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제1독서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2-5.24-28ㄷ
제삼십년 넷째 달 2 초닷샛날, 곧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오년에,
3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4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
5 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24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5 그들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6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27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려면: 무분별의 지혜
몇 년 전에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서 한참 물을 뿌리며 노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고등학교 남학생들로 보이는 아이 중 한 무리에 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듯 저를 째려봤습니다.
물놀이 시설에서 물속에 앉아서 얼굴에 물이 조금 튀었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 나빠 할 것이면 물 밖에 앉아있던가 물놀이를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굳이 거기 앉아서 당연히 튀는 물에 기분 나빠하는 아이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에게 무례하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의 분별심을 잠시 접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해주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학교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심각한 자세로 돌아앉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남 탓을 하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심이 극도로 치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분별심을 없애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또 성전세를 내는 것도 어쩌면 자존심 상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이 궁궐에서 세금 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도 성전에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이 가진 돈을 주시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 주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신다는 뜻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화로 2만 원 정도 하는 한 스타테르 동전을 문 물고기가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잡힐 확률은 실제로 없다고 보아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모르는데 뭐를 판단하니? 너의 판단을 멈추어라!”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분별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다 알아서 분별해주기 때문입니다. 분별심은 ‘나’가 자신을 지키려고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맹수와 함께 뛰노는 곳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을 때 분별심이 커지고 그 자아 때문에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삽니다. 그러다 회개하지 못하면 천국 무분별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장 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듯이 주교님의 무분별한 자비심으로 회개하여 신분 세탁하고 존경받는 시장이자 공장 소유주가 됩니다.
자베르 경감은 법과 사람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믿는 완고하고 냉혹한 경찰관입니다. 그는 가석방을 위반한 장발장을 자신의 도덕적 의무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1832년 파리 봉기 동안 장발장은 혁명가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자베르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이미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 발을 뗀 장발장은 복수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그를 풀어줍니다.
“당신은 자유롭고 조건이 없습니다. 거래나 청원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이 자비로운 행동은 자베르의 세계관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는 장발장의 친절함과 그가 받은 자비와 법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죄수가 그러한 연민을 보일 수 있고 자비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에 대한 의무와 그가 받은 자비 사이의 내부 갈등에 대처할 수 없었던 자베르 경감은 궁극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센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합니다. 나를 품고 계신 분이 정의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러니 나의 분별심을 그분께 봉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처럼 판단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자비심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지옥으로 만드는 자아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연은 신이 만든 건축이며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안토니 가우디).
사진설명: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