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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기이 (松都記異)]
[1631년(인조 9년) 이덕형이 쓴 송도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야담 설화집. 1책. 규장각도서. 저자가 송도유수로 나갔을 때, 그곳에서 들었던 특이한 이야기들을 파적과 문교에 도움을 주고자 1631년 완성한 글이다 ]
내용
조선 인조 때 문신 이덕형(李德泂)이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재직 중에, 그 지방에 전하는 설화 및 보고 들은 바를 모아서 엮은 야담집(野譚集)이다.
책 머리에 자서(自序)를 싣고, 본문으로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차식(車軾)ㆍ안경창(安慶昌)ㆍ최영수(崔永秀) 그리고 명기 황진이와 그밖에 한명회(韓明澮)ㆍ차천로(車天輅)ㆍ한호(韓濩)ㆍ임제(林悌) 등 송도(松都) 출신 인사들에 얽힌 설화들을 수록했다.
부록에는 고려의 우(禑)ㆍ창(昌) 양왕의 정위왕씨설(定爲王氏說), 이죽천 송도견문후(李竹泉松都見聞後)를 수록했으며, 책 끝에는 신익성(申翊聖)ㆍ이식(李植)ㆍ이경전(李慶全) 등의 발문이 있다.
저자 이덕형(李德泂)의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의 증손이요, 이오(李澳)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년)에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가 봉교(奉敎)ㆍ응교(應敎) 등을 역임했다.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반정 사실을 보고하고, 능양군(陵陽君)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했다.
1624년(인조 2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와서 형조 판서ㆍ판의금부사ㆍ지돈녕부사를 역임, 우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에는 이 《송도기이》외에 《죽창한화(竹窓閑話)》1권이 있다.
원래 야담(野譚)이란 민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야사(野史)의 구수한 이야기를 말한다. 또 야사는 일명 패사(稗史)라고도 해서 작자의 상상에 의해서 세상일이나 인정 등을 실지로 있었던 것처럼 기록한 글을 말하기도 한다. 즉 지어서 만든 이야기다.
원래 패관(稗官)이란 옛날 왕자가 여항(閭巷) 속의 풍속을 알고자 하여 낮은 관리를 시켜서 이것들을 찾아 모아서 기록하게 한 것이다.
옛날 서현(徐顯)의 〈패사집전서〉(稗史集傳序)에 보면, 《予生季世之下 不能操觚以選論當代賢人君子之德業 而竊志其所與遊 及耳目所聞見者 敍以錄之 自比於稗官小說 題曰稗官集傳 以候夫後世歐陽子擇焉》했다.
이상에서 야담이나 패사(稗史)에 대한 성격을 알아 보았다. 이러한 기본정신에 입각한 이 《송도기이》는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는 야담 중의 야담이라는 것을 덧붙여 말하며, 대동야승에 실려있다. 이 국역은 조선고서간행본을 썼다.
[대동야승 (大東野乘)]
오른쪽에서 3번째, 송도기이(松都記異)라는 글이 보입니다.
<이식(李植) 발문>
내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니, 군신 상하가 음란하고 방탕하고 요괴하고 허탄한 정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므로, 그 풍속과 인재가 옛과 같지 않은 것을 의심했다.
고도(古都) 사람을 보건대, 백성들이 모두 질실(質實)하고 돈후(敦厚)해서, 비록 그 풍속이 장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또한 능히 부지런히 일해서 여유 있게 재산을 벌어 남과 다투지 않으며, 남녀가 놀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마을에는 창기(倡妓)가 없으며, 그 집이나 의복ㆍ음식의 제도는 옛 나라의 남은 법을 숭상하고 지켜서 세상을 따라 변천하지 않았다.
혁명이 이루어지고 나라가 없어진 때를 당해서 의관을 한 사람들은 새 나라를 따라 옮겨 가지 않으면 도망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가문은 귀천의 구별이 없고, 관리 선발에 따른 법과 제도를 본래부터 비루하고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이따금 호걸스럽고 재덕이 있고 기예가 있는 사람이 뛰어나서 일세의 영웅이 된 자가 많았으니, 고려조의 인재와 풍속을 가히 상상할 만하거늘, 역사를 만드는 자가 승국(勝國)을 헐뜯고 깎는데에만 힘써서 그 사실이 묻히고 말았다.
판부사 죽천 이씨(竹泉李氏)가 일찍이 그곳에 유수(留守)로 있을 때 전후에 듣고 본 것을 모두 기록하여 한 책을 만들었는데, 모두 조리에 맞아서 전할 만하고 후일에 감계(監戒)가 될 만한 것이다.
비록 이상한 소문이나 기이한 말이라도 세교(世敎)에 관계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았고, 또 고려말년에 의심스럽고 잘못된 기록은 분변해 바로잡았으니, 아! 이 또한 실록(實錄)으로, 고려의 역사를 만든 자로서도 오히려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그 기록이 적은 것인데, 어찌 삼가고 정밀히 하며 그 번거로운 것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죽천공(竹泉公)은 집에서 한가롭게 수양하여 세상의 변을 두루 겪었지만 신명(神明)이 쇠하지 않았으니, 혹 이 예에 의해서 당세의 명인(名人)ㆍ재사(才士)와 문물(文物)ㆍ풍요(風謠)를 엮어서 전한다면, 그 문헌(文獻)에 공이 있음이 어찌 얕고 작다고 하겠는가?
이미 공(公)을 권면하고 또 책 끝에 기록하는 바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늦은 봄에 덕수(德水) 이식(李植)은 재배하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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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都記異(송도기이)]
이덕형(李德泂 1566-1645)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7)에 내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세대가 멀어져서 고려조의 남은 풍속이 변하고 바뀌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장사하고 이익을 좇는 습관만은 전에 비하여 더욱 성해졌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넉넉함과 물자의 풍부함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고 이를만 하다. 상가(商街)의 풍속은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기 때문에 사기로 소송하는 것이 많을 듯한데도, 순후한 운치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어서 문서 처리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매양 긴 여름에는 문서를 다 처리하여도 해는 항상 점심 때밖에 되지 않았다. 아전들이 물러가고 사람들이 흩어지면, 남은 해가 아직도 길어서 반드시 베개에 의지하여 졸게 되는데, 조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지만 졸음을 물리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는 것은 본성이 즐겨하지 않는 것이며, 명산이나 경치 좋은 곳도 늙다보니 흥취가 점점 엷어만 가므로, 때로는 혹 한두 사람 향로(鄕老)들을 불러다가 민간의 병폐를 묻기도 하고, 또 겸해서 항간의 풍속이나 가담(街談)ㆍ야화(野話)들을 캐내기도 하니, 깨달은 바가 자못 많았다.
또 나는 만력(萬曆) 갑진년(1604, 선조37)에 본부(本府)의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었는데, 일이 끝나지 않아 거의 열흘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은 안사내(安四耐)ㆍ진주옹(陳主翁) 등으로 나이가 모두 80여 세였다.
그들은 근고(近古)의 견문이 넓고 일을 경험한 것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교목(喬木)의 유로(遺老)들(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원로들)이었다. 나는 그때 이들 두 늙은이에게서 새롭고 이상한 말을 얻어들은 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30여 년이 되었으니 아득히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일과 같다.
항상 신구의 설화를 기록하여 파적거리로 삼았다. 생각건대 전조(前朝)의 지난 사적은 모두 방책(方策)에 실려 있지만 백년 동안의 옛일은 사실과 거짓이 혼동되었으므로 중고(中古) 이래의 일 중에서 두드러지게 이목을 끄는 것을 뽑아서 소설(小說)을 만들어 심심풀이로 보도록 한다.
말은 비록 속스럽지만 역시 명교(名敎)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신미년(1631, 인조9) 중하(仲夏)에 죽천병옹(竹泉病翁.이덕형)은 송악(松岳) 아헌(衙軒)에서 쓴다.
● 화담선생(花潭先生)은 성은 서씨(徐氏)요, 이름은 경덕(敬德), 자는 가구(可久)이다. 송도(松都) 사람으로 여러 대 가문이 한미하고 집이 본래 가난했다. 선생의 아버지는 덕을 숨기고 곤궁함을 편히 여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어머니가 일찍이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영리해서 보통 아이와는 크게 달랐다. 점점 자라자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아 눈 가는대로 문득 외었으며, 넓게 책을 보고 많이 기억했다.
일찍이《서전(書傳)》을 읽다가 기삼백(朞三百)의 주(註)에 이르러 거듭 생각했으나 쉽게 풀 수가 없었다. 본부(本府)에 늙은 상사가 있는데, 평소 경서에 밝은 것으로 일컬어졌기에 선생은 그 문하에 가서 가르침을 청했다.
상사는 말하기를,“이 주(註)는 비록 늙은 스승이나 나이 많은 선비라 하더라도 아는 자가 적어, 나도 또한 배우지 못했다.”하였다. 선생은 집으로 돌아와 개연히 탄식하기를, “세상에 통달한 선비가 없으니 우리 도는 폐해졌구나.”하고,
드디어 전서(傳書) 한 통을 벽 위에 붙여 놓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파들어가 침식까지도 폐하는 데 이르더니, 15일 만에 환하게 비로소 깨닫게 되어 그 가지를 가르고 실마리가 풀려 심목(心目)에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또 탄식하기를, “성현의 도의(道義)는 모두 방책에 실려 있으니 하필 다른 곳에서 구할 까닭이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더욱 스스로 사숙(私淑)을 했다.
타고난 바탕이 도에 가까와서 성경(聖經)의 깊은 뜻을 쉽게 스스로 이해했다. 더욱이 역학(易學)에 깊었는데 참되게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여 드디어 유종(儒宗)이 되었다. 명성이 날로 빛나자 원근에서 그를 추앙하여 배우는 자들이 모여드는데, 천 리를 멀리 여기지 않았다.
선생은 재주에 따라서 가르치되 반드시 효제(孝悌)를 먼저하고, 장유(長幼)는 나이를 따져서 오르고 내리는데 읍하며 사양하게 하고, 서로 의심나는 것을 의논하며 어려운 것을 묻게 하니, 글 외는 소리가 양양하여 함장(函丈.스승 또는 강 받는 자리)의 사이에 화기가 가득했으며 후학들을 인도함이 마치 때맞추어 오는 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같았다.
이 말은 김연광(金鍊光)의 일기에서 많이 나왔다. 문인 중에는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난 자가 몹시 많았는데, 사암(思菴) 박순(朴淳)ㆍ초당(草堂) 허엽(許曄)ㆍ행촌(杏村) 민순(閔純)이 더욱 뛰어난 이들이었다. 선생은 처음에 사마(司馬)에 합격했고, 태학(太學)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운명한 뒤에 대신들이 아뢰어 의정(議政)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했다. 선조조(宣祖朝)에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과 도헌(都憲) 홍이상(洪履祥)ㆍ참의(參議) 한백겸(韓伯謙)이 여러 선비들에게 통문을 돌려 선생이 전에 살던 곳에 서원(書院)을 세우니, 사액(賜額)하기를 ‘화곡(花谷)’이라 하였다. 선생을 봉안하여 제사를 모시는데, 박사암(朴思菴)ㆍ허초당(許草堂)ㆍ민행촌(閔杏村)을 종향(從享)하였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집 속에 ‘서화담(徐花潭)이 만월대(滿月臺)에 올라갔는데, 어느 손님이 율무로 쑨 죽을 올렸더니, 화담은 이것을 마시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 보니 선생이 올라가서 바라볼 때에 풍물을 보고서 감회가 일어나 유연(悠然)히 스스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춤추어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일어나서 춤추기까지 했겠는가?
내가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전 금오랑(金吾郞) 한대용(韓大用)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나이 90여 세인데도 정신이 쇠하지 않았다. 그는 선생과 한 마을 사람으로서 어려서 선생에게 가장 오랫동안 공부를 했기 때문에 능히 선생의 평일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줄 만하였다.
나는 그에게, “선생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니 사실인가?”하고 물었더니, 한생(韓生)은 말하기를,“선생은 매양 좋은 시절을 당하면 문도들을 데리고 걸어서 앞 시내로 나가서 송림과 수석 사이를 거닐다가 때로 혹 술을 마시되, 조금 취하면 문득 그치고 관자(冠者)로 하여금〈귀거래사(歸去來辭)〉를 외게 하고, 동자(童子)들은 일어나서 춤을 추게 했습니다. 이런 일은 내가 친히 보았지만 선생이 몸소 춤을 추었단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겠지요.” 하였다.
● 사문(斯文) 차식(車軾)은 송도 사람으로서 부지런히 배우고 글을 지었으며, 또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일찍이 벼슬하다가 집에 있는데 유수(留守)가 차식을 후릉(厚陵)의 한식전사관(寒食典祀官)으로 차송(差送)했다.
차식이 능에 이르러 정자각(丁字閣)을 보니, 해마다 비가 새어서 서까래가 모두 썩었고, 먼지가 벽에 가득했으며 뜰에 풀만이 우거졌고 상ㆍ탁자ㆍ기명은 오래 되어 더럽고 깨져 있었다. 차식은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탄식하였다.
이윽고 나이 많은 수복(守僕)이 와서 뵙자, 차식은 말하기를,“나라의 능이 이렇게 매몰될 줄이야 일찍이 몰랐었다.”하니,
수복은 말하기를,“이 능은 조천(祧遷)한 지가 이미 백 년이 지났는데, 1년에 한식 이외에는 향화(香火)가 끊어집니다. 제관(祭官)도 서울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전헌(奠獻)이나 배례(拜禮)도 떳떳한 법에 맞지 않으며, 희생에 쓰는 짐승은 파리하고 제주(祭酒)는 신 것이 예사입니다. 사당문은 한 번 닫히면 1년이 다 가도록 고요하며 능졸(陵卒)도 줄어들어 텅빈 산의 비바람을 수호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 황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차식은 이 말을 듣고 처량하게 느껴, 친히 청소를 한 다음, 제물을 정갈하게 차려가지고 목욕하고서 제사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자주빛 옷을 입은 중사(中使)가 와서 차식에게 소명을 전하기를,
“주상께서 대궐에 앉아 계시니 나를 따라 들어가시지요.”하고, 드디어 차식을 인도하여 큰 대문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바라보니 대궐집은 크고 깊은데 임금이 어탑(御榻) 위에 앉아 있었다. 황공하여 뜰에 엎드리니 중사가 들어오기를 재촉하므로, 탑(榻) 앞에 엎드리자 임금이 이르기를,
“전번까지 온 제관(祭官)은 모두 정성을 들이지 않아 제물이 보잘 것 없어서 내가 흠향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음식이 몹시 정결하기에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긴다. 들으니 네 어미가 지금 대하병(帶下病)을 앓는다니 내가 좋은 약을 주리라.”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뒤에 복이 있을 것이다.”하는 것이었다.
차식은 꿈에서 깨어서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다가 날이 밝자 동구(洞口)로 나왔다. 매 한 마리가 뒤에서 가볍게 날아 지나가더니, 큰 생선 한 마리를 말 앞에 떨어뜨렸다.
그 생선은 생기가 팔팔하여 땅에서 뛰는데, 뱀장어로서 그 길이가 한 자나 되었다. 차식은 꿈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여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연일 국을 끊여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차식은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고, 두 아들 천로(天輅)와 운로(雲輅)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차천로는 역시 문장으로 벼슬이 첨정(僉正)에 오르고, 차운로도 문명(文名)이 있어 벼슬이 시정(寺正)에 이르렀다. 차천로의 아들 전곤(轉坤)도 과거에 올라 지금 정랑(正郞)이 되었다 한다. 만려어(鰻鱺魚)는 칠성례(七星鱧)이다.
● 안경창(安慶昌)은 송도의 천한 사람으로 호가 사내(四耐)인데, 성질이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기절(氣節)이 많았다. 어렸을 때 중을 따라서 화장사(花庄寺)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늙은 중 하나가 있는데 겨울에는 맨 이마에 맨발로 눈위를 걸어다니고, 여름에는 누덕누덕 꿰맨 옷을 입고, 바위 위에 누워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골았는데, 모든 중들이 모두 공경하여 신승(神僧)이라고 했다. 안경창도 마음으로 몹시 사모하여 아사리(阿闍梨)가 되어 주기를 원하니 중은 이를 허락했다.
이에 그를 좇아 배운지 거의 반년이 되었을 때, 가만히 중이 하는 것을 엿보았더니, 중은 밤마다 북두성에 절을 하고, 밤중이면 일어나서 입으로 줄줄 불경을 외우며, 먹는 것은 다만 솔잎뿐이었다.
안경창은 스님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추위를 이기고 더위를 참는 방법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다른 방법이 있으랴? 오랫 동안 솔잎을 먹으면 자연히 추위에도 춥지 않고 더위에도 덥지 않으며,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몸에 침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했다.
안경창은 또 물었다. “스님께서 외우시는 것이 무슨 경(經)입니까?”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북두(北斗)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다른 중도 솔잎을 먹는 자가 많은데 추위와 더위와 기갈(飢渴)을 참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솔잎 외에 다른 소금이나 간장을 먹으면 정신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어떻게 하면 정신을 거둘 수가 있습니까?” 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욕심이 없어야 한다.”하였다. 안경창은 그 법을 조금 전해 받아서 자못 네 가지 괴로움을 참았기 때문에 사내(四耐)로 자호(自號)를 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실로 이승(異僧)이었고, 안경창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겨울에 베옷을 입고 다리를 내놓고 다니며, 또 얼음을 깨고 들어가 목욕을 했다. 얼굴은 마치 붉은 칠을 한 것 같았는데,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
● 만력 갑진년(1604, 선조 37)에 나는 응교(應敎)로서 송도에 시재어사(試才御史)로 나갔는데, 이때 무과의 인원수가 가장 많아서 수십여 일을 머무르는 동안 매양 안경창과 같이 거처했다.
안경창은 국내의 명산에 두루 돌아다녀 여태까지 유람했던 승경을 잘 말하므로, 나는 재미있게 듣고는 꽤 와유(臥遊)의 흥취가 일었다.
그때 마침 안경창과 박연(朴淵)에서 놀기로 약속을 했는데,
안경창은 또 박연(朴淵)에 대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기를,
“제 나이 열두 살에 같은 마을 족당(族黨)들을 따라서 박연에 갔었는데, 남녀 노소가 거의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때는 마침 4월 보름이라서 철쭉꽃이 한창 피었고 신록이 정말 아름다왔으며 더욱이 비온 뒤라서 폭포 물이 넘쳐 흘러 경치가 가장 좋았습니다.
새로 시집간 여인 하나가 자색이 몹시 아름다웠는데, 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낸 채 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못의 물이 저절로 끓어오르고 물결이 치솟더니 검은 구름 한 줄기가 마치 일산(日傘)같이 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물건이 못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그 모양이 키(箕, 곡식 터는 키)와도 같았으며, 구름과 안개가 모여들어 머리도 얼굴도 분별할 수가 없고, 눈빛만이 번개처럼 번쩍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는데, 그 여인은 놀라 부르짖고 물에 자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친속(親屬)들이 엉겁결에 그녀를 엎고 도망하여 바위 밑에 두었더니, 이윽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메우고, 골짜기가 캄캄해지면서 큰비가 물 쏟아지듯이 내리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습니다.
놀러간 사람들은 모두 나무를 껴안고 앉아서 벌벌 떨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한참만에 날이 개이므로, 엎어지고 넘어지며 분산하여 겨우 동구를 나오니, 태양은 중천에 떴고, 풀이나 나뭇잎에 하나도 젖은 흔적이 없어 비가 온 기운이란 전혀 없었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한 달 만에 죽었는데, 그 후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보니, 그 여인은 흰옷 입은 소년과 함께 박연 못가에서 놀더라는 것이었습니다.”하였다.
● 최영수(崔永壽)란 자는 송도 사람이다. 글공부를 하여 어려서부터 재주 있다는 이름이 있었다. 여러 번 향해(鄕解)에 참여했으나 회원(會院)에서 이롭지 못했다.
공용경(龔用卿)이 조사(詔使)로 왔을 때 태평관(太平館)의 수리감관(修理監官)이 되어 단청을 칠하고 바닥에 까는 것을 몹시 화려하고 아름답게 했다. 조사(詔使)가 관(館)에 들어가는 전날 밤에 모든 도구를 벌여 놓았는데 찬란하여 눈이 부셨다.
이날 밤 최생이 낭사(廊舍)에서 자는데, 꿈에 한 조관(朝官)이 말을 달려 먼저 오더니 두루 관우(館宇)를 돌아보다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거둥하시는데 벌써 동구에 이르렀다.”하더니, 이윽고 문밖에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깃대와 갑졸(甲卒)들이 수 리에 뻗어 있었다.
대가(大駕)가 문으로 들어와서 임금이 대청 북쪽 벽에 앉아 있는데, 용모가 엄중했으나 수심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종자(從者)가 말하기를,“공민왕(恭愍王)이시오.” 했다. 그리고 백발에 금 갑옷을 입은 장군이 왼쪽에 시립했는데 위의(威儀)가 몹시 무서웠다.
종자가 말하기를,“최영(崔瑩)장군이오.” 했다. 또 재신(宰臣) 여섯 명이 오른쪽에 부복하고 있는데, 종자가 말하기를,“맨 윗자리에 있는 분이 목은(牧隱)이고, 그 다음이 포은(圃隱)이오.”하고, 나머지도 모두 이름을 말했지만 잊어버렸다.
또 흰 옷 입은 부인이 있는데 형용이 초췌했다. 소장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그 모양이 마치 평상시에 임금께 글을 올리는 모습과 같았다.
이때 임금은 장군을 돌아다보고 무엇인가 말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중사(中使)가 호령을 전하자 사나운 병졸이 사방에서 나와 죄수 하나를 잡아가지고 뜰로 들어오는데, 몸에 모두 형틀을 씌웠다. 모두 말하기를, “정도전(鄭道傳)이오.” 하였다.
끝 자리에 있던 재신(宰臣)이 일어나서 임금께 아뢰기를,“내일 조사(詔使)가 이 관(館)에 들어올 것이니, 이곳은 죄수를 심문할 장소가 아니옵니다.”하니,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하품과 기지개를 켜다가 깨고 보니 꿈이었다.
최생은 마음으로 몹시 놀라고 이상히 여겨 부중(府中)에 있는 사문(斯文)의 여러 늙은이에게 꿈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묻기를, “흰 옷 입은 부인이 누군지 모르겠소?”하니, 혹자는 말하기를, “필시 신우(辛禑)의 어머니가 억울함을 하소연한 것일게요.”하였다.
고려 말년 군신(君臣)들의 원통함이 맺히고 풀리지 않아서 백년 후에도 이러한 하찮은 꿈에까지 나타나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당시에 나라를 팔아먹은 간사한 자가 정도전(鄭道傳)뿐만이 아닌데 그만 홀로 죄를 받고 있었으니, 어찌 간적(奸賊)의 괴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첨정 차운로(車雲輅)에게 들은 말이다.
● 진이(眞伊, 황진이)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이 꽤 자색이 아름다웠다.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 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 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로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요구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고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도 한 번 마셔 보아라.”했는데, 마시고 보니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황진이(眞伊)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絶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 유수(留守) 송공(宋公)이 처음 부임했을 적에 마침 절일(節日)을 당했다. 낭료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진랑(眞娘)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인(風流人)으로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다. 한 번 그녀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말하기를,“이름은 헛되이 얻는 것이 아니로군!”하고, 기꺼이 관대(款待)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名物)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하고,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들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으며, 붉게 분칠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한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眞娘)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光彩)가 사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손들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조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발[簾] 안에서 엿보고 전날과 같은 변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眞娘)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진랑은 매무새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래 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송공은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했다.
악공(樂工) 엄수(嚴守)는 나이가 70세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했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했다.
노래 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이것은 동부(洞府)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했다.
이때 조사(詔使)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들이 구경하는 자가 모두 모여들어 길 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두목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는데, 그는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너의 나라에 천하 절색(絶色)이 있구나.”했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花潭先生)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으니, 어찌 절대(絶代)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本府)의 어사(御史)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집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書吏) 진복(陳福)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했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러했던가?” 하니, 늙은이는 말하기를,“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했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顚末)을 들었다.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이다.
● 송악(松岳)의 신사(神祀)는 국초(國初)로부터 비로소 성해져서 그 폐단이 불어났다. 그래서 관부(官府)가 또한 무당과 마주 춤을 추는 일까지 있었다.
성묘조(成廟朝.성종때)에 대신들이 위에 아뢰어서 이를 엄금시켰지만 척리(戚里)나 귀가(貴家)에서는 오히려 그전 습관을 답습하였고, 시정(市井)의 부자 상인 집에서는 다투어 사치를 부려 온갖 도구를 줄지어 싣고 성악(聲樂)이 길에 가득했으므로, 한 번 차리는 비용이 중인의 경우 한 집안의 재산을 다 기울여도 오히려 부족하였다.
이런 일은 문정왕후(文定王后) 때에 이르러 더욱 심했다. 중관(中官)과 궁녀가 길에 끊어지지 않고 음식의 제공도 적지 않았으며, 남녀들이 산골짜기를 메워 여러 날씩 머물고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자못 더러운 소문까지 있었다.
이에 본부에 사는 강씨(姜氏) 성을 가진 생원 하나가 유생 4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옥(神屋)을 불사르고 상설(像設)을 헐어버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문정왕후가 크게 노하여 모두 잡아다가 중한 형을 내리라고 명하니 죄수가 연루되어 선비들이 옥에 가득했다. 그리고 유수(留守)로 있던 정승 심수경(沈守慶)도 이를 금하지 못했다 하여 견책을 당했다.
그리하여 삼사(三司)가 서로 글을 올려 석방시키기를 청한 것이 한 달이 넘었으나 문정왕후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는데, 이때 명묘(明廟.명종)가 틈을 타서 여러 번 간하여 비로소 석방하기를 허락했다.
그러자 여러 무당들은 두려워하면서 반드시 귀신의 꾸지람이 있을 것이라 했으나, 강씨는 오래 살고 아무런 재앙도 없었으며, 따르던 유생들도 사마(司馬)와 문과에 오른 자가 역시 많았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혹이 자못 풀리어 신사(神祠)가 폐해 없어진 것이 여러 해 되었는데, 뒤에 또 점차 다시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칠 수 없는 폐단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노국공주(魯國公主)의 능 속에는 금과 보물이 많이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어느날 성 안에 사는 사람의 집에서 말이 도망하므로 주인이 이를 쫓아갔는데 말은 쏜살같이 달려 바로 노국공주의 능 뒤에 있는 언덕으로 가더니 우뚝 섰다.
이에 주인은 말을 잡아서 그 아래를 내려다 보니, 그 곁에 풀무를 만들어 놓고 두 사람이 구멍을 뚫고 있으므로 이에 와서 관청에 사실을 고했다. 이때 정승 심수경(沈守慶)이 유수로 있었는데 군졸을 풀어서 잡았다.
적들은 정신이 혼미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서 그들이 관인(官人)인 줄도 모르고 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잡히고 말았다. 유수가 형구(刑具)를 갖추어 놓고 심문하자 그들은 모두 줄줄 사실대로 불었다.
낭리(郞吏)를 시켜 가서 조사해 보니, 거기에는 망치와 못 같은 기구들이 낭자하게 흩어져 있고, 구멍을 뚫은 것은 거의 한 길이나 되었다. 그러니 아마도 한두 사람이 몇 달 동안 한 역사는 아니었다. 이것을 조정에 알려 즉시 관리를 파견하여 수리하고 두 도둑은 법대로 다스렸다.
아! 전대의 제왕들도 혹 유명(遺命)으로 장사를 박하게 지내게 한 것은 대개 이런 일을 조심했기 때문이다. 도망한 말이 능으로 간 것이나 말 주인이 도둑을 고발한 것은 어찌 신명(神明)이 높게 인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역시 이상한 일이다.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는 본래 낙척(落拓)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고 나이 40여 세에 문음(門蔭)으로 비로소 송경(松京)의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었다. 이때 본부의 관료들이 마침 좋은 명절을 당했으므로 본부의 속관(屬官)들을 모두 청해다가 만월대에서 잔치를 열었다.
한공(韓公)도 여기에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공은 본래 웅호(雄豪)한 데 뜻이 있어 당시는 의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또한 모양도 내지 않았는데, 여러 손님 중엔 귀한 집 자제들이 많아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을 서로 숭상하는 터이므로, 그들은 한공의 행색을 깔보았다.
술이 얼큰하자 그들은 서로 약속하기를,“우리들은 모두 서울에 사는 친구들로서 고도(故都)에 와서 벼슬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런 좋은 놀이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서로 모여 만나기도 기약하기가 어려우니, 이제 마땅히 계(契)를 만들어서 길이 다음날에도 잘 지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했는데, 한공에게는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한공이 말하기를, “나도 거기에 참여하기를 원하오.”했더니, 모든 손들은 이를 비웃었다. 좌중에 본래부터 한공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있어 유독 말하기를,“오늘 한공이야말로 연작(燕雀) 중의 홍곡(鴻鵠)이다.”했다.
이듬해에 한공은 좌명(佐命)의 원훈(元勳)이 되어 공명이 크게 빛났고 3ㆍ4년 이래에 훈공으로 개부(開府)가 되니 지위가 상공(上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 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모두 옛 계급에서 맴돌면서 한갓 한공의 풍성(風聲)을 우러러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한스럽게 여길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송도 사람들은 이것을 기이한 이야기로 여긴다.
예로부터 영웅호걸의 선비도 품은 뜻을 펴지 못했을 때에는 판축(版築)에서 괴롭게 지내기도 하고, 남의 가랑이 밑을 참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풍운(風雲)이 한 번 모이면 하늘과 못같이 멀리 차이 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저들 귀하게 놀던 범상한 사람들이 띠끌 속에 이런 기이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는 것을 어찌 알았으랴?
세상의 세력을 믿고 남에게 거만하게 구는 자를 가리켜 당시 사람들은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고 했는데, 이를 듣는 자는 배를 안고 웃었다.
● 화장사(花藏寺) 불전(佛殿) 뒤에 바위 구멍이 있어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비가 오려고 하면 푸른 연기 한 줄기가 그 구멍에서 일어나서 한들한들하다가 사라지는데, 노승들은 서로 전해 말하기를,
“큰 뱀이 그 속에 엎드려 있으며 기운을 뿜어내서 그렇다.”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마침 장마비가 새로 개고 뜨거운 해가 내리쬐였다. 어떤 물건이 구멍에서 불쑥 나왔는데 마치 고양이 새끼의 머리와 같은 것이 비늘이 번쩍였다.
까마귀떼가 짖어대고 새들이 날아 그 위를 맴돌므로 절에 있는 중들은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또한 무슨 물건인지 알 수도 없었는데, 그 혓바닥이 날름거리므로 비로소 뱀인 줄을 알았다.
그 뒤로는 중들이 학질에 걸리면 그 바위 구멍에 가서 앉아 있으면 학질이 떨어지므로 이로부터 사람들은 모두 이를 신봉해 왔다.
그리하여 원근의 백성들이 병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와서 빌었는데, 향과 음식 같은 것을 여기에 놓고 북을 둥둥 치면 뱀이 나와서 먹었다. 마침내 이것이 관습이 되어 정상적인 것으로 여긴 것이 50년이 되었다.
장단(長湍)에 사는 박만호(朴萬戶)라는 자가 개를 데리고 매를 팔에 얹고 준마를 타고 왔다. 이때 그 마을 노파 하나가 막 병든 어린애를 안고 여기에 와서 지성을 드리자 뱀은 머리를 내놓고 음식을 먹었다. 박만호는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백우(白羽)를 뽑아 그 뱀의 머리를 쏘아 꿰뚫어 죽였다.
절에 있는 중들은 놀라서 서로 다투어 뱀에게 합장하고 절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박만호는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가버렸다. 이런 뒤로 그 요물이 드디어 없어졌다.
그 뒤 10여 년에 박만호는 당상관에 승진하여 고을 원을 역임하다가 늙어서 자기 집으로 물러왔다. 고향의 족속을 거느리고 절에 와서 계(契)를 하는데, 백발은 휘날렸으나 용모는 엄하고 굳세었다.
여러 중들은 익히 쳐다보고 말하기를, “이 노인이 당시에 뱀을 죽이던 자와 같다.” 하고 서로 의심이 나서 그 종에게 묻기를, “이 분이 장단 박만호가 아닌가?”했다. 종이 그렇다고 하자, 여러 중들은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박만호는 자리에 있는 손들에게 말하기를,
“이 절에는 옛날에 요괴스러운 뱀이 있었는데 내가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소. 중들은 내가 반드시 뒤에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지금 나이나 지위가 모두 높은 터이요.
뱀은 미물인데 어찌 사람에게 화복을 줄 수가 있겠소? 더구나 옛날로부터 뱀을 죽이고서 복을 얻은 자는 얼마든지 있소. 그러니 전날에 어리석은 중들이 의혹한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오.”했다.
이 말을 듣고 좌중의 손들은 탄복하였다. 박만호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반드시 아는 것이 많고 기이한 사람일 것이다. 그 자손이 번창해서 지금은 거족(巨族)이 되었다 한다.
● 사문(斯文) 차천로(車天輅)는 차식(車軾)의 아들로서 호는 오산(五山)이다. 문장에 능하고 더우기 시를 잘하여 장편(長篇)과 거작(巨作)을 별로 생각지도 않고서 끊기지 않고 줄줄 써 내려 갔는데, 구법(句法)이 웅건하므로 입에 오르내려 전해 외우는 자가 몹시 많았다.
중국 사신이 올때마다 제술관(製述官)으로 빈상(儐相.원접사)을 따라가서 시를 읊어 주고 받는데, 만일 강운(强韻)이나 짓기 어려운 체제를 만나면, 반드시 차천로의 시를 내놓으면 중국 사신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고 탄복했다.
선묘(宣廟.선조)가 인재를 길러서 시로써 세상에 울린 자가 많이 나왔으나 그 웅혼(雄渾)하고 부섬(富贍)한 것이 모두 차천로에게 미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그가 저술한 시문도 권질(卷秩)이 꽤 많았는데, 다만 사람됨이 우활해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직 마시고 먹고 글을 읊을 뿐이었다.
일찍이 알성과(謁聖科)에서 남을 대신하여 글을 지어 주었는데, 그 사람이 과연 장원했으나 일이 탄로가 나 그 과거가 취소되고 차천로는 옥에 갇히어 죄를 얻었다. 이 때문에 비방이 일어나서 드디어 불우하게 되어 벼슬이 겨우 4품으로 세상을 마쳤다.
그 아우 차운로(車雲輅)가 개성교수(開城敎授)로 있었는데, 그때의 유수 조공진(趙公振)이 제법 천문(天文)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운로에게 이르기를,“요사이 규성(奎星)이 광채를 잃었는데 이렇게 되면 문인(文人)이 반드시 죽는 법이요. 지금 세상에 문장으로는 그대의 백씨(伯氏)만한 이가 없으니, 혹시 이 별의 변괴가 백씨에게 맞는 것은 아닐까?”했는데, 얼마 안있어 차천로가 과연 죽자 듣는 자들이 이상히 여겼다.
차천로가 만일 별의 정기를 타고 났다면 인품과 명위가 어찌 그다지도 천렬(賤劣)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가 타고 난 것은 다만 뛰어난 재주일 뿐으로, 시를 짓는 궁한 데에 주저앉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 애석한 일이다.
● 한호(韓濩)는 송도 사람으로 호는 석봉(石峰)인데, 필법(筆法)이 힘차고 아름다워 스스로 한 체(體)를 이루었다. 공사(公私)간의 비석이나 묘갈ㆍ병풍ㆍ족자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모두 보배로 여겨 간직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은 하늘이 낸 성인의 기질에다가 또 시ㆍ서ㆍ화에도 모두 묘법을 얻었는데, 그의 필적을 볼 때마다 탄식하기를,“세상에 드문 특출한 재주다. 이 조그만 나라에 이런 기이한 재주가 태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했다.
중국에서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난 자도 역시 한호의 글씨를 보고는 놀라고 탄식함을 마지않으며 평가하기를, “목마른 고래가 구렁에 나가는 것 같다.”했는데, 이것은 그 글씨의 힘이 웅건함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사 가서 석봉의 이름이 천하에 전해졌다.
한호(韓濩)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제일 힘을 들인 글씨는 서화담(徐花潭)의 비석이다.”했는데, 지금 그 인본(印本)을 보니 참으로 묘필(妙筆)이었다.
국조(國朝)에서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후의 서법(書法)은 한호로서 첫째를 삼는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근신하며, 한미한 데서 일어나서 글씨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다. 벼슬은 겨우 군수에 이르고 죽었다.
● 유성(有成)이란 자는 송도의 천한 사람인데, 키가 8척에 용모가 헌칠했다. 일찍이 역부(役夫)로서 능(陵)의 공사에 나갔는데, 고을 원으로서 역사를 감독하는 자가 본래 상(相)을 잘 보았다. 여러 사람중에 유성(有成)을 바라다보고 마음으로 몹시 이상히 여겨 불러 묻기를, “너는 어떠한 사람이냐?” 했다.
유성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고을 원은 말하기를,“아깝구나. 지극히 천한 데서 태어났지만 역시 기이한 상(相)이 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세상을 덮고 수와 복이 몹시 크겠다.”하고, 드디어 군부(軍簿)에서 제명시켜 물러가게 했다.
이로부터 유성은 장사에 힘써 재산이 넉넉했고, 어미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느날 그 어미에게 말하기를,“일찍이 듣자오니 우리는 사족(士族)의 종이라 하옵는데, 여러 대를 숨어 사는 것은 의리에 상서롭지 못하옵니다. 옛 주인의 성명과 관향(貫鄕)을 어머니는 기억하십니까?” 했다.
어미는 크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내 나이 14세 때이다. 너의 아버지가 행상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나는 이웃 집 할멈의 꾀임에 빠져 만나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너의 아버지는 나를 구박하여 데리고 내려왔다.
그때 어찌 도로 가고 싶지 않았으랴만, 나는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가는 길을 알지 못하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흘러 지금은 이미 늙었구나.
너의 주인 영감은 바로 김감찰(金監察)인데 이름은 잊었고, 서울 아무 동(洞)에 살았었다. 주인 영감과 주인댁은 나를 딸처럼 생각하여 음식을 반드시 나누어 주었으며 한 번도 매 때린 일이 없었다.
그리고 처자(處子) 하나가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동갑내기로 항상 나와 한 곳에서 같이 놀았다. 그 선연한 모습이 꿈에도 항상 보일 뿐,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주인집 소식이 막연하여 들을 수가 없다.” 했다.
유성은 말하기를,“종으로서 주인을 배반하는 것이나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는 것이나 그 나쁘기는 한가지입니다. 오래도록 돌아가 뵙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내가 마땅히 공물을 갖추어 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이름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찾아간단 말입니까?” 하니,
어미가 말하기를,“주인의 이름은 비록 기억하지 못하지만 같이 있던 비복(婢僕) 아무 아무는 모두 나보다 나이가 아래였으니 필시 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을 방문하면 거의 찾을 수 있을 것이다.”했다.
유성은 즉시 포목과 토산물을 갖추어 가지고 김감찰(金監察)의 옛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감찰은 이미 10년 전에 돌아갔고, 그 부인도 나이가 늙어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며 딸 하나도 또 먼저 죽고 없었다.
유성은 공물을 갖다 바치고 지난 곡절을 갖추어 말한 다음 뜰에 내려가 절하고 뵙는데, 말과 체모가 지극히 공손하였다. 부인은 놀라고 슬퍼하며, 집안에 있는 늙은 종들도 서로 감탄하면서 유성을 후하게 대접해 보냈다.
유성이 돌아와서 그 어미에게 말하니, 어미도 상전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곧 초상을 발표하고 목을 놓아 슬피 울었다.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내는 공물 이외에 또 절기에 따라 물건을 보내어 거의 거르는 달이 없었다.
그런 지 5ㆍ6년에 부인의 병이 위중했다. 유성은 기별을 듣고 달려가서 진귀한 음식을 많이 바치니, 부인은 감동하여 임종 때에 문서를 만들어 면천(免賤)하게 했다.
유성이 여러 번 사양했으나 할 수 없었다. 그가 죽자, 유성은 초상을 발표하고 통곡하면서 수십 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한때도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힘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면천의 문서를 묘 앞에서 불사르고 통곡하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유성은 말하기를,“모자가 40년 동안 숨고 피했으니 그 죄가 몹시 중하거늘, 주인댁이 인자하시어 이것을 버려두고 묻지 않았으니 그 은혜가 중한데, 도리어 면천의 문서를 받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탄복했다.
주인집의 문족(門族)이 의롭게 여겨서 문서를 다시 써서 위로하고 주어 돌려보냈다. 유성은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고 반드시 제사에 참석하여 슬피 울어 흐르는 눈물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리고 절일(節日)에는 반드시 제수를 마련해다 바쳤고 또 종신토록 주인집에 충성을 다했다.
● 또 유성이 젊었을 때 여러 젊은이와 성거산(聖居山)에 가서 노는데 큰 범이 숲속에 죽어 있고, 곁에 두 새끼가 주려서 거의 죽게 되었다. 여러 젊은이들은 모두 큰 범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취하고 두 새끼마저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유성은 말하기를,“죽은 물건은 더러우니 손을 댈 수가 없고, 두 새끼는 어미를 잃었는데 어찌 차마 때려 죽인단 말이냐?”하고 힘껏 말려서 그만두었다. 유성은 두 새끼에게 밥을 먹이고는 안고 돌아와 집에 두고 길렀다.
4ㆍ5개월이 지나 점점 장성하더니, 달음질할 즈음에는 휙휙하고 바람 기운이 일었으며, 사람을 보면 으르렁거리며 물려는 모양을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고 유성도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집 뒤 산골짜기에 옮겨 놓고 날마다 쌀밥을 갖다 먹였다.
또 한 달이 지나자 두 범은 간 곳이 없으므로 유성이 산에 올라가 두루 살펴보니, 두 범은 산밑에서 한 어린애를 함께 먹고 있었다. 유성은 놀라고 해괴하게 여겨 달려와서 이로부터는 드디어 끊고 말았다.
이듬해 겨울 밤중에 범이 집에 와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니 문밖에 큰 사슴 한 마리가 놓여져 있었다. 유성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드디어 이웃과 일가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런 지 몇 달 후에 또 큰 사슴을 갖다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보고는 이상한 일이라고 감탄했다. 유성은 말하기를,“이 물건은 사사로이 쓸 수가 없다.”하고 즉시 관가에 바쳤다.
이때 유수 강공 현(姜公顯)이 일찍부터 그 일을 들어왔는데, 그의 인물이 웅위(雄偉)한 것을 보고, 대하여 은근히 이야기하더니 탄식하기를, “옛날 열사(烈士)의 풍도가 있고 게다가 성효(誠孝)까지 겸했으니, 참으로 이인(異人)이로다.”했다.
유성의 명성이 원근에 전파되자, 본부를 지나가는 사자(使者)는 그를 불러 보지 않는 자가 없었고, 보면 반드시 숙연(肅然)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이상하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의리를 구별해서 행하는지 알 수가 없다.”했다.
본부의 유생과 부로(父老)들이 유수에게 글을 올려 ‘위에 아뢰어 그 탁월한 행검을 표창하여 격려하고 권면하는 방도를 보이도록 해달라.’고 청원했다.
유수가 즉시 전하여 아뢰자, 중묘(中廟.중종)는 특히 복호(復戶)를 명하고 또 본부로 하여금 후하게 먹을 것을 주도록 했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은전이었다.
유성의 성은 이씨(李氏)로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또 효도를 다하여 유성은 늙어서도 편안해 살다가 나이 90세에 가까워 죽었다.
그 자손들이 경향에 흩어져 사는 자가 몹시 많았는데, 역시 무과로 벼슬이 수령과 변장(邊將)에 이른 자까지 있었으니, 이 어찌 선을 쌓은 보답이 아니랴? 지금껏 송도 사람들이 미담으로 여긴다고 한다.
●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 30)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이 풍덕(豊德)에 거둥하여 제능(齊陵)을 참배하고 인하여 송도로 가서 목청전(穆淸殿.이태조의 옛집)에 가 뵈었다.
호가(扈駕)하던 문신으로 하여금 전조(前朝) 최사립(崔斯立)의,
천수문 앞에 버들개지 날으는데 / 天壽門前柳絮飛
술 한 병 들고서 친구 오기 기다리네 / 一壺來待故人歸
해 지는 거리를 뚫어지게 보아도 / 眼穿落日長程畔
많이 오는 행인이 가까와 보면 아니네 / 多少行人近却非
라는 운(韻)에 의해서 글을 지어 올리게 했다.
이때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전승개(田承漑)의 시(詩)에,
천수문 앞에 버들개지 날으는데 / 天壽門前柳絮飛
술 한 병 들고서 친구 오기 기다리네 / 一壺來待故人歸
고금의 흥폐는 심상한 일이어니 / 古今興廢尋常事
청산을 향해서 시비를 묻지 마오 / 莫向靑山問是非
라고 하였다.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이 고취(考取)를 했는데 전승개의 시를 첫째로 삼으니, 중묘(中廟.중종)는 특별히 명하여 6품관으로 발탁하여 서용했다. 전승개는 홍주(洪州) 사람으로 시에 능하다는 이름이 있었고, 여러 번 수령을 거쳐 시정(寺正)으로 마쳤다 한다.
● 사문(斯文) 임제(林悌)는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일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송도를 지나다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진이(眞伊)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글이 호방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외워지고 있다.
임제는 일찍이 문재(文才)가 있고 협기(俠氣)가 있으며 남을 깔보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침내 예법을 아는 선비들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이 겨우 정랑(正郞)에 이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애석한 일이다.
[조선 문신 이덕형(李德泂)]
이덕형(李德泂.1566.명종 21∼1645.인조 23)
조선 인조(仁祖) 때 명신(名臣).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한산(韓山). 이언호(李彦浩)의 증손.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3년간 선조를 섬겨 응교(應敎)에 이르렀고, 광해군(光海君) 때 도승지(都承旨)까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반정을 보고하고 능양군(綾陽君:仁祖)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의금부판사⋅돈령부지사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병자호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 <죽창한화(竹窓閑話)> <송도기이(松都記異)>
첫댓글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한음 이덕형에 관한 자세한 자료를 소개해 주셨군요. 송도기행은 영조때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덕형이야기가 나오면 백사 이항복이 빠질 수 없는데 이항복이 먼저 죽자 아들이 이덕형을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글이 자못 아름답기에 댓글로 올립니다.
며칠이 지나 그(한음 이덕형)의 고자(孤子) 여벽(如璧)이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곡을 하고 상장(喪杖)을 내려놓으며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나에게 올리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이 늙은이의 마음은 친구 이모(李某)가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분은 오직 대부(大夫)뿐이십니다. 이에 감히 아버지의 묘지문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이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 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 지었다. 진나라는 국정을 여기에 의지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내가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보다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한참 뒤처졌다.
태평 시절에는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번갈아가며 군대를 관장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 때는 형제처럼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쳤으니, 평생 벼슬한 자취가 대략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였고, 그대의 아버지를 사모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 젊을 때에는 삼밭의 삼대에 의지하는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천리마의 꼬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 어찌 그대의 아버지를 위해 즐겁게 묘지문을 쓰지 않을쏜가.”
이항복의 시 한귀절입니다
常願身爲萬斛舟
몸이 만 섬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되어
中間寬處起柁樓
중간 넓은 곳에 선실을 세워둔 채
時來濟盡東南客
때가 되면 동쪽과 남쪽의 나그네를 모두 건네주고서
日暮無心穩泛遊
해지면 말없이 평온하게 떠다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