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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사순절 첫 번째 주일)
마가복음 2:23-3:6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 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설교 주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시다.
*설교 목적: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아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when?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는 강을 건너는 중에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할 줄 아시오?” “아니요.” “당신은 인생의 1/3을 잃었소.”
한참 후에 교수가 사공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철학과 역사와 문학에 대해 아시오?” “아니요.” “당신은 인생의 1/3을 잃었소.”
조금 후 갑자기 나룻배가 급류에 휩쓸려 전복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번에는 사공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수영할 줄 아십니까?” “아니요.”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소.”
-출처: 이도영, 「탈성장교회」 (새물결플러스, 2023);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2월호), 167에서 재인용.
여러분, 이 이야기가 어떻게 느껴지셨습니까? 반전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통쾌감이 느껴졌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지식도 중요하고, 철학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 생명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2장과 3장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다섯 가지 논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논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논쟁들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일어난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어째서 저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24절, 우리말 성경)”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항의를 했을까요? 왜 바리새인들은 밀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행동을 비난했을까요? 과연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밀밭 사이’라는 말은 ‘밀밭에 난 도랑 길’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밀밭 사이의 도랑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밀밭 사이로 들어가, 밀 이삭을 손으로 꺾기도 하고, 헤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항의했던 이유는 제자들이 일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에 밀 이삭을 꺾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헤쳐 나가며 과도하게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 준수였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할 날이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을까요? 과연 하나님께도 안식이 필요하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안식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을까요? 연약한 인간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인간은 노동 후에 적절한 쉼이 뒤따라야 합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노동 후에 반드시 쉬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거나, 몸 어딘가가 부서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쉼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친히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 이 세상에 안식을 창조하셨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은 하나님 창조 사역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엿새 동안에는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에 들어가 길을 열고, 밀 이삭을 잘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행동을 안식일을 어기는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who?
바리새인들의 항의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 인용하신 다윗 이야기의 배경은 사무엘상 21장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다윗은 황급하게 놉 땅에 살던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의 이름을 아히멜렉이 아닌 그 아들 아비아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대제사장과 그의 아들 제사장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신현우,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2월호, 66).
다윗은 대제사장에게 떡 다섯 덩이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는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던 거룩한 떡 밖에 없었습니다. 이 떡은 하나님께 제사하고 물려낸 진설병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진설병은 오직 대제사장과 그의 자손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레 24:9).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그 규정을 어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만약 다윗이 율법을 어겼던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면, 다윗이 “내 주”라고 고백했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어긴 것은 더욱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13:36~37).
놀랍게도,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율법을 창시하시고, 해석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율법의 창시자요, 해석자이심을 바리새인들에게 증언하셨습니다.
과연 누가 안식일에 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안식일에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일에도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피폐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안식일에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에도”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만’ 주인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안식일만이 아니라, 나머지 엿새 동안에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머지 엿새 동안도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귀납적 방법을 설교에 도입한 크래독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하루는 크래독이 삼촌 집에 갔다가 삼촌이 막 입양한 개를 보았습니다. 이 개는 그의 삼촌이 지옥 같은 개 경기장에서 막 탈출시킨 개였습니다.
크래독이 개를 보고 물었습니다. “개야, 왜 너는 더 이상 경주를 하지 않니? 너무 늙어서 그러니?” 그러자 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아직 팔팔한 나이야. 경주할 힘은 충분해.”
“그렇다면, 이제는 이기기가 힘들어서 그런가 보구나.” “아니야. 아직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아직도 나만큼 빠른 개는 별로 없어. 경주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전승을 했거든.”
“그렇다면, 주인이 돈벌이가 안 돼서 너를 버렸나 보구나.” “그것도 아니야. 내가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 줬다고.”
“그러면 경주를 왜 그만둔 거야?” 한참을 생각하던 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내가 좇던 토끼가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경주견과 같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쫓고 있는 토끼가 가짜 토끼인 줄도 모르고, 그것을 잡으려고 정신없이 쫓아가고 있습니다.
-출처: 토니 캠폴로, 「토니 캠폴로의 회복」 (두란노, 2010), 134~135.
율법에 규정된 안식일과 십일조 규례는 “과연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헛되이 낭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what?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다섯 번째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예수를 고발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주시하다”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주도면밀하게 살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계속해서 예수님을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들어 늘 사람들 주변에만 머물러 있던 사람을 한가운데로 불러 “일어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4절)”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습니까? 또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고발하려는 자들은 선뜻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했을까요? 차마 그들은 “안식일에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옳다.”라고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도, 안식일에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침묵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이 마른 사람을 향해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살려야 할 안식일에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식일은 단지 우리가 일하지 않고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과 관련된 날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how?
예전에 우리 교회에 방문하셨던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미국 국방대학교 교수로 근무할 만큼 유능하고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신앙인으로서도 가정과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분은 젊은 나이에 미국에서 췌장암 판정을 받고, 일 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주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이분의 가족과 교우들이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분은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다음과 같은 짧은 고백의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 이분이 남긴 짧은 고백의 말이 그 자리에 모인 가족과 교우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남긴 고백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나 죽으나, 충성!”
저는 임종 직전에 그분이 남긴 고백의 말을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상시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임종 직전에 남길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삶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에 희망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 모여 과연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지 못한 인생의 급류를 만난다면, 여러분이 가진 지식과 철학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