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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유럽 근대 작곡가중 슈베르트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중 완성되지 못한 곡이 있습니다. 일명 『미완성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곡입니다. ‘이 교향곡이 왜 미완성으로 끝났을까?’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완성교향곡』이 부족하다거나 가치없는 곡이 아니라 너무나 완벽한 곡이라고 음악가들은 평가합니다. 미완성이기하는 하지만 여타 교향곡에 비교해서 전혀 어색함이 없는 교향곡중의 하나입니다. 이 교향곡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정확한 악보를 찾아낼 수 없었는데 슈베르트가 죽은 지 37년, 곡이 쓰여진 지 43년이 지난 1865년 초연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미완성교향곡』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뿐 아니라, 역사상 그 심원의 깊은 몽환적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그 어떤 교향곡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명곡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근대 작곡가중 또 한 명의 유명한 인물 모차르트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수 많은 미사곡과 연도곡, 칸타타 등 교회음악을 작곡했지만 20대 중반에 결혼한 직후부터 어찌된 일인지 교회음악을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791년 서른 여섯이라는 나이로 요절하게 되었는데 그 해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듯 찬미가인 ‘아베 베룸 Ave Verum Corpus’과 ‘레퀴엠 Requiem’을 작곡합니다. ‘아베 베룸’은 3분 20초 가량의 라틴어 합창곡입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처음 쓰여진 이 라틴어 시는 1300년 경에 교회 기도문으로 받아들여졌고, 다양한 버전으로 퍼져 나가면서 중세에 이미 작곡이 되어 노래로 불려졌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하늘에 도움을 간구하는 마지막 행 때문에 종종 장례예절에 부르는 이 곡은 아주 짧으면서도 모든 면에서 원숙한 모짜르트의 기량이 남김없이 개화된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작곡하고 그 유명한 대작 레퀴엠을 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악가 파바로티의 장례식 때 맹인 테너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파바로티의 안식을 위해 장례식장에서 부른 곡이 바로 이 ‘아베 베룸’입니다. 명료하고 강렬한 감동으로 복잡한 마음을 정결하게 비워주는 ‘아베 베룸’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음악과 더불어 가슴에 사무치는 이 곡은 수많은 모차르트의 대작을 물리치고 ‘최고의 작곡가가 남긴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곡인 듯 하지만 작곡자의 어느 작품보다 그 작곡자의 모든 작품의 평가를 다 담아내는 위대한 작품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 사명을 따라 니느웨로 들어가는 요나를 보게 됩니다. 이 광경속에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정말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되고 내가 너무나 기대했던 만큼 하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뤄내시는 하나님을 오늘 본문을 통해 만나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첫째로, 하나님은 다시 사명자를 부르십니다.
요나 3장 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살려내시고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요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세상의 삶속에서 사람들에게 실망하여 사람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사람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일이 우선이고 업무지향적인 사람들은 능력만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인간존엄의 가치보다 실력의 가치, 쓰임새의 가치, 능력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인간을 보십니다. 그 사람의 본성을 더 중요시하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내면과 사람들의 성품과 개인 자체적인 존재를 더 중요시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배반하여 다시스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삐대한(?) 성격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보다 더 중요시하는 민족감정이 요나속에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요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르심도 여전히 사역에 마땅치 않을 수 있는 요나이지만 요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요나 스스로 절망감속에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미 한 번의 시험속에서 완전한 배반을 보여줬기 때문에 보통이라면 이런 기회를 다시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포기하고 사명자로서의 삶도 포기하고 이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이스라엘민족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간의 범죄가 민족의 발전에 큰 장애를 가져다주며 공동체의 패배를 보여줬습니다. 큰 전쟁에서는 너무나 쉽게 승리했는데 너무나 작은 성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스라엘은 자괴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도무지 일어날 줄 모르게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마무리하시고 여호수아에게 다시 아이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시며 구체적인 작전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은 아이성의 재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전쟁패배속에서 가지게 된 이스라엘의 좌절감과 그로 인한 비참한 분위기, 사회환경은 정말 암담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현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여호수아 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어려움과 힘든 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심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0장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우리의 패배의 원인이 다양한 만큼 그 형태 또한 다양합니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질병일 수도 있고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실패,가정의 파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패배는 반드시 회복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패배를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치시고 싸매십니다.
이사야 30장 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을 형통케 하고 풍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패배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합니다. 실수와 패배를 통해 새로운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과 들판에서 자란 꽃은 모양은 같지만 향기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판에서 자란 꽃은 거센 바람과 비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거칠어집니다. 그렇지만 향기는 진합니다. 더욱 건강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어려움에 낙망하지 말고 그 패배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회복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격려하시며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패배와 실패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견고히 붙잡고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지명하시고 쓰시기로 하신 사람들에 대해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우리에게 돌아올 환경과 상황을 만드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택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음성속에서 화답하시고 따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둘째로 하나님은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요나 3장 2절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더니 처음 요나를 부르셨을 때의 사명을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사실 주인이 종에게 일을 시켰는데 그 종이 주인을 무시하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정말 화가 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종에게 일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들은 주인과 종으로 보기 전에 창조주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주관자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는데 그 하나님이 다시 사명을 상기시켜주시고 다시 일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가 회사의 한 직원을 불러 “우리 회사가 미국에 공장을 새로 지으려고 하는데 당신이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뜻밖의 제의를 받은 직원은 “이곳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려면 적어도 한두 달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사장은 다른 직원을 불러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직원은 “사장님, 일주일 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날 사장이 다시 다른 직원을 불러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사장님,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당장 짐을 챙겨 오겠습니다.” 사장은 즉시 인사 담당자를 불러 이 직원을 미국 지사장을 발령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기회를 주었을 때 거부당하면 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지면 기회가 온 것인지 잘 분별하여 잡아야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 나오는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을 표준 새번역성경에는 “기회를 선용하십시오”라고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기회를 다시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미래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현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상황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 기회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거부했는데도 다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을 경험한다면 은혜에 감사하며 정말 우리는 결단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이라면 다시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이라는 분의 책『간장종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꾸물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불러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오는 일이 없습니다. 망설이고 꾸물거리다 끝나는거예요.”
고린도후서 6장 1,2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꾸물거리는 것, 신중함과 다릅니다. 게으름의 일종이고, 잘못 밴 습관의 하나입니다. 버릇처럼 꾸물거리다 한번 시간을 놓치면,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는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고 결단하며 순종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듣고 삶가운데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명을 깨닫고 하루하루 정말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기회를 잡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마지막 셋째로, 사명자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하십니다.
요나 3장 4절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를 다시 부르시고 요나에게 다시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사명을 행하라는 명령을 주신 하나님을 보며 우리는 불순종과 배반의 아이콘인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신약에서도 우리는 베드로를 보면서 배반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무튼, 요나는 하나님의 다시 부르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회개를 요청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나라가 멸망당할 것을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쓰임받게 된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이 결국 앗수르를 구원하고 그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막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요나의 외침에 니느웨 주민들에게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통곡하며 멸망을 피할 길을 찾았습니다.
요나 3장 5절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멸망을 예언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때 니느웨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뜻하는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온 이국의 선지자, 피식민지의 보잘것없어보이는 사람 요나가 누구이기에 이 한 마디에 사람들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모두가 금식을 하며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기를 다짐하며 이런 놀라운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요나의 뛰어난 논리적 언변과 설득력있는 어투가 가져온 결과일까요?
우리는 종종 같은 신앙인이지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여러 견해적인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며칠 전 사모가 어릴 적 함께 신앙생활했던 절친인데 지금은 목회자가 된 친구와 통화를 한 이후에 신앙과 현실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 대해 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도 그 며칠 전 어느 목회자와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에 대해 논쟁이 조금 있었기에 이런 부분에 대해 정말 인생에 있어 이런 부분에 참 어렵겠다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노력이나 어떤 일을 해결해 갈 때 나의 능력이나 나의 수고가 하나님의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상황을 만들어주시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완성하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중요한 팩트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 3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시는 중요지점을 거쳐서 일주하는데 3일이 걸리는 큰 성읍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요나가 하루동안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멸망을 예언하는 사역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는 빨라야 3일이 걸리지만 단 하루 사역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는 니느웨 전도의 반의 반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첫 단추를 꿰었지만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살펴보지 않았지만 다음 주일 살펴볼 3장 6절이후의 본문을 보면 요나는 이 후로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전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첫 날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이 일이 왕궁에 알려져서 왕과 대신들이 온 나라에 조서를 내리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고 결국 온 나라가 하나님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믿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성취감을 주시고 요나가 위대한 전도자라는 것을 세상에 각인시키고 신앙적인 교훈을 요나의 열정에 두려고 했다면 요나가 멸망의 예언을 선포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열정, 일을 만드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니느웨성과 요나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 우리의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진행하시는 분, 결국은 세상의 모든 주관자 되시는 분... 그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결국은 나의 준비, 나의 능력, 나의 수고 모두 필요하지만 그런 준비와 능력, 수고를 만들어주시는 분도 우리 하나님이시고 결국 막히는 일 마저도 일이 되어지도록 하시는 분도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많이 노력했다, 내가 할 만큼 했다, 나는 위대한 복음전도자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이 말씀속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하고 싶은 방점은 그렇게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노력하면 뭔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역량을 차감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아무리 내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많은 수고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니느웨를 향해 사명을 이루기 위해 두 번째 부르심을 받고 요나는 니느웨로 갔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끌리지도 않았고 니느웨성에 도착하여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의 부족, 그의 노력의 부족, 그의 성취도 부족이 결코 하나님의 사역을 미완으로 두지 못했습니다. 요나의 모든 면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한 미완의 상태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성으로 만드시며 놀라운 결과를 이뤄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족하고 나는 여전히 감당할 능력이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할 때 우리는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 고주리도, 우리 화성시도, 우리 대한민국도 저와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텐데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사명주시고 다시 시작해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우리가 액션을 취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일이 되는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능력이 되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잘 준비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열정이 그만한 시도를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서 하려는 뜻이 있으시면 그 뜻가운데 우리가 그냥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만들어 놓으신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민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만 신경쓰며 하루하루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허락하시고 우리의 수고이상의 놀라운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