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여행] 풍패지관(객사)..........32
.
.
[전주시 여행] 풍패지관(객사)..........32.전주여행 3번째 그동안은 오다가다 한번씩 들러서 구경하는 정도
의 전주 방문이었다. 그러나 마음먹고 전주 여행을 하리라 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
는 것이다. 오늘 그 첫 번째 방문지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때는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 가을이다.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이 오색단풍의 물결로 절정을 넘어서고 있는 시절이자. 자연이라는 큰 한폭의
수채화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시기이기도 하다.
.
유랑자는 전주객사의 주차장을 찾지 못해 골목을 돌다가 겨우 공사현장 옆 울타리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이동 객사앞에 다달았다. 그런데 아불싸 객사의 보수공사중 이어서. 안으로 들어갈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냥 밖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를 어쩌나. 제기럴....도로변의 화려한 은행나무의단풍이 무색할
정도로 이미 첫 방문지의 고색창연한 그림은 망처버린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패지관(豊沛之館)
이라는 커다란 글씨는 유랑자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
.
.
.
본시 풍패지관이라 조선시대의 객사다, 당시 지역을 통괄하는 감영이 있는 곳에는 그 지방을 방문하
는 손님을 접대하는 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전주 역시 객사가 있었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
며, 객사는 전주뿐 아니라 고려·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각 고을에 설치돼 방문한 외국 사신의 숙소나
연회장이나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묶게 한 일종의 관사를 말한다.
.
또한 감실에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있어 매월 초하루 와 보름에 왕이있는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린 장
소이기도 했다. 전주객사는 1473년(성종 4)에 전주서고를 짓고 남은 재료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
을 뿐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
풍패지관(豊沛之館)
.
전주객사 보물 583호로 지정(1975. 3. 30).
.
.
.
원래 가운데 에는 주관(主館)이 서있고 그 주관 양쪽으로 동익헌(東翼軒)·서익헌(西翼軒)·맹청(盲聽)
·무신사(武神祠)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1914년 일제때에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도로 확장공사로 좌
측의 동익헌은 철거되었다가 1999년에 복원했다. 현재는 주관과 서익헌, 동익헌, 수직사(守直舍)만 남
아 있다.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풍패지관은 1975년 3월 31일에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었다.
.
재미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전주 시민들 에게는 객사 주변의 상권이 발달함에 따라 만남의 약속 장
소로도 많이 쓰인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약속을 정할 때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으면 전주 한복판
에 자리 잡은 전주객사는 만인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했었다.
.
전주객사 원경 (1920년) 동익헌이 보이지 않음. 집집마다 나무가 많고, 다가동길을 제외하고는 아직 초가집이 많다.
.
1911년 전주객사, 1912년 금난부에 실려있는 사진임
.
공사 전 객사의 모습
.
암튼 수십 년간 전주시민의 약속 장소였던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의 전주객사가 고유 이름인 풍
패지관(豊沛之館)으로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객사의 이름이 원래 이름인 풍패지
관(豊沛之館)으로 다시 바뀌게된 이유가 있다.
.
풍패지관의 글씨를 쓴 주지번(?~1624))은 중국 명(明) 나라 신종(神宗) 때의 문인이자 서화가로 한림
원 수찬 등을 지냈으며, 신종 황제의 손자 탄생을 알리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1606년(조선 선조 39)에
정사(正使)로서 부사 양유년과 함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주지번의 자는 원개(元介), 호는 난우
(蘭嵎)이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畫)에 능했던 인물이다.
.
공사 전 객사의 모습
.
걷고싶은길 객사길
.
.
본시 ‘풍패(豊沛)’란 한나라를 건국했던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
는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이라 했으며 전주 객사는 ‘풍패지관’
이라고 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 글씨는 중국인 사신 공식외교 사절단 최고 책임자 주지
번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
그렇다면 왜?. 중국 사신은 한양에서 먼 이곳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규모
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에 살고 있던 호는 표옹(瓢翁) 또는 백련거사(白蓮居士)로. 경상도 관찰사와 병조참판을 지
낸 송영구(宋英耈1556-1620)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
으로 써준 것이다.
.
.
.
.
.
지금으로부터 414여년 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
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
그만큼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한양에서 전라
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스승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주
지번은 표옹의 도움으로 과거에 합격을 했기때문이다. 표용 송영구는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
狀館)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
.
.
.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장자의 남화경(南華經)
이었다.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천한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자(여비)가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청소년 거리
.
.
.
표옹(瓢翁)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조선의 과거에서 통
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몇
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그 후 이 청년은 과거에 합
격 하였고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 이었다. 전주 방문은 그 보답이었던 것이었다.
.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 도움의 손길을 받아 위
기를 극복하였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더욱이 생명과 더불어 인생의 삶을 구해 준 경우라면 평생
을 두고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한번 받은 은혜를 언제든지 잊지 않고 때가 되면 감사
의 마음을 표하며 어찌하든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
그 유명한 전주 콩나물국밥
.
.
.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은혜를 입는 그 순간에는 감사해 하며 ‘죽을 때까지 은혜를 잊지 않겠다’ 하지만,시
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 마음이 변질되는 것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주지번 같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는 것이이 오늘의 참다운 교훈이다.
.
암튼 객사는 1999년에 복원했다. 현재는 주관과 서익헌, 동익헌, 수직사(守直舍)만 남아 있다. 객사는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과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붙어져 있다. 주관의툇간(집채의
원칸살 밖에 붙여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에는 툇마루를 깔았으며, 칸마다 띠살문을 달았다.
.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지붕은 주관은 맞배지붕, 서익헌은 팔작지붕이다..전주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
으로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있었는데, 실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갯사 정
면에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진 커다란 현판은, 크기가가로4.66m, 세로1.79m, 초서체의 힘찬 필체다.
.
.
그 유명한 전주 콩나물국밥
.
.
.
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256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충경로 59
(지번)중앙동3가 1-1
홈: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2,05830000,3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