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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조선 최근세
(철종 14년(1864년)부터 이왕(李王) 융희(隆熙) 4년(1910년)까지, 47년간)
개설
제1기 청(淸) 세력 감퇴 시대
(철종 14년(1864년)부터 이태왕(李太王) 32년(1895년)까지, 32년간)
개설
제1장 이태왕(李太王)의 즉위와 대원군(大院君)의 천정(擅政)
제1절 이태왕(李太王)의 즉위
① 철종(哲宗)의 서거
② 제(諸) 외척(外戚)의 후계자 문제
③ 흥선군(興宣君)의 기략(機略)
④ 이태왕(李太王)의 가계(家系)와 즉위
제2절 대원군(大院君)의 내정 혁신
(1) 대왕대비 조씨(趙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
① 대원군의 대우
② 김(金)·조(趙) 두 가문의 분쟁
③ 대원군의 실권 장악
④ 대원왕부하(大院王部下)의 배치
(2)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
① 중건 의의
② 경복궁의 유래
③ 조영(造營)에 필요한 자재(資財) 징수 방법
④ 화재(火災)와 공사(工事)의 지체
⑤ 완성과 영향
(3) 풍교(風敎) 혁신
① 인재 등용과 당화(黨禍)의 제거
② 서원(書院) 철폐
③ 풍속의 교정(矯正)
(4) 제도
① 진위상(鎭衛上)의 설비
② 법전(法典) 편찬
(5) 재정(財政) 정비
① 징세법(徵稅法)의 개혁
② 전화(錢貨) 주조(鑄造)
③ 창름 제도(倉廩制度) 정비
제2장 대외 관계
제1절 쇄국(鎖國) 정책
(1) 쇄국주의(鎖國主義)
① 서서(西書) 수입 엄금
② 자국 문화의 과지(跨持)
③ 세계의 추세에 무지(無知)
④ 서양 문명 계수상(繼受上)의 일본과 조선 비교
⑤ 철저한 쇄국(鎖國)
(2) 서방 세력의 동침(東侵)에 대한 공포
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성효(成效)와 조선
② 노국 접양(露國接壤)
③ 청국(淸國), 평화책을 조선에 권고하다
④ 일본의 개국과 조선
(3) 배외주의(排外主義)와 조선의 쇠망
① 장래소요(將來騷擾)의 골자로서 배외주의(排外主義)
② 배외(排外) 사상과 쇠망
제2절 천주교도의 박해와 프랑스 함대의 내습(來襲)
(1) 천주교의 도래(渡來)
① 도래(渡來)의 기원(起元)
② 천주교도 증가와 박해
③ 프랑스와 조선의 교섭
④ 구주(歐洲) 선교사 간의 배제(排擠)
(2) 프랑스 함대의 내습(來襲)
① 벨마와 대원군(大院君)의 괴리
② 중국에서의 학살 허보(虛報)
③ 리텔의 보고
④ 헤비네 공사(公使)의 기획
⑤ 제1차 침입
⑥ 제2차 침입
⑦ 프랑스군의 퇴각
⑧ 방비 엄수(嚴修)
제3절 미국 함대의 내습(來襲)
(1) 초기의 한미 관계
① 인삼(人蔘) 무역
② 미국과 청국(淸國) 항로상(航路上)의 조선
③ 조선과 미국의 수교 계획
(2) 한미 분홍(紛訌)
① 서프라이즈 호의 구원
② 셔먼 호의 조난
③ 독일 침략
④ 조선과 미국의 교섭
⑤ 강화도의 전투
⑥ 쇄국 방침의 확립
제4절 일본의 수교(修交) 제의 및 이에 대한 국론(國論)
(1) 막부(幕府) 말기의 한국과 일본
① 소원해진 교통
② 서방의 동침(東侵)과 조선 및 일본
③ 프랑스 함대의 침입과 조선 및 일본
(2) 일본과 한국 수교 제의
① 유신(維新)을 통지(通知)
② 대원왕(大院王)의 극심한 배외(排外)
(3) 일본의 국론(國論)
① 초기의 정한론(征韓論)
② 일본의 외교 문제
③ 견한사신(遣韓使臣)의 교체(交替)
④ 견청사신(遣淸使臣)의 질문
⑤ 견한(遣韓)대사(大使)와 조의(朝議)의 궤열(潰裂)
⑥ 대원왕(大院王)의 은퇴와 쇄국(鎖國) 문제
제3장 일본과의 수교(修交)
제1절 왕비(王妃)의 책립(冊立)과 민씨(閔氏) 융성
(1) 왕비(王妃)의 책립(冊立)
① 대원왕(大院王)의 실책(失策)
② 왕비(王妃)의 책립(冊立)
(2) 민씨(閔氏)의 융기(隆起)
① 이조 말의 외척(外戚)
② 민씨의 융성
③ 외척(外戚)의 연맹(連盟)
④ 이원왕(李院王) 반동책(反動策)
⑤ 대원왕(大院王)의 낭전(浪轉)
제2절 강화도 사건과 일·한수호조약(日韓修好條約)
(1) 강화도 사건
① 청국(淸國)의 친일(親日) 권고
② 운양호(雲楊號) 사건
(2) 일·한수호조약(日韓修好條約)
① 일본의 견사(遣使)
② 한정(韓廷)의 응의(凝議)
③ 조약 체결과 그 의의
제3절 개진파(開進派)의 대두
(1) 보수파와 개진파(開進派)
① 개명(開明)의 대세(大勢)
② 민씨(閔氏) 가문의 개명주의(開明主義)
③ 개진파(開進派)의 융성
(2) 개진파(開進派)와 두 인접국
① 개진파와 일본
② 개항(開港) 실행
③ 개진파와 청국(淸國)
제4장 임오의 난(壬午의 亂, 1882년)
제1절 동란(動亂)의 원인과 폭동
(1) 동란의 원인
① 보수파의 반동(反動)
② 민씨(閔氏)에 대한 반감(反感)
③ 국정(國政)의 타락
(2) 폭동
① 병사(兵士)의 격앙(激昻)
② 제(諸) 권신(權臣)의 학살
③ 왕비(王妃)의 피신
④ 개진파(開進派) 습격
⑤ 대원왕(大院王)의 집정(執政)
제2절 제물포조약 체결
① 일본 사신(使臣) 내한(來韓)
② 조약 체결
③ 조약의 요점과 그 영향
제3절 청국(淸國)의 내정 간섭
(1) 청국의 대한(對韓) 정책
① 이홍장(李鴻章)의 대한책(對韓策)
② 청국의 기우(杞憂)
(2) 청국의 파병
① 왕비(王妃)의 구원
② 청병(淸兵) 내한(來韓)
③ 대원왕(大院王)의 압송(押送)
④ 제물포조약과 청국
(3) 정무(政務) 간섭
① 속국정책(屬國政策)의 관행
② 반동(反動)
제5장 갑신의 난(甲申의 亂, 1884년)
제1절 사대당(事大黨) 대(對) 독립당(獨立黨)
① 왕비(王妃)의 청(淸) 세력 영합
② 청(淸)·한(韓) 국경(國境) 사건
③ 청·한 섭외(涉外) 상황
④ 일본의 독립 부조책(獨立扶助策)
⑤ 소장(少壯) 정치가의 외력(外力) 인연
제2절 청병(淸兵)의 폭거와 일본의 대항
(1) 폭동 발발
① 우정국(郵政局)의 축하연
② 소장파(少壯派)의 정권 장악
③ 청병(淸兵)의 폭거
(2) 독립당(獨立黨)의 차질(蹉跌)
① 국왕(國王)의 위기
② 일본 공사(公使)의 철수
③ 독립당 패배
④ 이노우에(井上) 대사(大使)의 내한(來韓)
⑤ 서상우(徐相雨) 등의 도일(渡日) 사명(使命)
제3절 텐진조약(天津條約)
① 경성(京城)의 일(日)·청(淸) 주둔군 문제
② 텐진조약(天津條約)
③ 대원왕(大院王) 귀국
제6장 여러 외국과의 교섭
제1절 구미 열강과의 수교(修交)
(1) 미국·영국·독일 그 밖의 국가들과 수교
① 미국과 수교
② 영국과 수교
③ 독일과 수교
④ 그 밖의 제국(諸國)과 수교
⑤ 구미인(歐美人)의 조선 탐험
(2) 러시아와의 수교
① 묄렌도르프와 러시아
② 통상조약(通商條約)
③ 청·러 양국의 각축
제2절 거문도 사건
① 영국과 러시아의 동침책(東侵策)의 충돌
② 거문도 점령
③ 항의 및 철수
제3절 청 세력의 쇠락
(1) 한국과 청 관계의 동요(動搖)
① 모화(慕華) 사상이 점차 소멸
② 청국(淸國)의 대한책(對韓策) 긴축(緊縮)
③ 한국과 청국의 괴리 및 민씨(閔氏) 집안의 배신
④ 묄렌도르프·데니 등의 배청영로(排淸迎露)
(2) 일본 세력의 부식(扶植)
① 일(日)·청(淸), 동등한 실세로 승인
②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어책
③ 일·청 세력 부식(扶植)의 차이
④ 방곡령(防穀令)
⑤ 청 세력의 쇠퇴
제7장 일·청 전쟁
제1절 동학당(東學黨)의 봉기
(1) 국정(國政)의 문란
① 중앙의 정비와 지방의 쇠미
② 지방 폭정(暴政)
(2) 동학당(東學黨)
① 동학당의 내력
② 동학당의 주장
③ 토벌
④ 김옥균(金玉均)의 암살
⑤ 동학당과 정쟁(政爭)
제2절 청국(淸國)의 파병과 일본의 대항
① 청병(淸兵) 파견 요구
② 청국의 출병(出兵)
③ 일본의 출병(出兵)
④ 일(日)·청(淸)·한(韓)의 상의(商議) 및 영국과 러시아의 중재
제3절 전쟁의 경과와 국정 혁신
(1) 선전포고 전의 쟁투(爭鬪)
① 일본의 혁폐(革弊) 권고와 경복궁 충화(衝火)
② 풍도 해전(豊島海戰)
③ 아산 육전(牙山陸戰)
(2) 선전포고와 청(淸)의 패배
① 일(日)·청(淸)의 선전포고
② 일(日)·한(韓) 수교(修交)
③ 평양(平壤) 및 해양도(海洋島) 전투
④ 이노우에(井上) 공사(公使)의 내한(來韓) 및 조선 보빙사(報聘使)
⑤ 청국(淸國) 내부의 전쟁
제4절 강화(講和)와 조선
① 청국의 청화사(請和使) 파견
② 일본의 승리
③ 일·청 강화(講和)
④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과 조선
제2기 독립시대
(이태왕(李太王) 32년(1895년)부터 이태왕 광무 9년(1905년)까지, 11년간)
개설
제1장 국정 혁신 및 그 역전(逆戰)
제1절 갑오(甲午) 혁신
① 개혁의 장애 요건 제거
② 혁정(革政)의 서언(誓言)
③ 소위 독립의 의의
제2절 국정 개혁의 역전
① 김학우(金鶴羽)의 암살
② 박영효(朴泳孝)와 민씨(閔氏) 가문
③ 이준용(李峻鎔)의 유형(流刑)
④ 삼국 간섭의 영향
⑤ 독립 기념제
⑥ 박영효의 망명(亡命)
⑦ 이노우에(井上) 백작의 정쟁(政爭) 조정
⑧ 미우라(三浦) 공사(公使)의 내임(來任)
제3절 을미의 변(乙未의 變, 1895년) 및 을미의 변 이후의 정국(政局)
① 한국 조정(朝廷)의 혼란(混亂)과 배신
② 훈련대(訓練隊)의 격분(激憤)
③ 대원왕(大院王)의 입궁(入宮)과 흉변(凶變)
④ 대원왕파(大院王派)의 집정(執政)
⑤ 흉변(凶變)에 대한 일본의 조치
⑥ 소요(騷擾)와 경성외교단(京城外交團)
제2장 한정(韓政)의 친러(親露) 경향
제1절 국왕의 러시아 사관(使館) 파천(播遷)과 친러 정책
① 건원(建元) 및 치발령(薙髮令)
② 국왕의 러시아 사관(使館) 파천(播遷)
③ 제신(諸臣)의 살육
④ 일본 세력의 침체
⑤ 고마츠(小松)·베베르 협상(協商)
⑥ 러시아 세력의 활동 왕성해지다
⑦ 모스크바협약(協約)
⑧ 러시아·미국인 등의 이권(利權) 획득
제2절 독립 형식의 정비
① 국왕의 환궁(還宮)
② 러시아 교관(敎官) 및 고문
③ 독립 형식의 정리
제3절 독립 옹호 운동과 영국·러시아의 각축
(1) 국권 옹호 운동과 미국
① 러시아 세력에 대한 의구(疑懼)
② 독립구락부(獨立俱樂部)의 조성
③ 미국의 러시아 견제
④ 독립운동의 부진(不振)
⑤ 미국 모방의 유행과 실망
⑥ 반동(反動)
(2) 영국과 러시아의 각축
① 러시아 방침 변경
② 러시아 관리(官吏) 임용 강청(强請)
③ 영국의 항의
④ 러시아 제2 협상과 열국(列國)의 동방발진(東方發辰)
⑤ 러시아의 완화 정책
제4절 러시아의 대한(對韓) 정책의 진척
① 영국과 러시아의 분쟁과 일본의 대한책(對韓策)
② 파블로프 공사(公使)의 부임(赴任)
③ 북청사변(北淸事變)과 한국
④ 러시아 프랑스의 사업
⑤ 일본 및 러시아와 이용익(李容翊)
⑥ 마산·거제도 불양여(不讓與) 계약
⑦ 많은 러시아인이 내한(來韓)
⑧ 일·영 동맹
⑨ 러시아·프랑스 동맹의 의의
⑩ 경제 상태와 제일은행권(第一銀行券)
⑪ 경의철도(京義鐵道) 기공(起工)
⑫ 이용익의 실세(失勢)
⑬ 러시아, 만주 철병(撤兵) 문제
⑭ 제일은행권의 통용 거절
⑮ 러시아의 용암포(龍岩浦) 침입
ꊉꊘ 열강(列强)과 용암포 문제
제3장 일러 전쟁
제1절 개전(開戰) 전의 대외 정책
① 국외 중립정책
② 중립정책과 러시아
③ 일본과 러시아 교섭의 절박
④ 국교 단절
제2절 개전(開戰)과 일·한 친교(親交)
① 선전포고
② 일·한 동맹과 대사(大使) 부임(赴任)
③ 압록강 전투와 그 영향
④ 한로국교단절(韓露國交斷絶)
⑤ 친일 정책
⑥ 군정(軍政) 시행
⑦ 재정(財政) 및 외교 고문(顧問) 용빙(傭聘)
⑧ 전승(戰勝)과 일·한 대사(大使)의 내왕
제3절 강화(講和)와 한국(韓國)
① 강화회의
② 강화(講和)와 한국의 행동
③ 한국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지위
제3기 일본 보호정치 시대(이태왕 광무 9년(1905년)부터 이왕(李王) 융희 4년(1910년)의 6년간)
개설
제1장 일·한 제(諸) 협약(協約)의 성립
제1절 일·한협약과 행정고문
① 국정 개혁의 권고와 일·한협약
② 행정 각 고문의 취임
③ 행정상의 제(諸) 개혁
제2절 보호협약 확립
① 한국의 세(勢)와 정당
② 이토(伊藤)의 내한(來韓)과 제안
③ 협약 체결
④ 민심의 동요
⑤ 보빙대사(報聘大使) 파견
제2장 통감부(統監府) 개설
제1절 남한(南韓)의 폭동
① 협약에 대한 오해
② 최익현(崔益鉉)·민종식(閔宗植)의 반대
제2절 통감부의 시정(施政)
① 통감부 개설(開設)
② 왕궁곽청(王宮廓淸)
③ 서정(庶政) 개혁
④ 경제 재정의 정리
제3절 한국 정부의 내홍(內訌)
① 한국 정계(政界)의 암류(暗流)
② 각신(閣臣)에 대한 박해
③ 당국(當局) 탄핵
④ 당국(當局) 경질
제4절 헤이그 밀사 사건
① 외국인의 운동
② 밀사(密使)의 도구(渡歐)
③ 헤이그의 밀사(密使)
④ 밀사(密使) 사건과 한국 조정(朝廷)
제5절 정미정변(丁未政變)과 그 영향
① 각의(閣議)의 결정
② 양위(讓位)
③ 경성의 폭동
④ 양위식(讓位式)과 음모
제3장 통감 정치 진행
제1절 신협약(新協約)의 체결 및 군대의 해산
① 정변(政變)과 신협약
② 보호권의 확장
③ 정변 때의 군대
④ 군대 해산
⑤ 군대 해산 때의 경성 폭동
⑥ 지방 폭동
제2절 한국 조정(朝廷)의 일본 신뢰
① 새 황제 즉위식
②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
③ 새 황제의 창덕궁(昌德宮) 천이(遷移)
④ 왕세자의 일본 유학
⑤ 한국 황제의 순행(巡幸)과 이토 히로부미(伊藤) 공(公)
⑥ 이토 히로부미의 퇴임
제3절 간도(間島) 문제의 해결
① 문제의 유래
② 해결
제4장 일·한 병합(倂合)
제1절 병합의 기운(機運)
① 한국 정치의 혼란
② 관서(官署)의 점폐(漸廢)
③ 이토 히로부미(伊藤) 공(公)의 조난(遭難)
④ 조난과 한국
⑤ 조난과 내외 여론
⑥ 한국 정당(政黨)의 태도
제2절 병합(倂合)의 실시
① 통감(統監)의 경질
② 새로운 통감 부임 후 한국의 동정
③ 병합
제3절 병합 후의 신정(新政)
① 신정(新政)의 방침
② 신정과 일반민(一般民)
③ 총독부(總督府)의 설치
제5장 문명적 시설 유입
제1절 행정 및 사법
① 제1기 : 갑오(甲午) 혁신 전의 행정·사법
② 제2기 : 일·러전쟁 이전의 행정·사법
③ 제3기 : 일·러전쟁 이후의 행정·사법
제2절 교통운수
① 도로
② 철도·전차
③ 항만(하천 교통)·등대
④ 우편
⑤ 전신·전화
제3절 산업
① 농업(목축·양잠)·식림(植林)
② 어업
③ 공업·광업
④ 상업·무역·세관(稅關)
⑤ 금융·은행
제4절 교육 및 종교
① 학제(學制) 및 학교의 설립
② 각국의 포교(布敎)
제5절 의료 및 위생
① 포교(布敎)와 의료
② 보호 정치와 의료·위생
제6절 구제진휼(救濟賑恤)
① 보호 정치 전의 상황
② 보호 정치 후의 상황
<출전 : '朝鮮半島史要項細目', 연도미상, 미국 하와이대학 헤밀튼도서관 소장>
2. '조선반도사'의 내용
1) '조선반도사' 1편 원고(상고 부분)
상고(上古) 삼한
개설(槪說)
조선 민족이 조선 반도에 거주하게 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그 선주민(先主民)의 유무(有無) 및 이들과의 관계 역시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현재 조선 민족의 본간(本幹)을 이루는 한종족(韓種族)이 조선 반도 남부에서 서부에 걸쳐 정주(定住)하였으며, 이른바 예맥족(濊貊族)은 중국 대륙에서 조선 반도 동쪽, 즉 함경도·강원도 지역에 걸쳐 정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맥족은 조선 반도의 구석진 지역 일부 지방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데 불과하며, 조선 반도의 주요 주민은 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이들 민족 중에는 마을 단위로 모여 이루어진 집단에서 성장하여 원시적인 소국가(小國家)를 형성하였고,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조선·진번(眞番)·임둔(臨屯)·진국(辰國) 등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임둔 하나만이 예맥족이 세운 국가로 여겨지는 것 외에 다른 국가들은 한종족이 세운 국가들이며, 그 중에서 조선은 서북(西北) 지역에 자리하여 중국 대륙과 교통
하기에 가장 편리한 지역이어서 다른 국가보다 훨씬 앞선 발전을 이루었으며, 또한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조선에는 은(殷)나라의 현인(賢人) 기자(箕子)가 왕실의 선조라는 전설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그의 나라를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부른다.
또한 근세(近世)에 이르러 태고단군(太古檀君)이라는 신인(神人)이 태백산(묘향산(妙香山))에 내려와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는데, 기자가 오자 나라를 기자에게 맡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는 전설도 있어, 이 가상의 조선을 기자조선과 구별하여 왕검조선(王儉朝鮮) 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도 부른다.
단군은 존칭이고 왕검(王儉)은 그 이름이다.
이른바 기씨조선(箕氏朝鮮)은 본래 한강(漢江) 이북(以北) 대동강(大同江) 방면에 있어 중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기씨조선과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연(燕)나라 사이에는 다양한 교섭이 있었으며, 연나라가 강대해지자 조선을 침략해 속국(屬國)으로 삼아 그 남쪽에 있던 진번에까지 영향력이 미쳤으나, 진(秦)나라가 들어서면서 요동(遼東)의
변방(邊方)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 때에 패수(浿水)를 경계로 조선을 한 제국(漢帝國)의 연왕국(燕王國)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의 북쪽 경계에 살면서 마침내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진번 등을 복속시켜 왕검(王儉,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후의 조선을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고 하여, 기씨조선·단군조선과 구별하였으며, 또한 이들 세 조선을 이씨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이라고도 부른다.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손자인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 한나라 무제(漢武帝)에게 멸망당하였다.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모두 조선이라는 국호(國號)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국가였다.
기씨조선은 한종족(韓種族)이 세운 조선이지만, 위씨조선은 중국에서 이주해 온 한민족(漢民族)이 세운 국가로, 그 백성은 대부분 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무제(漢武帝)는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멸망시켰는데, 이 지역과 새로이 한(漢)나라의 위세에 복속한 지역에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위씨조선의 땅에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고, 그 밖에 남쪽의 한민족(韓民族) 땅에는 진번군(眞番郡)을 설치하였으며, 동북쪽의 예족(濊貊族) 땅에는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고, 동쪽에는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한민족(漢民族)이 주로 살던 조선 땅에 설치한 낙랑군은 다스리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한예(韓濊)가 살던 조선 땅에 설치한 군현(郡縣)의 통치는 매우 어려움을 겪다가, 불과 27년 만인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에 진번·임둔 등 두 군을 폐지하고 현도군을 만주(滿洲)로 옮겨, 조선 반도에는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북쪽에 있는 부여족(扶余族)에서 나온 고구려가 지금의 동가강(佟佳江) 유역에서부터 압록강(鴨綠江) 유역까지 차지하여 낙랑을 압박하였는데, 이무렵부터 조선 반도의 남쪽에서도 한민족이 흥기(興起)하기 시작하였다. 후한(後漢) 시대의 한종족(韓種族)은 마한(馬韓)·변한(弁韓)·진한(辰韓) 등 세 나라로 크게 구별되나, 그 속에
많은 소국(小國)이 있었으며 개 중에는 다른 나라에 명령을 하는 세력자도 출현하여 자신들의 평화를 유지하였다.
마한은 충청·전라 지역에 자리해 있었으며, 마한과 낙랑에 살던 한인(漢人)들은 지속적으로 왕래를 하였으나, 후한 말에 이르러 많은 낙랑인들이 마한 또는 그 밖의 다른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그 남쪽 지역은 황무지가 되었다.
이에 당시 요동(遼東)에서 할거하던 공손씨(公孫氏)는 조선 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여 이 지방에 대방군(帶方郡)을 새로이
설치하여 유민(遺民)들을 모았다.
이때부터 조선 반도에는 한인(漢人)의 군(郡)으로 낙랑·대방 등 두 개의 군이 자리하게 되었으나, 이 무렵에 부여족의
일족으로 만주에 거주하던 자들이 남하하여 마한의 땅에 들어가 이 나라에 정주하면서 훗날 백제국을 세우는 기반을
다졌다.
고구려가 북쪽에서부터 낙랑을 침략하자 마한 종족은 남쪽에서 대방을 침입하였는데, 3세기 후반에 이르러 백제는 신흥(新興)의 기세가 불타오름으로써 그 부근의 마한 제(諸) 소국(小國)을 병합하여 매우 강력해지면서 한산(漢山)에 전도(奠都)하였으며 대방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낙랑·대방은 고구려·백제의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쇠퇴하였으며 결국 대동강 하류에 겨우 잔류하다가 건흥(建興) 원년(313년)에 이르러 조선 반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남쪽에는 이보다 앞서 신라가 진한의 한 나라 중에서 일어나 점차 강대해졌으며, 신라·백제 사이에 가라제국(加羅
諸國)이 있었지만, 고구려·신라·백제라는 삼국이 대체로 정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 민족의 역사는 그 선조인 한민족(韓民族)의 역사와 이어져 있으며, 위씨조선·한 4군의 역사는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의 역사에서 생략해야 하겠지만, 이들의 역사는 한민족 그 자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 역사를 풀어갈수 없으므로, 여기에 기술하는 것이다.
백제는 그 왕실(王室) 및 일부 귀족은 부여족의 후예이지만, 그 백성은 마한인이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마한인이 부여족인 왕을 받들었던 셈이다.
신라는 진한을 통일하였고, 가라(加羅), (임나(任那))는 변한족이므로, 이들은 조선 민족의 나라이지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부여민족이 대륙을 근거지로 하여 조선 반도 북쪽에 나라를 세우면서 시작된 나라로, 후대에 이르러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국인(國人)은 대부분 발해(渤海)로 들어갔던 반면, 신라로 들어가는 자는 적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조선 민족의 역사를 이루는 요소가 아니지만, 이를 조선 민족의 역사 속에서 다루지 않으면 복잡한
당대(當代)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본서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자 한다.
제1기 원시시대(原始時代)
개설
원시시대란, 태고(太古) 때부터 한(漢)나라가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망시킨 시기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조선 민족의 주체인 한민족(韓民族)에 관한 문헌이 매우 희소하여 겨우, 조선·진번(眞番)·진국(辰國)의 이름이 나와 있는 정도이다.
기씨조선(箕氏朝鮮)은 구분해 보아야 마땅하며 이를 한민족(韓民族)의 국가로 보더라도 기자조선이 멸망하자 그 백성들이 흩어져 남쪽으로 이동하여 같은 민족인 마한(馬韓)에 섞여 들어가 그 역사가 막을 내림으로써, 후대에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다.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경우에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한종족(韓種族)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
또한, 한종족(韓種族)에 대해서는 원시시대였음을 면할 수 없다.
종래 역사가 중에는 일종의 편견에 빠져, 조선 민족이 전 민족 일 국가를 형성하여 출현하여 나중에 분열시대(分裂時代)로 들어갔다가 다시 통일된 국가를 만들었다고 오해해, 출현 이후 다년간 일 왕국(一王國)을 구성하였다고 보고 이 왕국을 왕실(王室)의 변이(變移)에 따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구분하여 이를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또는 기자조선을 마한 왕국(馬韓王國)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밖에 이런저런 계승설(繼承說)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사실을 탐구하기 위해 이미 본편의 개설에 그에 대해 설명하였듯이, 기원전 3세기, 다시말해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에는 이미 조선 반도에 정주(定住)한 조선 민족 중에 조선·진번·진국 등으로 불리는 비교적 큰 원시적 국가가 조선 민족이 형성한 많은 부락(部落)적 국가 사이에서 출현하였으며, 이들 중에 조선은 서북쪽에 한민족(漢民族)과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반도 서북쪽으로 이주해 온 한민족(漢民族)에게 가장 먼저 멸망되었다.
이 조선은 사실 조선 민족의 일부분이 그 북부에서 형성한 한 소왕국(小王國)에 불과하다. 조선 민족 역사의 본편은 이 당시 조선 반도의 남부에서 많은 소국(小國)을 건설하고 있었으며, 한종족(韓種族)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기자조선은 그 중에서 세상에 알려진 한나라에 불과하다.
이조시대 관찬(官撰)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고조선 및 4군(四郡) 삼조(三朝)를 외기(外紀)로 편성하였다.
기자조선과 삼한은 외기(外紀)에 넣어서는 안 되지만, 그 밖의 것을 외기(外紀)에 넣은 것은 식견이 있는 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군·기자의 전설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본서에서는 먼저 이에 대해 기술한 다음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개국(開國) 전설을 기술하고 고조선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제1장 조선 개국(開國)의 제(諸) 전설
제1절 기자 개국(開國) 전설
기원전 4·5세기 무렵에는 중국인이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북쪽을 열양(列陽)이라고 부르며 그 곳에 와 사는 경우가
다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강 남쪽에는 조선이라 불리는 국가가 있었는데, 이 국가의 자취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난 점이 없다.
이 국가는 대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중국인의 국가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동강 남쪽에 있던 한민족(韓民族)의 한 소국(小國)이 일찍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당시 여러 국가 중에서 비교적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동방(東方)의 여러 지방 중에서 가장 개화(開化)된 국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중국에는 은(殷)나라 말의 현인(賢人) 기자가 이 국가의 제후(諸侯)로 갔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 전설은 아마 은나라 사람의 후예인 송(宋)나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서(漢書)'에는 은나라가 쇠퇴하면서 기자가 은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서 조선 백성에게 예의(禮義)·전잠(田蠶)·직작(織作)을 가르쳐, 낙랑·조선의 백성이 범금 8조(犯禁八條)를 지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단, 8조(八條)의 범금(犯禁)은 한(漢)나라의 군(郡) 설치 이전의 풍속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때에 '위략(魏略)'이라는 사료에는 기자의 자손에 대해 조금은 자세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 설(說)은 아마 낙랑의 한인(漢人)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 설에 따르면, 기자의 후예는 조선후(朝鮮侯)로서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하였으나, 연(燕)나라가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던 무렵부터 기자의 후예 역시 왕호를 스스로 칭하였으며, 진(秦)나라 때에 기자의 후예 중에 부(否)라는 왕이 있었고 부의 아들은 준(準)이라고 하였으며, 준의 치세 때, 아마 한(漢)나라 초에 연나라 출신의 위만이라는 사람이 다수의 중국인과 함께 본국의 난을 피해 도망해 왔다는 것, 준이 지배하는 지역의 서쪽에 거주하다가 마침내 이들을 이끌고
준을 공격하여 준의 나라를 멸망 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에는 기자조선에 8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이를 가르쳐 대문이 없어도 도둑이 생기지 않았다 고한다.
그 후 40여 년 후 조선후 준이 호칭을 왕(王)을 바꾸었으나, 연나라 출신의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자신의 관인(官人)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한(韓)의 땅으로 들어가 스스로 한왕(韓王)으로 칭하였지만, 그 후 절멸(絶滅)하여 한인(韓人)들이 그의 제사를 모셨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른바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게 멸망된 것은 한(漢)나라 혜제(惠帝) 때의 일일 것이다.
그 후 100여 년이 흘러, 작성된 '사기(史記)'의 「조선전(朝鮮傳)」에는 기자에 대한 기사가 한 자도 등장하지 않는데, 훨씬 후대에 나온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에 기자의 기사가 상세히 나와 있다는 것은, 이들 사료들이 낙랑(樂浪)·대방
(帶方)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전기(傳記) 혹은 전설을 바탕 자료로 하여 저술되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상세한 것이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제2절 단군전설(檀君傳說)
조선에는 단군전설(檀君傳說)이 있다. 기자조선(箕子朝鮮) 이전에 단군의 조선이 있었다는 설(說)이다.
단군 전설은 고려의 원종왕(元宗王) 때에 편찬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내용이 현존하는 문헌 중 가장 처음 나오는 기사이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고 주(注)를 달았다.
'위서(魏書)'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계셔 아사달(阿斯達)-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했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했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바로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堯)와 같은 때였다고 한다.14)
'고기(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이른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계셔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 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다―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천왕(天王)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백 60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桓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桓雄)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기(忌)한 지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밑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왕검은 요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平壤城)에―지금의 서경(西京)―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겼다. 그곳을 또는 궁(弓)―혹은 방(方)자로도 되어 있다―
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한다. 그는 1천5백 년 동안 여기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아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일천구백여덟 살이었다고 한다.15)라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다.
14)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 無萊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15)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
'삼국유사'는 '위서(魏書)' 및 '고기(古記)'에서 수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위서'는 물론 그 밖의 중국 원대(元代) 이전의 사료에 실린 단군과 관련한 기사는 전무하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두 군데에 단군과 관련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 하나는 「왕력편(王曆篇)」에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이 단군의 자손 ‘단군지자(檀君之子)’라고 나와 있는 기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동명왕 출생담의 주(注)에, 「단군기(壇君記)」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이 기사를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주몽을 낳았다 한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인 것이다.16)라고 나와 있는 기사
이다.
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주자(注者) “찬자(撰者)와 다른 인물이다”가 부루(夫婁)와 주몽을 이모형제(異母兄弟)로 기술한 것은 이부형제(異父兄弟)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이모형제로 기술한 것은 우선 주몽이 단군의 자손이라고 실려 있는 왕력편(王曆篇)의 기사 및 '삼국유사'가 다른 곳에 인용한 '고기(古記)'에 “天帝降于訖升骨城乘五龍車立都號王國號北扶余自稱名解慕漱生子名夫婁云云” 이라는 기사 등으로 생각 되며 부루의 아버지인 해모수(解慕漱)는 다시 말해 단군의 아들이자 주몽의 아버지라고 해석하였고, 서하(西河) 하백(河伯)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있는 우발수(優渤水) 하백(河伯)을 각각 다른 하백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조선 세종왕대(世宗王代)에 완성된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의 ꡔ지리지(地理志)ꡕ(‘世宗王實錄地理志’로서 실록에
수록되었다)에는 평양(平壤) 조(條)에, '단군고기(檀君古記)ꡕ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
(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왕(東扶餘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17) 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一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芝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不見日光一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無與爲婚 故每於神檀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檀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則 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其未實) 都平壤(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 忽山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16) 檀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三國史記)則解慕漱私河伯女 而後産朱蒙 檀君記云 産子名曰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삼국유사'에 주(注)를 단 사람의 단군기(檀君記)라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책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의 단군 전설이 원시적인 이미지인 반면, '지리지(地理志)'의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이를 크게 개정하고 이에 수식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 전설이 황당무계하여 볼 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조선의 학자들도 설명하였으나, 그 전설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단군왕검의 단군은 존칭이고 왕검은 이름이다. 왕검은 후대의 위씨조선(衛氏朝鮮) 시대 평양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이 이름은 한(漢)나라의 군현시대(郡縣時代)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고구려가 이를 평양으로 개명(改名)하여
그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이 이름에 따라 평양의 지기(地祇)에 왕검선인(王儉仙人)이라고 칭하는 자가 있어서, 옛 지명인 왕험(王險)은 선인(仙人, 지기(地祇))의 이름이었는데 여기에 훗날 단군의 존칭을 붙였던 것이다(선인의 이름은 험(險)이었는데 이를 검(儉)으로 고친 것이다).
왕검선인은 훨씬 예전부터 평양을 개창(開創)한 지기(地祇)로서 그 지방에 전해지던 존재였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보다 앞선 시대의 전설적 신인(神人)을 본체(本體)로 한 것인데 아마 북부여(北扶余)의 해부루(解夫婁)였을 것이다.
이 원시적인 전설은 신인(神人)을 아버지로 신수(神獸)를 어머니로 하는 북방 제(諸) 민족의 시조(始祖) 출생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존숭(尊崇)된 다수의 선인(仙人)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으나, 고려 인종왕(仁宗王)
무렵부터 고려 고종왕(高宗王)에 이르는 사이에 단(檀)이라는 존칭을 붙여 점차 존숭(尊崇)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원종왕(元宗王)·충숙왕(忠肅王) 무렵까지는 단군으로 보다 왕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伯山神檀樹下 是謂桓雄天王 令孫
女飮樂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余濊與貊皆
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謂東扶余王 檀君與堯高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乙未入阿斯達爲神今文化縣九月山.
제3절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개국(開國) 전설
개국신인(開國神人)인 단군의 전설은 본래 한민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우리 한민족은 북방 민족이 가지고 있던
야비한 개국전설과 전혀 다른 매우 고상한 고유의 개국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 신화는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파편으로나마 남겨진 그 전설을 살펴보면 일본 민족의 그것과 유사하여 실로 성스러운 것이다.
신라는 개국 초기 6부(部)를 통해 형성되는데, 6부의 각 시조(始祖)는 각각 그 땅의 산상(山上)으로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6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紫卵)에서 태어난 혁거세(赫居世)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으며, 왕비 알영(閼英)은 성스런 우물가에 나타난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탈해왕(脫解王)은 왜국(倭國)의 동북쪽에 있는 다파나(多婆那) 왕후(王后)가 낳은 알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김씨왕(金氏王)의 시조 알지왕(閼智王)은 계림(鷄林)에 내려온 금궤(金櫃) 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락국(駕洛國)의 개국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 가운데 하나에서 태어난 존재로,
그 땅의 구간(九干)에게 봉대(奉戴)되어 국가를 열었으며, 그의 왕비는 바다 건너 왕국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그 밖의 다섯 개 가락국(駕洛國) 왕의 시조는 이 황금알 중 하나씩에서 탄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섬나라이면서 개국 이래 매우 오랫동안 그 왕통(王統)을 이어오며 개국전설을 비교적 완전하게 후세에 전해주어 마침내 사관(史官)들이 기록할 수 있었던 탐라(耽羅, 제주도)의 전설은 가장 주의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태초에 한라산(漢拏山)의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이름의 혈(穴)에서 세 명의 신인(神人)이 용출(湧出)하였다.
첫째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여, 유렵(遊獵)을 하고 피의육식(皮衣肉食)을 하였는데, 하루는 검붉은 진흙으로 봉해진 나무함이 동해 바닷가로 떠내려 왔다.
그리고 자줏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 한 명도 함께 왔다.
나무함을 열자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명과 망아지와 송아지 및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는 일본의 사자(使者)이다. 우리 왕이 이 처녀 세 명을 낳았다.
서해 중악신(西海中岳神)이 아들 3명을 보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었다.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처녀 세 명을 호위해 이곳에 오게 하였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시오.”라고 하였다.
사자(使者)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명이 나이에 따라 이들을 아내로 맞아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결한 개국전설은 한종족(韓種族) 고유의 것이며, 또한 제국(諸國)에 이러한 종류의 전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전혀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기 그지없다.
제2장 고조선
제1절 조선 반도의 원시 주민(原始住民)
한민족(韓民族)이 조선 반도에 들어오기 이전의 원시 주민(原始住民)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후대까지 전라(全羅) 서쪽 제(諸) 소도(小島)에 살던 주호(州胡)는 어느 정도 잔존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조선 반도에서도 석기시대(石器時代)의 유물이 발견되지만, 이를 사용한 민족이 어떤 민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조선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 4세기에 이미 한민족이 조선 반도에 거주한 이후의 일이다.
현재의 조선인(朝鮮人)은 한족(韓族)이 예족(濊族, 좁은 의미의)을 융합하여 부여족(扶余族) 일부와 일본족 및 중국족
일부가 섞여 이루어졌지만, 그 대부분은 한민족의 후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대하(大河)가 그 밖의 소하소류(小河小流)를 담아낸 것으로 비유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과 일본 민족은 태고(太古)에 한 민족을 이루어 같은 한 지역에 거주하다가 대이주(大移住)의 결과, 하나는 조선 반도에, 또 하나는 해도(海島)에 정주(定住)하여 그 거주를 달리하면서 많은 시간이 지나, 하나는 한민족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민족이 되어 구별을 낳았으나, 종족(種族)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두 민족이 조선-일본 단(朝鮮-日本團: Korea-Japanese group)을 이룬다는 사실에는 동서(東西)의 학자들도 의견이 일치한다.
한·일 상대(上代) 동역론(同域論)은 따르기 어렵지만 두 민족이 동종(同種)이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설(異說)을 주장하지 않는다.
조선어와 일본어는 세계 여러 언어 중에서 서로 가장 비슷한 언어이며, 용모나 체질 면에서도 또한 상대(上代)의 토속(土俗) 면에서도 이렇게까지 유사한 종족은 찾아보기 어렵다.
언어가 동일계(同一系)라는 점이 국토의 인접이나 교통의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민족이 일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접촉과 교통을 한 중국·만주 지역의 민족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만약 단순히 단어를 비교해 보면 조선어의 대부분은 중국어이지만, 그 어법(語法)을 보면 일·한 두 언어는 완전히 동일하여 그 단어 역시 두 민족 고유어에 대해 그 변이(變移)를 연구하면 동일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두 민족의 언어는 근저에서부터 동일한 것이어서, 교통의 대세가 단어를 움직이더라도 언어의 근저를
이루는 어법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민족이 태고에 같은 생활을 하였다면 어느 곳에 살았는지, 어떤 이유로 조선 반도 또는 해도(海島)로 이주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점이 없다.
남쪽에서 북진한 것인지, 북방에서 남진한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부여·예맥 등 북방 민족과의 관계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상대(上代, 중국 전국시대) 극동(極東)의 상황을 고찰하면 요수(遼水, 요하(遼河))·약수(弱水, 송화강(松花江)) 사이에
부여 종족이 거주하였는데, 주변 민족보다 우수한 문화를 보유하였다.
부여와 같은 종족인 예맥은 압록강(鴨綠江) 상·중류 유역에서 조선 반도 동부 중앙까지 거주하였으며, 조선 반도 서북
대동강(大同江) 북쪽은 열양(列陽)이라는 한(漢)·한(韓) 두 민족이 혼재하여 살던 땅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남쪽에 예맥 서쪽에서 남쪽에 걸쳐 이른바 표조선(表朝鮮)의 땅에는 한민족이 거주하였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본섬에는 일본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여·예맥·한(韓)·일본은 민족상 커다란 일단(一團)을 이루지만, 부여·예맥은 다시 말해 통고사족(通古斯族)으로 이른바 만주족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들과 한(韓)·일본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으며 지금 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동서(東西)의 인종학자가 인정하는 이설(異說) 없는 인종수표(人種樹表)를 만들어야 한다(킨 씨 300쪽).
제2절 조선 반도의 제(諸) 소국(小國)
기원전 3세기 말에 대동강(大同江) 남쪽의 표조선(表朝鮮) 땅에 있던 한민족(韓民族)은 많은 부락으로 나누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부락의 추장(酋長) 중 강대한자는 부근의 부락에 세력을 뻗치고 있어 여러 부락을 결속한 국가의 형태를 이룬 자도 있었다.
이들의 결합력은 매우 약하였으므로 이들 나라의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지리적 칭호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국가 중에 가장 오래 전에 성립한 국가는 비교적 발전된 모습이었으며 또한 중국과 인접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던,
조선으로서 이미 언급한 이른바 기자조선국(箕子朝鮮國)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진번(眞番)과 함께 연(燕)나라의 침략으로 그 속국(屬國)이 되었다가 훗날 진(秦)나라에 복속(服屬)하였다.
조선의 남쪽, 지금의 충청(忠淸)·전라(全羅) 지역에 진번국(眞番國)이 있었으며 이 국가는 한민족이 세운 소국(小國)이었다.
이 국가는 만주 지역에 있던 예맥이 세운 나라라는 설(說)도 있지만, 그 설은 잘못된 설이다.
나아가 경상(慶尙) 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다. 이상은 한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또한 함남(咸南)·강원(江原) 지역에는 임둔국(臨屯國)이 있었으며, 연(燕)나라·제(齊) 나라의 상선(商船)이 이곳의 제국(諸國)을 왕래하면서 그 이익을 취하였다.
그 밖에 한(韓)·예(濊) 중 많은 부락적 소국의 이름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한국(韓國)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설명하겠다.
제3절 위씨조선(衛氏朝鮮)
조선국(朝鮮國)의 북쪽 열양(列陽) 땅, 다시 말해 대동강(大同江) 지방은 예전에 조선국의 땅으로 한종족(韓種族)의 거주지였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연(燕)나라 세력이 압박해 오면서 중국인·조선인이 혼재하여 거주하는 땅이 되어 연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나, 진대(秦代)에 들어와서 이 지방의 주민을 퇴거시켜 공지(空地)로 만들어 두 민족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秦)·한(漢) 시대에 일어난 대란(大亂)으로 인해 연·제(齊)·조(趙)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으로 피난해 오는 자들이 크게 늘었는데, 한(漢)나라는 조선 반도 땅이 멀어 지키기 어려웠던 까닭에 요동(遼東)의 고새(故塞)를 수리하여 패수(浿水, 성천강(成川江)일까?)를 경계로 조선 반도의 일은 한(漢)나라가 봉건(封建)한 연나라에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高祖) 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匈奴)와 손을 잡자, 연나라 사람 가운데 위만이라는 자가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호복(胡服)을 하고 패수(浿水)를 건너 망명해 와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연나라·제나라의 망명자까지도 그를 따라 조선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며 그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한민족(漢民族) 주권의 국가를 세우고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왕검은 오늘날의 평양으로 사실 열양(列陽)의 중심지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위만의 왕국이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아마도 열양은 지리적 칭호였던 조선 중에 포함된 곳이었을 것이다.
한(漢)나라는 위만을 외번(外蕃)으로 삼아 새외인(塞外人)을 통해 변방을 지켰던 것이므로 달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나, 이 나라에 한민족의 이주가 크게 증가하여 조선 민족을 압도하면서 이 나라도 한민족의 나라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은 병위(兵威)와 재물을 마련하여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진번(眞番)·임둔(臨屯) 등도 위만에 복속하면서
그의 영토를 확장하여 아들에게 전해주었으며 그의 손자인 우거(右渠)의 대에 이르렀다.
우거의 대에 그 영토는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위령(威令)은 멀리 한(漢)·예(濊)의 일부 지역에까지 미쳤다.
위만 이래 한(漢)나라 조정(朝廷)에 입조(入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번이나 그 주변의 진국(辰國) 등이 상서(上書)하여 천자(天子)를 알현하러 가는 길을 막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한(漢)나라에서는 문제(文帝) 때에 이미 조선을 정벌할 것을 상서한 자가 있었으나, 문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영무(英武)한 무제(武帝) 대에 들어서면서 한나라는 북방에 흉노를 위압(威壓)하고 남쪽으로 남월(南越)·동구(東甌)를 복속시켰으며, 흉노에게 대타격을 가하여 한인만대(漢人萬代)의 안녕을 얻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그 주변국인 조선을 정벌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18년을 거치는 동안에 한나라는 서역(西域)을 다스리고 남월(南越)을 평정하자, 조선 경영에 착수하였다.
원봉(元封) 2년에 사자(使者)를 조선에 보내 우거에게 귀복(歸服)을 권하였으나, 우거는 이를 듣지 않았으며 이로써
분쟁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수륙(水陸) 양군을 거느리고 조선 정벌에 나서, 육군은 요동에서 남하하였고 수군은 제(齊, 산동(山東))에서 발해(渤海)를 건너 열구(列口, 대동강(大同江) 어구)로 들어가 양군이 만나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는 시기를 놓쳐 이득이 없었다.
얼마 뒤에 한나라 군대는 왕검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왕인 우거는 성을 견고히 지키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일 뒤 한나라가 군대를 합하여 갑자기 왕검성을 공략하자, 조선의 장상(將相) 중에 항복하는 자가 나와 원봉(元封) 3년에 우거를 살해하고 항복해 왔다.
마침내 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하였다.
위씨(衛氏)가 나라를 세운 지 80여 년 만의 일이다.
제2기 한(漢) 영토시대(領土時代)
제1장 한(漢)의 군현(郡縣) 설치
제1절 4군(四郡) 설치와 그 강역
원봉(元封) 3년, 한(漢)나라가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망시키기 약 20년 전인 한(漢) 원삭(元朔) 원년 가을에 조선 반도의 동쪽에 있던 예(濊)의 군주 중에 남여(南閭)라는 자가 있었다.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배신하고 요동군(遼東郡)으로 가 한(漢)나라에 복속하였으며, 무제(武帝)는 즉시 그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여 교통로 개통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막대한 경비와 인력을 동원하였다가 겨우 1년 만에 도저히 성공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원삭(元朔) 3년 봄에 2차년도 공사에 착수해야 할지 중지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공사를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땅은 아마 함경남도(咸鏡南道)에 있었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때부터 이미 조선 반도에 군현을 설치하고자 하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봉 3년, 조선을 멸망시키자
항복해 온 장상(將相)과 왕자를 한(漢)의 내지로 옮기고 제후(諸侯)로 봉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땅 및 한나라의 위무(威武)에 새로이 복속한 땅에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현토(玄菟) 등의 4군(四郡)을 설치하고 태수(太守)·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1) 낙랑군 현(縣)18)은 위씨조선의 본지(本地)에 설치하였으며 그 군치(郡治)는 위씨의 고향인 왕검성(王儉城), 즉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
북쪽은 패수(浿水)로 요동(遼東)과의 경계로 삼았으며 지금의 평안(平安, 패수(浿水) 이북(以北)을 제외한다)·황해(黃
海)·경기(京畿) 제도(諸道)의 땅을 지배하였다.
이 지방, 다시 말해 열수(列水, 대동강(大同江))·대수(帶水, 한강(漢江))·패수(浿水, 성천강(成川江)) 유역, 특히 하류 유역은 한민족의 이주가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평안·황해 지역은 한민족의 땅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2) 진번군 15현(縣)은 낙랑군 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충청(忠淸)·전라북도(全羅北道)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삽현(霅縣)을 다스렸다.
삽협(霅縣)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진번 지방에 설치되었으므로 한종족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3) 임둔군 15현(縣)은 낙랑의 동쪽에 있었다.
일찍이 그 지방에 존재했던 임둔국(臨屯國)의 옛 명칭을 채용하여 이름을 지었다(임둔은 위씨조선의 초기에 멸망하였다).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북쪽에 설치하여 예종족(濊種族)을 지배하였으며 동시현(東暆縣)을 다스렸다.
(4) 현도군은 지금의 함흥(咸興) 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옥저(沃沮)·고구려 등을 지배하였다(옥저는 함경 땅에 있던 민족으로 고구려와 비슷하며 넓은 의미에서 예맥에 포함된다).
4군이 설치된 지역은 지금의 전라남도(全羅南道)·경상남북도(慶尙南北道) 및 함경북도(咸鏡北道)를 제외한 조선 반도와 압록강 중·하류 지역으로 보인다.
제2절 한(漢)나라 소제(昭帝)의 개혁
한(漢)나라는 무제(武帝)가 조선 반도에 4군(四郡)을 설치한 뒤 25년이 지나 소제(昭帝)의 시원(始元) 5년에 이르러
남쪽과 동쪽 경계 지역의 경영에 개혁을 단행하여, 남쪽에 담이군(儋耳郡)을 폐지함과 동시에 조선 반도에서는 진번(眞番)·임둔(臨屯) 등 두 군(郡)을 폐지하고 이 두 군의 땅의 대부분을 방기하여 토인(土人)의 자치에 맡겼으며 그 나머지
부(部)와 현도군의 영토 일부를 낙랑군에 병합시키고 현도군을 요동(遼東) 동쪽으로 옮겼다.
조선 반도에 사군(四郡)이 병존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25년 동안이었으며 이후에는 현토가 그 이름만을 남기고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조선 반도에서 사라져, 조선 반도에 남은 것은 낙랑군뿐이었다.
다만, 이 개혁은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그들의 통치에 반항하며 압박을 가해 오는 한(韓)·예맥(濊貊)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결과로, 군현 유지의 난이(難易)는 조선 반도에
18) 원문에 현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음.
거주하는 한민족의 많고 적음과 그 문화의 보급량에 비례하여, 한민족이 적게 거주한 곳이나 그 문화의 보급이 적었던 지역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낙랑군은 한민족의 군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개혁을 통해 남쪽에 진번의 몇몇 현(縣)을 병합하였고 동쪽에 임둔·현토의 몇몇 현을 병합하여 25개의 현이 되었다.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경우는 적었으나 동쪽으로는 지금의 강원·함남 지역에 7개의 현을 얻어 일본해에 이르렀는데, 그 변경에는 경비를 중시하였고 남부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두어 몇몇 현을 분할 통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대령(大嶺, 지금의 평안·함남 사이의 고개) 이동(以東)의 7개 현을 분할 통치하였다.
제3절 낙랑(樂浪)의 융성(隆盛)
전한시대(前漢時代), 낙랑군(樂浪郡) 25개 현(縣)의 지역에는 호(戶)가 6만 2천 8백 12 채, 구(口)가 40만 6천 7백 4십 8명이 있었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이 살기 좋았으며 본국 중국과의 교통은 요동(遼東)을 경유하는 육로 외에 편리한 해로도 있었다. 산동(山東)을 출발한 배는 열구(列口, 대동강 어구)로 왕래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였으므로 한(漢)나라의 완전한 한
지방이었고, 조선 반도의 한(韓)·예(濊) 등의 제국까지 통괄하여 평화로운 한나라의 군현이었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초, 한(漢)나라에서는 왕망(王莽)의 찬탈로 인해 천하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는데, 낙랑 지방 이북도 이 영향을 받아 건무(建武) 원년 토호(土豪)인 왕조(王調)라는 자가 군태수(郡太守)를 살해하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라고 칭한 지 6년이 되었는데, 건무 6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왕준(王遵)을 태수로 임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낙랑의 관민은 왕조를 죽이고 새로운 태수 왕준을 맞이하여, 낙랑은 즉시 평정을 찾았으며 후한(後漢)의 군현이 될 수 있었다.
광무제가 일반 변군(邊郡)의 도위(都尉)를 폐지하자 낙랑도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되었으며, 7개 현은 방기하여 그 제현(諸縣)의 예(濊)·옥저(沃沮) 종족의 거수(渠帥)에게 현후(縣侯)의 명호(名號)를 주어 그 지역의 자치를 맡겼다.
이리하여 옥저·예 민족의 7현은 낙랑에서 벗어나 낙랑은 18개 현이 되었다(이 무렵 탄열현(呑列縣)을 폐지하고 낙도현(樂都縣)을 설치하였다).
낙랑의 평화와 융성은 계속되었으나, 2세기 말,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에 들어서서 본국의 세력이 쇠퇴함과 더불어
낙랑의 위력도 쇠퇴하자, 남쪽에서는 한민족이 침범해 왔다.
동쪽과 북쪽에서는 고구려·예 등의 세력이 강대해져 고구려가 요동군(遼東郡)의 압록강(마자수(馬訾水)) 유역을 침범하
여 강 어구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였으며, 도중에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약탈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요동을 경유하는 본국과의 교통로도 빼앗기기에 이르렀지만 한나라 군현의 힘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낙랑의 백성들은 대부분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
한제국(漢帝國)의 정치가 문란해짐과 동시에 낙랑도 쇠퇴하고 문란해져, 낙랑인들 중에는 가족과 종자(從者)를 이끌고 한나라의 내지(內地)로 유랑하는 자까지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 쇠퇴의 결과, 둔유현(屯有縣, 아마 지금의 황주(黃州) 부근) 이남(以南)은 황폐해져 빈터만 남았다.
이 당시에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 지방에서 일본해 연안으로 나와 동해안을 따라 함경(咸鏡) 지역의 옥저와 강원(江原) 지역의 예(濊)를 거느림으로써 4군 병존시대(倂存時代)의 현토·임둔 두군이 완전히 고구려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다.
제4절19) 대방군(帶方郡)의 신설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 한민족(韓民族) 고구려가 강대해지자 위기에 봉착하였는데, 새로이 요동(遼東)에 할거하던 공손씨(公孫氏)가 그 경영에 착수하면서 이로써 형세가 크게 변하였다.
한(漢)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 한(漢)나라의 요동군 태수(遼東郡太守) 공손탁(公孫度)은 요동에서 자립하여 그
아들 강(康)을 거쳐 손자인 공손연(公孫淵)에 이르기까지 3대 50년간 이 지역에서 할거하여 매우 강성해졌으므로,
고구려도 서진(西進)의 세가 꺾여 오히려 일본 해안의 옥저·예 종족 지역에 세력을 뻗쳤음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이다.
그러나 공손강(公孫康 : 207~220년)은 낙랑 경영에도 주목하여 건안(建安 : 196~220년) 당시 낙랑의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에 대방군(帶方郡)을 신설(新設)하고 장사(將士)를 파견하여 유민(遺民)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한(韓)·예(濊)를 정벌하게 하자 옛 백성이 조금씩 나타났다.
대방군의 신설은 조선 반도에서의 한인(漢人)의 세력을 다소나마 회복해주는 듯하였다.
대방군은 낙랑군의 대방현을 다스렸으며 이 현은 대수(帶水) 다시 말해 지금의 한강(漢江) 하류 지역에 있었다.
이후 일본인·한인(韓人)에 관한 사건은 대방군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조선 반도의 한인을 지배하고 한·예를 제압하던 이 공손씨도 위(魏)나라의 경초(景初) 2년(298년)에 조위(曹魏)에게 멸망되었다.
이 해 아니면 전년(前年)에 위나라의 명제(明帝)가 비밀리에 낙랑·대방 등 두 군의 태수를 임명하여 요동을 경유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자, 두 군은 위의 군현이 되었다. 위나라의 위세는 한민족에게도 미쳐 멀리 일본의
귀에도 이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북방의 고구려가 점차 세력을 갈고 닦아 창궐(猖獗)하여 위나라의 군현을 침범하자 위나라는 정시(正始) 5년(244년)과 6년(245년)에 명장(名將) 관구검(毌丘儉, 관음모(毌音慕))에게 명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게 하였다.
19) 원문에는 제3절로 되어있어 오기로 보인다.
이 당시 낙랑·대방의 두 태수도 이에 상응하여 대령(大嶺) 이동(以東)의 예(濊) 가운데 고구려에 복속한 자를 정벌
하여 무위를 떨쳤다.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대방군이 신설된 이후 한인과 교통하면서 그 지배의 이익은 대방군에게
돌아갔다.
본래 한인을 통치하던 낙랑군은 이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므로 진한(辰韓) 가운데 8개국을 할양하여 그 교통 지배를 낙랑에게 주었는데 언어불통이라는 점을 틈타 통역 관리가 사익을 탐하는 일이 발생하여 한민족(韓民族) 주장(主長)이 격노하였다. 한인은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대방·낙랑의 두 태수는 병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러 나섰으나 대방 태수가 전사하여, 두 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위나라는 이듬해 정시(正始) 8년에 전년의 고구려 토벌 때에 그 국왕을 말을 달려 추격해 무명(武名)을 떨친 왕기(王頎)를 대방 태수에 임명하여 그 질서를 회복하게 하였다.
위나라는 한때 조선 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제5절20) 낙랑(樂浪)·대방(帶方)의 쇠멸(衰滅)
위(魏)나라 말, 진(晉)나라 초 무렵(3세기 후반)에 낙랑군(樂浪郡)은 고구려의 침탈을 심하게 받아 대동강 북쪽의 대부분을 잃고 불과 6개 현을 보유하였고 군치(君治)도 옛 왕검성(王儉城)을 떠나 조선현(朝鮮縣)과 함께 대동강의 남쪽 연안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방은 7개 현을 다스리고 있었으나 그 중 6개 현은 한대(漢代)의 낙랑의 영현(領縣)이었다.
이 무렵에 대방군 남쪽에 인접한 한종족(韓種族) 중에 백제국이 새로이 발흥하여 대방을 침탈하면서 두 군의 영토가
날로 침식하여, 그 이름은 진(晉)나라의 군현(郡縣)이었으나 실제로는 토호(土豪)의 나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3~4세 기 무렵 백제는 마침내 도읍을 한산(漢山, 광주(廣州))에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대방군의 통치 지역도 옛 대방현의 땅을 떠나 평안도 남부로 옮겨가 낙랑과 합치게 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써 낙랑의 이름은 소멸하였고 대방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이리하여 잔존하던 두 군(郡)의 기념물은 남진(南進)을 향한 기세에 불타오르는 고구려로 인해 즉시 병합되지 않았는데, 당시(4세기 초) 요동(遼東)에 모용씨(慕容氏)가 흥기(興起)해 고구려를 압박하여 고구려의 남진 기세를 제어하고 있어 잔존할 수 있었다.
당시 대방·낙랑의 잔민(殘民)은 대동강(大同江) 남쪽(아마 봉산(鳳山) 부근) 지방에 요동의 장통(張統)이라는 자를 수령(首領)으로 반(半)독립국을 세웠으며, 장통은 대방태수(帶方太守)라고 칭하며,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과 계속 교전(交戰)하였는데,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였다.
건흥(建興) 원년(313년) 그 땅을 버리고 그 백성 천여 가(家)를 이끌고 모용씨에게 귀속하여 요동으로 이주하였다.
20) 원문에는 제4절로 오기되었다.
이 후, 지리적 호칭으로서 낙랑·대방이라는 이름은 조선 반도에 남았고, 요동에는 두 군의 교치(僑治)가 있어 정치적 호칭은 남았으나 조선 반도에서 한(漢)나라 군현(郡縣)이라는 그림자는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실로 4군(四郡)을 설치한 지 422년이 흐른 뒤였다.
이 당시에는 남쪽에서의 한종족의 제(諸) 소국(小國)의 상황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
제3장 조선반도에서의 한인(漢人)의 문화 및 사회 상황
제1절 낙랑(樂浪)·대방(帶方)의 문화
낙랑·대방은 조선 반도에 있던 한민족(漢民族)의 군현(郡縣)으로, 그 문화는 완전히 한민족의 문화였다.
본국과의 교통은 이미 기술하였듯이, 요동(遼東)을 경유하는 육로 외에 산동(山東) 지역과의 해상 교통이 매우 편리하여, 대동강 어구에는 그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고 남쪽의 오(吳)·월염(越) 지역의 상선(商船)까지 왕래하게 되어, 교통이
불편하던 변군(邊郡)과는 많이 달라 문화면에서 본국의 문화에 전혀 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처럼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기는 하였지만, 이와는 무관하게 본국과 직접 영토를 접하지 않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본국에서 일어난 요란(擾亂)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아 다소 별천지같기도 하여, 오히려 중국 문물을
계승하고 유지하는 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 사람들을 살펴보면 후한대(後漢代)에 적어도 역(易)을 배우고 널리 중서(衆書)를 보았으며 또한 천문 기술을 좋아하였다고 하며, 훗날 관직에 나아가 치수(治水)에 큰 공을 세운 왕경(王景)은 낙랑군 염한현( 邯縣) 사람으로, 군(郡)의 삼로(三老)인 왕굉(王閎)의 아들이다.
한(漢)나라 동시현령(東暆縣令, 임둔의 치현(治縣) 나중에 낙랑으로 들어가다)인 연년(延年)은 부(賦) 7편(篇)을 저술하였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 등과 문명(文名)을 나란히 한 최인(崔駰)은 차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의 눈 밖에 나서
낙랑 장잠현(長岑縣)의 장(長)으로 가야 했다.
최인은 관(官)에 이르지 않고 돌아왔으나 이와 동일한 사정으로 의외로 문사(文士)들이 이 지역으로 가게 되어 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진(晉)나라의 장잠현령(長岑縣令)인 화기(華耆)는 영화(永和) 9년에 왕희지란정수계(王羲之蘭亭修稧)에 들어간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또한 낙랑설령(樂浪挈令)으로 불리는 낙랑군에서 널빤지에 새긴 제령(制令)은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낙랑·대방인의 분묘(墳墓)는 대동강 남쪽에서 황주(黃州) 방면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벽돌로 궁륭(穹窿) 모양에 광(壙)을 축조하였으며, 그 유물로는 부유한 자의 분묘에서는 옥기(玉器)·동기(銅器)·철기(鐵器)·칠기(漆器)·토기(土器) 등이 나왔고, 가난한 자의 분묘에서도 동경(銅鏡)·철제 무기·토기 등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공예(工藝)의 정교함과 생활의 풍요로움을 짐작하게 하며, 그 벽돌에는 가끔 명기(銘記)된 문자가 있기도
하다.
낙랑·대방의 문물은 결코 중국의 변방에 있는 군(郡)이라고 하여 달리 보아서는 안 된다.
낙랑의 유물인 금석(金石)에는 유명한 점선비(秥蟬碑)가 있다.
이 점선비는 후한 말에 점선현(秥蟬縣)이 신선(神仙) 평산군(平山君)에게 제를 올려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던 때의 비(碑)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제2절 낙랑(樂浪)·대방(帶方)의 사회 상황
조선의 낙랑은 본국인보다는 기자의 화평질박(和平質朴)을 하나의 이상국으로 보았다.
그 군민(群民)은 한인(漢人) 및 한인화(漢人化)된 한종족(韓種族)이었지만, 하층민의 토속(土俗)은 본국과 다소 변이(變移)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군(郡)에서 교통·무역의 이권(利權)을 지배하는 번국(番國, 진번(眞番) 지방) 야두미국(耶頭味國, 강원(江原)·함경(咸鏡) 지방)의 많은 해산물이 본국에 이 지역의 특산물로 알려진 점을 보아도, 이 군(郡)의 어염(魚鹽)에서 나오는 이익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 밖에 한(韓, 진한(辰韓)) 지방의 철(鐵)도 이 군(郡)을 거쳐 본국에 들어갔던 것이다.
한(漢)나라의 공예품은 한(韓)·예(濊) 및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수입되어 그 이익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문화는 본국과 다르지 않았지만 본국의 측면에서 새로이 개척한 변군(邊郡)이어서 후미진 곳에 있는 땅이라는 점은 면할 수 없는 곳이지만 거대한 부(富)를 가지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민족과 교섭도 하고 있어 토호(土豪)의 세력도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주민이어서 문지(門地)를 본국의 고명문(古名門)이나 고명족(古名族)에 붙여 정하여 과장된 호칭을 사용하며 소민(小民)을 이끌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각지에 근거지를 마련해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낙랑·대방의 쇠망기에 들어서자, 본국으로 귀국하여 다시 크게 집안을 일으키는 자도 있었다. 후위(後魏)의 문명황후(文明皇后) 풍씨(馮氏)의 어머니는 낙랑의 왕씨(王氏)였고, 후주(後周)의 명덕 황후(明德皇后) 또한 낙랑의 왕씨였다.
그리고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이 쇠망하자 그 토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소민(小民)과 노비들을 데리고 조선 반도 각지로 흩어지거나 멀리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향유하던 문화를 전파한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상대(上代)에 일본으로 온 한인(漢人) 대부분은 두 군(郡) 출신의 한인으로, 백제·신라·고구려, 특히 백제·신라에서 문예를 담당하여 박사(博士)·색인(色人)의 대부분은 같은 두 군의 한인 또는 그 후예였을 것이다.
제4장 한종족(韓種族)의 제국(諸國)
제1절 마한(馬韓)
한4군(漢四郡) 설치 당시에는, 이미 기술하였듯이 한종족(韓種族)이 주로 지금의 경기(京畿) 남쪽 충청(忠淸)·전라(全羅) 지방에 있어서 많은 부락적 소국(部落的小國)을 형성하였는데, 그 중 경기·충청 지방에는 진번국(眞番國)을 설치하여
한(漢)나라의 통치를 받게 한 이후 20여 년이 지나 이 군(郡)을 폐지하게 되면서 그 구속에서 벗어났다(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안에도 본디 조선국인(朝鮮國人) 계통에 속하는 한종족(韓種族)인자가 있었다는 것은 필연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중국화한 자들로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한종족(韓種族)은 토속(土俗) 면에서 마한(馬韓)·변한(弁韓)·진한(辰韓)의 세 종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이와 같은 구별은 전한(前漢) 무렵에 이미 존재하였다.
마한(馬韓)은 충청·전라 지방에 있었다. 진번국을 형성한 것은 이들의 북방에 있던 존재였을 것이다.
예전에 조선국을 건국하여 살던 것도 이들이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종족이었을 것이다.
3세기 초 무렵에 대략 50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삼국위지(三國魏志)ꡕ에 대국(大國)은 만여 가(家), 소국(小國)은
수천 가(家), 총 10여 만 호(戶)라고 한다.
총수(總數)로 보면 일국(一國) 평균 2천여 호(戶)가 되어야 하는데, 소국이 수천 가(家)라고 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50여 국을 들어보면,
(1) 원리국(爰裏國) (2) 모수국(牟水國) (3) 상외국(桑外國) (4) 소석색국(小石索國) (5)대석색국(大石索國)
(6) 우휴모국(優休牟國) (7) 신분고국(臣濆沽國) (8) 백제국(伯濟國)(9)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10) 일화국(日華國) (11) 고탄자국(古誕者國) (12) 고리국(古離國)21) (14)월화국(月華國) (15) 노람국(怒藍國)
(16) 월지국(月支國) (17)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18) 소위건국(素謂乾國) (19) 고원국(古爰國) (20) 막로국(莫盧國) (21) 비리국(卑離國) (22) 점리비국(占離卑國, 또는 점비리(占卑離)의 오류일지도) (23) 신흔국(臣釁國)
(24) 문침국(文侵國) (25) 구로국(狗盧國) (26) 비미국(卑彌國) (27)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28) 고포국(古蒲國)
(29) 치리국국(致利鞠國) (30) 염로국(冉路國) (31) 아림국(兒林國) (32) 사로국(駟盧國) (33) 내비리국(內卑離國)
(34) 감해국(感奚國) (35) 만로국(萬盧國)(36) 벽비리국(辟卑離國) (37) 구사오차국(臼斯烏且國) (38) 일리국(一離國) (39) 불미지국(不彌支國) (40) 반구국(半狗國) (41) 소첩로국(素捷盧國) (42)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43) 신소도국(臣蘇塗國) (44) 막로국(莫盧國, 또 나왔지만 위지(魏志)에 실려 있는 대로기술한다) (45) 고납국(古臘國) (46) 임소반국(臨素半國) (47) 신운신국(臣雲新國) (48)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9)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50) 일난국(一難國) (51) 구해국(狗奚國) (52) 불운국(不雲國) (53)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54) 원지국(爰池國)
(55) 건마국(乾馬國) (56) 초리국(楚離國)
등이다.
21) 원문에 (13)이 없다.
이들 제국 대부분은 그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그 중에 백제시대까지 그 명칭이 남아 있어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곳도
있다.
그 위치가 정확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곳은 지침국(支侵國)으로 충청도 당진(唐津) 지역이었다는 점, 아림국(兒林國)의 경우 전라능성(陵城) 지역이었다는 점, 벽비리국(辟卑離國)의 경우 같은 전라의 김제(金提) 지역이었다는 점,
건마국(乾馬國)은 마찬가지로 전라의 익산(益山) 지역이었다는 점 등으로 이 밖에 고찰하여 위치를 산정해야 할 곳이
적지 않다.
백제국(伯濟國)은 충청 지역에 위치 하였으며 백제(百濟)라는 국명(國名)의 유래가 되었다.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目支國)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이들 제국은 규모가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 지금의 두 군(郡)의 땅에 상당하는 규모에 지나지 않은 부락(部落)적 단체로, 국가의 체재를 완비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성곽(城郭)이 없는 읍락잡거(邑落雜居)의 형태로, 국읍(國邑)에 주수(主帥)는 있었지만 제대로 제어하지는 못하였다.
그 장수(長帥)의 우두머리를 신지(臣智, 질지(叱智), 주지(朱智) 등 여러 가지 글자를 빌려 쓰고 있다)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자리한 자를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한(漢)나라 때에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여 항상 조알(朝謁)을 하였는데, 한나라는 이들 제(諸) 신지에게 읍군(邑君)·읍장(邑長)이라는 관명(官名)을 주었고 인수(印綬)를 내렸으며, 위(魏)나라 때에 솔선(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伯)·장(長)·후(侯) 의 관호(官號)를 주었다.
이 관호를 얻어 순화(順和)된 자는 군(郡)에 공납(貢納)을 거두어 바쳤으며 그에 상당하는 것 이상의 대물(代物)을 얻어 이득이 많았다.
한(漢)나라는 이들 신지가 한나라에 순화하는 대가로 재물, 재화를 주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후기(2세기 말)에 들어서서 한종족(韓種族)은 예종족(濊種族)과 더불어 강성해지면서 한나라 군현제의 통제를 받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들 군현의 백성들이 유랑하여 한국(韓國)으로 들어오는 자가 많아, 낙랑 남부는 황폐해져 갔는데 공손씨(公孫氏)가 이 지역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병사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정벌한 이후 한인(韓人)은 다시 그 통제를 받기에
이르렀으나, 앞 장에서 기술 하였듯이, 정시연간(正始年間) 무렵에는 한인이 봉기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
하여 두 군(郡)의 태수(太守)와 전투를 벌여 대방 태수가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한나라의 군현과 교섭에 나선 곳은 주로 이 땅과 직접 접해 있는 마한인(馬韓人)으로, 마한은 다른 두
한(韓)보다 강대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였다.
그 후 마한은 다른 두 한과 함께 흥기(興起)하여 발전하는데, 그 북쪽 변방에서 부여종족(扶余種族)인 자가 군장(君長)으로 나서서 백제국이 갑자기 발흥하자 형세는 크게 변하여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마한의 풍속은 '위지(魏志)'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위지'에 따르면, 그 백성은 토착민으로 잠상(蠶桑)을 잘 하며 면포(綿布)를 짜며 성곽(城郭)이 없는 주거는 초옥(草屋)을 엮어 무덤형태의 토실(土室)을 위에 얹었고 모든 가족이 함께 살았다(원문에 ‘居處作草屋土室形如冡云云’ 이라고 나와 있어서, 초옥인 토실에 살았다는 것인데, 초옥 외에 토실이 있는 것은 지금도 조선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장례식에는 관(棺)을 사용하고 곽(槨)이 없었으며 우마(牛馬)에 싣는 풍속이 없었다.
우마는 죽음을 보내는 것으로 끝났다. 영주(瓔珠)를 재보(財寶)로 삼아, 옷에 달아 장식하거나, 목걸이로 걸고 귀걸이로 달았다.
금은금수(金銀錦繡)를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마한인은 강하고 용감하였으며 두발은 둘러싸서 과결(科結)을 만들었으며 포포(布袍)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운운(云云)
5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사람들이 모여 가무(歌舞)와 음식을 먹으며 밤새워 즐겨 잠을 자지 않았다.
그들의 춤은 수 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를 따라 가며 땅을 밟고 손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하면서 서로 응대하였다. 10월에 수확을 마치면 다시 5월처럼 즐겼다. 귀신을 믿었으며 각 국읍(國邑)마다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는 자 한
사람을 세워 천군(天君)이라고 불렀다.
또한 제국(諸國)에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고 불렀으며 큰 나무를 세워 영고(鈴鼓)를 달아 귀신을 달랬다.
망명자가 이곳으로 들어오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았다. 운운(云云)
북방에 있어서 한(漢)나라의 군(郡)과 가까운 제국(諸國)은 차례속(差禮俗)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죄수나 노비처럼 때로 문신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제2절 진한(辰韓)·변한(弁韓)
진한(辰韓)은 마한(馬韓) 동쪽에 있었으며, '위지(魏志)'에 변한(弁韓)과 잡거(雜居)하였다고 나와 있다.
진한과 변한은 견고한 단체는 아니어서 국가가 서로 혼재해 있었다.
그 국가의 경계가 뒤섞여 있어 각국의 위치가 혼재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진한과 변한이 경상도(慶尙道)에 있었고 진한이 동쪽에 변한이 서쪽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한은 처음에 6국(六國)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다시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변한도 12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을 합쳐 24국이었으며, 또한 제(諸) 소별읍(小別邑)도 있었다. 각 국에 거수(渠帥)가 있었으며 그 중 우두머리를 신지(臣智)라고 부른 것은 마한과 마찬가지이다.
'위지(魏志)'에 따르면, 그 다음 지위에 있는 자를 검측(儉側), 그 다음 지위에 있는 자를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또한 이들의 주장(主長)은 일반적으로 한기(旱岐)라는 존칭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韓)은 원주민과의 혼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국(大國)은 4~5천 가(家), 소국(小國)은 6~7백 가(家)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이씨조선 시대(李氏朝鮮時代) 경상도에 약 70여 군현(郡縣)이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이들 제국(諸國)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한은 기노(耆老)가 대대로 전해 주는 말이 있어 “예전에 7인이 진(秦)나라의 분쟁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도망해 왔는데 마한이 이들에게 동쪽 경계에 위치한 땅을 나누어 주어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진(辰)과 진(秦)의 발음이 같고 한 집안에서 한 말에 불과하여 이 설(說)을 채택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더욱이 한인(漢人) 망명자·피략자(被掠者)의 피가 다소 섞이는 것은 마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언어도 두세 단어가 우연히 진인(秦人)의 언어와 비슷하다는 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채택할 수 없는 설이라는 것은 다른 의견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진한의 12국은 '위지(魏志'에,
(1) 기기국(己祇國) (2) 불사국(不斯國) (3) 근기국(勤耆國) (4) 난미이미동국(難彌離彌凍國) (5) 염해국(冉奚國)
(6) 군미국(軍彌國) (7) 여담국(如湛國) (8) 호로국(戶路國) (9) 주선국(州鮮國) (10) 마연국(馬延國)
(11) 사로국(斯盧國) (12) 우중국(優中國)
으로 나와 있으며, 신라 왕국은 이 중 사로국(斯盧國)에서 발흥한 국가이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 및 벼농사가 잘 되며, 잠상(蠶桑)을 하고 겸포(縑布)를 짜며 우마(牛馬)를 타며 가취(嫁娶)의 예(禮)가 있으며 남녀의 구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로 죽음을 보냈는데 그 의미를 죽은 자가 하늘로 날아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철(鐵)이 나와 한인(韓人)·일본인 모두 이를 취하여 제시(諸市)의 매매에서 철(鐵)을 이용한 것은
중국인이 철을 이용하는 모습과 같았다.
또한 이를 낙랑·대방 두 군(郡)에 공급하였다고 한다.
진한의 풍속은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으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이의 머리에 돌을 얹어 이를 눌러 평평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한의 남녀는 일본인과 비슷하며 또한 문신을 새겼으며 보전(步戰)을 자주 활용하였으며 마한과 풍속이 같았다.
병장(兵仗)도 마한과 같았다.
변한(弁韓)에는 성곽(城郭)이 있었다. 의복이나 거처는 진한과 같았으며 언어·법·풍속이 서로 비슷하였으며, 귀신을
모시는 데에 차이가 있었다.
변한 역시 12국이 있었고 또한 왕이 있었다.
변한 사람들은 모두 체형이 컸으며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을 하였다.
폭이 넓은 세포(細布)를 만들었다. 법·풍속은 특히 엄격하였다고 한다.
변한의 12국은,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2) 접도국(接塗國) (3)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4) 고순시국(古淳是國)
(5) 반로국(半路國) (6)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 (7) 감로국(甘路國) (8) 구사국(狗邪國) (9) 주조마국(走漕馬國)
(10) 안사국(安邪國) (11) 독로국(瀆盧國) (12) 낙노국(樂奴國)
등으로('위지(魏志)'에는 진한 12국, 변한 12국 합쳐서 24국이라고 기재하면서 26국의 이름을 실었다.
단, 마연국이 두 번 기재된 것을 제외하면 25국이다.
앞에서 기술한 진한 12국, 변한 12국 외에 변군미국(弁軍彌國)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군비국이라는 나라도 진한에 있었다.
지금 이를 제외하고 변한의 12국 이름을 열거하였다).
구사국(狗邪國)은 가야(伽倻)로, 지금의 김해(金海) 지역에 있었으며, 안사국(安邪國)은 안라(安羅)로, 함안(咸安) 지역에 있었다. 국사(國史)에 나오는 임나(任那), 반도사에 나오는 가라(加羅)는 대체로 이곳 변한의 제국(諸國)에서 나온 나라들이다.
앞에서 서술한 삼한의 제국에는 각각 왕이 있었는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력한 왕 한기(旱岐)는 그 부근의 소왕(小王) 한기를 규합하여 대왕이 되었을 것이다.
각 삼한이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체를 이루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토속(土俗)이 같고, 아마 개국신화도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 그동안에 자종자족(自種自族)이라는 생각도 약간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위략(魏略)'에 왕망(王莽)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을때, 염사치(廉斯鑡)가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다면 진한이
정치상 하나의 개체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漢)·위(魏) 시대에 진한 12국은 진왕(辰王)의 통치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마한의 월지국(月支國, 目支라고도 한다) 왕이 진왕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진한은 한나라 초 진국(辰國)의 뒤를 이었으므로 진국이 이미 해체되었지만 그 이름이 여전히 남아 진왕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변한을 변진(弁辰)이라고 표현하면 진한과 제국이 더불어 같은 진국을 형성한 것이 되므로 자종(自種)인 진왕을 잃고 마한종(馬韓種)인 진왕의 통치를 받지 않은 제국이었다는 것인지.
진한·변한이 잡거(雜居)하였다는 것은 마한종 진왕의 지배를 받는 나라와 받지 않는 나라를 구별하는 데 지나지 않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인지. 한편, 마한 제국 중의 신지(臣智, 월지국(月支國)의 신지라고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는 우호신운견지보안사축지분신리아불예구사진지염(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離兒不例狗邪秦支廉)의 호(號)를 받았다는
내용이 '위지(魏志)'에 나와 있다.
이 말은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신운(臣雲)은 마한의 한 국명(國名)이고, 안사(安邪)와 구사(狗邪)는 진한에 있는 국명(國名)이다.
그렇다면 마한의 대신지(大臣智) 중에 이들 제국에 세력을 뻗어 거대한 국가의 출현을 보여주는 형세가 생기기 시작
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삼한의 종족은 지금의 조선 민족을 형성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삼한이라는 칭호는 결국 조선 반도의 지리적 칭호인 것이다.
이곳의 국인(國人)은 오랫동안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 말은 특수한 용어로서 마한·진한·변한 등 세 개의 한국(韓國)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선 민족의 국가라는 뜻이다.
제3절 일본과 삼한의 관계
삼한 민족과 당시 중국인이 왜(倭)라고 부른 일본 민족은 동일 종족에서 갈라진 종족에 지나지 않아, 예부터 도항(渡航)하기 어려운 대해(大海)가 가로놓여 있어도 이에 상관없이 빈번하게 교통하고 왕래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앞의 절에서 자세히 기술한 마한인(馬韓人)의 습속은 일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또한 '위지(魏志)'에 따르면, 이미 기술하였듯이, 진한의 남녀는 왜와 비슷하였고, 변한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독로국은 구체적으로 탁순(卓淳)이라고 하는 지방으로, 지금의 창원(昌原)·웅천(熊川) 지방에 있던 나라이다.
이 나라의 남쪽에 왜인이 거주한 나라가 있었다는 점은 조금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기사는 이 나라의 남쪽에 왜국(倭國)이 있었다는 사실을 마치 왜국이 육지에 있는 것처럼 잘못 기술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오류는 서로 오해를 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일본·조선 양쪽의 고분(古墳) 유물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한종족(韓種族)이 거주한 남부 조선의 유물은 북부 조선의 유물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유물과 완전히 동일한 종류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러한 경우에 부여 계통인 백제왕의 고분이 한종(韓種)의 땅에 있어 한종과 달리 북방계에 속할 수도 있다는 것은
특히 민족의 이동(異同)을 고찰하는 데에 주의를 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 반도에서 이러한 조사에 착수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조사가 더 진행되면 일본과 한(韓)과의
토속이 동일하다는 점은 더욱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쓰시마(對馬)·잇키(一歧), 두 섬의 주민(倭人)은 당시 배를 타고 남북으로 시장을 열어,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진한(辰韓) 지방의 철(鐵)을 일본인 역시 취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옛 전설에 호공(瓠公)·석탈해(昔脫解) 등 고사가 있다.
일본에도 아마노히보코(天日槍)·소나카시치(蘇那曷叱智) 등의 고사가 있다.
이들은 일본 조정(朝廷)이나 신라에 온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이어서 그 이야기가 전해진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밖의 지방에 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사적(史籍)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제4절 예(濊)
조선 반도에 살던 예종족(濊種族)은 이후 신라인과 혼혈을 이룬 경우가 가장 많았으므로 특별히 기술해 두고자 한다.
예(濊)는 맥(貊)이라는 말과 같으며 중국인이 만주 지방에서 조선의 동부에 걸쳐 거주하는 종족에게 붙인 이름으로,
부여·고구려 등 이 모두 이에 속한다.
예는 맥 가운데 하나처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두 용어는 혼동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이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다만, 본 절에서 예라고 말하는 것은 낙랑·대방이 지배하던 당시의 조선 동쪽에 살던 종족으로, '위지(魏志)'가 고구려·
부여 등의 국가 성립과 구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따로 「예전(濊傳)」을 구성한 예종족(濊種族)을 말한다.
조선 반도에서 예는 지금의 대령(大嶺) 동쪽에 위치하여 강원도에 있었다.
남쪽은 진한(辰韓)과 접하였고 북쪽은 같은 종족인 고구려·옥저와 접하고 있었다.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漢)나라에 복속하여 창해군(蒼海郡)이 설치되었는데 한때 폐지되었다가 무제(武帝) 때에 임둔군(臨屯郡)을 이 지방에 설치하였지만, 소제(昭帝)가 이 군을 폐지하였을 때, 그 북쪽 변방의 제현(諸縣)과 옥저의 함경남도 남쪽 변방에 있던 제현이 병합되어 7현(七縣)이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낙랑군의 동부도위(東部都尉)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토인들의 자치에 맡겼다.
한나라 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위대(魏代)에 그 일부가 낙랑에 다시 복속되었으나 일시적인 일이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한종족(韓種族)과의
사이에 오랫동안 뚜렷한 구별이 있었으나, 6세기에 들어와 신라에 복속되어 그 땅으로 편입되어 신라인에 섞였다.
일본해의 해산물이 예(濊)의 북쪽 변방에 해당하는 원산(元山)·안변(安邊) 지방에서 채취되어 한인(漢人)과 교역을 하면서 한인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이 지방의 예인(濊人)은 비교적 한인 문화(漢人文化)를 향유하면서 살았다. 한나라 이후, 대군장(大君長) 없이 제(諸) 주장(主長)이 한나라가 수여하는 관(官)에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 등의 호(號)가 있었으며 하호(下戶)를 통괄하였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칭한 그 인성은 착하고 아름다워 욕심이 없고 염치를 알았으며 구걸을 하지 않았다. 언어·법·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으나 의복은 달라 남녀 의복 모두 곡령(曲領)을 드러냈으며 남자는 폭이 수촌(寸)이나 되는 넓은 은화(銀花)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들의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히 여겨 산천 곳곳에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동성혼(同姓婚)을 허락하지 않았다(성(姓)이라는 글자에 오류가 있을 것이다).
질병을 기피하여 사망하는 자가 있으면 그 가옥을 버리고 새로이 집을 지었다.
마포(麻布)가 있었으며 잠상(蠶桑)을 알아 면(綿)을 만들었다.
별자리를 읽어 해마다 풍흉(豊凶)에 대한 예지(豫知)를 하였다.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겼으며, 항상 10월 절기를 이용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이를 무천
(舞天)이라고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받들어 신으로 모셨다.
각 읍락(邑落)을 서로 침범하면 생구(生口)·우마(牛馬)로 서로 벌책으로 삼았으며 이를 책화(責禍)라고 불렀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보상해야 하였다. 도둑이 적었다고 한다.
조선 사적(史籍)에는 강원도 강릉(江陵)을 예(濊)의 중심지로 보고 춘천(春川)을 맥(貊)의 중심지로 보았다.
그리고 강원이라는 지역에서 예와 맥이 대립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설(說)의 연원(淵源)은 당(唐)나라 고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今新羅北界溟州蓋濊之古國” “句麗之東南濊之西古貊地盖今新羅北朔州”라고 실린 데에 있다.
그러나 예와 맥은 완전한 구별되지 않으며, 또한 강원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대립하였을 리도 없으므로 이 설은 채택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