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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o91GAIkqmug?si=iu94mZsY7ucqtrbJ
부활의 주님이 주신 사명 26:13~18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명대로 순종한 바울 26:19~23
19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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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해보다 밝은 빛 때문에 엎드러져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체험을 전합니다. 그는 주님께 순종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죽음에서 부활해 모두에게 빛을 전하심을 증언한 것밖에 없다고 변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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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이 주신 사명 26:13~18
해보다 더 밝은 빛은 하나님 영광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빛이 비치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9, 22장).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라는 표현은 소가 농부의 막대기를 걷어차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바울이 하나님 뜻을 거역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바울을 그분의 ‘종’과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즉 그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죄 사함을 받고 주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종과 증인으로 부름받은 모든 성도가 감당할 사명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부활의 주님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이었나요?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은 무엇이며, 나는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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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로 순종한 바울 26:19~23
바울은 자신의 사명 수행과 무죄를 변론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19절), 즉 부활의 주님이 주신 사명을 거역하지 않고 그 사명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했을 뿐인데, 유대인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22절) 자신이 모든 사회 계층에 복음을 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구약성경의 성취라고 변론합니다. 바울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 영혼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사명에 어떻게 순종했나요?
큰 고난이 따를 때, 나는 맡겨진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나요?
한절묵상:사도행전26장 18절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역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는 '자기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신다는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전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심고 가꾸는 특권을 그분 백성에게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복음 선포와 전도는 어둠의 군주를 멸하고 사람들 마음에 빛을 비추고자 주님이 선택하신 수단이다.
- 존 스토트
오늘의 기도
죄인을 불러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세상의 종이었던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아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구원의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을 잃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뿐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도 순종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30 어둔 밤 쉬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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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시고, 우리로 온 땅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히 나아가도록 하
더 많은 연습하고, 더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그들의 말로 잘 증거할 수 있도록 하자
8월23일 동인천 지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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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만을 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이 아닌 세상의 잣대로 우리가 이룬 일들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8-12절에서 고백한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관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세상의 자랑을 버리고 오직 예수께 잡힌 바 된 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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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이유를 밝힌 것으로써, 그것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보이라는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회개의 촉구는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입니다. 그 말은 실은 바울만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하였고, 예수님도 하신 말씀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런 그릇된 행실을 전면 중단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로날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는 그 결과 즉, 열매로써 입증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의 가장 좋은 본보기가 바로 바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있던 자로서, 믿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열심히 특심이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뒤, 개과천선합니다. 그것도 그만한 개과천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지자로서 아예 그리스도의 종이요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과 극을 달리니, 끝내는 복음의 전파자로 일생을 장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정녕 돌이켜 그것에 걸맞은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열매가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사생활과 여가를 활용하는 것을 보고 인품의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영적인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T.V.나 영화, 유튜브 등에 많은 시간을 보낸 뒤 후회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또한, 은근히 먹을 것에 신경을 쓰기도 하고, 틈만 나면 취미생활이나 오락 등에 정열을 쏟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잘한 것 같지 않아서 반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언가 잘 못 택했다는 뉘우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볼거리에는 작가의 생각과 철학이 있고, 제작자의 투자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탐식은 먹을 것을 위하는 삶이요, 즐길 거리는 육신을 위한 것이지 영혼을 위한 여가활동이 아닙니다.
아까운 시간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남자들은 모여서 가끔 군대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큰소리 치는 사람의 순서는 대개 해병대→ 특전사 → 전투병→ 일반사병→ 그리고 방위 순입니다. 그만큼 사연과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것이 땅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암시라고 해도 될성 싶습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분명히 상급을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굳이 상급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 때문이지요. 돌이킴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후회는 후회로 남을 뿐입니다. 반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저절로 곡식이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귀중한 시간을 돈벌이를 위한 제작자의 상품에 뺏길 수 없습니다. 우리 소중한 정신세계를 믿지 않는 작가의 경험과 인생관에 함몰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더는 속지 말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 거듭난 사람답게 살면 좋겠습니다. 영으로 거듭났으니 영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말이 우리들의 일상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순간 한순간을 그분만을 선택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우리를 선택합니다. 의지가 없으면 배는 물결 따라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뿌리를 내린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물에 휩쓸린 종이배는 흔적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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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왕과 왕비와 총독과 천부장들과 귀족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 고백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하였고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행26:9~14)
그리고 그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고백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26:14)
그런데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보야야 합니다
"히브리 말로 이르되"(행26:14) 히브리어로는 "שאול שאול למה תרדפני"(솨울 솨울 라마 티르데푸니)입니다
여기서 "תרדפני"(티르데푸니)의 원형동사는 추격하다는 뜻의 "רדפ"(라다프)입니다 따라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추격하느냐?"는 뜻이 됩니다
공교롭게도 사울 왕과 이름이 같았던 바울이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들을 때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추격하던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רדפ/라다프)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삼상26:18)
단단히 오해하고 크게 노하여 반드시 죽이리라 다짐하며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은 그들도 크게 오해한 것이 풀려서 자신처럼 추격자에서 추종자로 변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복음으로 살 때에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남달리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말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죄인이었고 우매했고 원수였고 추격자였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된 것을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따르라 부르셨기에 추격자에서 추종자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그리고 이제는 어린 양의 추종자가 되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성도의 행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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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과거의 거짓된 삶을 철저하게 버렸습니다.
그는 회개하여 돌이킴으로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쓰임 받는 삶을 살았고
그런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시고 증언할 힘과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진정한 빛과 진리를 받고 거듭난 이들은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기쁨은 나누고 환희는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어둠으로 뒤덮인 이 땅을 밝히셨고
은혜와 진리로 채우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 역시 태초부터 말씀해 오신 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이 만난 빛이신 예수님을 생명을 걸고 왕과 총독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변론 대신 선포하고 있습니다.
종으로 사용된 휘페레테스는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큰 배의 아래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며,
증인으로 표현된 마르튀스에서 순교자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생명을 다해
그분을 증거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분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서의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주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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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을 통해 바울이 회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이전의 삶을 ‘가시채 발길질’하는 인생이었다고 표현하고 계시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시채 발길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각 개인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계속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만물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지극히 작은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음을 열어 그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심이 일어납니다.
진정 회심하였습니까?
회심의 개인역사를 가지고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를 향한 간절한 바램입니다.
인생을 살다 아픔을 겪을 때 곧 가시채가 우리를 찌를 때
가시채를 괴로워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던 길을 멈추고 진지한 자기 성찰을 통해 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 가시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가시채가 있을 때 가시채발길질로 더욱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고 회심을 통해 진리의 길을 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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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의롭지 못한 베스도
베스도는 바울 사도를 가이사에게 보내기로 결정을 하고 오늘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의 죄수에 대하여 말하게 됩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면서도 그를 석방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세우고자 죄도 발견되지 않는 바울을 구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욕심때문에 공의롭지 못하게 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의로운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처하든지 항상 공의로움을 잃지 않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공의롭게 행하는가?
2.복음의 길이라면
바울 사도는 감옥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분명 기쁨으로 그 시간들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꼭 가기를 원했던 로마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내가 믿음 안에서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하였는가 하는 것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에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행16장) 바울사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복음의 일을 감당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하여 기쁘게 찬양하며 나아갈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떠한 처지와 상황에 처하여있는가 보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나의 가는 길이 복음의 길일 때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의 길이라면 어려움도 수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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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한 다섯째 변증에서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말씀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표현은 당시 널리 알려진 속담인데 가시밭에서 발길질을 하면 더 가시에 찔린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말씀이다.
주님 말씀을 듣고 바울이 말했다. “주여! 뉘십니까?” 그때 주님이 말씀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너를 보내리라.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15-19절).” 그 주님의 말씀대로 회개한 후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변증했다.
바울이 자신의 변증과 삶을 통해 강조한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킬 때 보통 그 일을 할 사람에게 먼저 하나님의 뜻을 말씀한다.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노아에게 말씀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했다. 또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하려고 기드온에게 말씀했고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보다
‘선한 사람’을 더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최고로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라.
내 뜻을 따라 가면 빠른 길로 가는 것 같아도 그 길이 늦는 길이고
결국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면 늦는 길로 가는 것 같아도 그 길이 빠른 길이고 결국 성공한다.
< 목표를 분명히 하라 >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내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아무개야, 분명한 삶의 목적도 없이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멋지게 일어나 나의 증인이 되라.
” 시련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은 낙심하고 탄식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끝났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삶의 목표를 잃지 말고
“일어나 네 발로 서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당하게 살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표를 따라 사는 한 사람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로이드 게리슨(Lloyd Garrison)이 말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사람이 곧 다수다(One with God is majority).
” 바울의 삶을 보면 그 말은 진리다.
본문을 보면 유대의 유력한 사람들 앞에서 심문을 받던 바울 한 사람이
오히려 심문하는 그들에게 자기 민족의 역사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을 본다.
왜 바울이 복음을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했는가?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실재를 깨닫고
삶의 분명한 목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룩한 목표지향적인 자세를 가지고 어정쩡한 위치에 서지 말라.
미지근한 현대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 미지근함은 영혼을 불신으로 이끄는 사탄의 교묘한 작업 술책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선한 결단을 하고 꾸준히 나아가라. 예수 믿고 얻은 가장 귀한 축복 중 하나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영적인 걸인처럼 불행하게 땅의 것을 의존하며 살고 있다. 돈과 명예만을 위해 사는 약한 모습을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을 위해 산다는 목적이 있다면 약자도 사실상 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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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호하고 있는 내용이다.
먼저 바리새인으로 양육받은 것을 이야기 했다.
다음으로 나사렛 예수 이름을 대적하고 성도를 옥에 가두고
온갖 핍박을 열심히 했다고 밝혔다.
오늘 본문에는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구원 간증을 하고 있다.
다메섹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
정오쯤 되는 한낮에 해 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일행에 비췄다.(13)
모두가 다 놀라서 땅에 엎드러졌다.(14)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언어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14)
가시채를 뒤발질 하기에 네게 고생이니라(14)라는 음성을 들었다.
바울이 주여 뉘시니이까? (15)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 주님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16) 할렐루야.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하신다.
왜냐하면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16) 아멘. 할렐루야.
내가 예수님을 본 일에 대하여 증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일에 대하여 증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의 사환이 되어야 한다.
내가 그 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아멘.
왜 이렇게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셨나?
1.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둠에서 빛으로(18)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18)
2.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18) 아멘.
3. 거룩한 무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18) 할렐루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여 나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어둠에서 빛 으로 살게 하옵소서.
죄사함의 은총이 있게 하옵소서.
거룩한 무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가 이것임을 알고 이렇게 살게 하옵소서.
이 부르심의 소명을 잘 깨달은 자의 거듭되는 고백이 있다.
결론은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아 지금까지 행했다는 것이다.(22)
좀더 구체적으로는
1.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아니하고(19) 할렐루야.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 이것이 소명받은 자의 행하는 태도이다.
2. 다메섹과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여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전한 것은(20)
거룩하신 성령의 부르심에 복종한 것 뿐이요
바울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요, 유대교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였지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복음을 전한 인물이다.
이것이 올바른 기독교인의 자세이다.
차별없이 복음을 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
3.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21)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까지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한다.(22) .
바울이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구사일생 걸어온 발 자취를 표현 한 말이다.
험준한 인생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고백이다. 아멘.
때때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과 매맞고 (고후11:23~27) 살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았다는 고백이다. 아멘.
마지막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것(23)
2.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셔서 살아나리라(23)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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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이 길을 가고 있을 정오 때였습니다. 전에와 달리 정확한 시간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할 정도로 열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때가 한 낮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강렬한 빛에 의해 자신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으며, 모든 관심은 주님이 하신 일과 주님의 말씀에로 집중하여 말합니다.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동행들은 다 땅에 엎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육신의 몸으로 승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면 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면 큰 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의 보내신 사람들을 통하여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바울)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예수님은 히브리말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람어로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21:40). 주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사울이라는 아람어로 불렀습니다(9:422:7). 사도핸전 9장1에는 사울로스라는 헬라어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냐 네가 가치채를 뒷발질 하기에 고생이라”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 말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본래적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말은 농경 문화에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킵니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속담은 유대교 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며 양심의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가시채찍을 뒷발질하며 피를 질질 흘리는 바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연민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 정해진 섭리를 거역했던 바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증인 삼으신 예수님)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바울에게 찾아오신 분은 바울이 박해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여 하늘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 발로 서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고 대신 아나니아를 통해 받은 소명을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이 소명의 인식을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 받았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건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상황에 맞추어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수적인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아나니아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을 상대로 말할 때는 자신의 유대교적 경건성과 정통성을 증거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과 같이 헬라적 청중들까지 포함된 상황에서 변증할 때는 유대교적 경건과 정통성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어떻게 이끌림을 당했는가를 증언합니다.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 상기시킵니다(겔 2:1, 3렘 1:7, 8). 바울의 소명 내용도(18절) 이사야 42장 5-7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소명과 유사한 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타난 것을 바울로 증인삼기 위해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를 본 일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경험한 것을 가리킵니다. 장차 나타날 일은, 앞으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보여질 것(16:9, 1018:922:17, 1823:1127:23고후 12:1-4, 7)을 가리킵니다. 바울을 통하여 소아시아와 유럽과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움과 외경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도록 명령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은 바울을 구원하여 이스라엘과 이빙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구원하여는 선택하여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7:10, 3423:27) 이 단어가 구원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과거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함을 받았었습니다(9:23-2521:30-3223:12-2425:3).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이 본문은 이사야 42장 6, 7에 이방의 빛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사42:6)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롬 1:24엡 5:18)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요 8:12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조금도 어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와 절망과 죽음의 어둠을 몰아내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또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배를 뜻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에서는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흑암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사함을 받고 그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됩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모두 어둠의 권세에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방인 전도를 함)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그 후부터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대사람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렘 20:9).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13-18절), 그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삶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일관된 내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롬 9:19-24엡 3:9-11),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고전 15:43), 자신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딤전1:15)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 이방인이라고 말하여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9:19), 다음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9:28, 29)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의 촉구는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촉구하였고(마 3:2), 예수님도 그랬으며(마 4:17),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회개를 선포했습니다(행 3:19).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18절)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3장 8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갈 5:22, 23).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거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함)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21:26-28).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 정죄는(21:29 주석참조) 하나의 계기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22:21, 22).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21:31, 3223:12-15).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으며 17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항상 증언한 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인류의 빛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말씀에 기초한 증거)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바울은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선지자들이 반드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앞에서는 복음이 민족의 차별을 뛰어넘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17, 20절), 여기서는 복음이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힙니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줍니다(요 3:16). 선지자와 모세는 율법과 선지자(13:15)와 같은 뜻의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요약한 말입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 모세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롬 1:216:26).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우선 전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기독교는 예수께 적용하여 예수의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지상적.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막 8:27-38 막 10:35-45) 메시야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만방의 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이사야서에 나옵니다.(42장1-7 49장 6, 60장3)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서는 메시야가 죽었다가 첫번째로 부활하리라는 생각 역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메시야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는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 모든 민족에게 빛을 선전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큰 빛으로 계십니다. 선전하시리라는 공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빛을 선포한다 함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요(약 1:17요일 1:5),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포한다는 말입니다(18절). 예수님은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 빛이 비치면 어떤 어둠도 물러갑니다. 바울의 무지함도 예수님의 빛으로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의 내면에 있는 절망 무의미 허무함도 물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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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저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어두움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인생, 핍박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인생, 돕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 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이미테이션 행복과, 인스턴트적인 즐거움을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진실한 기쁨을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사울 같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사람은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받을 길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회심했어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이렇게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 사울을 하나님이 쓰시기로 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인생의 여정을 삶의 방향을 바꿔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 그의 인생은 더 이상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14년 어간의 긴 훈련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자신의 역사를 간증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바뀐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느라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에 주님 찾아오셔서 빛나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사실 우리네 인생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가시 채를 뒷발질하느라 상처 난 몸과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은혜를 아는 인생, 진정한 행복을 아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은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고 평강을 나누어주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배후에는 부활의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고 믿은 주님은 우리 인생을 은혜로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비록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았지만 내 인생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던 곤고한 인생에서 사람을 살리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방인들에게 나아가 그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값진 인생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곤고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인생으로 평강을 주는 인생으로 부활의 산 소망 가지고 진정한 평강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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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날마다 돌보시고
기꺼이 종과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다해 맡겨주신 사람을
주님을 사랑하듯 아끼며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곳곳에서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참 힘과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절망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온전한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