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디프스 신화를 발굴하여 히트시키고, 한 세기를 풍미風靡한 사람은 프로이드였다. 인간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까뒤집어 보여주는 외디프스 신화의 파워는 대단하다. 프로이드는 신화를 너무 소국적, 편집적으로 해석했다. 신화의 실상은 너무도 도저到底한 인간상황이 걸려있다는 것을 운명가라면 한 눈에 알아본다.
또한 역학의 입장에서, 신탁을 피하려는 인간적 노력이, 도리어 신탁을 맞게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때문에, 작위적 개운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의심의 마음을 거둘 수가 없다. 참회의 마음이 빠진 개운술은, 신화처럼, 운명을 피하려다 도리어 운명을 맞게 되는 경우가 될 수 있다.
민간에 깔려있는 말 중에 전생의 웬수는 가족으로 만난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전생의 은인 역시 가족으로 만난다. 여하튼 6친 관계는 참으로 깊은 애증의 골을 평생 우리 영혼에 새기고 지나간다. 우리가 신화로부터 배운다. 6친은 [업의 부하負荷]가 굉장히 큰 관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은원 관계를, 쉽게도, 어렵게도, 생각치 말고, 조금 겸양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듯하다.
6친의 은원 관계는 금생 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금생을 잘 마무리 지으면 마음이 편하게,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맹자는 엄청난 달변가이므로 대개의 논쟁에서 웬만한 상대는 일합에 나가떨어진다. 고자와의 대결에서는 총 4합을 펼쳤다. 고자는 누구인가? 성욕의 인간을 발견한 프로이드의 대선배 할아버지이다. 1장, 2장은 맹자가 이겼다. 3장, 4장은 아마도 고자가 (약간) 우세한 듯하다. 왜냐면 (고자를 반박하는) 맹자의 말 뜻이 어렵고 너무 애매해서 설득력을 잃은 것처럼도 보인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라 했는데,
첫번째 논쟁에서,
고자는 [성性]을 버드나무로 비유했고, [인][의]를 버드나무 엮어 만든 바구니 그릇으로 비유했다.
천성 --> 바구니 짜는 버드나무. (원재료)
인의 --> 버드나무를 엮어서 인위적 가공을 거쳐서 만든 바구니. (인위적 가공품)
그러므로 고자에 의하면, [인][의]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가공과 교육에 의한 것이다.
역학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자는 틀렸다. 천간 5합의 이치를 완미해보면 인의는 선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천적 씨앗이 없다면 교육이 통할 리도 없다. 버드나무 안에는 바구니의 가능성이 내재한다고 할수 있다.
告子曰 性猶杞柳也 義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 猶以杞柳爲桮棬
두번째 논쟁에서도, 고자는 물의 흐름을 갖고 말했다가 맹자에게 논파당했다.
물은 윤하하려는 고유의 천성이 있는데도, 고자는 물길을 터주는 데로만 수동적으로 흐른다고 봤기 때문에 논파당했다.
告子曰 性猶湍水也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如水之無分於東西也
세번째 논쟁에서, 고자는 생물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성性]이라고 했다.
告子曰 生之謂性
네번째 논쟁에서, 고자는 식색, 즉, 식욕과 성욕이 [성性]이라 했다.
告子曰 食色性也 仁內也 非外也 義外也 非內也
고자의 주장을 종합하면, 물이 물길을 터주는데로 흐르는 것처럼 사람의 성품도 물길를 터주는데로 정해진다는 것.
만약 [인][의]의 물길을 터주면 [인][의]가 되고 [도척]의 물길을 터주면 [도척]이 된다.
단, 사람에게 천성으로 정해진 것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와, [식][색]이 있다.
고자왈, [인]은 안에 있는 것이고, [의]는 밖에 있는 것이라 했는데 상당히 타당하다. ※仁內也 非外也 義外也 非內也
생물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가 있는데 이는 하늘이 명한 [천성]임이 분명하다. -> 이 부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는 (곧 仁이라 할 수 있으며) [식][색]이라는 부수적 천성을 수반시킨다.
그러므로 [인]과, [식][색]이 천성의 안(內)에 있는 것이라고 할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천성에는 스스로 식색을 거부하는 (부차적인) 기제도 있다. 무도한 식색을 거부하는 기제를 [의]라고 한다.
식색을 거부하는 [의]는, (부차적인) 천성이므로 [의]는 밖에 있다.
정리하자면, [인]은 곧 생의 의지이다. 생의 의지는 가장 강력한 천성이다. 생의 의지는 식색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인]은 안에 있는 것이다. -> 仁은 人性의 내면에 존재.
그러나 생의 의지와 식색은 정도에 맞게 제어되어야 한다. 제어함은 [의]이다. 그러므로 [의]는 밖에 있는 것이다.
-> 밖에 있다 함은 [의]가 人性의 외면, 즉, 타율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네 줄 요약;
[인]은 생이고 [의]는 사인데 누군들 [생]을 좋아하지 않고 [사]를 싫어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인]은 안에 있고 [의]는 밖에 있다라고 고자는 주장했다, 맹자는, 상대적으로 [의]를 약하게 설정하면 모든 도리를 잃게 됨을 염려하였다. 만약 고자의 주장을 허락하면 생의 의지만 난무하는 의리없는 인간을 [정의봉]으로 제어해야 하는 인간세가 된다. 맹자의 인간상은 향기롭다. 맹자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명리적인 논점에서보면.....춘추전국시대. 중국의 고대역사의 삶의 논리는 陰陽의 철학이 주류를 이뤘다고 봅니다.
食.色. 仁 은 천성적이고. 內에 있다함은 陰의 논리 인것 아닐까 생각 합니다.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적 천성....印과 比劫.食傷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고 조정하는 것은 ,外...動的인 陽 을 어떻게 用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外를 나타내는 것은 결국 財官인데. 財官이 충실해야 한다고 바꿔 생각 해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월지에 내재된 천성을 천간에 財官으로 쓰임새가 있게 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도 보입니다. 明理를 하다보니. .....?
말씀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는 고자는 범부세계를 말했고, 맹자는 진리세계를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를 재관에 견줘보신 관점을 감사히 배웠습니다.
@木魚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