유명한 암부르시우스는 황제를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다윗도 죄인이 아닌가?” 라고 하였고, 암부르시우스는 “만약에 다윗을 본받기 원한다면 다윗의 회개도 본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윗처럼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땅바닥에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가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모습은 너무나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그림으로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특별히 사랑한 것은 다윗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온전하여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철저히 회개한데 있습니다.
베드로나 가룟유다나 예수님을 배신한 동일한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유다는 목매달아 자살하여 지옥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베드로는 회개하였지만 가룟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하나님께 정직하게 자백하고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기다리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기다려야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창자’, ‘내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창자의 통증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고난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힘들어 넘어지고 절망하며 낙심하고 있을 때, 내장이 흔들리는 아픔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힘들고 어렵습니까?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를 범하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자주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9:36절“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이 말씀도 긍휼과 같은 뜻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에 한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고 묘지를 향하여 가던 중 예수님 일행을 만납니다.
과부가 슬피 울며 상여를 따를 때 주님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눅7:13절) 하신 후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고 하시자 죽었던 청년 곧 과부의 아들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과부의 슬픔이 기쁨으로, 눈물이 춤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보시고 눈물의 의미도 아시는 분이시고 그 눈물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고 있는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을 믿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기를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하자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 졌습니다.(막1:40~42절)
주님은 율법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율법보다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 더 컸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율법과 나병을 밀어내어 버렸습니다.
개역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그 백성들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시더라. 는 말씀이 자주 기록되었습니다. 민망히 여겼다는 말도 긍휼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민망하다는 말은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Compassion. 이 단어는 Com이라는 단어와 passion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함께 느낀다.> 혹은 <함께 고통하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습니다. 양의 방황이 자신의 방황이었습니다.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이었던 것 입니다. 그들의 방황,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아픔, 그들의 좌절을 자기의 좌절처럼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 함께 느끼셨다는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믿고 기다린 많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긍휼함을 입었습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여리고에 디메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그 사랑을 믿고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주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소리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방해하였지만 그는 더욱 심히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나 주셨고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고 기다린 자들은 모두 주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마태복음15장에 보면 시돈 지방에 살던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족속이 섬기던 신을 찾아 간구하고 많은 의사에게 갔어도 아무도 고치지 못하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비로운 주님을 기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주님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 나가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시험이 있었지만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며 그 여인의 딸을 괴롭히던 귀신을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본문에 하나님도 우리가 돌아서도록 기다리시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긍휼함을 입기를 원하여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믿지 못하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기다릴 줄 압니다.
타불로 라는 가수가 미국의 Stanford Univ. 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을 했다고 해도, 믿지 아니하고 학력을 위조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는 자기가 스텐포드 대학의 졸업장과 그리고 성적표까지 사이트에 올려서 확인 시켜주었습니다. 분명히 Stanford 대학교의 졸업장이며, 성적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더하여 담당 지도교수의 확인서까지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분명한 증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아니합니다. 본인이 어떤 증거를 제시해도 사람들은 "위조된 증거"라고 그를 몰아붙이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 이 가수의 학력 위조의 음모론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한 인터넷 매체가 직접 스탠포드 대학으로부터 확인을 해보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음모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해명자료가 나오면 나올수록 불신이 증폭되는 기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제시되는 증거는 모두 "위조 자료"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불신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람을 경험하고 간증하고 있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당시에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고 말씀을 듣지도 못하였지만 풍문에 들려오는 소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 말을 듣고 주님과 그분의 긍휼함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긍휼함을 입었습니다.
여러분 이 불신의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시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과 약속을 믿고 기다립시다. 그리고 결국 주님의 영광을 보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