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충남 논산에 관촉사란 미륵부처로 유명한 절인데 이 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탈문(解脫門)이란 돌문을 지나야 했었습니다. 높이는 다섯 자, 폭은 두 자가 다 되지 못해서 그 문을 통과하려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아주 작게 해서 겨우 들어가고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미륵부처 앞에 나가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아주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작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지요.
내가 처음 일본의 대학들을 방문했을 때 나는 참으로 기이한 풍경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 질 수 있었습니다. 축소지향주의(縮小指向主義)의 일본문화를 입증하는 사례가 일본의 명문대학의 정문에 표징처럼 나타나 있었습니다. 대학의 정문이 1m도 채 안 되는 높이로 낮게 설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대학의 정문은 30-40m의 높이로 상아탑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학문을 하려는 대학생들은 그 정문도 높다고 생각하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오직 자신을 낮추고 그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표징입니다.
오늘 주님은 자신을 아주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하시면서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부자보다 더 쉽다고 말씀하시지요. 이스라엘 성전의 성벽에 ‘바늘귀’라는 아주 작은 문이 있는데 그 문은 관촉사의 해탈문처럼 작은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문으로 그곳을 통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낙타에 비유하셨으니 사람들이 놀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늘귀문을 정말로 바느질하는 바늘의 구멍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얼마만큼의 부자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계 인구의 50%가 기아로 허덕이거나 가난해서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데 나는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고 잘사는 수준의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서 몸무게가 70kg이나 나가는 부자로 아직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도 있고, 잘 살고 싶어서 노력하면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아주 인색한 부자입니다.
나는 명예로도 부자입니다. 대학에서 교수도 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고, 교회에서도 감투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또한 부자입니다. 또한 형제들도 많고, 가족이 있어 아내와 아이들이 셋이나 있고 모두 잘 자라서 혼자 다 살 수 있게 되었고, 결혼도 했고, 손자와 외손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많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는 사람이 많이 있는 부자입니다.
나는 많이 배웠다고 아주 교만합니다. 내가 잘 안다고 으스대고 사람들의 얘기에 비판도 잘하고 겸손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처럼 목에 깁스를 한 사람처럼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깔보거나 함부로 대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세상일을 할 때에도 내가 제일 잘하는 줄 착각하고 고집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부자입니다.
벌써 80이 가까워져 80 노인이라고 불리우니 살기도 많이 살았습니다. 아프면 곧장 병원에 가고 병을 고치려고 애쓰고, 그래서 20이 되기 전에 죽었을 몸이 오래도 살았습니다. 암으로 죽을병을 가지고 있었어도 기적적으로 치료도 하였고, 이제 완치까지 받았으니, 그 또한 축복을 받은 부자입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수명에 있어서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니 나는 천국에 가기는 정말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내가 가난해져야 하겠는데 내 노력과 의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아주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것이 나의 잘못이랍니다.
'천장제자의혈궤'(千丈堤自蟻穴潰)란 말이 있는데 아는 바와 같이 <천 길이나 되는 호수의 제방도 개미가 뚫어놓은 작은 구멍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실수로 인하여 큰일을 망친다는 뜻이지만 아주 겸손해져서 점차적으로 두껍고 어렵기만 한 하늘나라의 장벽도 큰 구멍으로 만들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아야 천국을 갈 수 있는 길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처럼 지옥에 가야 마땅할 사람도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축일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Bernard)
신분 :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 지역 : 클레르보(Clairvaux)
활동 연도 : 1090-1153년
같은 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르나르도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