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정의 「양파, 프랑스 혁명사」 해설 / 김효선
양파, 프랑스 혁명사
임재정
겨울엔
〈프랑스 혁명사〉를 읽지, 얼음이 키들대는 갈피마다
그때마다 가벼워서 무거운 눈이 내려
창틀 유리컵 속 앙파 뿌리가 유리창 가득 벌기도 하지
그래, 책갈피에 침이나 묻히며 겨울은
창밖을 엿보는 양파를 위해 입김을 불고 물을 받는 게 전부라서 좋아
어디서 온 바람인지 몰라 수시로 창문이 반응하지만 바람을 핑계로 담요를 덮고 키들거리며 퇴행을 해도 그만
그러나 출근을 하듯 정장을 하고
가끔 목마른 양파와 함께 냉장고까지 산책을 간다네
먼지 쌓인 구두 근처에서 잦아드는 길의 냄새, 아우성
순백의 눈처럼, 금세 더러워지기도 하는
혁명을 양파야 보았니? 창밖을 가혹한 겨울을
이파리가 솟아오른 만큼 양파는 쭈글쭈글해지고
누구든 밑동에 어떤 가려운 뿌리가 접 붙어 있대
끝끝내 유머로 가득한 양파의 혁명사를 읽어
우릴 둘러싼 껍질이 까르르 뒤집어지네
.........................................................................................................................................................................
감정 없이 우리를 울게 하는 사물이 있다면 아무렴, 양파다. 들키고 싶지 않은 눈물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가. 벗기면 벗길수록 눈물샘은 열리고 매운맛에 빨려든다. 눈에서 코로 연결된 감각기관에서 마침내 쏟아지는 폭포(과장해서)를 만나게 된다. 참 이상도 하지. 뭐, 그렇다 치고. 그런데 양파와 프랑스 혁명은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양파와 프랑스 혁명 사이의 거리는 태평양을 지나 대서양을 건너야 할 만큼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서로 이질적인 사물이 스밀 듯 말 듯 섞일 듯 말 듯 끌어안고 있다니.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건 프랑스 혁명이 있었던 때에도 양파는 있었겠지, 양파의 어떤 면이 프랑스 혁명사를 끌어들였을까 뭐 이런 상상력을 펼쳐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가까운 거리일수록 우리는 코웃음 치거나 감각을 작동시키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으니까. 이를 감각의 자동화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양파는 까면 깔수록 물질과 멀어진다. 표피에서 내피로 들어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넓어지고 확장되면서 양파는 이미 양파가 아니다. 나이면서 타자이면서 양파인 세계에 우리는 덩그러니 놓인다. ‘창밖을 엿보는 양파’처럼, ‘목마른 양파’처럼 ‘유머로 가득한 양파’처럼 각기 다른 시선을 갖는다. 여기서 양파는 시인이 만든 ‘구석’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석은 시인의 영혼이 숨어있는 곳 내지는 상상력을 지닌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구석이 필요하다. 고요와 고독과 몰입을 통해 ‘나’라는 타자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랑스 혁명사〉는 나의 구석에 놀러 온 상상력쯤 되지 않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시인은 자신이 의도한 것을 독자에게 들키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호해서 독자들이 속아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 시의 매력은 상상력이다. 이미지들이 저 따로 움직이며 혁명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는 게 그냥 다 혁명인 것처럼, ‘가벼워서 무거운 눈’처럼. 인생이 그렇지 뭐 하다가도 ‘까르르 뒤집어지’면서 곡예 하는 인생사처럼.
양파(2연)는 실존하는 양파에서 ⸻‘엿보는 양파’(3연)는 화자 혹은 나일 수도 ⸻‘목마른 양파’(5연)는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로 ⸻‘쭈글쭈글해진’ 양파(7연)는 타자(가혹한 겨울)로 인해 변화된 자아 ⸻‘유머로 가득한 양파’(8연)는 타자를 초월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양파는 하나의 집일 수도 있고 화자의 구석일 수 있다. 바슐라르는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 흔히들 말했지만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라고 했듯이 양파는 시인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우주적 공간이다. 북극 바다에 사는 곤鯤이 변해서 붕鵬이 되는 것처럼. <프랑스 혁명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는 ‘가벼워서 무거운 눈’으로 작용하는 곤이다. 그러나 양파는 현실의 삶을 끌어들여 혁명으로 치환하는 붕이다. 따라서 양파와 〈프랑스 혁명사〉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한 매개체이다. 양파는 가깝고 〈프랑스 혁명사〉는 멀어 보이던 것이 어느새 하나로 이어진다. <프랑스 혁명사>라는 낯선 이미지는 곧 양파와 근친의 관계로 변한다.
그러나 양파는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쭈글쭈글’해진다. 그것은 ‘어떤 가려운 뿌리가 접 붙어’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양파(나)는 누군가의 기생을 돕기 위한, 혁명을 위한, 하나의 접목대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사물에 자신의 심리를 투영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 듯 아닐듯하게 상상력을 가미한다. 그것이 양파의 일인 것처럼.
결국, 양파의 혁명사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블랑쇼의 말처럼 ‘예술 작품의 자율성은 어떤 해석이나 정의를 만나도 나름의 저항을 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이 시 역시 끝까지 저항을 놓지 않는다. 도대체 까도 까도, 까면 깔수록 양파는 어떻게 더 생의 눈물이란 말인가.
김효선(시인)
첫댓글 어쩌면 대부분의 시인은 자신이 의도한 것을 독자에게 들키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모호해서 독자들이 속아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 시의 매력은 상상력이다. 이미지들이 저 따로 움직이며 혁명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는 게 그냥 다 혁명인 것처럼, ‘가벼워서 무거운 눈’처럼. 인생이 그렇지 뭐 하다가도 ‘까르르 뒤집어지’면서 곡예 하는 인생사처럼.
김효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