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연가― 81세 욘사마 / 자향
“여보! 이제 여름도 서서히 떠나가는데, 우리 어디 냇가에 나가 개울연가라도 한 편 찍읍시다!”
푸하하하!
말을 해놓고 봐도 정말 절창이다.
겨울연가가 아니라 개울연가라니!
아침에 TV에서 겨울연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말인데,
어찌나 그럴듯한 패러디인지 나 혼자 한참을 웃었다.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 남편을 졸라대며 냇물이 흐르는 개울가로 나섰다.
24년 전 일본 아줌마들 가슴을 들썩이게 했던
남이섬의 욘사마를 꿈꾸며,
내 마음은 이미 최지우가 되어
찰방거리는 물가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현실의 욘사마는 바람에 날리는 멋진 목도리는커녕 목에 땀수건을 둘렀고,
아련한 미소 대신
“에구구, 무릎이야.”
소리만 연발한다.
우리 집 81세 욘사마다.
이제는 걷는 것도 힘들어 시큰둥한 얼굴로 터벅터벅 따라오는 남편을 보니 애석하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보! 거기 가만히 서봐요!”
남편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당신 젊었을 때는 배용준보다 열 배는 더 잘생겼었어.”
남편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어진다.
나는 신이 나서 한마디 더 보탰다.
“드라마처럼 내가 발 미끄러지는 척할 테니까, 당신이 나를 딱 잡아채 줘야 해!”
그러자 남편은 저 사람이 미쳤나 하는 얼굴로
한동안 멀뚱멀뚱 먼 산만 바라본다.
아마 속으로 이랬을 것이다.
‘아이고, 내가 오늘 괜히 따라나섯구나.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여보! 난 내가 이 나이에 아직 남편이 있다는 게 어디 가나 으쓱하다니까!”
“당신은 마누라 잘 얻은 줄이나 아시우.”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다.
“화낼 줄도 모르고 신랑 비위 잘맞추며 평생 살아온 나는
오로지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런 거였지,
당신이 다 잘해서 그런 줄 아슈?”
남편은 아무 대꾸도 없다.
역시 평화가 최고다.
내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떠들어대는 사이,
우리 집 81세 욘사마는 냇가 바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혀를 쯧쯧 찬다.
“개울연가는 무슨 놈의 연가야. 날도 뜨거운데 미끄러지면 도가니 나간다.
정 미끄러지고 싶으면 혼자 자빠져라.”
아이고!
낭만은 개뿔!
겨울연가의 욘사마에게는 아련한 눈빛이라도 있었지만,
우리 집 욘사마에게는 오로지
“집에 언제 가?”
그 말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큰둥하게 바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가 물가에서 넘어질까 봐 힐끔힐끔 바라보며 미끄러운 돌 조심하라고 연거퍼 주의를 준다
아! 그래 당신이 없으면 누가 날 보호해줄가?
우리는 천생연분!
당신은
내 인생의 영원한 주인공인 것을.
슬쩍 남편 얼굴을 살펴보니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더니 툭 한마디 한다.
“야, 집에 가는 길에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그 말에 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그래.
하루하루 늙어가는 날의 안간힘이랄가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개울연가가 있다.
젊은 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연가는 아니어도,
서로 구박하고
서로 잔소리하고
서로 못마땅해하는 듯하면서도 서로 보살피는
넘어질까 봐 힐끔 힐금 돌아보는 사람,
집에 가서 같이 밥 먹을 사람 하나,
그렇게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어쩌면
오래 살아온 부부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연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냈답니다.
― 81세 욘사마와 함께한 어느 날의 개울연가
첫댓글 재미있는 인생 멋집니다
들국화님!
어서오세요
방갑습니다
하늘은 마냥 높아졌네요
늘 즐러운날 되시길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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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