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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관한 베스도의 보고 25:13~22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 앞에 바울을 세움 25:23~27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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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가이사랴에 방문한 아그립바왕에게 총독이 바울 사건을 고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듣기 원하는 왕 앞에 그를 세웁니다. 총독은 자기가 살펴보니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과 달리 바울이 사형에 처해질 죄를 범하지 않았으나 황제에게 상소를 했기에, 죄목 없이 그를 보낼 수 없어 심문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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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관한 베스도의 보고 25:13~22
바울의 오랜 재판은 결과적으로 이방 왕과 총독을 비롯한 많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됩니다. 갈릴리 분봉 왕 아그립바와 누이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옵니다. 본문의 아그립바는 아그립바 2세로, 헤롯 아그립바 1세(12장)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마 2장)의 증손자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에 대한 고발 사건을 말합니다. 자신보다 유대의 상황과 법을 잘 아는 그에게 자문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베스도의 결론은 바울이 무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법에 반하는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복음이 세상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고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보고했나요?
과거나 지금이나 복음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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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 앞에 바울을 세움 25:23~27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크게 위엄을 갖추고’(23절) 바울을 만납니다. 아그립바는 왕이 입는 자주색 예복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썼을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복장이 남루하고 몰골이 초라했겠지만, 세상 왕보다 높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당하게 재판 자리에 섰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해 사안이 중대해졌기에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조언을 듣고 사전에 대책을 충분히 세우고자 합니다. 바울이 생애 말년에 거듭 심문받는 모습은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에 거듭 심문받으신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 집권자들로부터 무죄를 인정받는 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무죄를 인정받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베스도는 바울을 심문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밝혔나요?
화려한 권력자들 앞에서도 성도가 초라해지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절묵상:사도행전 25장 21, 25절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판결 받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베스도는 바울을 지켜주고 로마로 보내겠다고 결정합니다. 외면상으로는 힘 있는 베스도가 바울의 운명을 결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베스도를 통해 그 일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시작하시고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성도는 요란한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 권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지존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 시민인 동시에 세상에서 흠결 없는 말과 행실로 인정을 받아야 할 존재다. - 스콧 솔즈
오늘의 기도
하나님, 고난을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불평과 불만을 말하기보다는 환난마저도 영생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우신 자리라면, 그곳에서 당당히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45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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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스도 총독의 입장을 통해서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로마의 황제를 대변하는 베스도 총독이 상징적으로(아무런 힘이 없는) 유대의 왕인 아그립바에게 진정한 유대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바울의 죄를 논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죄목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처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죄목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한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여 질책하기 위하여 우리를 살필 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증거 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복음의 관심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8월21일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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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도는 바울에게서 어떤 혐의점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황제에게 상소할 자료를 얻으려고 아그립바 왕 일행을 배석시킨 자리에 다시 바울을 불러 세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22절 아그립바 왕의 방문을 계기로 바울이 총독과 왕과 고관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십니다. 유대 법을 잘 모르는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조언을 듣기 원했고, 아그립바는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말을 들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애써 찾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8,19,24,25a절 유대인들은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했지만, 베스도는 “악행의 혐의”를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언행이 베스도에게는 감흥을 주지 못했고, 유대인들에게는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때로는 환영을 받지만, 자주 무관심에 직면하고, 가끔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반응은 주님이 먼저 경험하셨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뒤따라 경험했던 선교적 행보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전도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합시다.
20,21절 바울은 비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의미 없는 죽음을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든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자라는 특권을 사용하여 신변 보호와 황제의 판결을 요청했습니다. 때로는 사지로 가야 할 때도 있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의미 없는 희생이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특히 돈과 시간을 들이는 일이 헛된 수고가 되지 않도록 잘 살펴봅시다.
25b-27절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상소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은 로마인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세상 법정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늘 법정에서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다룰 때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판단 기준을 더 신뢰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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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울의 무죄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이 부임인사를 하기 위해 오자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비록 유대인은 아니지만 헤롯대제의 손자로서 당시에 갈릴리 인근과 갈릴리 동쪽과 북쪽 지역을 통치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을 임명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 문제와 최근에 발생한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으로 새로 와서 잘 모르는 그는 아그립바 왕이 그에게 인사를 왔을 때 바울에 대한 재판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가 그 때까지 바울에 대한 조사에서 찾아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고 아그립바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Ac 25:18–19) 큰 소동이 일어난 사건이고 많은 유대인들이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큰 죄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하였는데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조사의 결론은 '바울이 죄가 없다는 것'과 바울이 문제가 있다면 '유대의 종교와 관련된 것과 예수라 하는 이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정도입니다. 바울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어떤 죄도 없었습니다. 베스도의 그러한 판단은 마치 이전에 예수님의 죄를 찾던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목을 찾지 못하였던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이 신앙인을 죽이려 하고 괴롭힐 때 많은 신앙인들은 '자신이 죄가 없는데 괴롭힘을 당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 죄가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더 복됩니다. 이 땅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이 땅은 많은 죄가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이 땅에서 살 때 바울이 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때로는 죄없이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죄없이 고난을 받을 때 죄가 있어 고난을 받는 것보다 죄없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2.바울의 위험
바울이 죄가 없는데 유대인들이 계속 그를 죽이고자 하였기에 베스도는 바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Ac 25:20–21)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산헤드린 사람들 앞에서 대답을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더 많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에 가는 것도 위험하고 로마에 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 베스도가 바울이 무죄라고 판단하는 것처럼 로마의 법으로는 죄가 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하였습니다. 로마시민으로서 정식으로 요청한 것입니다.
바울은 최악의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로마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울에게 재판으로서가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Ac 25:23) 베스도는 바울을 공식적으로 재판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과 천부장들과 가이사랴 도시의 유력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바울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울은 재판의 변론 형식을 띤 긴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 광경은 로마에서도 재현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들어가서 로마의 지도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로마에 가서 가택연금 형식의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때 로마 심장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로마의 심장부에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지금 바울에게 큰 위험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것같지만 실상은 당시의 행정수도인 가이사랴의 리더들에게 기독교의 실상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불식시키고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가서 또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일어나는 많은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힘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에 당황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주어진 순간순간에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황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불신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위험한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은 억울한 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신앙인의 길을 가는 것이 다소 억울할 때가 많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억울한 일에 원통해 하기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며 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이 아니라 로마에서의 재판을 요청한 것은 갈수록 태산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바울은 오랫동안 매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로웠을 때보다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효과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위험과 고난을 통해서도 더 효과적이고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는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일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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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위엄있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가 고관들과 함께 재판정에 들어오자, 바울이 심문을 받기 위해 그들 앞에 섰다는 말입니다. 아그립바가 가이사랴에 온 것은 베스도가 유대총독으로 부임했기에 인사차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식 사절이라는 말인데, 왕은 왕비와 함께 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 살 아래인 그의 누이동생과 온 것입니다. 그 문구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의 불미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버니게는 헤롯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의 딸로 태어난 왕족으로, 벨릭스 전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의 언니입니다. 그녀는 철학자 필로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을 하지만 성사되지 못하고, 삼촌인 칼키스와 결혼했지만 실패합니다. 당시 버니게는 두 번째 이혼한 상태입니다. 그녀는 이혼할 때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지 않고 오빠인 아그립바의 집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근친상간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와도 스캔들이 있었으나 여론의 악화로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가 오빠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것입니다.
어째건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섭니다. 마치 왕과 버니게의 노리갯감으로 선 것 같습니다. 이미 언도된 판결을 깨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시 법정 아닌 법정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실하게 변호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 왕과 당할 고난은 다름아닌 우리 주님이 미리 예고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바울을 꺼려 만나기를 원치 않는 아나니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님 앞에 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대로 움직이고, 이 광활한 우주도 정녕 태초의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믿는 사람들은 초조하지도, 서두르지도, 불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순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처럼 말입니다.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바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도 기뻐하실 것이고, 바울을 선택하시고 후회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의 공통적인 바람이 있다고 합니다. 후회할 것이나 인간관계를 진작 행하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될 것이고, 결단코 후회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편안하거나 고난 중에 있거나, 건강하나 그렇지 않거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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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베스도는 바울에게 죄가 하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도 보고했습니다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행25:25)
그렇게 죄목조차 없이 오직 정치적 이유로 2년 넘게 불법 구금하더니,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는 바람에 저들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행25:27)
그러나 황제 앞 항소문에 굳이 죄목을 써야 한다면 부활 전도죄라 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25:19)
결국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부활입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행4:2)
우리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 저들에게는 가장 나쁜 소식인 겁니다 그래서 믿지 못할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그래서 지금까지도 고집스럽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15:12~13)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복음과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고전15:14~15)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반드시 분명히 명백히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믿음의 경주에 힘차게 달음질하기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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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화려하게 차려 입고 와서 가이사랴 재판장에 들어오자 바울을 불렀고 베스도는 그간 진행된 재판의 내용을 포함하여 로마 황제에게 죄수로 보내기 위한 죄목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라고 간청하였지만 그는 로마 시민이기도 했으므로 죄목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결을 내릴 수도, 군사들을 동반시켜 로마까지 보내는 일도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수많은 이적을 베푸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의 거짓 고소로 “신성모독”이라는 누명으로 고초를 당하고 반란 살인죄로 죽어야 할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무죄한 존재가 대신
그 심판의 옷을 입고 그 수치와 고통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선포하는 이를
손가락질하고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모든 비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영광의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담대한 증인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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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시고
여호와의 담대한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힘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음성을 주심으로 인해 오늘도 감사함으로 나아갑니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손길을 굳게 붙들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석위의 믿음의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성령으로 채워주시고 기름부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그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 재해로부터 고통받는
주의 자녀들에게 위로와 긍휼을 베푸시고 회복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전심으로 경외함으로
날마다 주의 영광을 높이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바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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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가이샤라로 왔습니다. 아그립바왕은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세(27-100)입니다. 아그립바 일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고로 벌레먹어서 죽은 자입니다. 아그립바 이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A.D.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는 갈기스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었습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토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라, 트라코니티스, 아크라등을 맡겼습니다. 아그립바의 통치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 디베랴등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는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 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해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 관계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하여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버니게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습니다. 버니게는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티투스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니게가 오빠 아그립바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재판하지 않았음을 밝힘)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들이 거기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에, 베스도가 바울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왕 앞에 내놓고 말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를 문안한 것이 다소 길어진 듯합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왕에게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가 가두어 둔 바울이 있다고 합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발하여, 총독에게 유죄판결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2절),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들에게 로마 사람의 관례로서는,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 주지 않는 것이 전례라고 대답하였다고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됩니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3절) 법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 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과장하여 강조합니다.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자신이 가이샤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4절),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9절) 완전히 공정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아는 베스도)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고소한 종교지도자들이 가이샤라에 같이 왔으므로, 베스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베스도는 8-10일 지나서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습니다(6절).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를 유기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합니다. 이는 전임자인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됩니다.(24:22).
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베스도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바울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중대한 악행을 범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7절). 그들이 바울과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성전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하고 부활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24:21)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범죄자로 정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였습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의 부활만큼은 유대지도자들이 다 반대하였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자 안간힘을 썼을 뿐입니다(눅 23:4, 14).
(가이사에게 호소한 바울을 소개)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가 물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이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베스도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황제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원래 숭배하다 경외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B.C.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아그립바)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신도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도’에 해당하는 표현(also myself)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 증언한 것과 유사합니다.(눅 23:8)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눅 23:11),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베스도가 내일, 그의 말을 들어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바울을 데려옴)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엄을 갖추고 나와서, 고급 장교들과 그 도시의 요인들과 함께 공청실로 들어갔습니다.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위엄 있고 호화찬란하게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들이 뒤따라 화려하게 들어왔습니다. 접견실은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는 공청실을 뜻합니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왜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목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9:15).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고자 결정하였음)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 때에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 그들과 함께 계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나 여기에서나, 모든 유대 사람이 그를 이 이상 더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자신에게 재판을 청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을 송사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을 해하려 했던 군중들을 감안한다면(21:27-36)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사형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그러했고(23:29), 벨릭스도 마찬가지고.(24:22, 23), 지금은 베스도까지도 바울의 무죄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매번 바울이 석방되지 않은 사유가 있었지만(9-12절 23:20-2424:22), 그런 것들은 정당한 사유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판결의 지연이 바울을 로마로 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3장 11에 예수님이 바울은 로마에서 증언해야한다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주님이 섭리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스스로 황제께 상소하였으므로, 자신은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황제는 21절의 세바스토스와 다른 칭호입니다(21절 참조). 황제 퀴리오스는 주(Lord or His Majesty)라는 뜻의 칭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나 디베료는 이 칭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사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칼리굴라 때부터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도미티안 황제 때에는 공인된 칭호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를 새겨넣기까지 하였습니다. 본래 이 칭호는 통치자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점차 황제 숭배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은 퀴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습니다. 폴리갑은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아 순교당한 인물의 예이기도 합니다.
(황제에게 보낼 죄목을 찾고자 함)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베스도는 그와 관계되어 있는 일을 황제께 써 올릴 만한 확실한 자료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그를 신문해서, 내가 써 올릴 자료를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그립바 왕 전하 앞에 끌어다가 세웠다고 합니다. 베스도의 난처한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9절)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가 물었다가 바울의 항소를 받았습니다.(11절). 그런데 문제는 바울을 최고 법정인 로마에 보낼 때 함께 보내야 할 혐의 사실이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황제가 보아서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상소 재료도 없이 바울을 올려 보낼 수 없습니다. 그는 상소 재료를 찾기 위하여 이 청문회를 열기로 한 것이며 아그립바의 심문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천부장 루시아가 벧릭스에게 써보낸 것과 같은(23:26-29) 애매모호한 조서를 올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을 명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죄수를 보내면서, 그의 죄목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합니다.비합리적이고 정신나간 일이라 재판을 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바울의 공통된 소원을 배웁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와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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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는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바울과 얽혀지면서 드러내고 있는 그들의 속내가 바로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분봉 왕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라는 여인이 우선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또 한 사람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베스도 총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상황을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시각에서 자기가 이해한대로 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설명은 베스도가 바울과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가 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고 영향을 미쳐야할 세상에 관한 지평을 넓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통찰력을 얻게 할 것입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
1) 아그립바
우선 우리는 아그립바 오항과 버니게가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믄 만으로는 알 수 없는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배경을 아는 것은 이들의 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그립바 왕은 정확히 아그립바 2세입니다. 사실 당시 유대를 다스리는 것은 총독 베스도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왕이 또 있느냐? 이 왕은 원래 로마에 정복되기 전부터 있었던 왕입니다. 그러나 로마가 정복하면서 왕의 호칭은 남겨두고 왕권은 총독이 행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왕이로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왕입니다. 그래도 왕은 왕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아주 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통치하는 영역이 자꾸만 불어납니다. 뭐 사실 통치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이 아니겠습니까? 재판권이나 통치권은 갖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많은 애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주후 48년부터 70년까지 비교적 긴 기간을 로마 황제의 비호 가운데 왕으로 지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했던 관계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禮訪)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꺼리도 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세상사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역시 아그립바처럼 적당히 아부할 줄 알고 시세를 아는 사람이 대접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실력이 대접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맥이요, 금력에 의한 부정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연결고리를 붙잡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아그립바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그럽니다. 이것이 무슨 관심이겠습니까? 호기심이겠지요.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무슨 말을 하기에 유대인들이 흥분하는가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거기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무슨 새로운 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호기심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왜요?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세상에는 이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교만한 관심입니다.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관심이 아닙니다. 더구나 26:3절에 의하면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듣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야 하고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노하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흥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처럼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지요.
2) 버니게
그런데요? 오늘 본문에는 아그립바와 함께 온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굽니까? 버니게입니다. 이 여성이 아그립바의 왕비였다면 누가가 그냥 왕비라고 썼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그립바 부부라고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립된 사람으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그랬습니다. 참 이런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영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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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버니게는 벨릭스 총독이 그렇게 눈독을 들여서 세 번째 아내를 삼은 드루실라의 언니입니다. 벨릭스가 드루실라와 결혼할 때 아그립바의 딸과 정략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 한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아그립바 1세의 딸들이 드루실라와 버니게입니다. 그러면 아그립바 2세는 누구입니까? 그도 역시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드루실라 버니게 아그립바2세는 모두 형제간인 셈이지요. 그런데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오는 자리에 대동하고 왔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사건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원래 버니게는 철학자 필로(Philo)의 조카인 마르쿠소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자마자 죽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첫 번째 신랑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 후 그녀는 바로 삼촌인 헤롯과 다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도 그만 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20세였다고 합니다. 참 기구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인 아그립바 2세에게 와서 살았습니다. 뭐 이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관계가 정상적인 누나와 동생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그런데 소위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사람이 버젓이 누이를 대동하고 다니니 얼마나 말이 많았겠습니까? 더구나 버니게는 아주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이 찍혀서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다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이혼하고 동생에게 돌아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그립바 2세가 행차할 때 마치 부인처럼 함께 행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떻게 이해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여성의 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습니다. 로마 황후가 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성이 권력에 길들여진 아주 욕심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가 아그립바 옆에 붙어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말씀을 듣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스도의 이야기가 앞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 그럼 베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베스도의 설명을 통해서 본 세상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는 베스도에게 와서 여러 날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바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해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3년 전 이야기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마디가 더 첨부되어 있습니다. “정죄하기를 청하기에”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재판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처벌을 원했습니다. 그것도 신임 총독이라는 허점을 빌미로 말입니다. 참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 베스도는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판결을 내리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고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정직한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을 해 보니까 자신이 짐작했던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25절에서도 언급됩니다.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건 개요를 설명할 때 베스도는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그랬습니다. 확실히 베스도는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베스도는 걸리고 말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석방했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왜요? 자신은 아직 신임 총독인데다 원고들이 유대인들 가운데 너무 유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못 풀어주고는 다시 아그립바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던 본디오 빌라도 총독과 흡사합니다. 결국 베스도도 바울을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의, 진실! 이런 추상적인 것들보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당장에 정치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이어지는 말에 베스도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 하는 것뿐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종교라는 말 “데이시다이모니아스(deisidaimoniva")”는 데이시(deisi), 즉 숭배한다는 말과 다이모니아스(daimoniva")는 영어로 demon입니다. 즉 귀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종교라는 말은 아주 고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뭡니까? 귀신숭배입니다. 저들의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생명의 복음을 대하는 베스도의 태도였습니다. 베스도는 정직한 관리였지만 교만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에 별 관심이 없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복음을 귀신 놀음 정도로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귀신 놀음 가지고 지금 시끄럽게 한다는 경멸의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스도의 눈에는 사도바울과 유대인들의 분쟁이 귀신놀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미개한 나라의 미개한 종교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상에는 아그립바와 같은 사람, 버니게 같은 사람, 그리고 베스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그립바는 복음을 “한 번 들어보자. 아덴 사람들처럼...”이라는 입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버니게는 생존과 허영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불사할 수 있는 허영끼 많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베스도는 잘 먹고 잘사는 것에 길들여져서 자기들의 귀신놀음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토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 함께 상생의 길로 가야한다고 고상한 복음이나 되는 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는 문화를 연구하고 타락한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준비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그립바2세나 버니게, 베스도와 같은 인간형은 오늘도 존재합니다. 자기들의 귀신놀음이라고 하나님을 치부해 버리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찰스 콜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 수십년간 교회가 저지른 단 하나의 잘못은 기독교가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함으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져오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 삶을 바르게 꾸려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여기 우리 시대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그리고 교만한 베스도가 훨씬 더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른 바 현대판 아그립바와 버니게입니다. 베스도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는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거룩한 열정으로 다가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26장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요한복음 17장에 대한 핵심적인 한 마디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우리의 숙명입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 베스도는 모두 세상에서 만나는 인간 유형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다가갈 수 있으며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묵상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이들과 같은 모습이 없도록 깨어 근신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