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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gJy8OuYNop0?si=Bb5kJpHeHcNRszWz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반응 26:24~29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무죄를 인정하는 권력자들 26:30~32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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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자신더러 미쳤다 하는 베스도 총독에게 자신은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아그립바왕도 믿기를 거부하자 바울은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가 자신처럼 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왕은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고 그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뻔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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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반응 26:24~29
헬라 문화에 젖어 있던 이방 권력자들에게 부활은 허황된 이론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24절)라고 소리칩니다. 바울이 학식이 많은 사람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말한 부활 신앙은 비정상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기에,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것이 ‘참되고 온전한 말’(25절)임을 확신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믿음을 독촉하지만, 아그립바는 바울의 전도 행위를 반박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죄수와 같이 결박된 상황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증인입니다. 그는 이방 권력자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사랑과 열정으로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아그립바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리지 않으면, 생명의 복음을 들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아그립바를 비롯한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품은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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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를 인정하는 권력자들 26:30~32
이방 권력자들은 만장일치로 바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공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지만, 바울에게는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특히 아그립바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시민의 권리로 가이사에게 상소했기에, 바울은 자신의 원대로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 몇 차례에 걸친 심문과 변론을 통해 회심 간증과 부활의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성령에 매인 자 되어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 더 깊은 묵상
이방 권력자들은 바울의 죄목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나요?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
한절묵상:사도행전26장 24절
베스도 총독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라고 말합니다. 지식의 과함이 바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때로 '미쳤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그들이 사는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선택한 성도에게 '미쳤다'라는 말은 오히려 믿음으로 산다는 칭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선택하고 섬기는 사람이 참된 성도입니다.
우리는 그냥 살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창조되고 부름받았다. - 마크 부캐넌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이 주는 달콤한 향기보다 나음을 믿습니다. 복음을 거절하고 진리를 부인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것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을 긍휼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그들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98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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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는 아그립바 왕의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가고 싶었던 로마를 자신의 발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유대의 공회나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로마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십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세상의 권세와 능력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상황에 있든지 그는 복음 때문에 자족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일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세상을 쫓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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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 베스도 총독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바울이 아그립바에게 한 호소로,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된 일이 아니기에 아그립바왕께서도 이 일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과 더불어 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유대나라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베스도에 비하여 아그립바는 바울의 변론를 변명 이상의 것으로 들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는 그 때 자신의 알량한 영적인 지식으로 판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피상적인 것이라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전도하려고 했다고 바울에게 불쾌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온전치 못한 지식의 잣대로 들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를 설득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받아 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 이성이나 합리성 그리고 지식으로 받아 들이면 영적인 진리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문학도, 과학도 아닌 영적인 책이라, 영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작은 지식외에 큰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말씀을 묵상할 때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이성으로 난도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야 할 말씀을 죽여 버리는 것이지요. 정작 우리들 삶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말씀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의지함이 중요하니, 그 분의 도움이 있어야 지식에 머무는 차원을 벗어 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살아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 성령의 조명하심은 필수입니다. 요즈음 T.V.나 인터넷에 수 많은 설교나 성경연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을 추구하여 만족하게 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경공부를 위한 성경공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대가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성경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막상 예수가 메시아로 오자 그들은 그 지식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지식으로 판단만 하였지, 그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잘은 모르지만, 메시아가 올 것을 믿은 선량한 사람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여인들을 포함하여 소외층들은 그를 구원자로 믿습니다. 한 가지 영적인 지식이라도 그들은 실체화한 것입니다. 열을 아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 낫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요.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실체화, 인격화를 말합니다. 이는 지식으로 그쳐서는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삶을 거쳐야 합니다. 지식은 삶을 거쳐야 비로소 능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후손들이 바울을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삶을 통하여 말씀이 능력으로 드러난 귀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영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실천된 것만큼 자기 것이 되는 법입니다. 한 가지라도 실천함으로 영적 지식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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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바울이 심문 받는 자리를 복음 전하는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바울이 미쳤다고 비난했습니다
왕 역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수 있었다고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2년이나 구금한 것은 그들이었고,
상소하지 않았다면 이런 심문 자리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예루살렘에 끌려가다가 길에서 매복한 자들에게 죽임 당했을 것인데도
상소한 것 때문에 석방되지 못했다는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심령은 억울함이나 분노가 아니라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그들의 모습이 자신의 옛 사람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하셨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보면 이런 뜻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추격하느냐 너야말로 사망의 추격을 받고 있으니 네가 고생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이 뒤따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높고 자유하다고
착각하는 그들이 불쌍했을 뿐입니다 "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 믿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해방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1:5~6)
그래서 이제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 생명의 샘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14:27)
그러므로 오늘도 주께서 위로로 가득하게 하시고
소망과 기쁨이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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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통해 간접적으로 비치는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 베스도의 마음은 요동치며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독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재판장으로 앉아 있는 그 직위에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그 복음의 선포는 강렬했고 또한 자신이 정죄할 원고석에 죄인으로 묶여 서 있는 바울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가 바울을 변호를 중간에 막고 소리치며 그 빛의 메시지에 대해 지식으로 인해 미쳤다고 이야기했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정신의 온전함과 아그립바 왕조차 분명히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온 하나님의 뜻의 성취임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아그립바 왕과 모인 모든 무리들은 자신에게 임한 복음의 진리 앞에 스스로의 죄악과 거짓, 탐욕을 안고 버텨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내어쫓고
화려하게 입고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자들보다
쇠사슬에 묶인 바울이 더 힘 있고 복되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누가 판단하여도 세상과 하나님 앞에 무죄였지만
로마에서도 그 능력의 복음을 전할 바울을 여호와께서는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주목하여 바라보시는 여호와 앞에
오늘도 그림자도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빛을 좇고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의 손길을 붙드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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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구원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에 세 번의 큰 기회가 온다고 하는데
구원에 이르기는 기회보다 더 큰 기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에 응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엄청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이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요청에 거스르지 아니하고 순종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진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회개는 돌이킴인데 그는 철저히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 사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진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길을 갔습니다.
그 길을 가다가 지금은 결박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박당한 것이 그의 길을 또 세상으로 가도록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3) 그는 성경에서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며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이라는 빛을 보여줌으로 새로운 시대와 영원한 시대를 볼 수 있게 한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둠의 길을 가던 곳에서 회개하여 이제는 빛을 품고 빛을 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2.사람들의 거부
바울의 말을 들은 베스도가 크게 소리내어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4) 그는 바울이 너무 많이 공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죄는 없으나 그가 주장하는 부활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아그립바 왕은 조금 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행 26:26) 아그립바 왕은 혈족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교를 받아들임으로 유대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왕으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했습니다. 곧 그는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바울의 이야기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8) 아그립바 왕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그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바울이 '적은 말로 그를 개종시키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은 말 많은 말이 아니라 진리인지 아닌지가 중요한데 그는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왕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그렇게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회개를 한 이후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행 26:20)
처음 다메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이방에게까지 계속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자신이 놀랍도록 변한 분명한 간증과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복음과 회개는 쉽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참 어려운데요. 신약 성경에서는 믿음과 회개를 거의 동의어처럼 취급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믿음이 어려운 것은 회개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단지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께"라고 말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돌이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또 하나의 지식을 더 갖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지식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지식과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을 던지고 새로운 사실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이야기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말에 많이 동의하면서도 바울의 말에 따라 회개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바울은 회개하였습니다. 진리를 거스릴 수 없어 철저히 회개하고 그 길을 갔습니다. 믿음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 베스도에게는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에게는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한 삶이 아니라 이전에 가던 그 길을 그대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개는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둠의 길을 가던 길에서 그것이 얼마나 멸망의 길인지를 깨닫고 이제는 빛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회개가 이전의 삶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어려울 수 있으나 이전의 삷이라는 것이 어둠이요 멸망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음성에 따라 회개하십시오. 어둠에서 빛으로 회개하십시오.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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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글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을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신비한 체험으로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문외한인 베스도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 바울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가 미친 것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은 이 부문에서 사실상 끝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조현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듯이 영적인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의 생각에는 바울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몰두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적 차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끔 자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듯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만 주된 관심이 있는 베스도의 모습은 복음의 신령한 메시지를 영접한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대조를 이룹니다(13:7, 12).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그밖에는 희랍의 철학이나 당시의 최고 학문에 대해 폭넓은 지식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베스도가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렸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 하여금 미친 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개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고후 5:13). 주님께서도 살아 생전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요 10:20).
(온전한 말을 하는 바울)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바울은 이런 아그립바왕에게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미친 자가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은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심한 말로 맞섰던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다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이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보고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신비적인 것을 이성화할 수 없으면 그것은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신비적인 것을 이성화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 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바울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대히 말하노니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함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바울은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진실대로 말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 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삶이 공개적인 것이었고(눅 22:53). 그분의 죽음 또한 여러 증인들에 의해 목도 되었고(눅 23:26, 35-37). 예수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증거와 현현 체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마 28:9-11막 16:12, 14), 그처럼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20절1:82:14막 16:20).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선지자를 믿느냐고 묻습니다. 선지자를 믿으시냐는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가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습니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피상적 지식차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예언된 바 메시야에 관련된 구절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합니다. 복음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실한 것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복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의 기회를 예수님 증거의 기회로, 자기 구원의 기회를 타인 구원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세상 권세에 기죽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을 외친 참된 복음의 증인이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단 한번에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적은 말로 나를 권한다고 말합니다. 적은은 전치사 엔과 함께 쓰일 때는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적은 말은 RSV처럼 짧은 시간 안에(in a short time)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아그립바왕은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왕도 바울처럼 되기를 바람)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은 말이 많고 적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박된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는 길거나 짧거나(whether long or short)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간에,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산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아울러 애정 어린 소망을 기원합니다. 바울은 죄수였지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게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18절). 바울의 마지막 말과 행동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는 가이사랴 최고의 권세가들 앞에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사슬이 매여 있습니다. 그런 모습의 바울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세가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진정한 영적 자유에로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왕은 몸은 자유인이나 마음에는 슬픔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유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슬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맺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는 그리스도를 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에 대해서도 긍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왕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자긍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바울은 현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죽은 후에 있을 하나님 나라와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비록 왕이지만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죄수라도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마음에는 성령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의가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부활하여 왕노릇할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선언함)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서 공통적으로 바울이 무죄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배석했던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바울을 비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소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무죄는 천부장 루시아(23:29), 벨릭스(25:25)에 이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석방할 수 없음)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을 석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석방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입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바울의 무죄를 최종적으로 조언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그밖에도 베스도가 항소 이유서를 작성할 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 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사도행전 23장11). 바울의 석방되지 못함은 도리어 그에게 가장 안전한 로마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
바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해보다 밝은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분을 직접 만나면 다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주의 종을 통하여 이분을 만나고 말씀을 통하여 이분을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은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결박당할지라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이나 총독이나 대제사장 앞이라도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여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를 통해 세상 권세자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지만, 이는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마10:18). 하나님은 세상 권세자들도 불쌍히 여기시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복음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인 구원의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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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은 베스도가 사용한 네가 미쳤다는 찬사에 집중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미쳤다는 말을 찬사라고 표현하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르게 예수를 믿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 네가 예수에 미쳤다는 말은 찬사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니아(Mania)라는 말을 아십니까? 마니아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쓰입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해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을 때 마니아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사실 마니아라는 말은 고상한 표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디오 마니아, 영화 마니아, 혹은 독서 마니아라고는 사용하지만 도박 마니아, 축구 마니아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도박에 빠졌다. 혹은 축구에 미쳤다고 씁니다. 그런데 사실 마니아라는 말과 빠졌다 혹은 미쳤다는 말은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말은 미쳤다는 같은 단어를 뭔가에 심취해 있는 상태와 정신 분열적인 상태를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시대에는 정신분열적인 상황을 미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픈 것입니다. 감기가 들렸거나, 몸에 이상이 생겨서 아픈 것처럼 머리에 어떤 물질이 과도하게 분비되어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들을 폄하하는 의미에서의 미쳤다는 표현을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미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아야 할 이야기는 바로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말을 가로채서 “네가 미쳤다”고 소리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광신과 건전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때 그리스도인을 미친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너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지 않아 있다”고 질타하는 듯이 보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과거 회귀적이거나 회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과거가 하나님의 간섭이었으며 은혜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으며 나는 그것에 거스르지 아니하고 여기까지 와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전한 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구체적이고 힘 있는 복음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간결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뜬 구름을 잡는 것 같은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확신에 넘쳤습니다. 그가 죄수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나타내는 반응은 참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먼저 베스도의 반응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스도의 반응(24절)
베스도는 이미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법에 충실한 관리였습니다. 베스도는 헬라문화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우월감에 충만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내가 이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까 자신들의 종교, 즉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뿐이지 내가 생각했던 범죄가 성립될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자기들의 종교라는 말은 데이시다이모니아(deisidaimoniva)입니다. 미신이라는 말입니다. 귀신놀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비하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에게는 유대교나 기독교나 귀신놀음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런 모습이 미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스도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 주는 한마디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둘 다미신인데 서로 싸운다는 식의 생각인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헬라적인 신앙, 헬라적인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인데 정복 민이라고 하는 우월 의식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 베스도가 바울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간증을 듣다가 중간에 바울의 말허리를 자르며 소리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그랬습니다. 이 한마디가 바울의 간증을 들은 베스도의 소감인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베스도의 시각으로 볼 때 바울은 불건전하게 미쳐 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베스도는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의 시각으로는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까 생각이 혼란스러워져서 정신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쳤다는 말이 참 재미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마이노마이(maivnomai)가 사용되었고 뒤에는 마니아(maniva)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마니아는 앞에 사용된 마이노마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 말의 본래적인 의미는 광인처럼 미친 듯이 날뛴다는 말입니다. 미쳐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의 관점에서 데이시다이모니아, 즉 귀신을 섬기는 종교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는 이 말은 좀 다르게 사용하는 듯 합니다. 오디오 가운데 롯데 마니아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흔히 뭔가 취미 생활을 좀 깊이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마니아 혹은 마니아라고 합니다. 이 말이 원래 헬라어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인 뜻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광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Computer mania, 또는 Audio mania라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데 원래 이 말은 오디오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적인 의미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어의 마니아는 여기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리고 뭔가에 열중해 있는 상태, 광적인 심취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craz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친, 미치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에 홀딱 빠졌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mad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실성했다는 의미입니다. 개가 광견병에 걸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이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뭔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insane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미친, 광기에 사로잡힌 것을 의미합니다. 진짜 미치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정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어쨌든 베스도의 시각에서 바울은 미치광이입니다. 귀신놀음에 생명을 걸뿐만 아니라 그 많은 학문을 가지고 도무지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의 차이는 이렇게 서로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스도가 이 간증을 이렇게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깊은 세계관의 벽을 발견합니다. 베스도는 로마적인 사고방식, 헬라 문화에 길들여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으로 보니까 바울의 간증이 참으로 논리적이고 배운 사람답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도무지 자신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하더니 미쳤구나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행11:26절에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말을 기억하시지요? 이 때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굳이 베스도식의 표현으로 한다면 Jesus mania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지도했던 바울이 지금 베스도 앞에서 예수 마니아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비록 베스도는 바울과 신앙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경멸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을 지언 정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이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예수 마니아라고 하겠습니까?
마니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입만 열면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입만 열면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총, 사죄의 은총을 전합니다. 이게 마니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마니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마니아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마니아, 찬양 마니아, 전도 마니아가 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자나 깨나 주님을 생각하는 뜨거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너무 비인격적인 전도를 하거나 예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함으로 듣는 경멸적인 호칭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를 너무 사랑해서 좀 미친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모여 앉으면 오늘 말씀이 어땠느냐, 오늘 말씀대로 이렇게 승리했다는 자랑과 간증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에 온전히 미친 예수 마니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우리 광신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out of mind, 즉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슨 광신적인 행동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도 바울에게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열정에 대한 찬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답변
자, 이제 사도 바울의 답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25절입니다.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그럽니다. 이 말은 “나는 지금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시선을 아그립바에게 돌렸습니다. 베스도와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소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린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구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로 선지자를 믿으시느냐고 질문합니다. 누가 재판하는 사람이고 누가 심문을 받는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머쓱해진 아그립바가 뭐라고 답변합니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말이 상당한 설득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아그립바가 사용한 단어가 크리스티아노스(Cristianov")입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 11:26절에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했을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는 사도 바울의 말을 잘 알아듣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정말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한마디를 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절)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확신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실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의 몸으로 재판정에 서 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합니까? 저는 이것이 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이도 들었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도 없고 자녀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안정된 가정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입에서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선언이 떨어졌습니다. 이게 진정한 예수 마니아입니다.
이런 사람이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나의 삶이 당신들의 삶보다 나으니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확신입니까?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 마니아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예수 마니아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빛으로 오셔서
모든 어둠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참 자유와 평안을 허락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그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며
온전히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삶을 세워가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기도와 간구의 선한 통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붙드시고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