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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73편 20절-27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 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0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꿈은 참으로 허망한 거다. 어제의 일은 꿈처럼 영원으로 사라진 거다. 인간세계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지나간 것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다.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가지고 씨름하지 말아라. 미래적으로 없어질 것에 꿈을 두지 말아라. 세상 모든 것은 다 자기 앞으로나 뒤로나 지나가는 거다. 다른 사람도, 자기도 다 지나간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영원한 것,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에게 품은 소원 목적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영원하다.
자기에게 품은 하나님의 뜻은 영원 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거다. 그러니 인간 네가 함부로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봐주고 있고, 용서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권고하고 있고 권면을 하는 거다. 영원히 가는 것을 잡으라고 너를 지나가는 시간 속에 둔 거다.
어떤 때는 어제의 일이 마치 꿈을 꾼 후에 그 꿈을 잊는 것처럼 전혀 생각이 안 날 때도 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벌써 영원으로 흘러가 버렸다는 거다. ‘세월은 강물과 같다. 시간은 화살 같다’ 라고 하는데, 흐르는 세월 속에 영원한 것이 들어 있으니 이걸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걸 붙잡으려면 영의 눈이라야 한다.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영의 세계를 아는 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눈을 떠야 알 게 된다.
세상만사는 모두 시간 속에 지나간다. 아무리 좋은 꿈을 꾸고, 또 그 속에서 살았어도, 또 미래적으로 그렇게 살고자 해도 모든 것이 꿈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 참 꿈이 아니라 개꿈이다. 꿈을 깨는 것은 죽음 저 너머 영원의 세계에서다. 현실세계에서 현상계에서 이룰구원 성화구원으로 사는 것은 참 꿈으로 사는 거다. 이 꿈은 자기를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만든다.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주께서 깨신다 함은 조용히 계셨다가 심판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저희 형상이 어떻기에 멸시를 할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었다 함은 피조물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었다는 거다.
인간에게는 특수성이 있으니, 감염성을 넣어서 인간을 지은 거다. 왜 감염성을 넣어서 지은 거냐? 감염성이란 무엇을 가까이 하면 그것으로 닮아지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면까지 포함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가치판단 평가를 해서 세상 쪽보다, 마귀 쪽보다, 물질 쪽보다 하나님을 욕심을 내면 하나님을 닮게 되는 거다.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을 닮으라고, 그 속성과 성품을 닮으라고 인간 자기에게 감염성을 넣은 거다. 이런 감염성의 성분은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다.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인간인데도 악한 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하신다는 거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면을 모른다거나 닮지 않았거나 하면 질적인 면에서 악한 거다. 이들의 형상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니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성이 없는 형상은 무슨 형상이겠느냐? 짐승의 형상이요 마귀의 형상이다. 생명이 없고 형상만 있는 것은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부러워하고 돋보는 자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멸시받는 인간으로 보이면 안 된다.
인간이 왜 우상처럼 사느냐? 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처럼 사느냐?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걸 악하다고 한다. 계:의 일곱 교회에서 이런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느냐? 복음서에 보면 충성봉사나 종교적 사업적으로 주님께 자랑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난 너를 모른다’고 했다.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를 어떻게 하겠다’ 이게 있는 건데, 이건 외면한 채 자기 주관대로 했다는 거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교훈적인 면이나 목적적인 면에서 분명히 말을 했는데도 왜 이 말씀을 무시하느냐? 세상을 자랑하고 소원 목적하게 하는 거짓적인 신앙을 주장하면 하나님 앞에 이단자가 돼 버린다. 교단 교파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는 않고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쳐다보며, 그게 아니면 신앙이 아닌 것처럼 생각을 하느냐? 누구를 못 닮아서 안달이고, 누구를 못 따라가서 안달이냐? 하나님의 눈에 멸시받을 인간으로 살면 안 된다.
우리 입장에서 예수 믿으면서 이룰구원 성화구원이 안 돼 들어간다면 너는 바보다. 예수 믿는 학교에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배운 게 뭐냐? 예수님의 소원 목적 취미를 아느냐?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말해봐라. 마음을 말해봐라. 하나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게 아니냐? 알아야 공경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아버지가 자기에게 향한 마음을 모르고 있다면 이게 뭐냐?
21절: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마음이 격동을 받아 슬퍼지면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아삽이 악한 자들이 선한 의인들보다 더 잘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 자기의 신앙에 대해 의심이 생겼는데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야 확실하게 깨닫고 보니 자기가 잘못 안 것에 대해 심장이 찔렸다는 거다.
우리가 알지 못했을 때는 의문 투성이였고, 뭐가 뭔지도 모르며 박박 우겼는데 하나 둘 확실히 알게 될 때는 양심이 찔리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의 잘못만 볼 때는 독한 마음이 나왔는데 내 잘못이 발견이 되니 고개가 숙여지고 그만 입이 다물어진다. 양심이 찔린다는 것은 양심이 살았다는 증거다. 이건 희망이 있다. 이것마저도 없다면 화인 맞은 양심이다.
22절: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깨닫지 못함이 짐승 같다는 거다. 그동안 자기가 사리에 어둡고 아무 것도 몰랐었는데 성소에 들어가서야 자기의 우매함을 깨닫고서 ‘내가 왜 진작 성소에 들어오지 못했던고? 왜 진작 깨닫지 못했던고?’ 하는 탄식이다.
그러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게 뭘 말하는 거냐?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교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려면 먼저는 제물이 번제단에 올려져서 네 뿔에 사지가 묶여서 죽게 되는데, 이는 옛사람 자기가 완전히 죽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식으로 세례를 받는데, 세례란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는 세상을 향해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선서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믿는 것은 성소에 들어간 신앙이 아니다. 교회의 메시지 속에는 성소의 정신 사상이 나와야 한다.
23절-24절: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성소로 들어가면 깨달아지니 자기가 낮아지고, ‘내가 무지몽매했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주께서 진리생명의 교훈으로 붙들어 주시고 인도를 하신다.
세례요한은 우리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왔는데, 교훈적 차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주님을 맞이하게 하는 주님이 보내신 종이다. 세상을 둘러업고 세상을 배경을 하고 있으면 주의 종이 아니다. 정신 사상적으로 이걸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그 다음에 영광자로 만들어 주신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동행한다는 것인데, 의사적으로 맞아야 함께 동행이 되는 거고, 함께 동행이 되면 주의 능력 있는 역사가 돼 나간다. 능력 있는 역사란 목사가 손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넘어지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넘어지고 하는 거냐? 목사가 손바닥을 사람의 이마에 대고 장풍을 날리면 사람이 넘어지고, 이렇게 하면 일어나고‘ 하는 거냐? 이건 마귀 앞잡이들이다.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신데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했느냐?
능력 있는 역사란 사람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거다. 이 일은 성령님의 역사라야 만이 가능하다. 능력 있는 역사는 진리이치의 깨달음을 주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한다. 이걸 알면 성경을 다 아는 거다. 이걸 알면 인간의 출생의 목적, 재세기간의 존재목적이 뭔지, 예수를 믿었으면 됐지 왜 또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건지를 알게 된다. 성경에 이룰구원이 있는데, 이룰구원의 이치를 말하면 이단자냐? 예수 믿는 정신이 어떤 거고, 예수 믿는 소원 목적이 어떤 거고, 무슨 취미로 살아야 하는 건지? 그리고 세상을 왜 불에 태우는 건지? 세상은 어떤 곳이며 신령천국은 어떤 곳인지? 왜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는 건지? 왜 변화 부활을 하게 하는 건지? 능력 있는 역사는 이런 걸 알게 한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자세히 안다면 이 사람은 목회를 해도 된다.
교회에서 이것은 안 가르쳐 주고 ‘예수 믿어 천국에 가고, 예수 믿어 병 낫고, 부자 되고’ 이런 것만 가르친다면 교인들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믿는 사람은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자기의 출생목적, 재세기간의 목적,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뭘 해야 하는지, 우리 주님이 환경을 붙들고 오셔서 그 환경으로 뭘 말씀을 하는 건지를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수 년 수십 년을 믿었어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몰랐다면 너는 속은 거다. 헛 믿은 거다. 헛 나이 먹은 거다. 충성봉사 하는 것을 기준으로 믿음을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그런 걸 보시지 않고 ‘네가 누굴 닮았느냐?’ 하는 것을 보신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룬 후에는 신령천국에서 존영자로 맞이해 준다는 거다. 그러니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여기에는 듣는 것만 아니라 먼저 마음으로 순종을 해야 하고, 이러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따라간다.
25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나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만들어 줄 분이 천상천하에 누가 또 있느냐? 주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고, 따져 봐도 주밖에 없다. 주님을 닮는 일밖에 없다. 그러니 누구를 부러워하고 돋보겠느냐? 우리가 죽게 되면 주님 닮은 실상만 남게 된다. 주님 닮은 실상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우리가 정이 들고 그리워할 분은 주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서로가 있을 때 주님을 잘 닮아라.
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간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나이 들어갈수록 쇠해지고 약해지는 것뿐이다. 건강해지고 젊어지는 육체는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인생은 다 쇠잔해간다. 그래서 아삽은 시대를 타고 들어오는 유행적인 창수의 바람이 불어도,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의 창수의 바람이 불어도 자기의 마음을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반석이신 하나님께 두고, 이것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았다고 한다.
누가 하나님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을까? 세상사람들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모두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고 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직업 선택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한 하나의 부업이다. 본업은 예수를 잘 믿는 거다. 일이나 사업을 통해서 전도처가 생긴다.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도 좋지만 일터에서 대화를 통해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주님을 잘 알아야 한다.
27절: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멀리 하면 젖을 못 먹고, 아이들이 부모를 멀리 하면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양육을 받을 수 없다. 한 끼를 못 먹으면 못 먹으니 만큼 힘이 빠지고, 세 끼를 못 먹으면 세 끼 만큼 힘이 빠지고, 열흘을 못 먹으면 그만큼 힘이 빠져서 탈진이 되고 죽어 들어가듯이 진리를 한 번 못 받으면 그만큼 모르는 것이고, 열 번을 못 받았으면 그만큼 망한 것이고, 평생을 못 받았으면 영원히 망하는 거다.
교회에서 진리를 못 들으면 믿음이 안 생기는 거고 그만큼 모르는 거다. 성경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볼수록 알아진다. 안 보면 모르는 거다. 예수 믿는 자기가 일반이치를 무시하면 미련퉁이가 된다. 일반이치는 영적인 이치를 알게 해서 자기를 존영스럽게 만들어 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다. 일반이치의 법을 어기면 육신이 죽는다. 주를 멀리 하면 무엇이든지 못 받는 것이고, 생명의 말씀, 진리이치, 신적인 도덕이치를 모르면 그만큼 주님으로 자체화 되는 것이 없으니 신앙인격 면에서 망한 거다.
기독교 외에 그 어떤 이방종교도 하나님의 진리이치, 하나님의 도덕이치, 하나님의 생명이치가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에도 없다. 이런 것은 다 타락된 지식에서 나온 거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사업이 망하고 흥하고, 집안이 망하고 흥하는 것을 물질적인 면으로만 알지 사람의 인격 면이 흥하고 망하는 것을 모른다.
사람이 자체적 인격 면에 흥하고 망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그런데 뭘 배우느냐?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 자기의 존영성을 안 배우고 뭘 배우고 뭘 듣는 거냐? 주님을 멀리 하는 사람은 영적인 면이 망해 들어가고 죽어 들어간다. 영적인 면의 가치를 뭘 가지고 따지겠느냐? 부귀와 돈으로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의 가치를 따지겠느냐?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음녀’란 자기 신랑을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 여자를 말한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사랑해서 주를 버리고 세상 품에 안긴 것은 영적인 면에서 음녀다. 영적인 음녀는 신앙정조가 없다. 오늘날 거짓된 교회를 봐라. 교인들에게 가르침으로 세상을 안겨주지 않느냐? 이건 음녀 짓이다.
신앙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떠나고 진리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신다. 우리를 사랑해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당신의 몸과 목숨과 피를 흘리고, 당신의 전 인격을 기울여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을 살려서 죄에서 해방시켰는데 영능의 실력은 기르지 않고 세상 밑에 들어가서 종노릇하고, 세상을 안고 돌아가면서 예수이름을 불러서 세상을 달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이런 음녀를 어찌 가만 두겠느냐? 진노의 불이 머리끝에서부터 안 올라오겠느냐? 괘씸해서 가만 두겠느냐? 무엇으로 이 주님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