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의 상징은 남근석이다. 흔히 선돌신앙 또는 입석신앙이라고 한다. 진천리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성혈이 새겨져 있는 남근석을 발굴하였다. 초례봉의 정상에는 남근석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신앙을 이야기 할 때 가장 흔히 바위신앙과 선돌신앙을 말한다. 초례봉은 바위와 선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거기에 성혈까지 있다. 후대로 갈수록 남신이 힘을 발휘하지만 무속신앙에서는 지금도 여신이 힘에 세다.
고려말기에 운문사와 동화사를 근거지로 하여 초적과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군이 이들 운문적을 토벌하고 나서 팔공산에 산신제를 올린 제문이 있다. 여기서는 남신의 명칭인 대왕(大王)이라고 하였다. 팔공산의 산신이 이미 남신으로 바뀌어서 성혈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불교가 민간 신앙으로 스며들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고대의 성지는 불교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마을 주민들도 토속 신앙터를 떠나서 사찰로 자리를 옮기면서 옛 성지는 점차 잊어진 것이 아닐까? 왕건이 올렸던 대대적인 제사도 이제는 더 이상 올리지 않음으로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초례봉은 점차 잊어져 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민속 신앙은 쉽게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초례봉을 조리봉으로 바꾸어 부르면서도 복조리라 하여 무의식적으로 기복을 하였을 것이다. 다산과 풍요가 기복신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리봉도 고대의 다산과 풍요 신앙과는 일맥 상통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고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 신앙은 祈子(기자)신앙으로 살아 남는다. 전국의 산에 버티고 남아 있는 남근석들이 그들이다. 상투바위, 촛대바위라 부른다. 좀 더 고상한 이름으로 필봉, 미륵바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아예 *바위라고 원색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 바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선돌신앙의 잔재이고 성기신앙의 흔적이다. 민간신앙으로 살아 남아서 지금도 기능을 하는 곳이 많다.
고대 농경신앙에서 기자 신앙과 기우 신앙이 가장 신앙이 깊은 자발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동체가 복리를 위하여 올리는 의례는 개방적인 장소에서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치룬다고 한다. 풍년제나, 동제, 기우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남자들이 주도하여 축제로 치룬다.
기자 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아 선호 사상은 기자 신앙을 더욱 불을 붙였다. 기자 신앙은 여인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신앙이었던 성기신앙과 기자 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아 선호 사상은 기자 신앙을 더욱 불 붙였다. 기자 신앙은 여인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신앙이었던 성기 신앙이 조선시대에 기자 신앙으로 바뀌었다. 기자 신앙은 공동체 의례와는 성격이 달랐다. 개인적인 의례일 뿐 아니라 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은밀하게 치루었다. 신앙 대상인 성석(性石)은 여근, 남근, 성교합 형상의 자연물이 대상이 된다. 대개의 경우에 여인들이 치성을 올리는 성석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있다. 지금도 성기 신앙은 민간 신앙으로 숨쉬고 있다. 성석의 주변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명산 대천에서 제사를 올렸던 산신기도가 기자신앙으로 바뀌었음을 심청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앞 못 보는 심봉사 마누라도 품팔아 모은 돈을 몽땅 털어 명산 대천에서 굿을 하고, 대찰에 불공을 드려서 심청을 낳았다.’ 라고 하였다.
요약하면 초례봉은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적인 번영을 기원하는 성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동체의 의례는 잊혀지고 개인의 기복을 바라는 민간 신앙처로만 존재하였다. 조선시대가 되면 남아선호사상과 맞물려서 기자 신앙터로 은밀하게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곳이 무엇을 하였는지 조차 잊어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