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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탈출 11,10─12,14
복 음 : 마태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 등의 일탈 행위가 뉴스에 종종 등장합니다.
잊을만하면 또 보도되곤 하지요. 사람들은 이에 크게 실망합니다.
사실 직접 만났던 사람도 아니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완전 남남인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실망을 표현합니다.
인터넷에 게시글을 올리거나, 기사에 댓글을 답니다.
또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실망을 널리(?) 알리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을 이상화하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만들어온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상대방을 내가 만들었고, 이에 혼자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런 사람을 공인이라고 하지요.
어떻게든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특히 조심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지금의 자리에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안 되는 일일까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모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어떤 죄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람 자체만을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이야기하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엄청난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따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밀 이삭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 손을 비빈 것을 타작 행위라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만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억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새 율법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율법 준수보다 현재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역할은 더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와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바리사이들이 트집 잡은 것은 그들의 배고픔이나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해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하였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차려놓은 제사 빵에 한 일을,
아직 빵이 되지도 않은 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뒤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2)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6)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리고는 모세가 안식일을 야훼께서 주님이심의 표시로 선포하였듯이(탈출 31, 13),
안식일을 당신께서 주님이심을 알리는 날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지렁이를 잡으려는 새가 있습니다.
새는 지렁이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참새를 잡으려는 매가 있습니다.
매는 참새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매를 잡으려는 포수가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알라스카에서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당연히 한국 신자들과 지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사목하는 지역에는 한국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과만 지냈던 저에게는 신부님의 생활이
무척이나 힘들고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저의 생각과는 달리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아마존에서 주문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치도 담가서 먹는다고 합니다. 음식도 맛있게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용감하게, 기쁘게 선교사로 지내는 신부님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도 서로의 입장이 다 다릅니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제재를 해제하기를 바랍니다.
종전선언을 바랍니다. 미국과 수교하기를 바랍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바랍니다.
일본은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와 더불어 장거리 미사일의 폐기를 바랍니다.
중국은 북한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러시아도 중국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바랍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바랍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갈등과 분쟁이 있었고, 화해와 협력도 있었습니다.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과 북을 서로 이용하려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남과 북의 문화 교류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서 중국으로, 러시아도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차로 유럽까지 가면 좋겠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긴장과 대립의 군사분계선이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뜨게 해 주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셨고,
나병 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헌신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안식일은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악한 습성을 고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쟁과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일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던
어리석음을 탓하기 전에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고 원칙적이셨습니다.
박사학위도 3개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의 모든 단체는 질서를 잘 지켰습니다.
본당의 모든 시설물도 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생활이 시계추와 같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존경하였지만, 신부님께서 엄하셨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변하자 그분께서 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에 비견하는 노동으로 비약해서 올가미를 놓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편협한 사고를 넓혀 주고 싶어 하십니다.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에 기인합니다.
엿새에 걸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던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들도 그리하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도 이날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하느님과 더불어 거룩히 지냅니다.
아울러 안식일은 땅과 일꾼들과 종들과 가축까지 쉽니다.
쉼으로써 이 모두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겸허히 고백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처럼,
이날은 일상의 노동에서 잠시 놓여나 자신을 돌보고 회복시키며,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작은 파스카의 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부유한 지주라도 안식일을 통해 자기 조상이 노예였음을 기억하고
모든 피조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하느님 마음이 되어 보는 겁니다.
땅과 일꾼과 종과 가축의 안위까지 배려하는 안식일의 정신은, 그래서 "자비"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결정적 사건, 즉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기술합니다.
"그 피를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탈출 11,7.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린 짐승의 피가 발려진 집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합니다.
재앙은 하느님 백성의 자유와 해방과 안식을 거부하는 이집트인들의 교만을 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단 한 번의 희생제사를 바치신 영원한 사제인 동시에
아버지께 희생제물로 바쳐진 순결하고 흠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리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는 인간을 옭아매는 죄악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신 겁니다.
그분은 안식일이 자비와 사랑의 축제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남녀노소, 빈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의 쉼은
강요가 아닌 권리로 보장되고 축복받아야 합니다. 그날이 생명을 살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허겁지겁 밀 이삭을 비벼 입에 털어 넣는 제자들을 보시며
"쯧쯧, 얼마나 허기졌으면..." 하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의 안식은 그런 주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시작할 것입니다.
다정한 눈길 한 번, 소박한 격려 한 마디로 형제와 이웃의 생명을 되살리고 회복시키며
안식일의 정신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 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강호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강호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자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유학시절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