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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이야기 송도기이 (松都記異)
추공 추천 0 조회 863 20.02.16 02:02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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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0.02.16 20:17

    첫댓글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한음 이덕형에 관한 자세한 자료를 소개해 주셨군요. 송도기행은 영조때 강세황이 그린 송도기행첩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덕형이야기가 나오면 백사 이항복이 빠질 수 없는데 이항복이 먼저 죽자 아들이 이덕형을 찾아와서 묘지명을 부탁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글이 자못 아름답기에 댓글로 올립니다.

  • 20.02.16 20:17

    며칠이 지나 그(한음 이덕형)의 고자(孤子) 여벽(如璧)이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곡을 하고 상장(喪杖)을 내려놓으며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나에게 올리며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이 늙은이의 마음은 친구 이모(李某)가 잘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분은 오직 대부(大夫)뿐이십니다. 이에 감히 아버지의 묘지문을 부탁드립니다.”

  • 20.02.16 20:17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이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 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 지었다. 진나라는 국정을 여기에 의지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내가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보다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한참 뒤처졌다.

  • 20.02.16 20:18

    태평 시절에는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번갈아가며 군대를 관장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 때는 형제처럼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쳤으니, 평생 벼슬한 자취가 대략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였고, 그대의 아버지를 사모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 젊을 때에는 삼밭의 삼대에 의지하는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천리마의 꼬리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 어찌 그대의 아버지를 위해 즐겁게 묘지문을 쓰지 않을쏜가.”

  • 작성자 20.02.17 11:16

    이항복의 시 한귀절입니다


    常願身爲萬斛舟

    몸이 만 섬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되어


    中間寬處起柁樓

    중간 넓은 곳에 선실을 세워둔 채


    時來濟盡東南客

    때가 되면 동쪽과 남쪽의 나그네를 모두 건네주고서


    日暮無心穩泛遊

    해지면 말없이 평온하게 떠다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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