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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왕의 무덤
귀왕전의 내부는 향로에서 피어나는 분홍빛 향연으로 희뿌옇게 뒤덮였다.
그 향연이 부골소혼향임을 알게된 순간부터 자의후는 감히 함부로 숨을 쉴수가
없었다. 부골소혼향은 글자 그대로 뼈를 썩게하고 정신을 혼도시킨다. 자칫 잘못
한모금이라도 들이켜게 되면 그의 일신 영명은 오늘로 끝일 가능성마저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내가의 고수라 할지라도 숨을 쉬지않고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그처럼 날카롭던 그의 검세도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쨍!
그의 일검에 달려들던 냉혼사왜의 염왕자(閻王刺)가 튀겨져 나갔다.
평소라면 그의 질풍경도십칠검식(疾風驚濤十七劍式)은 숨쉴 사이를 주지않고서
냉혼사왜를 추격해서 피를 뿌리게 하기에 족했으리라.
하지만 조금전 귀왕을 향해 신검합일하여 덮쳐갔다가 진퇴되면서 반모금의 숨을
들이켜는 바람에 정신이 일순간 아찔했던 그는 감히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뒤에서 그를 덮쳐오는 현령진인 등의 기세를 몸으로 느끼고 있는 바에야
더더욱.
그것은 그의 기세를 삼푼 감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째앵!
그 자리에서 몸을 반전(半轉)시키면서 검을 휩쓸어내자 날카로운 음향이 일어나고,
그의 뒤를 덮쳐오고 있던 현령진인과 살수들이 튀겨져 나가듯 물러났다.
귀왕전 안의 분홍빛 향연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자의후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그는 냉전과 같이 번뜩이는 눈을 들어 다시 덮쳐오려는 냉혼사왜 등을 쏘아보았다.
『 누가 먼저 죽겠는지 나서보아라』
크지 않은 목소리다.
하지만 그 음성을 들은 냉혼사왜와 현령진인 등은 등골이 서늘하여 부지중에 그
자리에 굳어져야 했다.
『 우후후후…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음산하게 귀왕전을 울리는 음성에 냉혼사왜 등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공세를 전개하려는 순간이었다.
『 달라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맑고도 무거운 음성이 힘을 가지고 들려왔다.
쾅!
동시에 옆쪽 문을 봉쇄하고 있던 석문이 두쪽이 나면서 안으로 넘어왔다. 사방으로
돌가루가 튀면서 일진 질풍이 귀왕전 안을 휩쓸었다.
돌변한 사태.
경악한 장내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수중에 목검을 든
청년 한 사람이었다.
왕승고였다.
수중의 목검으로 앞을 가로막은 석문을 두쪽내고 나타난 그를 본 현령진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백제인 목우치(木雨致)?』
그를 본 왕승고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 당신이 진인이 아니듯 나도 목우치가 아니지』
『 그, 그런…』
왕승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의후를 보았다.
『 내가 늦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으시오?』
『 괜찮소』
자의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승고를 보는 그의 눈에는 의혹이 떠올라 있다. 무엇인지 기이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가 누군지 일시지간에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이다.
설사 알아보았다 한들, 지난날의 그 문약했던 서생 왕승고가 이러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날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 귀왕혈에는 세간에 알려진 오대천왕외에 귀왕의 명을 받는 삼비(三秘)와
칠십이살수(七十二殺手)가 있다고 하던데, 그들도 여기 있나?』
왕승고는 휘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 ……』
그의 출현은 장내 모든 사람에게 있어 뜻밖인지라 휘장 뒤의 귀왕마저도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흐르는 침묵.
『 귀왕은 시간을 끌고 있소』
자의후가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의 뜻은 명백했다.
『 시간을?』
왕승고는 귀왕상의 앞에서 향연을 피워올리고 있는 향로를 보면서 싸늘히 웃었다.
향연은 더욱 짙어져 이젠 안개와 같이 시야를 방해하면서 귀왕전을 뒤덮고 있는
상태였다.
『 부골소혼향을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문득, 경악한 신음소리가 휘장뒤에서 들려왔다.
『 시험을 해보면 알겠지!』
말과 함께 왕승고는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했다.
『 으아악!』
그의 앞을 가로막던 흑의인 하나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 누구든,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죽는다!』
왕승고는 차갑게 질타하면서 땅을 박찼다.
원래 그와 휘장과의 거리는 십 장 가량이나 되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발동하자 그
거리는 순식간에 지척이 되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축지신행(縮地神行)?」
그것을 본 자의후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 감히! 물러나라!』
왕승고에게 감쪽같이 속았음을 알게된 현령진인이 대노하여 왕승고를 덮쳐왔다.
그의 무공은 간단히 볼 것이 아니었다.
『 비켜라!』
싸늘한 질타.
왕승고의 목검이 폭풍과 같이 앞으로 무찔러갔다.
땅!
단 일합에 현령진인의 불진이 두동강이 나면서 그가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 이렇게 강하다니?』
신음하던 현령진인이 참지못하고 피를 토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내공력이 약할 것은 당연한 일. 현령진인은 그것을 믿고는
내공으로 그를 누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어딘지 어설픈 듯 한 그의 검세에 실린 것은 장강대하(長江大河)와도 같은
깊고도 두터운 내공!
심상치 않음을 그가 경각하는 순간에 그 힘을 견디지 못한 불진은 부러졌고, 그는
피를 토하면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해서 왕승고는 단숨에 귀왕의 앞에 도달했고, 그가 수중의 목검을 휘두르자
시야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마치 면도날에 베어진 듯이 잘려 나갔다.
묵묵히 내공을 운행하여 암중에 독기를 누르고 있던 자의후는 그 광경을 보고 내심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왕승고가 휘장을 베어내는 찰나, 휘장 안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를 향해 좌우에서 덮쳐왔다.
그들의 공세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가히 출기불의(出其不意)한 위력이
있었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면에 버티고 선 귀왕상만을 보고 있었지,
좌우의 어둠속에서 암습자가 나타날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승고가 그들을 막는 순간에 천장에서 다시 박쥐와 같이 서너명의 흑의인이
날아내려 그를 덮쳤다.
일순 물러났다가 다음 순간에 격렬하게 좌우에서 덮쳐온 흑영 둘을 공격해가던
왕승고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전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서 질풍신뢰(疾風迅雷)와도 같은 검세가 날아들어 그들을 격퇴했다.
자의후였다.
왕승고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전진하면서 흑영 둘을 공격했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검세가 첩첩이 일어나 그들을 휘감았다.
땅! 따당!!
고막을 울리는 금속성과 함께 흑영 하나의 검이 부러지고 다른 하나가 피를
토하면서 나뒹굴었다.
『 으아악!』
자의후의 손에 흑의인 둘이 피보라 속에 쓰러졌다.
귀왕상의 앞에서 두 사람이 검을 세우고 서자, 냉혼사왜등은 감히 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기세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음침한 어둠 속에 귀왕상만이 그들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 아직도 나타나지 않을 셈인가? 귀왕?』
왕승고가 귀왕상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바로 귀왕상을 향해 덮쳐갈 기세.
와당탕!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향로가 공중으로 붕 떠올라 사오장밖에 있는 석벽을
들이박고는 나가떨어졌다. 귀퉁이가 깨어지고 절반은 금이 간 동향로에서는 더
이상 향연이 피어날 수 없었다.
자의후가 발길로 향로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 너는 누구냐?』
귀왕상에서 음침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와서 이야기 함이 어떤가?』
왕승고가 코웃음쳤다.
동시에 그가 귀왕상을 향해 검을 겨누고 신형을 날렸다.
얼핏 보기에도 청동으로 주조된듯한 형상의 귀왕상은 절반쯤 웅크린 자세가
일장여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왕승고가 몸을 날림과 함께 귀왕상에서 배산도해(排山倒海)의 잠경(潛勁)이 그를
향해 밀려왔다.
뿐만 아니라, 청동으로 된 귀왕상의 거대한 팔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왕승고를 향해 내리쳐오는 것이 아닌가.
『 훗?!』
경악한 외침,
왕승고는 고함과 함께 수중의 목검으로 귀왕상의 팔을 찍으며 그 탄력으로
허공중으로 떠올라 상대의 잠경을 피해냈다.
팡!
맹렬한 바람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왕승고가 훌훌 허공을 날아 자의후의 옆으로 내려서는 순간에 음랭한 음성이
의혹을 담고서 들려왔다.
『 처음 나타날때는 점창의 유운신법이더니 공동 복마검법에 이어 무당의
태극혜검, 이번에는 종남의 암향표라? 너는 누구냐?』
냉소가 왕승고의 얼굴에 떠올랐다.
『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시지?』
그가 검을 다시 겨누자 냉소가 귀왕전의 안을 메아리쳤다.
『 본왕이 이곳에 있는데, 감히 반딧불이 명월과 밝음을 다투려 한단 말이냐?
죽음이 눈앞에 있거늘 아직도 세상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그 소리와 함께 돌연 귀왕전 안의 불이 일시에 사라졌다.
원래 상당히 밝았던 귀왕전 내부다.
그런데 모든 불빛이 일시에 사라져버리자, 사방은 단 한순간에 암흑천지가 되었다.
『 자리를 피해!』
자의후가 소리치면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왕승고 또한 암습을 우려해 그가 몸을 날린 쪽으로 같이 몸을 날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같이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암습도 다른 어떤 일도…
왕승고와 자의후가 의아함을 느낄 무렵, 갑자기 끽끽 하는 소리가 바닥에서 들리는
것 같더니 귀왕전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바닥을 조심하시오!』
왕승고가 소리치면서 몸을 떠올렸다.
『 우후후후… 조심할 수 있을까?』
음산한 웃음소리가 어둠을 뚫고서 들려왔다.
『 귀왕!』
소리친 왕승고는 뒤로 물러나 벽에 붙였던 몸을 박차 귀왕상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뭔가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적을 잡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의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그도 같은 순간에 귀왕상이 있던 곳에
당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둘은 경악과 당혹감으로 손을 멈추어야 했다. 놀랍게도 귀왕상이
있었던 곳은 두꺼운 석벽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공격한 것이 석벽임을 경각한 두 사람은 찰나간에 공세를 거두고
날아내렸다.
그러고보니, 그들 둘을 제외한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그들 모두가 숨을 쉬지 않는단 말인가?
왕승고나 자의후 정도의 내가 고수가 되면 제아무리 어둠 속이라도 상대의
숨소리를 듣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숨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그럴 리가?
왕승고와 자의후는 내심 신음했다.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사라졌다는 가정이 성립하는 것이다.
바로 그순간이었다.
끽끽 돌과 돌이 마주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바닥이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변고(變故)!
그것은 그렇게 불릴만한 일이었다.
바닥이 돌아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간단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허공.
두 사람은 갑자기 자신들의 신형이 허공에 떠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발밑에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바닥이 꺼져버렸다.
그리고 추락.
느닷없이 닥쳐온 어둠, 시야를 막고서 벌어진 이 일은 가히 대처방안이 없었다.
허둥대는 사이에 그들의 몸은 허공에 떠있었고 그 다음에는 이미 추락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우흐흐흐…』
어디선가 귀왕의 웃음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 했다.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딛고 서있던 발밑이 꺼져버릴 때에는 힘을 빌릴 곳이
없으므로, 날개가 달린 새가 아닌 다음에야 대처방안이 없다. 돌연간 시야에
있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의 무공이라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기관자체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찰나간에 칠팔장 가량이나 추락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 하압!』
옆에서 자의후의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밑에서 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는 불과 삼사장 정도.
『 밑에 도치된 창날이 있소!』
왕승고가 소리치면서 거세게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소매짓에 의해 추락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이윽고 그는 바닥에
내려설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이 아니라 창날의 끝에 건들거리며
선 것이었다.
상황은 자의후도 마찬가지였다.
자의후는 바닥과의 거리를 알기 위해서 자신의 검을 던져 그 소리로 남은 거리를
짐작하려 했고, 그 순간에 왕승고는 자신의 특이한 안력으로 바닥에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이루고 있는 창날들을 보고 소리친 상황.
일견 간단한 듯 했지만 두 사람이 고수가 아니었다면 횡액을 면키 어려운 무서운
함정이었다.
어둠 속, 바닥에 박혀있는 예리한 검날의 끝에 보통 사람이 어찌 설 수가 있으랴.
『 음…』
자의후에게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괜찮소?』
왕승고가 신형을 안정시킨 다음에 물었다.
『 이까짓 함정이 무슨 문제일까?』
자의후가 나직이 코웃음쳤다.
왕승고의 신발바닥을 뚫고 창날이 들어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그것은 표피를
살짝 건드린 상태에 불과했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산적(散炙)이 되어버렸을
위태로운 상황. 그와는 달리 자의후는 평소의 상태가 아니었으니 조금쯤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정(性情)으로 보아 그것은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암중에 고개를 끄떡인 왕승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어둠에 눈이 익기
시작하여 자신들이 빠진 함정이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것을 알아보았고 바닥에는
아귀의 이빨과 같은 창날이 빈틈없이 깔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돌연 탁탁! 소리와 함께 일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자의후가 천리화통(千里火筒)을 들고 있었다. 천리화통이란 보통 불을 붙이는
화섭자(火攝子)와는 달리 오랫동안 불을 켤 수 있게 여행용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강호무림의 천리화통은 상당한 시간을 유지할 수 있어 필수품과 같았다.
무림 중의 사정에 밝지 않은 왕승고는 당연히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의후는 여전히 냉오한 신색으로 창날 위에 우뚝 선채로 화섭자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빠진 함정은 사방 십여장이 넘는 넓은 곳이었다. 창날이 도산검림과 같이
곤두선 곳은 함정의 가운데라 주변은 그냥 바닥이었다.
그것을 본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창날이 꽂혀 있지 않은 곳으로 내려섰다. 창날
사이 여기저기에 백골이 널려 있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로군…』
주위를 일별한 자의후가 중얼거렸다.
창날 사이 여기저기에는 백골이 흩어져있고 천리화통의 불빛을 받아 시퍼런
인광(燐光)이 이리저리 날고 있어서 심히 공포스러웠다.
『 거기에는 너희들도 포함되겠지… 하지만 이곳까지 들어와 죽게 된 외인은
너희들이 처음이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산한 울림을 가진 음성이 들려왔다.
『 귀왕!』
왕승고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천장까지는 십 이삼장? 아니면 십 사오장? 까마득히 멀었다. 제아무리 경공의
대가라 할지라도 엎어놓은 솥과 같은 형상을 한 이 함정에서 그대로 솟구쳐
오른다는 것은 어불성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당신이 귀왕혈의 주인인 귀왕이 틀림없나?』
왕승고가 소리쳤다.
잠시 말이 없다.
그리고,
『 너는 누구냐?』
다시 들려온 것은 되물음.
『 당신이 귀왕이라면 알려주겠다!』
『 듣지 않아도 뻔한 일. 구파에서 보낸 자이겠지』
『 나는 구파와 관계없다. 하지만 귀왕혈을 세상에서 멸하고자 서원(誓願)한
사람이지!』
쿡쿡, 웃는 소리가 울렸다.
『 귀왕혈을 멸하고자 하는 자들이 한둘일까? 그래 말해봐라. 본왕이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귀왕지주(鬼王之主)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 들려왔다.
옆에서 자의후가 가볍게 손을 저어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말을 하라는
뜻인 듯했다.
무슨 의미인지 왕승고도 안다.
말을 시켜서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이다. 함정 안에서 말이 웅웅
울리고 있어 한두마디로는 도저히 어디에서 말이 들려오고 있는 것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 나는 곽대장군의 아들이다』
『 …』
갑자기 조용해졌다.
『 내가 귀왕혈을 찾아온 까닭은, 누가 청부를 해서 귀왕혈이 장군부를 멸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 장군부라고? 네가 곽천수의 아들이란 말이냐?』
『 그렇다』
『 곽천수의 일가는 이미 모두 죽었는데…』
믿기 힘들다는 의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세상에는 왕왕 뜻밖의 일들이 생기는 법이다』
『 그렇군! 하지만 결과는 같다. 어차피 선후일 뿐, 너는 거기에서 죽게될테니까』
『 귀왕! 귀왕!』
왕승고가 소리쳤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리를 뜬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대답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왕승고가 자의후를 돌아보았다.
자의후가 고개를 저었다.
『 어디 전성통(轉聲筒)이 있는 모양인지 소리가 울려서 찾아낼 수가 없었소』
왕승고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때, 어디선가 묘한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 독!』
낮게 자의후가 소리쳤다.
탁탁탁…
그가 들고있는 천리화통의 불길이 묘하게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불꽃을 튕겨냈다.
공기중으로 희미한 회색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 불을 끄는 것이 좋겠소』
왕승고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보는 자의후를 향해 왕승고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전음.
「의선이 만든 벽독환(僻毒丸)이오」
자의후는 그것을 받아들면서 묘한 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소?』
『 분명히』
왕승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설마했더니, 정말 그때의 백면서생이 당신이란 말인가?』
『 그렇소』
왕승고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리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 할지라도…』
믿기지 않는 듯 자의후가 그를 보았다.
천리화통의 불은 꺼졌다.
그리고 스며들던 독기도 옅어지고 종래에는 사라졌다. 하지만 지하특유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의후는 운기조식을 한 다음이었다. 의선이 만든 벽응환은 과연 세간의
벽독환과는 달리 신효한 효험이 있어서 그의 체내에 중독현상은 물론 방금 투여된
독기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왕승고는 암암리에 운기하여 자신의 내부를 살폈지만 여전히 중독된 현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그의 생각대로 독에 대해서 면역성이 생긴 모양이었다.
『의선을 만나 해독한건가?』
자의후가 물었다.
『반쯤은…』
그의 대답에 자의후는 상황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했다. 하긴 보통의 경우라면 어찌
그 짧은 일년여의 시간만에 왕승고와 같은 고수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기색을 보고 왕승고가 말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소. 그런데 여긴 어떻게?』
그의 물음에 자의후가 대답했다.
『귀왕혈을 쫓는 것이 내 목적이니까』
『이곳이 귀왕혈의 총단임을 알고 온 것이오?』
『귀왕혈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구파가 동맹을 했고, 나는 그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귀왕혈의 총단을 알아내기 위해서 위장청부를 했고
거기에 귀왕혈 오대천왕의 하나인 냉혼사왜가 걸려들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이곳이
귀왕혈의 총단이겠지! 이 자들이 이런 곳에다 이런 정도의 건축을 할 정도라면…
우리는 귀왕혈을 너무 간단히 보고 있었던 것 같군』
『꼭 그렇지도 않을거요』
무슨 소리냐는 듯 왕승고를 자의후가 보았다.
『저기 죽은 백골을 보시오』
왕승고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인광을 번뜩이고 있는 창날 사이의 백골을
가리켰다. 얼핏 보기에도 열구 정도는 되어보였다.
『사람이 죽어서 완전한 백골이 되려면 얼마나 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자의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귀왕혈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칠팔 년전… 그럼 이 함정은…?』
『일개 살수집단이 굳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야 했을 것 같지 않소.
더구나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뻗은 지하통로는… 일이십년의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이 보였소』
『음…』
자의후가 신음을 흘리며 왕승고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군. 솔직히
내눈을 믿기 힘들 정도다. 불과 일년 사이에…』
『간난(艱難)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단련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소』
『그런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인 자의후가 물었다.
『그럼 이 지하건축물을 귀왕혈이 만든게 아니라면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무엇때문에?』
『반드시 귀왕혈이 만들지 않았다는 단정은 못하겠소. 하지만 이 석벽만 해도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인데 이런 정도의 공을 들일바에야 나 같으면 다른데 투자를
할 것 같소』
『그럼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을 하는건가?』
『황릉(皇陵)』
『황… 그럼 이곳이 고대 황제의 무덤이라는건가?』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런 것 같소. 귀왕혈은 그 무덤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가공을
했다. 내 가정은 그렇소』
『음…』
자의후는 낮게 신음했다.
이곳이 북망산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능성은 컸다. 더구나, 현도관의 뒤에는
산등성이 같은 능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제왕들의 묘가 거대한 것은
불문가지이니…
『제왕의 무덤이라면 도굴꾼들을 잡기 위해서 만든 함정일텐데, 나가기 쉽지
않겠군』
『쉽지야 않겠지만 여기서 죽을 수야 없지 않겠소?』
왕승고가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그들이 떨어진 함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너비 십이장. 좌우가 십장 정도.
중앙의 창날들은 가운데 사오장 가량의 너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떨어진 함정의 너비가 그 정도일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함정.
가로 십 장 하고 일 장 가웃정도. 세로 십 장가량. 결국 사십 장가량의 길이를
가진 석벽을 두드리면서 뱅뱅 돌다가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통로가 될만한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이 떨어진 함정의 천정은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그곳으로
빠져나가려면 손에 도끼를 든 독수리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 같았다. 십 장이상은
충분한 높이. 게다가 힘빌릴 곳 하나 없다. 제아무리 경공의 고수라도 아예 의지할
곳조차 없는 허공을 십 장이나 솟구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곳은 없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등을 두드리던 벽에다 기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왕승고가 벽을 후려쳤다.
공력을 모은 그의 손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까지 벽으로 파고 들었다.
돌가루가 퉁겨졌다. 독수리 발톱(鷹爪)의 형상으로 벽에 파고들었던 손은 한움큼의
돌무더기를 움켜쥐고서 벽에서 떨어졌다.
『 좋은 공력, 정말 대단하군! 무림사상 그처럼 빠르게 상승무공을 익힌 사람은
아마 자네밖에 없을 것 같군』
어둠 속에서 자의후가 그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왕승고는 손에 있던 돌가루를 손가락사이로
흘려냈다.
『 여기 석벽은 화강암과 같은 단단한 암석이 아니오. 그건 이곳이
자연적이라기보다 천연동굴을 가공했을 가능성을 의미하고, 만약 그렇다면 이처럼
수직으로 된 천연굴이라면…』
『 천연적인 지로(支路)가 있을거라는 뜻인가?』
『 없더라도, 팔 수는 있을거요. 우리라면…』
『 우리라면…』
그 말을 되뇌어본 자의후는 씩, 웃음을 떠올렸다.
『 좋아! 힘이 빠지기 전에 한번 해볼만한 일인 듯하군!』
『 우선은 이곳을 한번 건드려보는게 좋을 것 같소』
왕승고는 말과 함께 빙글 몸을 돌려 방금 자신이 쳤던 벽을 다시 쳤다. 퍽! 다시
손이 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가 잇달아 벽을 치자 우수수 돌더미가 무너졌다.
자의후의 눈이 커졌다.
왕승고의 앞쪽, 방금까지도 석벽이었던 그곳이 아주 간단히 허물어지면서 컴컴한
통로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 이게 도대체?』
『 도와주겠소?』
왕승고가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하자 두께가 반장가량이나 되었던 석벽이 무너지면서 한 사람이
충분히 기어나갈 수 있는 통로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뒤따라 들어온 자의후가 천리화통을 켜들자 주위가 밝아졌다.
그 안쪽은 통로였다.
어른 하나가 허리를 펼만한 높이. 너비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만했다. 누가
보아도 인공이 가미된 것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 여길 어떻게 발견한건가?』
『 우연이었소』
과연 우연이었다.
벽에 기댄 왕승고는 무엇인지 모를 묘한 냄새가 코를 스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유심히 벽을 살펴보자 그가 기댄 곳의 벽이 어딘지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아주 미세한 틈이 있고 그가 맡은 냄새가 바로 그곳으로
스며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마당에 더 망설일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다.
냄새의 정체는 이끼였다. 습기에 자란 이끼.
질퍽한 바닥은 비스듬해서 그나마 습기를 배출하는 듯 했는데,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그 비스듬한 바닥 때문에 함정쪽으로 오랫동안 스며나오면서 틈이 생긴 듯
했다.
『 어딘지 모르겠군!』
『 그거야 가보면 알 일! 귀왕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생각하기로 하지!』
자의후가 냉소를 흘렸다.
귀왕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막혔다면 바람이 통할리 없을테니까.
『 졸지에 두더지가 되어야겠군!』
공력으로 쳐낼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곳을 친다면 더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긁어낼 수밖에 없다.
왕승고의 목검이나 자의후의 검이 이 마당에서는 별 쓸모있는 도구일리는 없었다.
제아무리 공력이 높다고 한들 손으로 무너진 돌무더기를 긁어내는 것이 쉬울리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전체 통로가 붕괴될 위험마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고강한 공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견뎌낼 수가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한점의 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
『 지진이 있었던 것도 아닌 모양인데 하필이면 왜 이곳이 이렇게…』
투덜거리던 자의후는 왕승고가 옆의 벽을 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 무슨…?』
그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그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왕승고가 밀고 있던 벽이
그대로 무너지면서 검은 아가리를 벌린 통로가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 어떻게 된건가?』
왕승고가 천리화통의 불빛을 빌려 통로 안을 비추어보는 것을 보고 자의후가
물었다.
『 통로를 파내다가 옆의 벽이 조금 무너져 있는걸 보고 밀었더니…』
왕승고는 대꾸를 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지하 특유의 냄새. 하지만 그 안은 무너진 통로와는 달리 건조했다. 그리고
전혀 뜻밖의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
푸석하게 썩어버린 시신이 묘하게 생긴 옷을 입고서 그들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
손에는 부러진 검.
『 중원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죽은 지도 무척 오래된 것 같고…』
시신을 살펴본 자의후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거의 목내이木乃伊:미라가 된 시체는 아무리 적게 보아도 백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 백제의 사람이오』
왕승고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 백제?』
『 복식대로라면 그렇소. 어쩌면…』
왕승고는 굳은 얼굴로 앞을 보았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사방 삼 장 정도의 넓이를 가진 석실이었다. 시신은 입구
쪽이었던듯한 곳에 쓰러져 있었다.
『 이자는 상승의 검기에 즉사한 듯하군』
자의후가 시신을 주의깊게 살펴보고는 중얼거렸다.
석실 앞쪽에는 반쯤 열린 석문이 있었다.
한 사람이 옆으로 몸을 틀어 들어갈만한 틈.
끽끽… 수백년의 침묵을 깨고 석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자, 거기에는 또
한구의 시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건…』
시체를 본 자의후가 묘한 표정을 했다.
『 이 자는 왜인(倭人)인 것 같은데?』
『 왜인?』
『 옷은 우리 것 같지만, 머리를 보게. 이런 식으로 머리를 틀어묶는건
왜인들뿐이지. 연전에 남해에서 왜구들과 싸웠는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머리를
묶고 있더군』
『 왜인이 아닐겁니다. 그들에 비해서는 체구가 크죠. 아마 이들은…』
왕승고는 어둠에 묻힌 통로를 보았다.
통로 여기저기는 마치 거대한 망치로 친듯한 흔적이 나 석벽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막대한 충격이 일대를 휩쓸고 간듯한 모습.
충격으로 인해 반쯤은 부서져내린 통로를 넘어가자 그들의 앞에 너비가 다섯
장가량의 석실이 나타났다. 맨처음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석실의 중앙에 안치된
석관(石棺).
그리고 그 석관의 앞쪽에는 두 구의 시체가 엉겨 엉거주춤하게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일견한 순간에 이미 두 사람이 수중의 검으로 상대의 심장을 뚫어
즉사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뒤로 다시 시체 한 구.
그 시체는 석관을 부여잡은 채 죽어 있었다.
『 도대체 여긴 어디지? 고대 황제의 묘라기에는 초라한 것 같고, 그렇다고 일반
서민의 묘는 아닌 것 같은데…』
자의후가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먹이를 본 승냥이와 같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면서 석관 앞에서
서로 상잔하여 죽어있는 두 구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옷도 삭고 시신도 거의 형체만 이루고 있는 두 시체. 하지만 그 자세에서 그는
막강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느낌이 잘못이 아님을 의미하듯이 두
사람의 발밑에는 뚜렷한 발자국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딱딱한 석판으로 이루어진 바닥.
거기에 마치 횟가루를 디딘 듯 뚜렷이 드러난 발자국. 그것은 그 발자국을 남긴
임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대단한 무공을 지녔던 사람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주인은 바로 자의후의 앞에서 상잔하여 죽어간 두 사람이었다.
죽은 다음에 생전의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시체.
그것은 그들이 생전에 얼마만한 고수인가를 웅변한다 할 수 있었다.
『 이곳은 나라를 잃어버린 불행한 군주의 묘요』
묵묵히 서 있던 왕승고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 나라를 잃어버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왕승고는 석관을 부여잡고 죽은 시신의 한쪽으로 드러난 석관의 글자를 가리켰다.
「…대방군공 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
천리화통에 드러난 일곱글자. 시신에 가린 그 글자중 일부인 일곱글자는 이 석관의
주인이 누군지를 세월을 뛰어넘어 전하고 있었다.
『 지금의 조선 이전에 그 땅에 존재했던 백제의 왕, 의자왕의 능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오』
『 의자…? 그곳의 왕이 왜 이곳에 죽어있나?』
쓴 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떠올랐다.
『 패망한 나라의 군주였으니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나라에 끌려와서
이곳에서 죽었소. 백제를 그리면서…』
의아한 얼굴로 자의후가 왕승고를 보았다.
『 그런걸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나?』
『 내가 찾던 곳이오. 촌로들에게 그 능으로 짐작되는 곳을 파보도록 했는데,
뜻밖에도 여기에…』
왕승고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 너무나 의외에도 그가 찾던 의자왕의 묘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곳이
의자왕의 묘인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했다.
주국대방군공 백제왕(柱國帶方郡公百濟王)이란 것은 지난날 당태종이 의자왕에게
내린 책봉이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이라면 그에 대한 책봉은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도 명목상으로나마 그런대로 유지가 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그의
아들을 웅진도독이란 이름으로 반란이 일어난 백제로 다시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 찾던 곳이라…. 그럼 이 시체들은 어떻게 된건가? 내가 보기엔 쉽게 볼 수 없는
고수들인 것 같은데 이들이 왜 여기서 이렇게 죽어있는 것이지?』
찾던 곳이라니까 당연히 알 것으로 단정하고 물어보는데, 왕승고라고 알 리가 없다.
문득 목우충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능을 찾거든 그 분의 영혼을 위로해드리게. 어차피 능을 찾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무슨 뜻이었을까?
그는 이 묘 안에서 일어난 이 참상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 그 석관의 안에 세상을 놀라게 할 무슨 보물이 있는 모양이군. 이 사람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이렇게 전력을 다해 다투다가 공멸한 것을 보면…』
『 흥미가 있소?』
자의후의 말에 왕승고가 그를 보았다.
자의후가 석관의 발치에서 왕승고를 보았다. 그 눈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보이고
있었다.
『 자네가 방관한다면 흥미가 없지도 않아. 어차피 함정에서 이곳으로
찾아들어오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이 무덤이 어떻게든 인연이 닿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반대한다면 굳이 찾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 도와주겠소? 석관의 시신이 과연 그 분인가 확인해봐야겠소』
말을 하던 왕승고는 석관을 부여잡고 있던 시체를 조심스레 옮기려했지만 그가
손을 댄 순간에 시신은 먼지처럼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신이 엎어져 있던 석관에서 전혀 다른 필체의 글자가 나타나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시신이 죽으면서 석관의 뚜껑에다 남겨놓은 것 같았다.
놀랍게도 시신이 석관에다 남긴 글은 손톱으로 긁어 새긴 것이었다. 사람의 손톱이
제아무리 강하다한들 돌위에다 글을 새길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시신이 살아
생전에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는 한가지 사실외에는.
-후손의 능력이 이르지 못하니 그저 죄스러울 뿐… 부디 이 못난 후손을
용서하시라-
마지막 글은 거의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이 정도의 상황으로, 단서로 과연 무슨 능력이 어떻게 이르지 못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그 글을 내려다보고 있던 왕승고는 조용히 손에 공력을 가했다.
그그긍…
지난 수백년을 두고 석관의 위를 덮고 있던 뚜껑이 천천히 용틀임을 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석관은 재질이 사실상 별로 좋은 것이 아닌지라 그 뚜껑
또한 간단히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왕승고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뚜껑이 절반쯤 밀려나자 안을 볼 수 있었다.
수의로 전신을 감싼 시신 하나가 조용히 그 속에 누워있음을 볼 수 있었다. 뚜껑을
열자 석관의 반대쪽이 상당부분 파괴되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이들은 검도고수 였어. 이들의 대결에서 생긴 검기에 석관이 파괴되어 있었던
모양이군. 그게 자네가 관을 여는 바람에…』
자의후의 뒷말이야 명백했다.
『 무덤이 도굴된 흔적은 없소. 사실상 도굴될만큼 값진 부장품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석관의 안을 살펴본 왕승고가 말했다.
『 이들이 싸우면서 무덤 자체가 파괴된 걸로 보이는데? 그 마지막은 여기서
장식되었고… 아마도 이들의 싸움으로 인해서 이 능묘는 파괴되고 우리가 들어온
그 길도 이들의 싸움 때문에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듯 하군. 그건, 이들이
목숨을 내놓을만한 무엇이 이곳에 있었다는 게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와의 싸움이었을까?』
자의후가 석관 앞에서 동패구사(同敗俱死)하여 죽은 두 사람의 시신을 보면서
말했다.
한 사람의 복색은 처음 본 백제의 옛 형태. 한 사람은 당의(唐衣)를 입었지만
머리가 통로의 앞에서 본 왜인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왜구가 노리는 물건을 백제인이 지키려 했다? 뭐 그런 해석일까?』
자의후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왕승고의 안색이 달라졌다.
옷차림이야 달랐지만 이곳에서 죽어간 다섯구의 시신이 모두 같은 민족임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옷차림이 다른 것은 서로가 걷던 길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뇌리에서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황은 그러하였다.
만세일계(萬歲一系)라 자호하는 일본왕조의 시조인 천지정권(天智政權)의 천황
부여용,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은 왜국을 자신의 장악하에 넣고 그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면서 군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백제계인 그가 세운 왕조는 신라계인 천무왕(天武王)이 나서면서 뒤로 물러서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계가 득세한 것은 불과 십여년.
그 자리는 다시 의자왕의 자손이 계승한다.
그 과정에서 의자왕의 유해가 봉환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 유해를 모셔옴으로써 정통을 주장하는 자와 그것을 막아야만 하는 자가 생김은
예로부터 정쟁(政爭)에 있어서 늘 있어왔던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몇차례의 실패 끝에 고수들이 파견되었고, 상대측에서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왕승고의 앞에 벌어진 상황인 것이다.
비운의 의자왕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론, 그의 주검 앞에서
자손들이 칼부림을 하면서 서로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한 실정(失政)에 대한 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강의 상황을 짐작케된 왕승고는 그제서야 목우충이 의자왕의 묘를 찾되, 그를
굳이 본국으로 송환하지는 말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의 귀환을 반겨줄 자손이 없는 곳에 그의 유해가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왕승고는 정중히 의자왕의 시신에 조의를 표하며 공력을 이용, 석관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거기에 죽은 나머지 시신들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서로 상잔한 두 사람.
그들의 시신은 생전, 그들의 능력을 말하듯 아직도 꿋꿋하였다. 그들의 시신을
같이 거두기 위해서 왕승고가 그들의 시신을 분리하자 삭은 옷이 먼지처럼
부스러지면서 그중 백제인의 복색을 한 사람의 품에서 양피로 된 책자 하나가
떨어졌다. 통로가 무너지면서 밀폐되지 않고 습기가 스며들었으니 지금까지 옷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음도 신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양피로 된 책자의 보존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품속에 넣고 다닌
것인지 겉장의 제목마저 바래진 그 양피책자에는 뜻밖에도 간략한 사람들의 그림과
몇줄의 시구와 같은 글귀들이 옆에 적혀 있었다.
『 검무(劍舞)로군!』
옆에서 자의후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양피지에 적혀 있는 것은 검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무를
추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었다.
둥기둥 둥…
간략하게 보였던 그림은 다시 한번 보자 정말 생동감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춤사위가 느껴질 정도였고 북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절로 하늘로 들려지고 추임새가 느껴지며, 그 느슨하게 뻗은 손끝에서 마치
안개와 같이 검끝이 흔들린다. 하지만 파도와 같이 전신을 흔들면서 내뻗은 검에는
또한 노도(怒濤)의 숨결이 거세게 쏟아져 나가는 듯 하다.
『 이건…』
왕승고가 나직이 신음한다.
책자는 두껍지 않았다. 전부 다해서 스물다섯면. 그것은 춤사위의 기본자세가
스물네개라는 의미.
『 이들의 검법일까? 너무 부드러워서 검법이라기 보다는 역시 검무인 것 같군.
이걸 실전에 쓸 수가 있을까?』
옆에서 같이 그 그림을 본 자의후가 중얼거렸다.
같이 그림을 보았으면서도 왕승고가 느꼈던 그 느낌을 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검도의 고수임을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뭔가 다른 까닭이 있을 듯 했다. 서로
수련한 길이 달라서일까.
「황창검비요(黃昌劍秘要)」
다시 살펴본 책자의 제목이다.
『 황창검? 이게 어떻게 백제인의 손에…』
왕승고가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쿵!
격한 울림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천장이 흔들리면서 돌가루와 흙먼지가 쏟아져내렸다.
놀란 왕승고는 급히 책자를 품속에다 쑤셔넣으면서 자의후를 보았다.
『 밖에서 뭔가 변화가 인 모양이군』
자의후가 바람과 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연도(연道)에서 현실(玄室)에 이르는 길에 죽어있던 시신들을 현실에다 같이 모은
왕승고는 의자왕의 묘를 다시 정돈하고 죽은 사람들을 그 관앞에 뉘었다.
이제는 편히 쉴때였다.
어차피 목노사도 그것을 바란 듯 했다.
그가 묘를 찾도록 유언한 것은 후손이 그를 찾는다면 언제라도 찾을 수 있도록
그가 있는 곳을 알아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연도의 끝, 원래 그들이 처음 들어왔던 곳에 자의후가 나가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오?』
『 변고가 일어난 모양. 아마 구파의 고수들이 쳐들어온 것 같은데?』
자의후가 말했다.
주위를 살피던 두 사람은 무너진 통로 가운데에서 다시 석벽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을 통해서 다시 지하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석벽을 부수고 그 지하도에 들어서자 멀리서 은은히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좋아…』
자의후가 냉소를 했다.
슬쩍 몸을 날렸던 자의후는 왕승고가 움직이지 않음을 보고 그를 보았다.
『 가지 않을 작정인가?』
대답대신 왕승고는 모았던 기(氣)를 검을 통해서 쳐냈다. 그의 검이 벽을 치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연도를 폐쇄하는 것이다.
그가 일검으로 석벽을 쳐 무너뜨리는 것을 보자 자의후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 기세검도(氣勢劍道)로군! 기로서 검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도 경지에 이른
사람은 없는데, 정말 신기하군. 그 사이에…』
『 가지 않을 작정이오?』
왕승고가 그를 보았다.
움찔한 자의후는 왕승고를 보았다.
왕승고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신선했다. 아니, 조용하고 그윽했다.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고 해야할까?
『 커졌군』
불쑥 말을 뱉아낸 자의후가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왕승고가 따랐다.
거기 남은 것은 무너진 석벽.
잠시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과거는 다시 역사의 뒤안길에 몸을 숨긴 셈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길을 찾은 듯 했다.
그들이 몇 개의 지하도를 지나자 바닥에 쓰러진 흑의인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은은히 들리는 싸움소리.
두 사람은 말없이 그곳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 위험해!』
일지검이 영롱검에게 덮치는 흑의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으윽!』
이미 부상을 당했던 영롱검이 위기는 면했지만 그 바람에 등쪽으로 칼날이 훑고
지나갔다. 피가 튄 것은 보나마나.
석실 하나.
네 군데의 통로가 있는 그 장방형의 석실에는 일지검과 영롱검, 그리고 동료 넷이
있었지만 남아있는 것은 그들 둘을 포함한 셋뿐이고 나머지 셋은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물론, 귀왕혈도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다섯이나 되는 흑의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은 귀왕혈 살수 네 명의 무공은 고강했고 암습에 능했다. 들고있던
천리화통도 박살이 난 상황. 어둠 속에서 이미 두 사람이 쓰러진 참이었다.
일지검은 이를 악물면서 영롱검과 다른 한명, 점창의 삼수(三秀)중 하나인 섬전검
욱일의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부릅떴다. 귀를 곤두세웠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묘한 냄새.
『 독이야!』
뒤에서 영롱검이 놀라 소리쳤다.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가운데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그것은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환히 드러났음을 의미했다.
『 바보!』
일지검이 부르짖으며 검을 휘둘렀다.
종적이 드러난 이상, 적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 으아아…』
그들의 눈앞에서 터져나오는 단말마의 비명.
그들을 향해 덮쳐오고 있던 귀왕혈의 살수 네 명이 한꺼번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폭풍과 같이 그들을 휘감아 날려버리면서 나타난 것은 자의후였다.
『 자대협!』
영롱검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 어떻게 추적 일조만 여기 있는건가? 본대는 오지 않았단 말인가?』
『 아닙니다. 길을 갈라 뚫고 들어오느라고… 이 지하도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 견딜 수 있소?』
『 예? 아, 예. 물론입니다』
『 그럼 밖으로 나가는게 좋겠군』
말과 함께 자의후는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왕승고가 서 있었다. 왕승고가
누군지 알 리 없는 일지검등의 눈에 다시 긴장이 일었다.
『 그의 말대로 일단 이곳을 벗어나시오』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왕승고의 말소리만이 그들의 앞에 남았다.
『 저… 사람은 누구야?』
참다못해 영롱검이 중얼거렸지만 알 리가 없다.
그들의 앞에는 다시 귀왕혈의 총단이 나타났다. 하지만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귀왕혈의 살수들이 아니었다.
무림은 평온했다.
원(元)이 쓰러지고 명(明)이 서는 혼란의 와중에 무림이라고 평온할리야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세월이 지나고 명이 자리를 잡게 되자 무림은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 평온을 흔들어 놓은 것은 다름아닌 귀왕혈의 살업(殺業)이었다.
살인청부업이란 무림이 존재하면서부터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과 같이 조직적이고 강력한 집단은 아직껏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청부조건만 맞으면 누구던 살해했다. 결국
그렇게 되어 초래된 것은 힘의 공백.
그들이 등장한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 무림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고 귀왕혈은
무림의 공적화(公敵化)되었다.
하지만 비밀유지를 제일로 하는 그들을 잡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격대가 조직되었지만 헛된 시간만 보낸 꼴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명백한 전기를 만든 것은 귀왕혈을 처리하기 위한 구대문파의 회동,
중립지역이라 할 수 있는 황산에서 각종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모였던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당한 변고였다.
몰살(沒殺)!
굳이 아홉 개의 문파를 들어 구대문파라 칭하는 것만 보아도 이들이 무림중에서
가지는 힘이나 비중은 짐작하고도 남을터, 이 일은 천하를 경동(驚動)시키기에
족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귀왕혈을 쫓기 위한 구파추적대가 결성되었고 천하 각처에
무림첩(武林帖)이 발송되었다.
무림첩이라 함은 무림 각지에 뿌려지는 일종의 격문(檄文)이다. 구대문파가 뿌리는
무림첩이 일반 격문과 다름은 거기에 구파연명의 서명이 들어있어 구대문파가
공동으로 협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무림중의 그 누구도 구대문파가 공동으로 협조를 요청하는 일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천하가 귀왕혈을 잡기 위해 나섰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어둠 속에 숨어있는 귀왕혈을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고 급기야는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주축으로 한 구파추적대가 결성되어 귀왕혈을 쫓기 시작했다.
비록 구대문파 수뇌의 몰살이 과연 귀왕혈의 짓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 일이 그들의 짓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추적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뛰어난 사람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그처럼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귀왕혈도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파탄은 그 와중에도 그들이
청부살인이라는 살업을 중지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하였다.
오대천왕중 유일하게 여자인 냉혼사왜는 구파가 판 함정에 빠져서 천중(川中)의
거부인 수대인(帥大人)을 암격하기 위해 나섰다가 덫에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은 했으나 지독한 추적에 몸을 담을 곳이 없었다. 결국 생사를 넘나들면서
겨우 돌아온 곳이 현도관.
그 뒤를 쫓던 냉면검신 자의후와 추적대의 몇사람이 제일 먼저 당도했고 뒤이어
본대가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길을 연 자의후의 뒤를 따라 지하도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함정과 첩첩(疊疊)한 기관매복(機關埋伏).
귀왕혈의 총단으로 짐작되었던 이곳에 그들이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지하도 전체가
폐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이루어지는 귀왕혈의 암격(暗擊)에
의해 적지않은 피해를 봐야만 했다. 그러나 공격을 하는 측과 방어를 해야 하는
측에게 있어서 공격하는 측이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결과는 늘 정해져 있는
법이다.
추적대의 고수들은 몇갈래로 갈라졌지만 결국 그 중심부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이르러 전혀 엉뚱한 적을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암습에 손해를 본 그들과 부딪힌 자들의 힘은
뜻밖에도 막강했다. 그렇게 되어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때, 그 자리에
자의후가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쓸어본 자의후는 구파추적대와 맞닥뜨린 자들을 보고는
이내 냉소를 터뜨리면서 사납게 그들을 덮쳐갔다.
쨍! 쨍그렁……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음향.
자의후가 검과 함께 날아들어 구파의 추적대와 맞싸우고 있는 회의인을 공격하자
단숨에 피를 뿌리고 쓰러질 줄 알았던 회의인은 놀랍게도 그의 일검을 막아내고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법이군!"
뜻밖의 광경에 미간을 찡그렸던 자의후는 조금도 쉬지않고서 천하를 울리는
질풍경도십칠검을 발휘하여 상대를 덮쳐갔다.
어둠속에서 검광이 불빛을 받아 서릿발처럼 번뜩이는데 도저히 그 허실조차 추측할
수가 없었다. 검세의 변화가 너무나 빨라 손에 든 화통의 불빛으로 겨우 상황을
보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검을 제대로 판단하고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회의인은 상태를 직감했다.
하지만 그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중독에서 벗어난 자의후다. 게다가
일신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고 연이은 좌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인지라 그의
공격은 사정이라고는 아예 없으니 그보다 무공이 떨어진 회의인이 그 공격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헛되이 발악처럼 수중의 검을 흔들어댈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물러나라!"
냉엄한 호통과 함께 강력한 도세(刀勢)가 그들 가운데로 날아들었다.
캉! 쨍, 째애앵……
단 한순간에 다섯번의 부딪힘이 이루어졌고 검광(劍光)이 번뜩이고 도영(刀影)이
일어나는 가운데 무려 서른번에 가까운 변초가 행해졌다.
그 격돌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옆에서 싸우고 있던 회의인 일행과 구파추적대의
고수들이 물러날 정도였다.
자의후는 놀란 눈으로 회의인의 앞을 가로막은 당당한 체구의 사내를 보았다.
수중에 특이한 형태의 칼刀을 들고 있는 사십대의 장한. 회청색의 옷을 입은 그는
고리눈을 부릅뜬채로 수중의 도를 천천히 들어올려 자의후를 겨누고 있었다.
"귀왕혈에 너와 같은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자의후가 묘한 빛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검을 세웠다.
상대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회청색 장한은 자의후의 검에서 검기가 아지랑이와 같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긴장의 빛을 띠며 낮게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말과 함께 그의 도가 부르르 떨리며 한순간에 십여 매의 도광을 마치 꽃송이와
같이 환출(幻出)해냈다.
그리고 마치 강력한 자석의 인력이 작용한 듯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덮쳐갔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 한번의 격돌에서 생사격돌이 이루어질 것임을! 바로 그때였다.
"손을 멈추시오!"
낭랑한 호통 한마디.
동시에 한 사람이 그 가운데로 날아들었다.
수중에 들린 것은 목검. 그 목검은 그가 춤추듯이 흔듬에 따라 거대한 도끼와 같이
두 사람의 격돌현장 가운데를 잘라갔다.
당!
장한의 도와 슬쩍 부딪힌 목검은 심산계류에서 잉어가 튀듯이 퉁겨져 빙글 도는
사이에 자의후의 검을 향해서 너울너울 날아갔다.
목검이 너울거린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지만 그 검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느꼈다.
자의후는 나타난 사람이 왕승고임을 보자 그의 외침과 함께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렇게 되자 왕승고는 목검을 거두고 그들 가운데 우뚝 섰다.
방금의 상황이 얼마나 흉험했는가를 말하듯이 그 순간에 한줄기 경풍이 그곳에서
일어나 주위로 퍼져나가면서 잘려져 나간 왕승고의 머리카락을 흩뿌렸다.
"고맙소".
왕승고가 자의후를 향해서 가볍게 미소지어 보였다.
여전히 침착하고 태연한 태도.
신기한 눈으로 자의후가 그를 보았다.
전혀 뜻밖의 상황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주공!』
느닷없이 들려온 격한 외침.
왕승고는 흠칫하여 그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가 물리친 회청색 옷을 입은 사십대 장한.
그의 옆에서 회의를 입은 사내가 격동한 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 혹시…… 정말 주공이십니까?』
회의를 입은 자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 남로총탐?』
왕승고가 그를 보며 의아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 그렇습니다, 주공!』
회의인, 남로총탐이 부르짖으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남로총탐과 왕승고를 바라보던 신력대도 정규. 따로 순행위장(巡行衛將)이라
불리는 그도 뒤따라 무릎을 꿇었다. 마치 물결이 치듯이 그때까지 싸움을 하던,
싸움을 그친 자들이 모두 그 뒤에서 한마디를 외치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 주공!』
싸우던 자가 싸우던 상대를 버려두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베어가라는 소리다.
그들과 싸우고 있던 서너 명의 고수들은 일순간 멍청해져서 주춤거렸다. 그들이
협의도(俠義徒)가 아니었다면 기회다 하고 일단 그들의 목을 쳐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이 돌변한 상황은 격렬한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던 이 지하를
숨죽이게 하기에 족했다.
자의후조차도 얼떨떨하여 왕승고를 쳐다보고 있었다.
『 여긴 어떻게 온 거요?』
『 주공을 찾아왔습니다!』
왕승고의 물음에 남로총탐이 부르짖었다.
그는 왕승고가 정말로 살아있을 줄은 몰랐기에 격동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대가 어둠에 싸여 왕승고의 얼굴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는 오히려
왕승고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왕승고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는 왕승고의 기태(氣態)를 보자 그임을 확신하고 소리쳤다. 만에 하나 달라진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면 오히려 망설였을는지도 몰랐다.
그 말의 의미는 왕승고가 지니는 일신의 기품이 남이 알아볼 정도로 특이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의후와 왕승고가 함정에 빠졌던 귀왕혈의 총단은 폐쇄되었다. 추적대가 그곳을
파괴하고 들어갔을 때, 거기에 귀왕혈의 살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방 싸우면서
주의를 끄는 사이에 귀왕혈의 주력은 다른 비밀통로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먹물을 뿌린 듯 어두운 지하.
시야를 밝히는 것은 손에 들린 화통에서 뿌려지는 불빛뿐이다.
거기서 돌연히 나타난 자들, 일행이 아닌 바에야 적일 수밖에 없다.
난 누군데 너는 누구냐고 묻기에는 쌍방이 다 이미 지독한 악전(惡戰)을 치른
다음이었다. 그렇게 묻다가는 그 사이에 상대가 자신의 목을 따고 있을 것임을
이미 이 지하에 들어와서 수없이 경험한 다음이라 일단 상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구파추적대와 왕승고의 종적을 찾아 이곳까지 들어온 남로총탐 일행이
격돌한 이유였다.
『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 많은 힘을 들였습니다. 돌아가시지요!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로총탐이 다시 외쳤다.
들뜬 음성이었다.
왕승고는 고개를 돌려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자의후를
보았다.
『 황족(皇族)인가?』
자의후가 불쑥 물었다.
쓴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떠올랐다.
『 글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귀왕은 자리를 걷어가지고 떠난 것
같은데……』
상대가 굳이 말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캐묻지 않는 것이 예의다.
잠시 왕승고를 바라보던 자의후는 대청 저 끝을 가로막고 있는 석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함정에 떨어지기 전까지도 저곳에는 귀왕이 명령을 내리던 귀왕상이 있던
곳이다.
그냥 돌아갈 수야 없었다.
왕승고 등이 함정에 빠지기 전과 지금의 이 지하대전의 상황은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몇군데로 났던 문중 두 개가 부서지고, 그나마 귀왕상이 있던 곳은 아예
거대한 석벽으로 화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곳이 석벽인줄 알 형태.
자의후가 그곳을 노려보면서 검을 고쳐잡는 것을 보고 왕승고가 말했다.
『 파괴할 작정이오?』
『 그냥 두고 볼 순 없지!』
『 여기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이고 싶지 않다면 참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왕승고의 말에 자의후가 그를 보았다.
『 기관이라도 설치되어 있단 말인가?』
『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함정을 만든 자들이 그냥 돌벽으로 앞을 막아 놓았다면
아마 믿기 힘든 일이 될거요. 나라도 그냥은 가지 않았겠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왕승고의 말에 자의후가 고개를 돌렸다.
『 석송(石松),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구파 고수들 중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른 체구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저분 소협의 말이 맞습니다. 저 석벽을 파괴하면 이 일대 지하대청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그래서 저곳을 살펴보고 있던 중입니다』
그는 기관매복에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다.
교수검객(巧手劍客)이라고 하는데, 원래 그의 출신인 석가(石家)는 기관건축
방면으로 특별한 재주가 있는 집안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그가 지혜 있음을
의미했다.
『 교활한 놈들…』
자의후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반쯤 부서진 동향로를 발길로 찼다. 얼마전
자신이 발길로 차버렸던 바로 그 부골소혼향을 피워내던 향로였다.
쾅!무서운 기세로 떠올라 반대쪽 벽에 부딪친 동향로는 산산조각이 나버리면서
퍽!하며 분홍빛 연기가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 이런!』
자의후가 미간을 찡그리는 것과 함께 왕승고가 공력을 일으켜 소매를 저어 연기를
밀어내면서 낮게 소리쳤다.
『 부골소혼향이오! 모두 밖으로 물러나시오』
그 말에 군웅들은 놀라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긴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왕승고 등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동녘 하늘이 저멀리서 뿌옇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검은 구름이 옅어져가면서 이리저리 조각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장관(壯觀)이었다.
현도관은 어제처럼 그렇게 묵묵히 버티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빈민들이 아침배급을 받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이야 시간이 남았지만, 한걸음이라도 빨라야….
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생각이라는 것은 일단 먹을 것에 대한 본능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이런 식으로 은신하고 있으니 지난 일년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겠지』
자의후가 현도관을 바라보고 있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지하를 벗어난 것은 현도관이 아니라 현도관에서 조금 떨어져서 현도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비밀통로였다. 그것은 무덤의 비석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 오늘부터가 큰일이군』
현도관을 내려다 보고 있던 왕승고가 문득 중얼거렸다.
『 눈가림을 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저 빈민들을 구제하고 있던 것은 바로
현도관이었소. 하지만 그들이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누가 그들을 돌보겠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자의후를 보고 왕승고가 말했다.
그 말에 자의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확실히 그것은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 이곳을 관장하고 빈민을 구제할 인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거기 소용되는
비용은 내가 내겠소. 도와줄 수 있겠소?』
왕승고의 물음에 자의후가 고개를 끄떡였다.
『 구파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 그럼 되었소』
왕승고가 고개를 끄떡였다.
왕승고는 떠나갔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의 숫자는 적지않아서 스무명에 가까웠다.
자의후는 묘한 표정으로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 그가 누구요?』
구파추적대는 삼대로 나뉘어 귀왕혈을 쫓았다. 그중 여기에 도달한 것은 무당파가
주축이 된 제이대 스물 일곱 명이었다. 그 이대를 이끌고 있는 무당파의 속가장로
남삼일점홍 이득수(藍衫一點紅 伊得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나도 모르오』
자의후가 대답했다.
남삼일점홍이 미간을 찡그렸다.
대답하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의후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별로 없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진경(進境). 분명히 내가 처음 보았을때의 그는 백면서생이었는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의후는 자신이 검을 수련하기 위해서 그처럼
살과 같이 흘려보낸 세월을 생각했다. 십년이 넘었다. 그런데 불과 일년만에
자신과 필적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나타난단 말인가.
왕승고는 현도관을 떠나자 남로총탐을 따로 떠나보냈다. 그의 능력으로 현도관에서
자취를 감춘 귀왕을 쫓아 그의 종적을 알아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력대도 정규와 함께 제남으로 향했다. 만금전장의 총호(總號)로
가는 것이다.
그와 어머니 구대부인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나 흐른 뒤였다. 밤을
도와 말을 달렸다는 말이 맞을 터였다.
왕승고를 앞에 둔 구대부인은 말을 잃었다.
그의 옷차림새는 변하지 않았다. 평범한 베옷에 길게 늘어져 질끈 묶은 머리.
하지만 그 가운데 드러난 얼굴은 지난날의 그 투박했던 모습이 아니다.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은 달라졌을 터였다. 백면서생의 그 책냄새에서
세월을 달관한 수련자의 모습으로 바뀌어졌을터이니 그 기질(氣質)이 어찌 같을
수야 있겠는가.
『 저, 정말 너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왕승고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 그간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 무, 무슨…… 그게 무슨 소리냐. 어디,
어디 네 얼굴을 다시 보자……!』
황망히 소리치며 왕승고를 잡아 일으키려던 구대부인은 문득 왕승고의 지난 일이
생각나 그의 어깨를 잡았던 손길이 굳어졌다.
왕승고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잔잔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여유있는 웃음이었다.
『 만지셔도 됩니다. 제 몸속의 독은 해독되었습니다』
『 그, 그게 정말이냐? 그게 정말이야?』
억제하고자 해도 억제할 수가 없도록 말소리가 떨려 나왔다.
『 그렇습니다』
『 그렇구나! 그렇구나!!』
무엇이 그렇다는지 알수 없는 외침. 그 외침이 구대부인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왔다.
그녀는 지난번 안아보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왕승고를 안고
또 안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들여다 보고 다시 그를 안았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떨리는 손길에서 왕승고는 어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일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식을 버려둔 어머니.
자신이 죽었음을 알았을 때, 그 어머니의 가슴이 어떠했을까.
진정이 되고 두사람은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자(話者)는 당연히 왕승고였다. 어머니 구대부인은 듣는 사람이었고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해서 탄성을 질렀다.
『 그런 일들이……』
이야기가 끝나자 구대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 다시는,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라. 네가 반드시 귀왕혈을
상대해야겠다면 전장의 힘을 사용하거라. 네 일신에는 고려의 한(恨)이 서려 있다!
너는 너이되, 네가 아닌 것이다』
구대부인이 그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제남은 멀리 태산을 바라보고, 제수(濟水)를 끼고 자리하는 산동성(山東省)의
중심부다.
만금전장은 그 제남의 중심가에 자리한다.
하지만 구대부인이 왕승고를 만난 것은 만금전장의 총호가 아니다. 성 교외에
자리한 조용한 장원이었다.
후원 뜨락에는 국화가 특유의 향을 흘린다. 보자니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저런
갖가지 국화의 전시장에라도 온 듯한 느낌.
왕승고는 그 국화밭에서 어머니 구대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이제 때가 오고 있다. 이런 때에 죽은 줄만 알았던 네가 살아 돌아옴이 어찌
보통 일이기만 하겠느냐? 이는 반드시 고려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구대부인의 눈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 반드시 천도가 무심하지 않다는 것을 그 자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 ……』
왕승고는 조용히 그녀를 보기만 했다.
사부, 한호국의 죽음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참혹한 최후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어머니가 상심을 할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죽지 않았다면 돌아 올 것이라는 한가닥 희망을 가질 것이니
그것은 그의 넓은 헤아림에서 비롯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인과(因果)의 얽힘이 얼마나 수많은 결과로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인지를 어찌 인간으로서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 가자, 네게 한 사람을 보여주겠다』
구대부인은 주렴을 친 장막의 뒤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옆에는 왕승고가
조용히 서 있었다.
『 거사는 근일중에 있을 것입니다』
『 모든 지원은 아끼지 않고 있겠지?』
『 물론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최대한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방원(李芳遠)을
처리할 사람은 그외에는 없으니까요』
『 좋아, 그럼 지금 떠나도록 하시오』
『 다시 뵐때까지 강녕하십시오』
사내가 깊게 몸을 숙였다.
오십줄에 들어선 그는 조선과 만주를 넘나 들면서 인삼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고려에 대한 충신이기도 했다.
『 이방원이라면, 이성계의 아들 아닙니까?』
『 그렇다』
구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는 명의 연왕과 같은 자이지. 야심이 크고 야심이 큰만큼 그릇도 크다. 그가
왕이 된다면 조선은 강해질게다. 그렇게 되면 조선을 치기 어려워질 수도 있지』
『 그럼?』
『 그렇다. 지금 떠난 자는 인삼행상을 하는 거상이지만, 내 심복이기도 하지.
나는 그를 통해서 정도전을 지원하고 있다』
『 정도전이라면 조선조의 개국공신…』
『 그렇다. 그는 남온 등과 함께 조선을 일으킨 일등공신이지!』
입술을 깨문 구대부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 그런데 왜 그를…』
『 그가 아니면 이방원을 잡을 자가 없다』
『 그럼 그를 통해서 이방원을 제거하고 그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려는…?』
『 그렇다. 지금 조선조의 세자인 방석(芳碩)은 심약하고 고생을 모르고 자란
화초와 같은 샌님이지. 그의 형인 방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어쩌면
지금의 명과 너무도 흡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을테지.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은
이성계의 후비인 강가(康哥)년이 정도전과 짜고서 만든 일이야. 방석이 왕위에
오르면 정도전이 권력을 쥐게 된다』
싸늘한 웃음이 구대부인의 얼굴을 긋고 지나갔다.
『 공신이 개국초기의 나라에서 권력을 쥐게 되면 뒷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한
일이지… 나는 정도전에게 기대를 하고 있다』
그녀의 눈에서 일어나는 웃음은 이미 웃음이라기보다는 칼날과 같았다.
왕승고는 자신의 어머니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의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이런 일은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에 넘어와 절치부심, 칼을 갈고 있는 것뿐 아니라 두고 온 나라의
내부사정까지 살피면서 그 정세까지 암중에서 조종을 하다니… 어쩌면, 그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왕승고는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참으로 기묘했다.
너무도 흡사하게 명나라의 형세를 빼다 박은 듯한 형국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두 명의 부인 사이에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었다. 무려
스물네 명의 아들을 두었던 주원장보다는 적었지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당대에 이르러 지존(至尊)의 위(位)에 오르게 되어 있는 것은 창칼이 부딪히는
전장(戰場)에서 적의 목을 치면서 말을 달려 나라를 이루어냈던 그 용과 범 같은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고 자라난 막내 방석(芳碩)이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첫째인 방우(芳雨)가 그 자리를 포기한 것에서 기인하였지만,
야심만만한 다섯째 아들 방원이 그것을 그냥 두고볼 리가 없었다.
더더구나, 첫째형인 방우가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세자의 자리를 포기했으므로 그
위(位)가 둘째형인 방과(芳果) 등의 형에게 돌아갔다면 대의명분상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그것이 후처인 왕비 강씨와 정도전의 입김에 의해 그녀가 낳은
아들 방석에게로 왕위가 돌아가게 되자 앙앙불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뒤를 이어 추진된 사병(私兵) 혁파(革罷)또한 명에서 추진하고 있는 삭번과 다를
바 없었다.
조선의 건국에는 훈구대신(勳舊大臣)에 반기를 든 토호(土豪)의 힘이 상당히
작용했던지라 일단 나라를 세우게 되자 그러한 힘에 대하여 경계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또 그러한 힘을 이용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까.
상황은 긴박했고, 누가 먼저 손을 쓰는가는 가히 초읽기와 같은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먼저 손을 쓴 것은 이방원이 아니라, 정도전이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병이 위중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전실(前室)의 소생 왕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음모를 꾸몄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니 세상은 정도전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그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는 오히려 역습을 가해 정도전과 남은
등을 모두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제일차 왕자(王子)의 난이다(1398).
상황이 이에 이르자 세자 방석은 벌벌 떨면서 태조 이성계에게 나아가 목숨만은
살려주기를 애원했다. 이성계는 대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다음이라
조정대신들까지 모두 방원의 편이었다.
이성계는 탄식을 했지만 결국 방석을 폐세자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을 세자로 앉히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왕비 강씨의 아들인 막내가
폐세자된 마당이니, 서열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둘째 아들 방과(芳果)를 세자로
정한 것이다.
뒤이어 세자가 되고 전위를 받아 조선조의 두 번째 왕인 정종(定宗)이 된 방과는
심약하여 원래 그런 쪽으로 별로 재질이 없던 사람이다. 기세등등한 아우 방원의
입김에 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세자의 위를 버리고 물러나던 방석을 비롯하여, 같은 강비의 소생인 형
방번까지 후환을 염려한 방원측에 의해 비명에 간 것을 본 다음인 것이다.
결국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이차 왕자의 난을 불러오게 되고 마침내 이방원을
왕위에 올려놓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의 일이었다.
어둠이 내렸다.
왕승고는 아직도 구대부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아니, 하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은 듯했다.
『 너무 늦었구나…』
문득 바깥을 본 구대부인이 말했다.
『 먼 길을 왔는데 쉬게 했어야 할 텐데 내가 너를 너무 오래 붙들어 두었던 것
같구나. 이제 푹 쉬도록 해라. 아마… 내일 부터는 쉴 틈이 별로 없을 것이다』
왕승고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복국지계(復國之計)를 시작하십니까?』
구대부인은 멈칫, 왕승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 너를 편히 쉬도록 해주고 싶지만, 그간 너무 지체되고 변수가 많이 발생하여
이젠 시간이 없구나. 곧 전쟁이 일어난다!』
『 전쟁…』
『 그렇다. 전쟁!』
구대부인이 다시 한번 말했다.
『 이미 제왕(諸王)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죽거나 폐서인되는 길 뿐.
연왕 또한 마찬가지.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직 전쟁을 일으켜서 전부냐,
전무냐 하는 주사위를 던질 수밖에』
구대부인의 말은 당금 천하의 정세를 꿰뚫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정세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명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촛불이 일렁였다.
『 그 전쟁은 연왕과 당대 황제에게는 생사결이 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우리
고려의 복국을 위한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은 봉황비상(鳳凰飛翔)의 계를 실행할
때가 된 것을 의미한다』
『 봉황비상의 계라면?』
『 우리 고려를 다시 세우기 위한 계책이다. 그것은 연왕이 전쟁을 일으키면
시작된다』
천하의 여장부 구대부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빛나고
있다. 지난 세월 기다려왔던, 그렇게 바랐던 일이 이제 그 결실을 향해 용틀임을
하고 있었으므로.
『 뭐라고?』
왕승고는 놀란 눈으로 앞을 보았다.
그의 앞에는 머리를 틀어올린 아름다운 용모의 시비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이름을
서향(瑞香)이라 하였다.
『 들어가십시오. 천비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서향이 허리를 굽혔다.
이곳은 왕승고의 거처. 그녀와 왕승고가 서 있는 곳은 휘장이 드리워진 욕조의
앞이었다. 대리석으로 된 욕조. 통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던 시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호화롭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만금전장의 부를 생각한다면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 되었다. 너는 가보거라』
왕승고는 고개를 저었다.
『 저는…』
『 시중이란 편하기 위한 것, 네가 시중을 든다면 편하지 아니하니 물러가 있거라.
필요하면 부르마』
뜻밖이란 듯 서향은 왕승고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왕승고의 눈을 보고 그의 눈이 평범한 사람과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 형용키 곤란했다. 그저 조용하고 맑아보일 뿐.
『 그럼…』
서향은 새로 지은 옷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날아갈 듯이 허리를 굽힌 다음,
뒷걸음질로 그곳을 물러났다.
시녀의 시중이 당연하던 시절.
서향을 물리친 왕승고는 옷을 벗다가 문득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책이었다. 양피로 된 책.
바로 지하 의자왕의 무덤에서 얻은 황창검비요였다. 밀폐되었던 곳에서 나와서
그런지 처음 볼 때보다 훼손이 심각했다. 너덜거리는 것은 둘째치고 적힌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 황창이라면 신라의 화랑. 그의 검무도(劍舞圖)가 어찌하여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겠군…』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생각했던 대로 무덤 안에서 신라계와
백제계가 싸운 것이었다면 신라의 화랑이었던 황창의 검무가 거기 남아 있다한들
무리가 될 것은 없었다.
신라의 화랑이라고 알려진 황창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화(說話)가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현재까지 전하는 황창랑무(黃倡郞舞). 「동경잡기」(東京雜記)의
풍속조(風俗條)에 황창랑이라는 신라의 나이 어린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백제
왕궁에 들어가 왕 앞에서 칼춤을 추다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잡혀서 죽은 충절을
추모하여, 신라 사람들이 창랑의 용모와 비슷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가 추던
춤을 모방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년의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뛰어난 검객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증거는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었다.
밤 하늘.
아스라이 별들이 깔려있다. 은가루를 뿌린 듯한 별의 무리가 끝없이 널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폭포수 같이 쏟아져 내릴 듯이.
왕승고는 국화향이 그윽한 뜨락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도 다시 묶었다. 이미 중독된 지난 시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록 전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의 본래의 면목을 되찾은
왕승고였다.
바람이 불었다.
옷자락이 사각거리고 꽃잎들이 흔들린다.
날아갈듯한 느낌일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왕승고는 거북했다.
원숭이들과 뒹굴고 자연에 길이 들여진 상태인지라 새옷을 입자 그 까슬한 느낌이
어딘지 모르게 남의 옷을 빌려입은 듯이 편안하지 않았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지난날에는 그러한 옷이 아니면 입지를 않았던 귀공자
왕승고였던 것이다.
문득 왕승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부터는 복국의 대업에 참여하라.
어머니의 그 말은 그에게 부담을 주기에 족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만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사부의 얼굴이 스쳐가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채노야,
장호법등의 얼굴, 그리고 목우충의 얼굴도 스쳐갔다.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낙양을 떠나면서 중단시켰다. 이미 찾은 무덤을 다시
찾을 필요도 없겠거니와 잘못하면 오히려 시신을 욕보일 염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예정은 귀왕혈을 치고 소림사에 들러서 지난날의 약속을 이행할 참이었다.
그가 도중에 만난 공우대사등에게 신물을 넘기지 않은 것도 직접 찾아가 건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정규등의 재촉으로 인해 바로 제남으로 오느라 그 일을 하지
못했다. 남은 것은 부담.
코 끝에 국화향이 스친다.
길게 숨을 들이킨 왕승고는 드리운 달빛 아래에 흐드러진 국화를 보면서 묘한
감흥을 느꼈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마치 춤을 추는듯한 형태의 손끝.
무엇을 쥔 듯 하기도 하고, 아니 쥔 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공을 부유하는
깃털과 같은 움직임을 가진 손이 활짝 펴지자 갑자기 왕승고가 불쑥 한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두둥!
북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그의 발이 슬쩍 들어올려지자 바다가 출렁이는 듯하고 휘젓는 소매에 파도가 인다.
벌린 두 손에 천지가 가득하고 슬쩍 허공을 휘감은 손에는 어느새 국화 한그루가
들려있다.
꽃잎이 춤을 추었다.
사람도 춤을 추었다.
국화가 흔들리고 사람도 흔들린다.
휘돌아가는 춤사위에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했다.
그것은 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무였으며, 그 이름을 황창랑무라 하였다.
왕승고는 욕조에 몸을 담근채 검무를 생각했었다. 양피에 적힌 것은 훼손되어 이제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왕승고 뿐인 셈이었다.
황창랑무는 말 그대로 춤과 같았다.
유연하고 부드럽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것을 남과 싸우기 위해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자의후가
검보를 보고 『 이걸 실전에 사용할 수가 있을까?』라고 중얼거린 것이 바로
그것을 웅변한다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왕승고는 달랐다.
그가 익힌 천부신공은 달랐다.
그 부드러움 속에 대해를 담을 수 있는 넒음과 하늘을 가를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천부신공이 바로 그러한 힘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이지 아니하고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힘.
바로 자연(自然)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한바탕의 춤사위가 달빛 아래에서 벌어졌다.
너울너울 국화꽃 한송이를 든채로 춤을 추는 무인(舞人) 하나.
그가 춤을 다 마쳤을때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혼자 국화꽃을
든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절학을 펼쳐서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위가
초토화가 된 것도 없고 위대한 힘이 작용하여 새생명이 움트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 같은 계열이다』
왕승고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익힌 여러가지 무공들은 가히 잡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절대로 그 무공들을 그렇게 익힐 수가 없었다.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왕승고가
세상에 드문 천부신공을 익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황창랑무는
그러한 무공들과는 달랐다.
국화 한 송이.
왕승고는 달빛 아래에서 손에 들린 그 국화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빛을 띤 국화. 한바탕 춤사위를 함께 한 다음인데도 국화는 제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승고의 내력이 그 국화를 보호했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그 국화 한 송이가 진검과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헌검(獻劍)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충절보국(忠節報國)에 이르는 스물네가지의
춤사위는 천부신공과 어우러질 수 있다. 굳이 격(格)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왕승고는 의자왕의 무덤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도 그러한 기세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실로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떤 수준을 이루기 위해서는 길을 따라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양을 갖추고 그 나름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창랑무나 천부신공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굳이 체나 격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물과 같은 존재였다.
물은 분명히 존재하고 담기는 그릇에 따라 그 형상이 변하기는 하지만 그 본신이
물이라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듯이.
왕승고에게 지난 일년은 그가 배운 구파의 무공등을 스스로의 것으로 하는
세월이었다.
그것은 체계적일 수가 없었다.
절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에게 구전(口傳)된 것은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지학(實用之學)일 수밖에. 간단히 말한다면 기초는 없는 상황에서 아주 고급의
학문이 얼기설기 모양을 맞추고 선 꼴이었다.
그들은 왕승고에게 그것을 일러 주면서도 설사 그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무공을 모르던 자가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상승의 무학을, 그것도 단편적으로 알게된 무공을
수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
하지만 천부신공이 기초하자 그러한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뼈를 깎는 왕승고의 노력은 그것을 수습함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경험.
그것을 알기에 왕승고는 강호에 나와 비무행을 벌이며 낙양으로 향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고리를 이어줄 수 있는 단서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황창랑무.
왕승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가 알던 것과는 다른 어떤 영감(靈感)이 뇌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부신공이 그의 전신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전신이 용광로와 같이 들끓어 올랐다.
가만히 서 있되,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울거리는 검무의 춤사위가 그를 덮고 있다. 아니, 천지의 춤사위가 그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일컬어 천지와 내가 하나가 되는, 나와 천지가 하나로 화하는 영감이 그의 전신을
휩쓸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달빛 아래 국화밭에서 국화로 검을 대신하여 검무를 추던 왕승고는 생각지도
않은 거대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었다. 전신이 불길에 빠진 듯 했다.
천지지교(天地之橋)가 용암구덩이에 빠진 듯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진기가
충일(充溢)하게 일어났다.
조용한 진동이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팍!
왕승고의 수중에 들려있던 국화꽃이 마치 폭발하듯이 산산이 흩어졌다. 남은 것은
줄기 뿐. 그리고 그 줄기마저도 그의 손아귀에서 산산이 부스러져 흘러내렸다.
『 아깝군』
왕승고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아서 천지와 하나가 되어가던 그의 정신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순간은 결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고자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천지지교에서 들끓던 기운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왕승고는 고개를 저으며 십여장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경계가 엄중했다.
하지만 그것을 무인지경처럼 뚫고 스며든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방해는 거기에서 생겼다.
인영은 소리도 없이 어둠을 뚫고 후원으로 스며들었다. 거침없는 몸짓. 번을 서고
있던 고수들은 그의 출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왕승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왕승고는 정말 뜻밖의 대공을 이룰 수도 있었다. 긴박한
순간에 그 인영이 후원으로 스며들면서 왕승고를 발견하고, 그를 피하면서 처마밑
어둠으로 숨다가 실수로 낸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인영이 소리만 내지 않았더라도, 아쉬움은 남지만 인연이 그뿐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면서도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나직이 한숨을 쉰 왕승고는 인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밤에 눈을 피하여 숨어드는 자라면,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인영은 흑의에 복면까지 해 진면목을 감추고 있어 누가 보아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손님이라면 복면을 하고 이렇게 숨어들지 않을
것이기에.
하지만.
「여긴 어머님의 거처?」
흑의복면인이 도달한 곳을 본 왕승고의 미간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다른 곳도 아닌 어머니 구대부인의 거처에 도달한 그 흑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밤에 저렇듯 태연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설마….
왕승고는 갑자기 굳어졌다.
흑영이 사라지고 나자 조금 있다 불이 켜졌다. 이미 밤은 깊어 4경에 가까운
시간이다.
갈등이 이는 듯이 잠시 망설이고 있던 왕승고는 조용히 몸을 날려 얕은 담을 넘어
구대부인의 거처인 취향루(聚香樓)를 보았다. 불이 밝혀진 곳은 취향루의
2층이었다. 한쪽 창문이 열려있어 불빛은 확연했다.
주위를 살핀 왕승고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았다. 암향표의 경공, 그야말로 암중에
흐르는 향기와 같이 그의 신형은 기척조차 없었다. 현도관에서와는 또다른
진경(進境). 방금 그 일이 공을 이루지는 못했을 망정, 적잖은 도움을 준 듯했다.
정말 2층 구대부인의 침실에는 흑의인이 구대부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침실이라고는 하지만 전실과 후실이 나뉘어져 전실은 손님을 맞을 수 있게
되어있다.
『 바로 말인가요?』
구대부인이 놀란 빛으로 말했다.
『 그렇습니다. 더이상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직접 뛰게 해야 한다고…』
흑의인은 말과 함께 봉서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을 개봉하여 읽은 구대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다고 말씀드리세요』
『 그럼』
흑의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는 몸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제보니 열린 창문은 그가 들어왔던 곳이었다.
그가 사라진 후, 다시 한번 봉서를 읽어본 구대부인은 그것을 구기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 승고를 바로 투입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수중에 구겼던 봉서를 가볍게 던져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봉서는 이미 갈기갈기 찢겨있는 상태로 촛불로 날아가서 허공에서 춤을 추면서
불타올라 재로 화해갔다.
말이 그렇지 그것은 상승의 공력이 없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직한 놀람의 소리.
『 누구냐?』
질타와 함께 구대부인이 창문을 왈칵 젖히며 일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외침에
놀란 듯이 주위에서 인영들이 벌떼처럼 솟아나왔다.
『 무슨 일입니까?』
『 주위를 수색해라. 침입자가 있다』
그녀의 말에 인영들이 사방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들은 모두 담 밖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이 일대를 수색하고 있을 때, 왕승고는 자신의 거처에 돌아와 있었다. 의혹을
가슴에 안고서.
의혹이 일 만한 일이었다.
느닷없이 찾아든 흑의복면인.
간단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무공을 지닌 듯한 그가 구대부인에게 보내는 글은
그녀를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어머니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니,
그것도 상승의 무공이란 말인가!
날이 밝았다.
『잘 잤느냐?』
대청. 앞에 앉은 왕승고를 향해 구대부인이 자애로운 얼굴로 물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사실은 오늘 너를 데리고 한 분을 만나뵈러 갈 생각이었다』
『…』
『그런데 갑자기 예정이 바뀌었구나. 너는 지금 바로 북평으로 가야겠다』
『북평, 연경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가서 연왕을 만나 군자금을 전해주고 전쟁이 언제 시작될 것인가를
알아서 내게 알려다오. 시기가 무르익어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근일 중에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회가 무산될 수도 있다』
『단순히 자금만 전합니까?』
『무슨 뜻이냐?』
『단순히 자금만 전하고 전쟁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그쪽에 물어보는 일이라면,
굳이 제가 가지 않아도 기존에 있던 사람들로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에 여쭙는
겁니다』
희미한 웃음이 구대부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네가 가는 이유는 봉황비상의 계가 거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고려의 부활이
걸린 현장에 네가 없다면 되겠느냐?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너는 개인적으로 연왕과
친분을 맺어두어야만 한다』
그녀는 왕승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를 믿겠다』
『한가지 여쭤보고자 합니다』
『물어보거라. 무엇이든지…』
『오늘 만나보려고 했던 사람이 어젯밤 어머님을 찾아왔던 사람과 관계가
있습니까?』
『!』
놀람이 구대부인의 눈에서 튀어올랐다.
잠시 왕승고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이곳에 왔던 사람이 너였더냐?』
『그렇습니다』
왕승고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구나. 사명존자(司命尊者)의 무공으로 네가 따라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니…』
말끝을 흐린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희미한 웃음이 그녀의 눈에서 물결쳤다.
『어미에게, 아니 너와 나 모두에게 은인인 분이다. 은공이 사라진 다음,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날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어젯밤 왔던 사람은 그
분의 명을 전하는 사람이지』
『그 분이라는 사람의 명을 받으십니까?』
『그건…』
무심결에 말을 받던 구대부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왕승고를 보는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뜻이냐?』
『봉황의 비상이 어머님의 뜻인지, 그 은인이라는 분의 뜻인지 알고자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그 잠시의 침묵은 가히 숨막히는 것이었다. 가슴 속에다 무거운 납덩이를
매단듯한 긴장된 순간. 구대부인은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왕승고를
쏘아보았지만 왕승고는 조용히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많이 컸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구대부인이 이윽고 고개를 끄떡였다.
『네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이 어미는
누구에게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도 이 어미를 친 딸과 같이
아껴주실 뿐, 이용할 생각이 없는 분이니까』
훈훈한 웃음이 그녀의 얼굴을 물들였다.
『이용할 필요가 없지!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여 나를 이용하려 들겠느냐? 북평에 다녀온 다음, 이 어미와 함께 그 분을
만나보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그 분의 명호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금곡노야(金谷老爺)』
구대부인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금곡노야…?』
왕승고가 그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대화는 더 지속되었다. 구대부인은 계속해서 그의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그가
알아야 할 일은 아직도 너무 많았다.
첫댓글 즐감~~
감사합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
ㅎ 오늘도 즐독하고 갑니당.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