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굿바이 마이프렌드 원제로 몇개를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치유'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어의 이해가 부족하기때문에 다음의 글을 보고 원제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제목을 프렌드로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정을 먼저 생각하게되고
저렇게 큐어라고 하면 아래와 같이 치유로서 보여지게 되기 때문에 제목이 중요하기 떄문에 뇩님의 과격한 분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우리나라에서 큐어라고 원제를 붙이면 영혼의 치유보다는 에이즈 치료제를 구하는 치료과정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 cure와 heal의 어감 구분은 전혀 되지 않지만 치유와 치료의 어감의 차이는 잘 받아들여집니다.
영화의 제목이 여러가지 중의의 뜻을 품고 있으니까 영어의 이해가 깊지 않아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으면 작가의 의도를 알게 원제를 찾고 좀 더 생각을 하고 공부를 했었어야 했습니다.
1.
http://blog.naver.com/soullima?Redirect=Log&logNo=50023492704
긁어오기가 안되엇 중요한것을 옮기다면
" 이영화의 원제는 'The Cures' 치유이다.
우리나라 제목인 '굿바이 마이 프렌드'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감상적이긴 하지만, 영화 전체를 통틀어 보자면 원제가 더 맞다고 하겠다. " (이하생략)
2.
http://blog.naver.com/bschun55?Redirect=Log&logNo=60014703346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 21 기사중 일부 입니다.)
마음과 육체의 치유를 위한 두 소년의 여로
그만큼 여행은 몸과 마음의 내벽에 끈끈하게 달라붙은 불순물과 노폐물을 일거에 씻어낼 수 있는 빠르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널리 신뢰받고 있다. 얼마나 많은 TV 드라마가 실연 당하거나 실패한 인물들을 공항이나 항구로 데려다 놓고, 손쉬운 해결을 꿈꾸는지 돌이켜 보라. 우리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책 제목을 정한 어느 작가처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장소에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동갑내기 두 외톨이의 만남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The Cure)’는 원제의 뜻 그대로 ‘치유’의 행위로서의 여행을 보여준다.
‘스틸워터’라는 한가로운 이름을 가진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마을.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소년 에릭(브래드 랜프로)은 겨우 11살이 됐을 뿐이지만 매일 매일이 권태롭다. 낮에는 부동산 중개인으로, 밤에는 편의점 점원으로 일하는 엄마는 늘상 피로와 짜증에 찌들어 있다. 학교 친구들과도 그다지 친하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에릭의 뒷집에 젊은 엄마와 아들 덱스터(조셉 마젤로)가 이사온다. 수혈 중 에이즈에 감염된 덱스터는 이내 철없는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의 입에 흉칙한 괴물이라도 되는 양 오르내린다. 늘 혼자인 두 동갑내기 소년들.
“네 병, 공기로도 옮는 거니?” “아니, 공기로는 옮지 않아.” 높다란 담 양쪽에서 각기 혼자 놀던 에릭과 덱스터는 대화를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 에릭은 성큼성큼 담장을 넘어 작고 여리지만 지혜로운 이웃의 친구와 얼굴을 마주한다. 히스테리컬한 에릭의 엄마는 “안전거리 2미터를 유지하라”고 차갑게 이르지만, 씩씩하고 사려 깊게 아들에게 닥친 불행과 싸워 온 덱스터의 엄마(애나벨라 시오라)는 늘 혼자 내버려져 있는 에릭을 덱스터와 함께 보듬는다. 덱스터의 어깨 너머로 그녀와 에릭이 맺는 감정적 유대는 ‘굿바이 마이 프렌드’에서 가장 - 덱스터와 에릭의 그 것보다도 한결 - 가슴 아프고 깊은 것이다.
쪽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신화 속의 많은 여행이 그렇듯 에릭과 덱스터의 여행은 ‘구원’에 대한 순진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아픈 사람들은 채식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숀 코네리가 밀림의 식물을 연구하다가 기적적인 치료약을 발견하는 내용의 영화 ‘메디신 맨(Medicine Man)’에서 확신을 얻은 에릭은 이름 모를 풀들이 친구의 병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온갖 풀을 채집하여 덱스터에게 달여 먹이는 에릭의 치료법은 독초를 먹은 친구가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가던 밤까지 계속된다.
에릭의 실망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사건과 실화’류의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뉴올리언스에 사는 의사가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보던 날 출구를 찾는다. 문제의 의사만 찾으면 친구와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퍼 먹을 수도 있고 덱스터 엄마의 근심도 끝날 것이다. 마침 뉴올리언스는 에릭과 헤어진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여행은 결핍을 통해 맺어진 단짝이, 서로의 결핍을 동시에 채우기 위해 떠나는 길이기도 하다.
전 재산을 배낭에 챙긴 덱스터와 에릭은 옛날 옛적 허클베리 핀이 그랬듯이 허술한 쪽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으로 통하는 샛강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겨우 시속 3마일의 속도로 1천2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뉴올리언스라는 약속의 공간을 향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나그네들은 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삶의 가혹함에 일찍 익숙해진 에릭과 덱스터가 둘 다 세상과 맞설 태세가 돼 있는 외톨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여행을 통해 성장한 두 소년
소년들이 여행길에 오르면서부터 영화는 좀더 다채로운 모험담으로 변모한다. 소년들은 조금 더 빨리 뉴올리언스에 가 닿기 위해 20대 청년들의 보트를 바가지 요금으로 얻어 탄다. 여행은 우리가 애초에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얼굴을, 의외의 기쁨과 고통을 선사하는 법. 에릭과 덱스터는 보트에서 캠핑 온 평범한 어린이들처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하고 섹시한 누나들의 모습에 생경한 설렘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기 당했던 돈을 갖고 달아났다가 위협을 받기도 한다. 뒤쫓아온 보트 주인에게 두 소년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덱스터의 마지막 무기는 슬프고 섬뜩하다. 칼로 손바닥을 그은 덱스터는 위협한다.
“가까이 와 봐! 내 피는 독이야!”
로드 무비의 걸작으로 남아 있는 영화 ‘스탠 바이 미’의 네 소년은 기차에 치어죽은 소년의 시체를 찾아 철로를 따라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느낀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을은 훨씬 작아 보인다고. 하나의 강렬한 사건이 각자 다른 고민을 안고 있던 소년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엇을 영원히 바꿔놓고 어른들의 세계로 그들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료약을 얻지 못한 채 귀가한 덱스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처럼 긴 여행이다. 에릭과 덱스터의 여행은 일종의 조촐한 연습과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친구와 바꿔 신은 신발 한 짝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180억 광년에 걸쳐 있대. 그만큼이나 멀리 갔는데 아무 것도 없다면,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데 끝없이 춥고 어둡기만 하다면 어떡하지?” 미시시피 강가에서 둘이 보낸 밤, 고통에 겨워 깨어난 덱스터는 에릭에게 묻는다. 친구의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이해한 에릭은 잠자코 자신의 운동화를 쥐어주며 말한다.
“이걸 가져. 무서우면 이렇게 생각해. 내가 왜 냄새 나는 농구화랑 있지? 지구에 있는 게 틀림없어. 에릭이 가까운 곳에 있을 거야.” 덱스터가 마침내 병마와의 고된 싸움을 멈추고 내내 슬기롭고 의젓한 빛을 발하던 두 눈을 감았을 때 그날의 대화를 잊지 않은 에릭은 자신의 운동화를 관 속에 넣고 시신의 검은 구두 한 짝을 갖고 장례식장을 나온다. 짝짝이 신발로는 먼 길을 걸을 수 없을 텐데.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천국에서는 걷기 위해 신이 필요 없을 것이고, 에릭은 나이 먹고 다른 친구를 만나고 수십 켤레의 새로운 신발을 해지게 만들며 삶의 여행을 계속할 테니까.
<김혜리 / ‘씨네21’ 기자>
첫댓글 사과하실 필요없는데 별도의 글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님과의 댓글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제가 모르고 있던점들 그리고 혹시라도 님이 모르고 있었던것들을 배우게되면 좋은것 아닐까요? 저는 이런 생산적인 대화를 사랑합니다. 님이 이렇게 특별히 별도의 글로까지 저를 배려해주신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김혜리 기자님은 이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것, 과연 큐어는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은 없으셔서 섭섭해요. 아픈 덱스터였을까요? 아니면 세상과 단절해버린 에릭이었을까요? 누가 치유받고 누가 구제받았을까요? 이것이 굉장한 포인트인데없어서섭섭해요
어찌되었건 제가 댓글을 통하여 님과 논쟁을 하는 중에 만약에라도 상처받으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라고요 이런 생산적인 대화는 독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생각되어져요. 그리고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해서 서로 미워하고 보기도 싫어하면 미워요 :-( 대화는 대화와 논쟁은 싸움이나 전투가 아닌것이잖아요. 알러뷰 모어해요. 찐빵님 :-)
앞으로도 이유있는 분노나 이의제기나 고통스럽고 흉칙한 문제들에 대하여 님과 많은 대화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미국에 산다고 해서 우월의식같은것 없는데요, 만약 그렇게 느끼셨다면 저의 부족함때문일것이에요. 부시이후로 미국에 사는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것이 되었답니다. 미국은 피로 물든 국가가 되어버렸어요. 오일이 100달러가 넘어가는 시대가 와버렸고 타종교에 대한 존중심같은것도 없어져버렸고 사람들은 이제 911의 현장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사기당했다라는 느낌과 가공할 무기가 이라크에서 발견되지 못한것에 대한 분노가 큽니다. 엄청난 이 사기극에 놀아난것에 대하여 너무나 수치스러워합니다.
넓은 배려 감사드립니다. 뇩님 글에서 한국어 어감의 차이에 제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제목의 중요성에 대한 문화적 차이에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가의 저작권을 존중하는 문화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하지 못하고 비난의 어휘에만 촛점을 맞추어서 원제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나라에서 대중영화로 개봉할때 받아들이기 쉽게 제목을 바꾸는 것이 그러한 지나친 과격한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것이 영어 중심주의가 아닐까로 여겼지만 또 생각을 바꿔보니 그것은 영어중심이 아닌 작가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국의 풍토에 대한 분노로 생각될 수 있었기에 또다른 저의 영어피해의식일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답글을 달자면 우월의식이라면...우리나라에서 자체의 우월의식으로 뇩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굿바이 마이프렌드는 부담없이 영화보러가기 좋은 느낌의 제목 이지만, The Cure라면 편안함보다는 미리 주제의식을 생각하게 되고 문제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는 뜻으로 영화자체의 감상보다는 이건 에이즈에 관한 감동적인 영화, 에이즈와 동성애의 편견을 깨는 영화니까 봐야해..왜 너는 이걸 안보는 거야..이걸 안보는 것은 에이즈와 동성애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난 진보적이고 보았어 란 우월의식 이라는 식의 느낌이나 정서를 줄 수 도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뇩님께 오해를 드렸습니다.
두분 알흠다워요 ^0^
여기는 마음이 너무 예쁘신 분들만 계신것같아요. MJ를 닮으셔서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