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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복음말씀의 향기♣ No2629
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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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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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JCAqAb1W48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1979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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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유다인들이 아닌 이방인들, 동방박사들에게 드러내 보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육화사건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동방,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할 보편적인 일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성탄절인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인물들이 있으니 동방 박사들입니다.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 오랜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방박사들이 이제는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가져온 선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강생하신 만왕의 왕 앞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니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입니다.
준비해온 예물을 다 바쳤고, 또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아기 예수님을 드디어 발견하고 경배했습니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뵙는 기쁨에 황홀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구유 앞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가져온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 위해서는 금을 많이 사용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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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생존하려는(to be) 사람에겐 당신을 감추시고 살려는(to live) 사람에겐 당신을 드러내신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Hap9_z2X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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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지를 묵상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제 주님께서 나의 ‘삶의 의미’가 됩니다.
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으면 그냥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생존하는 사람의 특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나도 죽고 이웃도 죽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릴 적 길을 잃어 남의 집의 식모로 키워졌습니다. 그 집은 어머니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만 죽도록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생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당엔 보내주었지만,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하도 모질게 당신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타서 죽이고 당신도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며 이런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얼굴과 손발이 문드러진 저 나병 환자들을 보아라. 저런 사람들도 사는데 넌 무엇이 모자라 죽으려고 하느냐?”
어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의 의미를 찾으셨습니다. 사람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창조해주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살게 되셨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생존합니다. 생존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존이 목적이 되는 이유는 ‘창조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 생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나면 살아갑니다. 그들은 ‘내가 왜 생존하는가?’를 묻습니다. 부모를 보며 ‘아, 부모가 낳아주었으니 사는 거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생존합니다. 나를 창조해 준 부모를 위해 살 때 동물적 생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더는 ‘사는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진짜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냥 살아가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존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처럼 창조자를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알아 그분 때문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래서 살기 위해 창조자를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하지만 대부분은 찾지 않습니다. 그저 생존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가 그런 사람입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나 참으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영표 선수의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을 마치고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꿀맛과 같은 2주간의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강원도 어느 곳에서 청년들을 위한 강연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북한 이탈자 청년들도 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며칠을 생각하다 도저히 피곤해서 갈 수가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잘 아는 목사님의 사모가 우연히 자신을 방문했고 또 우연히 북한선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다시 강연하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강연 내용은 그리 감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 성공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맨 앞의 한 청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지막 질문을 그 청년에게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영표 선수는 왜 저희 탈북자 청년들을 좋아하세요?”
이영표 선수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뒤 그 청년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그때 자신이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북한을 나와 남한에 왔는데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를 때 하느님을 안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을 보며 이영표 선수를 한 번 만난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청년이 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이 의미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진짜로 만날 때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진짜 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생존의 삶을 넘어서고 싶어 해야! 합니다. 참삶의 의미를 위해 생존의 도구들을 포기하는 모습이 바로 ‘봉헌’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지니고 강연에 왔던 것이고 하느님은 그런 동방박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면 더는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며 생존하게 만드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이 때 부모가 삶의 의미가 되어 그렇게 행복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하느님을 만나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투자’하는 방법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표징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희망이 되는지, 아니면 고문이 되는지가 우리가 헤로데의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인지 동방박사인지를 결정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을 찾는다는 증거로 준비해 온 선물이 십일조와 같습니다. 황금은 세속(돈)을, 몰약은 육신(쾌락)을, 유향은 마귀(교만)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세속-육신-마귀를 선택하여 주님께 바치기를 거부한 ‘선악과’와 같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별합니다.
청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연습을 시킨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의 창조자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투자하는 만큼 주님은 당신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사는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힘차게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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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은 제2의 성탄이다. 그것은 주님의 탄생 신비에 대한 몰이해를 더 강조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유다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공현은 성탄의 신학적 내용을 확대해주고 깊게 해 준다.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오늘 박사들에게 나타난 별은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그 별은 그들 여행의 안내자 역할 외에 더 나아가 그들을 꼼짝 못 하게 이끄는 자석과 같아 보인다. 오늘의 전례는 이 예루살렘 대신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 이제 이렇게 예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땅끝까지 쏟아부어야 할 새로운 예루살렘은 교회이다.(교회 1항)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복음 선포와 교회 각 지체의 삶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의 공현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방인의 세계를 대표했던 동방박사들은 완전한 자격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불행히도 교회 밖에 머물러 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이 메시아의 탄생지라는 것을 가르쳐 줄 줄은 알았지만, 그 메시아께 경배를 드리러 가지는 않았다.
복음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다. 이때 헤로데가 당황하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데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탄생할 곳이 어딘가를 알아본 뒤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만나 경배한다(마태 2,4-12 참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놀라운 역사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몇 명이고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가 아니다.
복음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이들, 즉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헤로데처럼 그를 해칠 계략을 짜지만, 멀리 있는 이들, 즉 이방인들은 신앙의 빛의 자극을 받아 예수께서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찾고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11절)
복음에서 별은 동방박사들을 예루살렘에까지 인도한 후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아기가 있는 곳 위에”(9절) 머물게 된다. 이 별에 대해서는 하나의 혜성으로도 생각했고, 현대 과학자들은 기원전 7년에 발생한 물고기 성좌에서의 목성과 토성의 접함을 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그 별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내적 빛일 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요한 6,44 참조)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둘째로는 마태오는 별의 표징 아래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했던 발람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제 구약의 계약이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되고, 그분의 빛은 이미 온 세상에 빛난다. 왜냐하면, 이교도들도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길을 떠났을 때, 동방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나 아기가 있는 집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9-10절)고 한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것이 대단한 수고를 치르고 얻은 기쁨이고, 오랜 싸움 끝에 얻은 기쁨이며, 때로는 실망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얻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갖는 여러 가지 체험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쉽게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계시하신 뒤 감추심으로써 당신을 다시 찾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공현축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빛’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빛나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을 찾기 위해 동방박사들처럼 오랫동안의 고달프고 때로는 실망을 가져다주기까지 하는 여정을 끝내 달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밝게 빛나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빛을 받아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헤로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폭군에게 그리스도를 살해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다시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헤로데와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스며들 수가 없다.
만일 빛이 스며든다면 모든 것이 붕괴한다. 왜냐하면 ‘숨은 생각들을’(루카 2,35) 드러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사들의 나라 ‘동방’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을 더욱더 널리 확산시켜나갈 수 있다. 예루살렘보다도 동방에서 그 빛이 더 강하게 퍼져나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빛에서 빛으로’(2고린 3,18) 옮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밝은 빛처럼 변화시켜 더욱더 깊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또한 영원한 영광중에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뵙기를 갈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그곳에서 주님의 공현은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항상 찾아 만나 뵙게 되는 것은 주의 공현의 의미를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가능함을 잊지 않고 순간의 삶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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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주님 성탄 대축일로 부를 만큼 중요한 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는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듯이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연약한 아기 예수님께서, 동방 박사들로 표현된 이방 민족들에게 별의 인도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구세주의 탄생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솟아오른 생명의 빛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혜며, 세상을 구원하는 빛입니다. 이 빛을 보고 도착한 동방 박사들에게 연약한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시어 ‘신앙의 여정’이라는 먼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 인류의 구세주께 경배를 드린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빛을 따라 삶의 희망을 잃지 말고 참고 견디어 내며 지혜롭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 주시고 온갖 위험에서 건져 주시며, 끝내 당신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신앙의 빛을 따라가는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들어 높여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겸손하고 가난하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신앙의 빛 안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그분께 의지하는 신앙인은 늘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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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동방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1-2)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9-11)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사야서 60장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3)
“낙타 무리가 너를 덮고 미디안과 에파의 수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라.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6)
메시아께서 모든 민족들을, 즉 인류 전체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이 예언의 진짜 뜻입니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은 ‘모든 민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되는 셈입니다.
메시아 강생을 알리는 ‘별’이 왜 동방박사들 눈에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였을까? 하느님께서 특별히 동방박사들에게만 계시를 내려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어떻게 길 안내를 할 수 있었을까? 그 별은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별이 아니라, 어쩌면 별의 모습을 한 천사가 길 안내를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 별은 베들레헴으로 직행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모습을 감추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베들레헴으로 갈 때 그 별이 나타난 것은 그들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로마제국의 작은 식민지 국가의 왕에게 경배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에게 경배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경배 드린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아니라, '어떤 집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입니다.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뒤에 방을 구해서 옮겨 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아기 예수님의 겉모습과 처지가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가난하고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받은 계시를 믿었고, 아기 예수님의 초라한 겉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모두 각자 한 사람의 동방박사입니다. 누군가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신앙으로 인도해 준 그 사람이 부모일 수도 있고,
친구나 친척일 수도 있고, 선교사일 수도 있는데, 누구였든지 간에 그 사람은 우리에게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과 같은 일을 해 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신앙인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이 말씀은, 각자 하나의 등불이 되어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감화되어서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마태 2,3-5ㄴ)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7-8)
여기서 ‘깜짝 놀랐다.’라는 말은,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일반 민중은 동방박사들이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고, 그 경우에는 ‘놀랐다.’ 라는 말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를 비롯한 기득권층 사람들에게는 ‘메시아 강생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 경우에는 ‘놀랐다.’ 라는 말은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이 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 주면 정말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도 구원받지 않겠다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복음 선포는 신앙인들이 꾸준히 실천해야 할 기본 임무입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을까? 동방박사들이 전해 준 ‘기쁜 소식’을 안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가서 보고 싶어 하면서도 헤로데가 무서워서 못 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가 박사들을 ‘몰래’ 불렀다는 것은, 그 아기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메시아로 오신 분이 어린 아기라는 것도 알았고, 아직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 아기가 자라서 실제로 위협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라는 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박사들이 자기를 속였다고 그가 화를 낸 것은(마태 2,16) ‘적반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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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4년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 당시는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03위 시성식과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공식 표어는 ‘이 땅에 빛을’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784년 시작된 교회는 많은 박해를 겪었고, 순교자가 있었지만 신앙을 지켜왔고, 103위 성인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103위 시성식’입니다. 교황님과 사제단이 제대로 입장하는 동안 통로에서 안내를 맡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님의 신학교 방문이었습니다. 저의 자리는 통로 쪽에 있었고, 교황님께서 제대로 입당하실 때 제 옆을 지나가셨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았던 제가 신학교를 잘 마치고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빛이 되신 103위 성인의 전구하심이라 생각합니다.
5년 뒤인 198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제 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세계 성체 대회(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는 전 세계의 성직자, 평신도가 성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높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회입니다. 103위 시성식이 한국교회를 알리는 자리였다면 성체대회는 한국교회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성체대회의 공식 표어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저는 당시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하였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의도에서 있었던 ‘성체대회 폐막미사’입니다. 저는 제단에 올라가서 미사에 참례하였고, 성체 분배를 하였습니다. 5년 전인 시성식 때는 통로 안내를 맡았지만 성체대회에서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괌에서 온 참가자들의 안내였습니다. 덕분에 성체대회의 많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셨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여러 나라의 공연도 보았습니다.
25년 뒤인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방문하였습니다. 시복식의 공식 표어는 ‘일어나 비추어라.’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세월호 참사’로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세월호 희생자의 손을 잡아 주셨고, 희생자의 가족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 교구청에 있던 저는 감사하게도 방준위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도문 제작’입니다. 교황방한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교회의 인준을 받아서 나누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기억하는 자료집 발간입니다. 함께 하였던 분과위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통로 안내자, 성체 분배자에서 분과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일어나 비추는 것이 제게는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별을 따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세 명의 박사이야기입니다. 멜키올과 발다살 그리고 가스발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인도해준 ‘별’을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 부와 건강이라는 별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별은 참된 진리의 별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남을 속이게 되고, 분쟁과 갈등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별은 무엇이어야 할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선물은 무엇이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드려야 하는 첫 번째 선물은 첫 예물은 희생이었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인내였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2021년도에는 ‘말씀’의 별을 따라 ‘희생, 인내, 감사’의 선물을 준비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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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별>
마태오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주님의 별>
주님을 만나려면
칠흑 같은 어둠 속
한걸음 내딛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두려울지라도
검은 땅과 맞닿은
캄캄한 하늘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천천히 부드럽게
정성스럽게 더듬는 거예요
땅은 늘 그렇듯
두려움 속에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려 하겠지만
마음을 담은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아득히 먼 곳에
주님의 별이 보일 거예요
찾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러나 분명히 있어요
주님께서 띄워 놓으셨으니까요
그러니 계속 찾아야 해요
결코 포기하지 말고
아 저기 있다
주님의 별을 보았다고
고개를 내리지 말아야 해요
아직 주님을 만난 것은 아니니까요
주님의 별을 놓칠세라
끝까지 눈길을 맞추고
가까이 더 가까이
주님의 별을 향하여
이제 걸어가야 해요
땅은 여전히 어둡고
앞길은 알 수 없지만
조심스럽지만 힘차게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 거예요
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사람의 덫에 걸려들지 말고
별이 이끄는 그곳까지
아직은 알 수 없는 그곳까지
쉬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 거예요
마침내 별이 멈춰선 곳
그곳에서 별을 보내신
주님을 만날 거예요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
주님께 우리를 기꺼이 드려요
주님과 함께 우리 맘껏 즐겨요
그러나 아직은 마냥
주님 곁에 머물 수는 없어요
우리를 만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별로 삼아
지금여기로 보내시니까요
우리는 주님의 별이에요
우리를 주님께 이끌었던 그 별처럼
벗들을 주님께 이끄는 별이에요
그러니 이제
맘껏 빛을 내어요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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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험한 길과 다리를 건널 필요가 없다 해도>
+찬미예수님
스무살 초반, 군입대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수류탄 투척 훈련을 앞두고 훈련장에서 대기하던 중, 왼손잡이들을 먼저 선별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제가 군입대하던 시절에만 해도 실수류탄을 훈련 때 사용하였으므로 모든 불안전한 요소를 차단하고자,
같은 손을 사용하는 인원들을 나누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룹에 따라 모두 같은 손으로 수류탄을 던져야 조교들이 헷갈리지 않고 안전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왼손잡이였지만 소대장 훈련병이었으므로 다른 대원들을 인솔해야 했고 먼저 나가기도 왠지 귀찮아 그냥 오른손잡이 그룹에 남아있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영화처럼 언덕 위에 위치한 훈련장 저편에서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뒤, 구급차가 급하게 들어오고 헬기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안전을 기했지만 안타깝게도 먼저 올라간 왼손잡이 그룹에서 수류탄 사고가 난 것입니다. 한 명의 훈련병, 한 명의 조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왼손잡이 훈련병들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훈련이 취소되었고 부대에는 침묵만 흘렀습니다. 동료를 잃은 소대장들과 훈련병들은 그저 침묵뿐이었고 부상을 입지 않은 다른 왼손잡이 그룹의 대원들조차 그 사건을 똑똑히 지켜봤으므로 정신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종교활동을 비롯한 모든 외부활동이 차단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왼손잡이였음에도 이 큰 사건을 목격하거나 당하지 않았음에 하느님께 감사했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데, 그리고 살면서 성체를 걸러본 적이 없는데 성당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큰 답답함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몇주 후에 성당에 다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코로나로 인하여 성당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아마 많은 분들이 당시의 저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시기, 그럼에도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는 날들 중에 주님께 의지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으실 것이고 누군가의 기일이나 생일 축일 등을 기억하며 특별히 성체를 영하고 싶은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향한 마음을 저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바라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공현대축일을 맞이해, 복음에서 긴 여정을 걸어와 예수님께 준비해온 선물을 봉헌하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별을 보고 메시아의 탄생을 직감하며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의 그들의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비행기도, 자동차도, 기차도 없는 험한 길과 다리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를 생각해 보면 추위를 무릅쓰고 산과 고개, 넓은 벌판을 넘어 어려운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세상이 기다려온 메시아 예수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들의 대척점에는 헤로데 왕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게 자기도 새로 나신 왕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혹시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로 헤로데는 군인들을 보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부류의 극단적인 믿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갖게 된 첫 번째의 외국인들입니다. 기나긴 여정을 떠나온 만큼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의 값진 선물을 바쳤습니다.
헤로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서워하거나 피곤해 하지도 않았으며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을 믿게 되는 아름다운 신앙으로 재탄생됩니다.
반면 헤로데 왕은 천상의 것이 아닌 지상의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천상의 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상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즉 그는 세속을 사랑하며 이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를 장애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결국 분노와 증오만 남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현재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일이란 물리적으로는 사실 매우 쉬운 일입니다. 긴 여행을 할 필요도 없고 물을 건너거나 언덕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성당 문이 닫혀있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성당 문만 다시 열린다면 손 쉽게 예수님의 몸을 영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실천, 정성어린 기도, 마음이 담긴 봉헌을 통해 예수님께 좋은 선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성사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인 비유일뿐 실제로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당에 나오기까지 우리들은 사소한 귀찮음의 언덕을 넘어야 하고 미움의 강을 겅너야 하며 시기, 질투와 같은 일상적인 장애물들 또한 이겨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달콤한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상황 역시 더욱 더 커다란 유혹이 될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 되면서 혹시 주님과의 거리 또한 멀어지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러한 장애물들을 잘 이겨내고 거룩한 동방박사들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나와야 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장애물들 잘 이겨내고 한주를 정리하며 예수님께 정성어린 경배를 드릴 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즐거워 하실 것이며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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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철규 아오스딩 신부님]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한 시인이 노래하듯, 어두운 밤을 밝히는 별 ... 그 하나하나는 어두운 우리네 마음을 밝혀주기도 하지요 ...
2020년은 참 어두운 한 해였습니다. ... 그럼에도 우리에겐 그 어둠을 밝히는 스타들이 있었죠. 세계를 터트려 버린 다이너마이트(dynamite) BTS, 70m 달린 소니 손흥민, 전국민의 어깨를 들썩인 미스터트롯의 영웅들, 그리고 우리들의 바이러스 사냥꾼 정은경 본부장 등등. 그들이 있어 우리는 잠시라도 어려운 현실을 잊고 밝게 웃어 볼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어두운 밤을 밝히는 큰 별 하나가 떠올랐었습니다. 가장 먼저 그 별을 알아본 것은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었죠. 그들은 저 멀리서부터 예물들을 들고 그 별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왕궁이 아닌, 작은 시골마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유에 누워있는 한 아기를 보게 되었죠. 그렇게 특별한 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오히려 너무나 초라한 그 모습이 특별했던 그 아기가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타였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분께 경배를 합니다. 그리고 가져온 예물을 바치죠. ‘황금’과 ‘유향’과 ‘몰약’, 각각은 ‘고귀한 인성’과 ‘거룩한 신성’,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 그로써 온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 인류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온 ‘구세주’,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말입니다.
그렇게 주님공현대축일인 오늘,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을 통해 우리는 구세주의 오심을 보았습니다. 어둔 밤과 같은 인류의 마음을 밝히는 별 ...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동방박사들을 따라 ... 그분께 경배를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이제 서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들의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따뜻한 새해 맞이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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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훈 미카엘 신부님]
<주님의 해>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유다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구세주로서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대축일을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인 12월 25일로 정했듯이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탄생 대축일을 1월 6일로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태양신 축제를 이날 지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두 날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 탄생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에 중점을 둔 신비를 보여 주고 공현은 인류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빛으로 널리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이사야 예언서 60,1-6)에서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일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고,
제2독서(에페소서 3,2-6)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들까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상속자로 만드시는 심오한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이어서 복음(마태오 2,1-12)은 동방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나신 분’을 찾아옴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렇듯 주님 공현 대축일은 구세주의 탄생을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드러내 보이셨다는 의미를 강조하면서 보편적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 동방의 왕들은 예수님께 꿇어 경배드렸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모습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이 준비해온 선물처럼 신적 권능을 지니시고 인간 세상에 만연한 어둠을 몰아내고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갈 분을 찾으러 떠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상에 만연한 죄악과 어둠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징표인 별을 보았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별의 표징을 찾으러 떠났습니다.
눈만 감고 징표를 무시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떠났습니다. 별의 징표를 보겠다는 순결하고 올곧은 열망은 헤로데의 위선에 속지 않고 별의 징표를 만나고 다른 길로 기쁨과 희망을 안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더욱 기뻐했던 것은 별의 징표가 아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악을 없애러 오신 강력한 신적 권능을 지닌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하기 그지없는 아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시는지를 본 것입니다. 신이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약한 사람들도 희망을 갖고 함께 손을 잡고 생명의 길로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제로 이끄는 힘이 아니라 우리 약한 인간들이 서로 손을 잡고 세상의 악에 맞서며 정의를 지키고 사랑을 일구어내며 희망을 열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 주시는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별의 아기로부터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올해 서기 2021년이라고 하지만 로마식 표기로 하면 AD 즉, 주님의 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길이 새로운 시간이며 구원의 시간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보편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멋진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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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주님 성탄 대축일로 부를 만큼 중요한 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는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듯이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연약한 아기 예수님께서, 동방 박사들로 표현된 이방 민족들에게 별의 인도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구세주의 탄생을 공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솟아오른 생명의 빛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혜며, 세상을 구원하는 빛입니다. 이 빛을 보고 도착한 동방 박사들에게 연약한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시어 ‘신앙의 여정’이라는 먼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 인류의 구세주께 경배를 드린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빛을 따라 삶의 희망을 잃지 말고 참고 견디어 내며 지혜롭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 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 주시고 온갖 위험에서 건져 주시며, 끝내 당신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신앙의 빛을 따라가는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들어 높여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겸손하고 가난하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신앙의 빛 안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과 함께 걸으며,
그분께 의지하는 신앙인은 늘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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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엄기영 안드레아 신부님]
<그리스도 우리의 빛!>
새해의 첫 주일인 오늘은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를 지내게 됩니다.
작년 한 해 우리 모두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 등의 개발로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1월 6일 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새 주교님을 중심으로 교구의 모든 구성원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을 안내했던 별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라집니다. 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이 왜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사라졌는지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대한 유혹이 가득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신앙의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헤로데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나실 곳이 어디인지 물었고, 그들은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이 유다 베들레헴임을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현세의 유혹 등으로 신앙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 올바른 길을 찾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말씀’ 임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중 그 누구도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을 정확하게 알면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물을 드리고 경배합니다. 헤로데를 비롯한 왕궁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안주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뒤 다른 길로자기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로부터 성가정을 보호하려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나부터 먼저 근본적인 변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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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다수의 뇌과학자에 따르면, 우리 뇌는 ‘처음 시작한 지 아직 21일이 되지 않은 행동’에 거부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 그 행동을 입력해 놓을 ‘기억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주 동안 계속했음에도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는 것은 뇌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행동을 뇌가 받아들이고, 그 행동을 습관으로 저장하는 데는 꼬박 ‘21일’이 걸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습관으로 길들이고 싶다면 끈기를 갖고서 21일간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뇌에서 “아! 주인이 이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려나 봐.”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21일 이하면 뇌에서는 ‘아예 결심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습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습관을 통해 계속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이야기도 많아지고 더 가까운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습관이 이뤄지지 않으면 늘 주님이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21일 동안이라도 반복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의 세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것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동방박사의 경배로 예수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인 오늘, 동방박사의 모습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별만을 보고서 메시아를 만나러 이스라엘까지 찾아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고, 메시아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가서 헤로데 임금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동방박사들이기에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초라한 마구간에 태어난 이 아기가 온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주님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만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21일의 규칙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이 나의 삶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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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1984년부터 1996년까지 4차례의 올림픽 대회에서 총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육상 영웅 칼 루이스에 대한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살았던 도시는 교통 상황이 너무나 나빠 교통지옥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도둑이 그의 모터사이클을 훔쳐 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가격이 저렴한 자전거를 샀지만, 이것마저 도둑맞았습니다. 그 뒤 그는 왕복 24킬로나 되는 먼 길을 매일 뛰어다녔습니다. 훗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도둑도 달리기만은 훔쳐 갈 수 없었습니다.” 매일 이렇게 달린 결과 그는 세계 제일의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가장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에만 더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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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물을 바쳐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알아 뵙고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한 임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임금이고 다른 임금은 자기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거짓으로 속이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소위 갑질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 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림으로써 풍성함과 자유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 년 만 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길 마다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풍성히 주십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를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 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미루지 않는 사랑,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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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적순례여정>
-목표, 이정표, 도반, 기도-
원주교구 조규만 주교님이 수도형제들에게 보내 준 성탄카드 답신에 공감했습니다.
“성탄카드 감사합니다. 올해 성탄은 쓸쓸했습니다. 첫 성탄처럼. 그래도 2021년 새해를 희망합시다. 희년이고 또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이시니까요?”
올 성탄이 참으로 아쉬운 것은 성탄시기 성탄대축일 낮미사후 오늘 공현대추일 미사 때마다 불렀던 그 좋은 손상오곡 화답송을 부르지 못한 것입니다. 짧은 기도로 바쳐도 얼마나 흥겨운 곡에 내용들인지요!
“땅끝마다 우리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보았도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그리고 오늘 공현대축일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새삼 찬미노래가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지 깨닫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은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입니다. 어제 월피정 복음 나누기중 새롭게 떠오른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그리운 추억이었고, 지체없이 강론 내용도 결정되었습니다. 매해 주님 공현 대축일 때마다 거의 반복되는 내적순례여정의 네 근본요소에 대한 강론이지만 할 때 마다 새로워 다시 삶을 추스르게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의 참 값진 깨달음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은 강론 주제중 하나가 ‘여정’입니다. 우리 인생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하여 늘 피정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습니다.
“일일일생, 여러분의 일생을 하루로 압축하면 하루중 어느 지점에 와있겠는지요. 여러분의 일생을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과연 어느 지점에 와있겠는지요.”
물으면 다들 숙연한 모습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여정을 점검하다보면 하루하루가 참 소중한 선물의 날들처럼 여겨집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그대로 우리의 내적순례여정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은 구도자와 순례자의 원형적 모범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는 구도자요 순례자입니다. 오늘 내적순례여정의 네가지 근본요소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목표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목표는 베들레헴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 생장 포드에서 시작된 800km 순례여정의 최종 목표지점은 산티아고 대성전입니다. 베들레헴이나 산티아고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우리 내적순례여정입니다. 이런 삶의 근본 목표인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표류요 방황이고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그러니 늘 하느님 목표를 새로이 함이,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억함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을 잊으면 나를 잊게 되고 곧 무지의 어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이며 하느님께 대한 앎과 더불어 나에 대한 앎도 깊어집니다. 하느님 없이 나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여 하느님과 나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기 위해 늘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이정표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빨리가든 늦게 가든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등수를 보지 않고 제 페이스대로 목표를 향해 완주했는가 봅니다. 여기서 참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삶의 여정을 안내하는 가이드와 같은 이정표입니다.
산티아고 800km 긴 여정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비결은 순전히 이정표 덕분입니다. 이정표는 생명과 같습니다. 길을 잃고 한참 방황하다 이정표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반갑던지요! 길을 잃고 방황할 때의 불안과 두려움은 얼마나 컸던지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 따라 가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삶의 여정에 결코 도약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우보천리 하루하루 이정표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정표는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과연 여러분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주님의 별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나 자명히 드러나는 주님의 별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처럼 깨어 찾는 순례자 누구에게나 계시되는 이정표 주님의 별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별 이정표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한 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니 성공리에 끝난 순례여정입니다.
셋째, 도반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혼자 떠다도 곳곳에서 함께 합류하는 도반들이 있어 순례 여정이 가능했습니다. 국적, 언어, 인종 모두 달라도 목표가 같기에 순수한 마음에 원활한 무언의 소통이요 평화의 일치였습니다. 만민의 보편언어가 순수한 마음임을 실감했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끊어져 단절되면 죽고 이어져 연결되면 삽니다. 하여 수도공동체의 도반 형제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가스팔, 발타살, 멜키올 셋이었다 합니다. 만일 혼자라면 그 힘들고 험한 먼 순례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 같은 동방 박사들 셋 사이의 우정도 참 깊었을 것이며 주님의 별을 통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우정도 꽤 깊었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도반은 누구입니까? 사실 내적순례여정에 도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부부도 친구도 도반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수도형제가 도반입니다. 보이는 형제 도반과 더불어 평생 영원한 도반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형제 도반은 물론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새벽에 감동적 인터넷 기사를 읽었습니다. 평생 부부 도반으로 살아 온 이들이 배우자를 떠나 보내는 인사는 다음과 같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 여기서 더 이상 힘들게 있지 말고 어서 가.--- 사랑해.”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평생 오매불망 꿈에 그리며 사랑하던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과 불안은 기쁨과 설렘으로 바뀔수도 있을 것입니다.
넷째, 기도입니다.
삶이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기도해야 목표인 하느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정표를 발견합니다. 보이는 도반형제들은 물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중 가장 많이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걷는 것은 기도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바로 이 짧은 시편기도를 바치며 샘솟는 힘에 갈수록 빨라져 나를 듯 걸어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전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짧고도 긴 삭막한 광야인생 기도없이, 주님없이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런지요. 노욕이나 노추가 아닌 품위있는 노년의 여정에 기도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끝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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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 주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먼 길을 온 이유는 그들을 놀라게 했던 그 별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유다인들만의 임금으로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현자인 그들이 감지한 것이지요.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누워 있는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충실히 움직이고, 박사들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별을 따라 갑니다. 별은 박사들을 예수님 구유 앞에까지 이끈 뒤 제 역할을 마치고 멈춥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
박사들은 기뻐하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애초부터 별을 따라서 떠난 길이니, 그 별이 멈춘 곳이 왕궁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것은 별이니까요.
유다인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분이 이방인들에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반겨 맞이하고 엎드려 경배한 존재들은 마굿간 짐승들과 가난하고 투박한 목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제1독서는 온 세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몰려들리라고 예언합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이사 60,3-4)
저마다 예물을 들고 빛을 향하여 몰려드는 무리를 관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더 이상 작은 나라 이스라엘만의 임금이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 자비와 구원을 목말라하는 온 세상이 이 모두를 지니신, 빛이신 분께로 나아옵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들에게 열린 구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줍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공현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느님과의 계약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상으로 지평이 열립니다. 모든 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또 그분의 신부가 됩니다. 이제 구원의 조건은 인종이나 국적,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써 실현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마태 2,6)
말씀을 품은 이에게 온 세상의 보화가 물밀듯 밀려들 것입니다. 주님을 품었으니 모든 것을 품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주님께 쏟아지는 경배와 흠숭이 그저 흐뭇하고 기쁠 뿐입니다.
주님 공현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지속됩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의 구유 안에 말씀을 모시고 사는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신분이나 학위, 부나 권력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주님을 모신 영혼 위에 별은 떠오르고, 구원을 고대하는 이들은 이를 감지합니다.
우리를 비추며 사막과 광야를 돌고 돌아 앞서가던 그 별은 저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나 왕궁이 아니라 초라한 마굿간 같은 우리 존재 위에서 멈춥니다. 누추하고 죄스런 우리 마음속 구유 안에 머물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말씀이신 분, 그분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시다.
사랑하는 벗님! 나 자신이 가난한 목동 처지여도, 의지할 곳 없은 이방인 처지여도, 마굿간 짐승밖에 못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을 모신 곳에 별은 빛나고 그 빛은 남녀노소, 민족과 국가, 인종과 문화를 넘어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평화를 건넬 것이니, 그저 말씀에 머물러 고통에 찬 세상을 품읍시다. 세속의 멍에와 탐욕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비추는 말씀의 별을 따라 여기까지 오신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제 "일어나 비추십시오."(이사 6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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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왕’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왕’은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에 대한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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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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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요한2,2)
<또 하나의 성탄!>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합니다. 그리고 귀한 예물을 봉헌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라는 동방박사들의 물음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랍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에 대해 관심을 드러냅니다.
유다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 자신들을 구해 낼 강한 힘을 지닌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태어나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경배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에게 먼저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고,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에게 먼저 드러내 보이십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구원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구원의 문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열려져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여겨지던 이방인들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아와 경배하였다는 것은 이방인에게도 하느님의 구원이 열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
죄로 얼룩진 이방인!
잘 믿지 못하고, 희망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방인!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방인!
이런 이방인들에게도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고,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메시아시요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 경배 드리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귀한 예물을 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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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1Rbc8PRwe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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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사람이라는
기쁨을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먼저 드러내신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기 개방성인
평화와 기쁨의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떠나
우리들 곁으로
오셨다.
동방박사들도
길을 떠났기에
하느님의 성탄을
만날 수 있었다.
공현은
떠남이다.
집착에서
탐욕에서
떠나는 것이다.
공현은
만나기 위한
떠남이다.
공현은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사랑의
축제이다.
그 축제에서
하느님의
가난함을
만난다.
작은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껴안으신다.
널리 드러내는
공현은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씀의 빛이다.
사랑할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본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가난한 아기의
여정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공현의 본질이며
구원의 실재임을
알려주신다.
모든 삶을
우리들에게
거시는
하느님의
봉헌이 사랑의
공현(公顯)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봉헌이시다.
봉헌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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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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