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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3
과장의 유혹을 떨쳐내라. / 김학중 목사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자신을 스스로 홍보해야 하는 시대에는
과장하거나 심지어 사기를 쳐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널리 알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실덩어리’라고 말하면서도,
취업에 성공하거나 남들에게 인정받는다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직자들을 위한 각종 강연들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강점은 부각시키고 약점은 감추는 법입니다.
하지만 개인들만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현대 기업들의 마케팅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과장 또는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판매하는 상품들의 단점과 결함은 숨긴 채,
그 상품들의 장점과 유익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기업들이 지나친 과장 및 허위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성경의 인물들 역시 자기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처럼 어이없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들을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드셨을까요?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를 밑바닥까지 낮추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봅시다.
1. 밑바닥을 확인하면 담대해진다. (6:1-4, 6-14)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할례를 받고 회복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여리고 성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리고의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광야의 강한 민족들을 파죽지세로 물리친 데다가,
얼마 전에는 요단강마저 기적적으로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 번 승리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6:2).
여기까지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곧장 여호수아에게 너무나도 황당한 작전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 나아갈 것이요”(6:3-4).
즉, 이스라엘 군사들이 해야 할 일은 여리고 성을
무려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부끄럽다고 해서
여리고의 주민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돌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란하게 뿔 나팔까지 불면서 행진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매일 대대적으로 광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며칠 동안은 모든 군사들의 마음에 불평과 짜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작전명령을 내리다니, 혹시 여호수아 총사령관이 미친 건 아닐까?’
이스라엘 군사들은 당장 행진을 멈추고,
여호수아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말은 한마디도 못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6:10).
결국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부글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행진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여리고의 주민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재미난 ‘카니발 퍼레이드’을 구경하듯,
여리고의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행진할 시간만 되면,
여리고의 성벽 위로 올라가 한참 동안 구경하였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공포에 질렸던 여리고의 주민들이 그때에는 서로 낄낄거리며 이스라엘 군사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손가락질하거나 돌멩이까지 던지며,
큰소리로 조롱과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들, 우리를 공격할 자신이 없어서 매일 뱅뱅 돌기만 하는 거지?
너희들, 40년씩이나 뜨거운 광야에서 헤맸다더니, 혹시 몽땅 미친 건 아니냐?’
하지만 여호수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명령하였으므로,
이스라엘 군사들을 그 모든 모욕과 수치를 묵묵히 참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불평, 원망, 분노의 단계를 넘어,
극심한 좌절과 낙심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 우리는 성을 뱅뱅 도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너무나 한심한 존재들이구나!’
그런데, 일곱째 날이 되자,
여호수아는 고달프고 지쳐, 축 늘어져 버린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른 새벽부터 모두 깨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눈을 비비며 힘든 몸을 겨우 일으킨 군사들에게
이전보다 더욱 황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날 여리고 성을 무려 7바퀴나 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여리고 성을 7바퀴나 돌면서,
과연 이스라엘 군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그때에는 불평하거나 분노할 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여리고의 주민들로부터 야유와 조롱을 받다 보니,
나중에는 아무리 거칠고 상스러운 모욕을 들어도 무덤덤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오기마저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한심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너희들 마음껏 놀리고 비웃어라! 그래도 우리는 돈다!’
이처럼 이미 최악의 상황,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은
현재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담대해집니다.
그들은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을 그저 태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처지가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경제전문가들이 긍정적인 경제전망을 내놓을 때
흔히 쓰는 표현들 중에 하나가 ‘바닥을 쳤다’ 또는 ‘바닥을 확인했다’입니다.
즉 경기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까지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말을 뒤집어 이해하면
향후 경기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가 됩니다.
그래서 노련한 투자자들은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확신이 생기면,
더욱 공격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합니다.
그러므로,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은 밑바닥이 어디인지 몰라 두려워 떨지만,
이미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더 이상 더 밑으로 떨어질 이유가 없으므로 오히려 더욱 태연해집니다.
이것은 마치, 100층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은 떨어질까 봐 항상 염려해야 하지만,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에게는 떨어질 염려가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밑바닥 경험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은 ‘깡(다구)’, 즉 ‘오기’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요하게 사용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하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하게 하심은
단순히 우리의 오기를 기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밑바닥 체험’을 통해,
우리의 힘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우쳐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할 때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자신은 여리고 성을 뱅뱅 도는 것밖에 못하는 ‘한심한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도 단숨에 무너뜨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곳에 혹시 자신의 현재 처지가 너무나 한심하고 초라한 분들이 있습니까?
이곳에 혹시 남들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된 분들이 있습니까?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밑바닥을 치고’ 솟구쳐 오르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후원자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맞설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친히 증거하여 주실 것입니다.
2. 당신의 시계가 기준이 아니다. (6:4-7, 15-16, 20)
새벽부터 여리고 성을 7바퀴나 도느라 파김치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여호수아는 또 다시 황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6:16).
물론 여호수아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6:5).
이스라엘 군사들의 갑작스런 함성소리에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저것들이 1주일씩이나 우리 성을 뱅뱅 돌더니,
오늘 드디어 완전히 돌아버렸구나!’하며 박장대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커지면서
여리고의 성벽은 갑자기 흔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성벽에 올라가 구경하던 주민들과 군사들은 땅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무너진 성벽을 넘어 여리고 성을 단숨에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의 성벽을 이처럼 쉽게 허무실 계획이었다면,
이스라엘 군사들을 1주일 내내 고생시키지 마시고,
그냥 첫째 날이나 둘째 날 성벽을 허물어 주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눈에 띄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로 ‘7’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돌았고,
이 순회행진에는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불었습니다.
또한 성벽이 무너진 7째날에는 특별히 7바퀴를 돌았습니다.
성경의 7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모든 것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즉, 이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7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정확하게 완료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여리고 성의 함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시간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현재 전 세계는 모든 분야에서 무한 속도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에서든 다른 경쟁자들보다 단 1초라도 ‘더 빨라야’
승리의 기선을 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유용한 정보를 확보해야만 더 많은 이익을 독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첨단과학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연구결과를 발표하거나 특허를 신청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빨리빨리’로 유명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무한 속도경쟁이 더욱 치열해집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사회는, 양심과 원칙도 헌신짝처럼 버린 채,
‘무작정 빠르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위공직자들도, 대기업의 경영자들도, 존경 받는 선생님들도,
‘더 빨리’ 성공하기 위해 미련 없이 원칙과 양심을 버리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교육, 의료, 복지 등,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비리와 불법의 악취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속도전’을 비판하는
‘프랭크 파트노이’ 미국 샌디에이고대학교 교수의 책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속도의 배신』(2013.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인들이 ‘속도의 굶주림’과 ‘조바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속도주의’와 ‘단기성과주의’가 막대한 부작용과 비극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대인들을 ‘똑똑하지만 성급한 바보’라고 부르면서,
현대인들이 ‘늦춤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얻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을 앞당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조바심을 내며 성급하게 행동할수록,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더 깊은 실패와 절망의 수렁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을 잠잠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여리고 성이 단숨에 무너진 것과 같은 놀라운 승리의 기적을 허락해주십니다.
3. 삶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6:17-27)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7째날 큰 함성을 지르기 전에,
몇 가지 사항을 매우 엄하게 경고하고 당부했습니다.
첫째, 기생 라합과 그녀의 집에 사는 친지들을 반드시 살려줄 것.
둘째, 여리고 주민들의 재산을 절대로 탐내지 말 것.
특히 모든 보석과 금속류는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거두어들일 것.
그리고 여리고 성이 함락된 후에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6:26).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녀의 친지들을 살려주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바를 끝까지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단순한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와 신의가 달린 약속이었으므로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여리고 주민들의 재산을 탐내지 못하도록 한 것과
여리고 성의 재건을 엄격하게 금지한 것은 모두
세상적인 탐욕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최종목적은
결코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가나안 땅 자체와 주민들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군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거대한 강도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강도떼로 만드실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라도 허락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더 많은 재물이 필요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물을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셨을 것입니다.
건강이 필요하다면 건강을, 자손이 필요하다면 자손을,
그 외에도 그들의 필요를 따라 무엇이든 풍성하게 부어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의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최종목표 그 자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끝내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주민들의 재물을 훔친 사람이 생겼고,
수백 년 후에는 여리고 성을 재건한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하고도 가혹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칙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게 다양한 복을 구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탐욕만 부릴 뿐,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여길 뿐,
정작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은 마침내 가장 불행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탐내는 것들의 노예가 되고,
노예생활의 끝은 슬픔과 고통뿐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유명 대중가수의 가정이
결국 돈 문제로 풍비박산이 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돈 문제가 얽히게 되니, 수십 년 간 동고동락했던
부모자녀, 형제자매의 관계도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행복의 원칙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원칙이 세상적인 탐욕 때문에 변질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담대함의 진정한 근거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백성,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현대사회의 ‘과장의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