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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제1독서 : 예레 23,1-6
제2독서 : 에페 2,13-18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형제님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워낙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저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지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떡볶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떡볶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무슨 떡볶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제가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끼리 어떻게 파스타를 먹어요?”
남자가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고, 남자끼리 파스타를 먹으면 안 되는 법이 있을까요?
깜빵 갈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라는 식의
편견이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서 새로운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를 오히려 커다란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일상 안의 고정관념 탈피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그냥 좋은 구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들, 즉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또한 배부르게 먹여주는 등,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도 나고
미움의 감정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셨음을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떻게든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도, 다른 이유로 당신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주님의 뜻인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자 - 연민의 마음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연중 제16주입니다.
주제는 한마디로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입니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냅니다.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농민들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옛날 중국 노나라에 재경이라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특히 악기를 만들면 모양새뿐만 아니라 그 소리가 살아 있었습니다.
한번은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 거문고에 대한 소문이 노나라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거문고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재경이 만든 거문고는 과연 기가 막힌 명품이었습니다.
임금은 재경을 궁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그대가 만든 거문고는 참으로 훌륭하도다.
그대는 어떤 기술을 지녔기에 이토록 놀라운 악기를 만드는가?”
그러자 재경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습니다.
“임금님, 저는 그저 평범한 목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렇다 할 아무런 기술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악기를 만들기 전에 제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합니다.
그리고 악기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흘을 보내고 나면 상을 받는다거나 벼슬을 받는다는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게 됩니다.
다시 닷새를 그렇게 보내고 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떤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하는 따위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됩니다. 이레째가 되면 세상 아무것도 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오로지 악기 만드는 일에 대한 생각만이 날 뿐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저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이지요.
저에게 이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는 이외에 달리 악기를 잘 만드는 기술이란 정말 없습니다.”
고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는, 정곡을 찌르는 예리함이 있습니다.
이 재경이라는 목수의 이야기는 참으로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마음의 자세로 삶을 대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 정치인들이 흔히 상투적으로 쓰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는 것,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일에만 마음을 모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재경이라는 목수가 자기에게 그런 마음을 비우는 이외에
악기를 잘 만드는 기술 따위란 따로 없다고 한 말이
지나친 겸손이어서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몇 년 전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재경에게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다만, 제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부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삶의 경험에서 깨우치게 되는 것은 우리도 어느 정도는 재경의 흉내는 낼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흉내만으로도 인생살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삶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바른 자세를 지니는 것이며 욕심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다시 마음을 모으는 것이겠습니다.
정말 사심을 품지 않고 자기에 주어진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마음을 모으면
뜻밖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가끔 강론 준비를 하면서 이 흉내를 냅니다.
저는 처음에 강론 준비에 일주일이 걸린다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십 분 강론 준비에 일주일이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보통 하루 정도 걸렸었지요.
컴퓨터에 앉아서 써 내려가는 것은 사실 두어 시간 이내이지요.
그런데 저도 이제는 일주일이 걸린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떤 의미에서 일주일 걸리거든요.
일주일 전에 독서와 복음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경우 잠을 자면서도 그 생각에 머뭅니다.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멋진 강론을 해서 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택했던 복음의 내용에 마음을 모으고 며칠을 지내다 보면
깊은 인상을 주겠다든가 좋은 소리를 듣겠다든가 하는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게 됩니다.
한 닷새가 지나면 다만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질 뿐 어떤
좋은 강론을 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도 없어집니다.
그다음에 강론을 써 내려가지요.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제 강론이 마음에 와 닿는다면,
그때는 제가 마음을 주님께 모았었던 때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공동번역의 ‘불쌍한 마음’이나 새 성경의 ‘가엾은’이라는 번역도
“조금 안 되었다.”라고 느낀 정도로 어감이 약할 뿐만 아니라
값싼 동정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비교적 직역이며 정확한 번역인 RSV 영어 번역은
“being moved with compassion”이라고 옮깁니다.
원문인 희랍어로는 splagchnistheis인 데 아주 강한 연민을 뜻합니다.
창자를 뜻하는 splagchna라는 말에서 왔거든요.
우리가 너무나 깊이 마음이 움직일 때 창자가 다 뒤틀린다고 하지요.
아주 내면 깊은 곳까지 마음이 움직인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마음이냐고요? 바로 연민의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의미상으로 번역하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연민의 마음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깊은 연민으로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대목은 복음서에서 아주 여러 번 나오지요.
참으로 예수님은 깊은 연민, 깊은 사랑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져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비록 목석같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면서 비록 악령들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 연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지니도록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모으기로 해요.
목수 재경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오직 예수님의 마음만을 생각하면
차츰 다른 생각들, 남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나를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할까 하는 등,
세상 사람들이 어떤 비난을 하거나 칭찬을 하는 따위의 마음은 사라지고
사랑으로 가득한 그분의 마음으로 채워져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탁월한 어느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비록 목수 재경이 장인으로서 이루었던 그 경지까지는 아니라도
얼추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다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로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과 <호세아서> 말씀의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 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몸살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권력이 분산 되어 있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금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한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적었습니다.
기업의 독점을 막았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향상 시켰습니다.
특허를 통해서 창의성을 보장하였고,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집중된 권력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였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생기고, 세금보다는 뇌물에 익숙해졌습니다.
뇌물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뇌물은 부유한 이를 더욱 부유하게 하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신사가 독점하니 통신비가 비싸고, 핸드폰이 있어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으니 물동이를 들고 물을 얻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했던 나라가 추락하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질 때입니다.
소수의 탐욕이 사회의 조직과 질서를 무너트릴 때입니다.
공화정에서 황제의 통치로 바뀌었던 로마가 그랬습니다.
왕실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던 스페인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했던 베네수엘라가 그랬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탐욕은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다수의 국민들을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자원이 많아도, 국토가 넓어도 권력이 독점되면, 재벌과 권력이 유착하면,
소수의 탐욕이 기승을 벌이면 가난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적어도, 국토가 좁아도 공정과 정의가 보장되면, 기회가 균등하면,
부정과 부패가 자리 할 곳이 없으면 나라는 부유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으로 충만하게 성장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름 날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처럼 생기를 잃어버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는 신앙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세상의 명예, 부, 권력을 향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영혼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이 독점되었고, 소수의 탐욕이 다수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어 그간의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보람과 아쉬움을 헤아리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육의 쉼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듯하지요.
그래서 일단 외딴곳으로 떠나서 쉬도록 배려하십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신 쉼은 안타깝게도 불발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쫓아온 군중이 먼저 그곳에 다다라
갈망 가득한 눈으로 예수님 일행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서 목마르고 허기지고 불안해하는 양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흡사 목자 없는 양들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예수님 마음을 움직여, 예정했던 쉼을 미루신 채
그들에게 다가가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제1독서는 거짓 목자에 대한 주님의 단죄와 참 목자의 도래를 약속하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예레 23,2)
사실 양들의 주인은 목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목자로 세우신 이들에게 당신 백성을 맡기신 것이지요.
하지만 목자들은 자기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양들을 제멋대로 다룹니다.
섬김은커녕 돌봄조차 소홀히 하면서 양들의 우유와 고기와 가죽과 털로 제 이익을 채웠지요.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자를 약속하십니다.
거짓 목자에게 시달린 당신의 양 떼를 다시 불러들여 참 목자 아래 모아주실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 아래서 양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길을 잃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번성하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평화의 주님을 선포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 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는 양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옛 목자 아래의 양들과 새로운 목자의 양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경계하거나 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참 목자께서 목숨을 바쳐 양 떼들 사이의 장벽이었던
계명과 조문을 율법과 함께 폐지하시고 적개심을 허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이 착한 목자의 섬김과 돌봄의 첫 수혜자가
바로 자신들임을 잊지 않았다면 불발된 쉼의 기회도 크게 서운하지 않았을 겁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격려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천방지축 미숙하고 부족한 자신들이었으니까요.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섬김과 돌봄의 사랑을 앞으로 만날 양들에게 베풀 것입니다.
스승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았고 또 목격했으니 영육에 각인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들은 군림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며 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착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머물러 그분 사랑의 눈길을 듬뿍 받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는"(영성체송) 참 목자이십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육의 생명을 떠받치시고 말씀과 성체로 영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니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를 것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은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