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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리야에 가기로 결정된 바울 27:1~5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시에 이르러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백부장 27:6~12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시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오늘의 말씀 요약]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이달리야에 보내고자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에 태웁니다. 그들은 바람 때문에 그레데를 지나 간신히 미항에 도착합니다. 이때는 항해하기 위험한 시기임을 바울이 경고하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고자 미항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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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리야에 가기로 결정된 바울 27:1~5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상황과 사람을 움직이십니다. 이방인과 임금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9:15; 19:21). 그는 로마를 선교의 교두보로 삼아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발당한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했고, 마침내 이달리야(로마)로 향합니다. 이때 아구스도대(황제의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과 죄수 몇 명을 인솔합니다. 백부장은 배가 시돈에 잠시 정박하는 동안 바울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게 그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비록 피고인 신분이지만,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은 하나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다른 죄수들과 이달리야(로마)에 가기로 결정되었을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 섭리로 내가 가게 된 곳이 있다면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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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 백부장 27:6~12
이달리야로 향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많은 곡식을 싣고 276명의 인원도 너끈히 태울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27:37). 당시 곡식 운송 선박은 로마 정부의 통제를 받았기에, 항해 여부를 백부장이 결정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다는 것은 속죄일(오늘날 9월 말~10월 초)이 지났음을 뜻합니다. 지중해에서는 10월이 지나면 날씨가 좋지 않기에 항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배와 사람들이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을 예견하고 항해를 연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경고를 무시한 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항해를 강행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분별력은 세상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백부장에게 어떻게 조언해 주었고, 이에 백부장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나는 무엇을 선택할 때 누구에게 의견을 묻나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지식과 경험이 옳다고 생각했던 교만과 고집을 봅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크고 높은들, 하나님 지혜보다 앞설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소서. 제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지혜에 매여 살게 하시고 그 길 위에서 인생의 형통함을 맛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49 예수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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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도 풍랑 때문에 한없이 표류할 때가 있습니다.
고난과 환란이라는 풍랑이 우리의 삶을 이리저리로 끌고 가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바울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천국이며
이 땅에서 주어진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아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증거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신앙의 동역자들(2절)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압송당하는 과정에 바울과 함께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였고 데살로니가인 아리스다고와 에베소의 드로비모도 함께 하였다가 병 때문에 밀레도에 남겨졌습니다.(딤후4:20) 디모데도 같이 가다가 아시아 해변에 남겨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앙인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동역자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옥에 갇혔을 때 찾아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찾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
광풍이 이는 세상(1-20)
바울은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서 로마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시돈을 거쳐 길리기아 밤빌리아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시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옮겨탔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겨우 항해하여 미항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바울이 이번 항해는 큰 어려움이 있다고 했는데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만 믿고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출발하자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좋아했는데 곧 유라굴라(북동풍) 광풍이 불어 닥쳤습니다.(14)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버리고 사흘째 배의 기구들을 버렸습니다. 여러 날 해도 달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먹지도 못하고 구원의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는 끊임없이 풍랑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에게조차 풍랑은 일어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도 풍랑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의미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고통이지만 바울과 일행은 복음을 위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냥 세상의 고통은 크면 클 수록 고통만 크지만 복음을 위한 고통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상도 클 것입니다.
신앙인은 빛나는 주인공(21-44)
신앙인은 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힘겨워할 때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게 된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너에게 맡겼다"(24)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배만 상하고 너희 생명은 아무 해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25)
신앙인이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면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광풍이 일어나기 전 바울은 한낱 죄수였지만 광풍이후 바울은 실제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공들이 도망치려하자 바울은 군인들에게 저들이 도망가면 다 죽는다고 하며 그들을 제지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마치 선장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14일이나 굶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바울은 마치 그들 모두의 목사인 것처럼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배에 탄 276명은 바울 덕분에 안심하며 떡을 먹었습니다. 배가 거의 깨졌지만 그들은 멜리데라는 섬에 무사히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광풍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아무리 거센 풍랑이 일어나도 복음을 위해 풍랑을 피하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풍랑은 우리를 결코 해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풍랑만 주시고 그 풍랑으로 인하여 더욱 빨리 가게 하십니다.
바울은 풍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겉으로는 죄수처럼 초라하게 보일수 있어도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히 보시는 주인공들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풍랑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입니다.
풍랑 앞에서는 백부장도 선장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성도는 바로 그 때 그들을 구원하고 위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큰 풍랑이 일어날 때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성도일수록 더욱 큰 능력을 보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 인하여 풍랑이 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이 상소함으로, 황제 친위대 아구스도대 백부장 율리오는 다른 죄수 몇과 함께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기 위해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가이사랴항에서 시돈항을 경유하여 무라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로마로 가는 세곡선 알렉산드리아 배로 환승하여 미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때가 대속죄일이 이미 지난 10월 중순이었기 때문에 찬바람이 거세져서 과동할 항구를 정해야 했는데, 바울은 거기 미항에서 과동하자 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항으로 가서 과동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 배는 로마 정부 소유는 아니었지만 계약된 세곡선이었기 때문에 백부장에게 지휘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보다 선장과 선주를 더 믿었고 뵈닉스항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이 한번의 잘못된 결정이 결국 재앙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백부장은 바울에게 누가와 아리스다고 등이 동행할 수 있게 해 주는 등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의 경고만 아니라,
"간신히",(행27:7)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행27:7)
"간신히"라는(행27:8) 표현들에서 알 수 있듯 이미 불길한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걸까요?
다수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행27:12)
그러나 의인의 다수라면 몰라도 악인의 다수 의견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뵈닉스항으로 가자 한 것은 더 크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긴 겨울 더 환락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말씀보다 여론을 따라 어리석은 결정들을 하고 온갖 악법도 만들다가 재앙에 걸려 갑자기 파선하는 겁니다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9:12)
그러나 우리는 다수가 아닌 한 분만 따릅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그리고 사실 땅만 보면 저들이 다수같지만 하늘까지 보면 우리가 다수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17)
하늘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어 저들이 다수가 아니라 우리가 다수임을 믿고 오직 한 분 주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무라에 도착한 그들은 짐을 호송하는 연안선 아드라뭇데노호에서 알렉산드리아호로 갈아탔고
다른 200명이 넘는 승객들도 함께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그리스 아래의 군도를 지나가야 했는데
항해는 느렸고 바람이 불어 결국 니도를 거쳐 크레타섬의 아름다운 항구(Fair Heaven)에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10월 초였고
11월이 지나면 지중해 내의 항해는 전면 중지되는 환경이었으므로
선장과 선주는 항해를 서둘렀습니다.
미항은 항구도시가 없어 많은 인원이 타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죄수들의 폭동이나 다른 승객들의 불만이 커질 가능성이 있어
좀 더 큰 뵈닉스 항으로 옮기기를 원하였으므로
백부장은 그들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근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 눈과 귀를 막고
사람과 재물을 더 의존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로마에서 증인으로 세우실 것을 알았기에
그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그분의 섭리 안에 평강으로 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분의 놀라운 인도하심과 이끄시는 인생의 배에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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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역사는 확장되어 갑니다 -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의 책임 아래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가이사랴에서 배를 탄 후에 시돈을 거쳐 구브로 해안을 통과하여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하여 이달리야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끝난 겨울철이라 항해를 미루자는 바울의 의견보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게 됩니다.
_ 복음의 역사는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과의 아름다운 동역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1~5절).
바울의 로마로의 마지막 전도 여행이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서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1절)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후송되어가는 여정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2절)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다가 체포까지 된 적이 있습니다. 힘든 여정 가운데 함께해 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어 바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니..’(3절). 율리오의 친절이 무엇 때문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신앙적 언행이 그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시돈 지역에 있던 성도들이 바울을 환대하여 대접을 합니다. 이는 분명 바울이 앞으로 로마까지 가는 여정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함께 말씀을 가지고 고민하고, 목회의 영적, 양적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되는 귀한 동역자들이 나의 곁에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나 역시나 다른 누군가에게 영적으로 도움이 되어주는 동역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_ 복음의 역사는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6~8절).
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정이 그리 순탄하지가 않습니다. 강한 맞바람으로 인해 바울이 승선해 있는 알렉산드리아 배가 상당히 많은 날을 바다에서 보내며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7~8절).
바울의 로마행은 본인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힘들게 하는 환경들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신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 때로는 아주 힘들게 하는 상황들에 직면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영적 사역의 현장 가운데 생각지도 않았던 고난과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이 닥치더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은 그런 나를 통해 복음을 확장시켜 나아가실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여 주님의 선한 이끄심을 날마다 경험하는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_ 복음의 역사는 세상적 안목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확장되어 갑니다(9~11절).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한 것은 유대인의 절기인 대속죄일이 훨씬 지난 겨울철이었습니다. 당시의 선박으로는 겨울철에 지중해를 항해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항해를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주장합니다(10절).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보다 항해 경험이 더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게 됩니다(11절).
지극히 인간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울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경험과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적 안목과 정욕에 따라 지금 당장의 편의와 실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큰 낭패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세상적 방법과 내 감정과 경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주님의 신실하심에 겸손히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복음의 확장을 위해 주님을 위해 열정을 쏟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8월25일 동인천 지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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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 예상 밖의 역풍과 강풍을 만나 원래 일정보다 늦게 도착하자, 바울이 위기를 느끼고 제안을 했다는 말입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때를 히브리 역이 아닌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경이 됩니다. 브루스라는 학자가 계산해 보니까 A.D.59년의 금식 속죄일은 10월 5일경이었으므로, 아마도 바울을 태운 배가 미항에 도착한 것은 11월 초로 추산됩니다. 당시 11월 서부터 다음해 3월 까지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선박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날씨와 뱃길이 흉흉한, 항해 비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배의 선장과 선주는 항해하기로 결정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미항은 너무 작은 항구라 겨울을 지내기가 불편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옆에는 뵈닉스는 큰 항구가 있는데 불과 거기로부터 65K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배는 1세기 당시로는 초대형 선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화물을 가득 싣고서도 276명의 승객을 넉넉히 태우고 항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완도에서 출항하는 쾌속 카페리도 승객 500명을 싣고 제주도에 도착하니까 말입니다. 그 큰 배로 해안선을 따라 살살 올라가면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항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배의 선장은 분명히 노련한 뱃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길의 전문가죠. 그런 자가 출항하자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배의 선주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죠. 도무지 바울의 말을 들어줄 형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출항을 반대합니다. 물론 바울은 선장보다는 항해 경험이 적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25년 이상 그 지역을 여행하던 바울입니다. 더구나 그는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울에게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배와 화물은 물론이고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사람들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그 배는 깨질 운명입니다. 당시 상황이 말해줍니다. 바울은 선박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걱정합니다. 선장과 선주는 불편하고 답답한 겨울을 보낼 것을 걱정합니다. 바울은 위기를 감지합니다. 선장과 선주는 성공을 낙관합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선장과 선주는 눈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편한 것이 사람의 생명보다 귀할 리 없습니다. 위험을 직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신앙인의 차별화입니다. 생명이냐? 유익이냐?, 원칙이냐? 타협이냐? 육안이냐? 영 안이냐? 믿는 자는 늘 그런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물에 빠져 본 사람은 물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압니다. 죽을뻔한 사람은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분의 도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압니다. 경험자라고 다 경험자가 아닙니다. 전문가가 다 전문가가 아닙니다. 조원을 들어도 바울과 같은 조언자에게 조언을 듣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그런 조언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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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이달리야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선대했지만, 항해의 위험을 알리는 바울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2절 바울의 고단한 여행에 ‘우리’가 동행합니다. ‘우리’는 실라, 디모데, 누가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참조. 16장 10~17절; 20장 5~8,13~15절; 21장 1~18절; 27장 1절~28장 16절), 여기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참조. 사도행전 20장 4절; 골로새서 4장 10절; 빌레몬 1장 24절)도 추가됩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멀고 험난한 여행길에 신실한 동역자들이 위험을 마다않고 함께합니다. 같은 소망을 가진 믿음의 동지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기에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즐겁게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 여정과 사명의 길을 함께 걸어줄 동역자들은 누구입니까? 혹 내가 새롭게 동행해주어야 할 지체가 있습니까?
4~8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길이라고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여정도 순탄하지 않습니다. 시돈을 출발한 배는 조심스럽게 맞바람을 피해 무라에 도착했고, 무라를 출발한 배는 풍세가 심해 겨우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더 항해할지 아니면 미항에서 과동할지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세찬 파도를 맞서 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절제하고 쉬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 지혜를 따르는 것이 용기입니다. 지금 내가 당면한 여러 상황이 바람에 맞서 헤쳐 나가야 할 때인지 멈추고 쉬어 가야 할 때인지, 잠시 멈추고 주님의 뜻을 구합시다. 자기 힘만 의지하여 밀고 나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일 수도 있습니다.
9~11절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바울의 상식적인 권고보다 뱃사람들의 전문가적 식견을 더 신뢰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장과 선주가 경제적인 이유로 무리한 여행을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실제로 금식하는 절기(10월)가 이미 지나 곧 겨울이 닥쳐 올 시기였으므로 항해가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좀 더’ 편하게 과동하기 위해서는 ‘좀 더’ 항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좀 더’의 욕구가 그들을 심각한 위험에 빠트립니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좀 더’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바람과 날씨까지 주관하셔서
인생을 돌아보게 하시고
사명을 새롭게 하시는 그 놀라운 손길을 날마다 기억하고
그 은혜의 날개 아래 평강과 생명으로 거하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인생의 폭풍우가 불어 우리의 방향을 가리고 낙심케 할지라도
시공을 초월하여 바른길로 이끄시는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고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발걸음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주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도록 은혜로 덮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