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5dOj5YI3Ppg?si=DPUp8kw5ekyfoakf
주세페 시노폴리 [ Giuseppe Sinopoli 1946~2001]
베르디와 푸치니 작품의 대담한 해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명지휘자. 1946년 11월2일 이탈리아 베니스 출생. 60년대 말과 70년대초 베니스와 시에나,독일,오스트리아 등에서 음악수업을 쌓았다.
72년부터 베니스 음악원에서 현대음악과 전자음악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75년에 현대 음악 연주를 위한 '부루노 마데르나 앙상블'을 창단하고 지휘자로 데뷔했다. 80년 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인 도이체 오페르에서 베르디의 '맥베스'를 독창적으로 해석, 지휘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83년 런던뉴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마의 산타세실리아 국립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임명됐으며, 85년엔 푸치니의 '토스카'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데 이어 바그너의 '탄호이저'로 독일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도 첫 선을 보였다.
1990년부터 세계 최고(最古)의 교향악단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이자 수석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95년과 2000년 두차례 내한공연을 했다. 2001년 4월 20일 도이체 오페르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지휘하다 전체 4막 가운데 3막 연주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나 사망했다. 당시 54세.
드레스텐 국립 관현악단 (Dresden Staatskapelle)
드레스덴 역시 동독권 내에 속해 있는 대표적인 음악도시로서, 라이프치히와 함께 고풍이 서리는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다. 유럽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드레스덴도 오페라를 중심으로 하여 음악문화가 발전해 왔기 때문에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DS)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도시에 묻혀간 오페라의 역사를 먼저 알아두는 게 순서다. 왜냐하면 지금의 DS라는 오케스트라가 사실은 드레스덴 국립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오페라 연주단체이며, 따라서 이 악단이 오페라를 연주할 때는 `드레스덴 국립가극장 관현악단'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단지 오페라가 아닌 순수 콘서트 프로그램을 연주할 때만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이라고 표기하여 연주의 성격을 달리할 뿐, 그 실체는 모두 같다. (이 점은 주로 레코드 쟈켓 표기를 위해서 구분되는 것이니만큼 서로 혼동이 있어서는 안된다)
드레스덴 국립가극장의 전신은 1655년 바로크시데 건립된 모렛티 오페라 극장이다. 그것이 나중에 드레스덴 궁정극장으로 바뀌었고, 다시 국립가극장으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DS의 발전사는 곧 이 가극장의 발전사와 발걸음을 같이 하고 있다.
고전주의 말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어느 도시나 오페라 상연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드레스덴 궁정가극장 역시 마찬가지여서 오페라하면 으레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로 통칭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작곡가가 있었다. 독일 국민가극의 창시자요 낭만주의 음악의 포문을 연 베버(Carl Maria von Weber)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들고 나와 진정한 독일오페라의 첫걸음을 내딛으면서 드레스덴 궁정극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817년에 드레스덴을 찾아온 베버는 이 가극장에 속해 있는 DS를 지휘하여 <마탄의 사수>를 공연함으로써 독일 낭만주의 음악사상 최대의 거보를 내딛게 된 것이다. 지금의 DS의 선배들에 의하여 상연된 오페라 <마탄의 사수>와 함께 독일 국민 오페라가 시작된 이래, 그 흐름을 강렬하게 이어받고 등장한 바그너 역시 1843년에 지휘자로 부임하여 DS를 이끌었다. 바그너는 그의 초기 대표작인 <리엔찌><방황하는 화란인><탄호이저> 등을 이곳에서 상연하여 베버로부터 물려받은 낭만 오페라의 절정을 꽃피워 냈다. 그러나 1849년에 터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그너는 정들었던 드레스덴 가극장과 DS를 남겨둔 채 리스트가 머물고 있는 바이마르로 피신했다가 스위스로 망명, 다시 드레스덴을 밟지 못하고 말았다.
바그너가 떠난 뒤의 DS는 한동안 침체기를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869년에는 대화재를 당하여 가극장이 전소 되어버리는 참화를 입었지만, 오페라를 사랑하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눈물겨운 정성에 힘입어 9년만에 복구되기도 했다. 그것을 기념하여 1878년부터 `왕립가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나 DS의 실체는 여전히 존속하면서 연주를 담당해 나갔다.
19세기를 보내면서 DS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국민가극의 계승자 R 시트라우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베버-바그너-시트라우스로 이어지는 독일오페라의 마지막 완성자로 등장, 바그너보다 훨씬 관능적인 오페라들을 연이어 상연했다.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등이 그것으로, 이 오페라들은 모두 시트라우스 자신의 지휘로 DS에 의해 초연된 작품들이다.
1차대전 중에는 프릿츠 라이너가 부임하여 DS를 지휘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현재의 이름인 `드레스덴 국립가극장'으로 개칭하여 비로소 DS의 현대적인 탄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칭의 재탄생일 뿐, DS의 뿌리 그 자체까지 변절된 건 아니다. 베버 이전부터 시작하여 바그너를 거쳐 R 시트라우스로 이어져 온 자랑스러운 전통은 그대로 안고 있으며, 오로지 현대적인 오케스트라 개념의 이름을 얹었을 따름이다.
34년에는 칼 뵘이 DS의 지휘자로 부임, 콘서트 연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36년 뵘의 인솔로 영국순회연주길에 오른 DS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돌아온 것은 이 악단의 중요한 체질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제2차대전은 드레스덴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시의 건물 80%가 폭격으로 날라가 버리고 3만 5천명에 달하는 시민이 죽음을 당했다. 드레스덴 국립극장도 살아남을 수 없어서 완전한 잿더미로 주저 앉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의 도시 드레스덴을 옛모습대로 복원해 가는 복구작업이 진행될 때 제일 먼저 복구으 손길을 뻗친 것이 이 유서 깊은 오페라극장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드레스덴을 상징하는 명소이기 때문에 동독 당국도 깊은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이 가극장이 원래의 모습대로 완전한 복구작업이 끝난 것은 1985년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무려30년간에 걸쳐서 복구작업을 진행해 온 그들의 문화의지야 말로 참으로 귀중한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다.
67년에는 체코 출신의 마틴 트루노프스키가 부임하여 DS를 지휘하다가 노이하우스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볼롬시테트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일 오페라 음악사의 면면한 맥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고색창연한 음색을 발하는 DS의 무한한 그윽함을 글로서 표현해낼 재주는 없다. 다만 그들이 빚어내는 음의 향연을 객관적으로 추적해 볼 따름이다.
최근에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DS를 자주 지휘한다. 그가 <마탄의 사수>로 오페라 레코딩 데뷔를 할 때도 DS를 기용했었다. 베버의 숨결이 살아 있는 DS의 옛스런 음색이 이 오페라 연주에 꼭 들어맞아 단숨에 베스트 셀러가 되어버린 명연이다. 최근엔 주세페 시노폴리가 새 상임 지휘자로 왕성한 활동을 벌인바 있는데.. 안타깝게도 재작년 오페라 '아이다' 리허설 중 심장마비로 급서하였다.
칼 뵘이 녹음한 R 시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전곡판도 귀중한 보배다. 한 시대 전의 드레스덴 가극장 주력가수들이 동원되어 DS와 혼연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레코드에 따라서는 `작센 국립관현악단'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도 많으나, 그 실체도 모두 DS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글출처: 웹사이트
첫댓글
드보르작 _ 슬픔의 성모 중..(A. Dvořák _ 'Quando corpus morietur' from "Stabat Mater", Op.58)
https://youtu.be/Udyt9zJ1L2I?si=69zgQ7wruSR9gm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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