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8개월 만에 물러나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산업/ 19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에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 회장은 오는 24일 상의에서 퇴임한다. 2021. 3. 19 / 장련성 기자
오는 24일 대한상의 회장에서 물러나는 박용만(65) 회장은 ‘튀는’ 경제단체장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연말 여당이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제·개정안)을 밀어붙일 때, 다른 경제 단체의 반대 성명 동참 제안을 거부했다. 2019년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섰을 때도 ‘정부의 외교적 미숙’을 지적하는 재계의 목소리가 컸지만, 박 회장은 “정부 중심의 단결”을 주장했다. 하지만 2018년 여름엔 “규제 개혁”을 요구하며 7시간 동안 의원회관을 돌며 여야 의원들을 만났다. 7년 8개월 임기를 끝내는 그를 지난 19일 서울 중구 두산타워 33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공정경제 3법' 반대 입장문에 대한상의 이름이 빠졌을 때 좀 놀랐습니다.
“다른 경제 단체에서 ‘같이하자’고 했을 때, ‘나 그거 동참 못 한다’고 분명히 그랬어요. 왜냐하면 공청회든지 뭐든지 열어서 쟁점을 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문제점·보완책·대안을 얘기해야죠. 그래도 안 되면 반대 입장을 내는 게 순서죠. 아무것도 안 한 상태에서 반대 목소리부터 내자고 하니 ‘못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랬더니 계속 뭐라고 하더군요.”
-그런 방식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진 않다는 지적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기업 입장은 거의 반영도 안 됐습니다.
“아쉽죠. 하지만 반대로 물어봅시다. 제가 처음부터 ‘반대’라며 소리 질렀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요? 더 안 됐을 겁니다. 계속 소리만 질러대면 토론이 아니라 ‘승부’가 되잖아요. 그러면 패배를 택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협상은 더 어려워져요. 한두 번 안 되더라도, 계속 토론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죠. 성급하게 한 방에 결실을 보겠다고 하면 안 되죠.”
-하지만 반(反)기업 법안들이 잇따라 통과하면서 기업들은 경영 환경이 갈수록 안 좋아진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미래를 향한 기회의 문을 여는 데 너무 게으르고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고민 없는 의원들
-무슨 의미인가요?
“제가 아는 한 국회의원은 경제 관련 포럼이나 토론회마다 쫓아다녔어요. 처음엔 아주 관심이 많은 줄 알았지요. 그런데 막상 관련된 법안을 통과시킬 때가 되자 표결조차 안 하는 겁니다. 토론회에서 사진만 스무 장 정도 찍고 사라진 거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던 겁니다.”
-누군가요?
“실명 밝히면 원수질 겁니다. 사실 그분만 문제가 아니고, 비슷한 사람이 아주 많아요.”
-국회를 가장 많이 방문한 경제단체장이었는데, 의원들을 만나보면 어떤가요?
“한번은 젊은 창업자들과 국회에 가서 필요 없는 신사업 관련 규제를 없애달라고 했어요. 반대하는 의원이 아무도 없길래 창업자들에게 ‘여야 이견이 없으니 잘될 거야’라고 했죠. 그랬더니 한 창업자가 ‘이견이 없는 상황이 벌써 2년째’라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여야 간에 다른 문제 때문에 대립하면서 매번 (창업자들이 통과를 기다리던) 관련 법률이 후순위로 밀려 통과가 안 됐던 거지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박 회장은 인터뷰 중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차례 했다. 그는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이게 다 경험이야'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며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며 같이 울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서는 공직자들이 더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공직 사회는 오히려 더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이 소신을 갖고 전향적으로 행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관료들의 의지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 실패하면 감사원 감사와 국정조사 등 여러 조사를 받잖아요. 어떻게 공무원 개인이 판단해 리스크(위험)를 감수하라고 할 수 있나요. 그래서 ‘정책 감사’를 많이 줄여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산업/ 19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에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 회장은 오는 24일 상의에서 퇴임한다. 2021. 3. 19 / 장련성 기자
미래 여는 데 현 정부도 너무 게을러
-규제 때문에 창업뿐 아니라 일자리도 늘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일자리가 생길 수 있는 신사업 분야를 규제로 다 막아 놓았잖아요.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고 경제는 성장세가 느려지고 있는데, 정치권은 오늘도 뭐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라고 하고 싶어요. 오늘 하루 종일 한 일 가운데 미래를 위해서 한 게 뭐가 있는지. 현 정부도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일자리 정부’가 되겠다고 했어요. 그럼 일자리의 실체가 뭔지 고민하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게 기회의 문을 더 과감하고 과격하게 열어야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현 정부도 예외가 아닌 거죠.”
박 회장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같은 것이 여전히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이 법은 교육·철도 등의 서비스를 민간에 개방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1년 국회에 제출됐지만, 현 여권을 중심으로 ‘의료 민영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0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 대해 국회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현재 제조업은 일자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서비스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서비스 산업 비율이 선진국은 다 70%대인데 우리는 60%가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서비스 산업은 제조업에 비해서 고용 창출 효과가 2배입니다. 제가 7년 8개월을 매달렸는데 아직도 그 법 통과를 안 해줬어요. 최근 여당 지도부가 통과를 시켜주겠다고 했으니 한 번 더 기대해 봐야죠.”
사회 약자의 삶 나아지지 않아
-현 여당은 산업 규제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요?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죠. 그런데 정부마다 ‘경제 문제’와 ‘사회 문제’ 중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게 있습니다. 현 정부는 후자(後者)를 내세워 국민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사회문제를 더 중시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 없어요. 다만,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서 큰 진전이 없는 건 아쉬워요. 현 정부 출범 때 양극화 해소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자의 생계 급여는 52만7000원으로 예전보다 크게 늘지 않았고, 고용보험 확대 등도 이뤄지지 않았지요. 남은 1년 동안이라도 좀 더 양극화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어요.”
-탈원전 같은 것도 산업계 전체엔 악영향을 줬지요.
“제가 ‘원전 업자’라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요. (그가 회장을 지낸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은 원전이 주력 사업이었지만 탈원전 정책의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조금 급격했다고 봅니다. 원전 관련 업체들이 다른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시간과 여력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는데 말이죠.”
-현 정부의 경제 정책에 점수를 준다면?
“에이, 그걸 꼭 점수로…(웃음).”
박 회장은 2013년 취임 때 ‘기업인 사면’을 정부에 건의하지 않겠다고 했다. “기업인도 범죄를 저질렀으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실제 그는 재임 기간 중 기업인 사면 요청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다.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 농단’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파기 항소심 재판부에 낸 적은 있다.
-기업인 사면에 나서달라는 요구도 많이 받으셨죠?
“네. 하지만 기업인의 법적 문제와 기업은 분리돼야 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기업인이 법적 처벌을 받으면, 매번 ‘그 때문에 기업 경영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저도 이해는 하지만, 국민들한테 큰 소리로 얘기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오히려 반기업 정서가 강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이 부회장 탄원서는 왜 냈죠?
“사실 그 문제(국정 농단 사건)는 이 부회장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기업 전반의 문제이고 책임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부회장 개인에게 과도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어요. 삼성그룹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정치와 기업 간의 비정상적 관행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2019년 9월 16일 저녁 박용만(왼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이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있는 한 치킨집에서‘호프 미팅’을 갖고 노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두 사람의 호프 미팅은 지난 2017년 10월에 이어 두 번째였다. /조선일보 DB
상속세 낮춰 편법 가능성 낮춰야
-삼성을 포함해 기업인 상속 문제도 여전히 뜨거운 이슈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욕망은 탐욕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선 강합니다. 상속세를 올려 그걸 억지로 못 하게 하니까, 부정을 저지르고 편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좀 더 실리적인 판단이 필요해요. 현재 우리나라 연간 상속세가 3조원 정도 되는데, 이를 줄이는 대신 소득세를 올리면 어떨까요? 세수도 늘고 부유층은 국가 재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속이 쉬워져 편법·불법의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고요.”
박 회장은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을 맡고 있다. 이 회사는 곧 현대중공업그룹에 인수될 예정이다. 박 회장은 향후 계획에 대해 “무계획이 계획”이라며 “하고 있는 봉사 활동은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박용만은 누구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5남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외환은행 등을 다니다 28세 되던 1983년 두산그룹에 입사했다. 1990년대 그룹을 맥주 등 소비재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을 맡았고, 2005년부터 5년간 그룹 회장을 지냈다. 부친 박두병 회장, 형인 박용성 회장과 함께 3부자(父子)가 대한상의 회장을 맡는 기록도 세웠다.
산업/ 19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두산타워에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 회장의 뒤로 우리나라 천주교 순교자들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2021. 3. 19 / 장련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