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혈연 가족과 동지적 공동체 사이에서
갈라 3,22-29; 루카 11,27-28.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2020.10.10.; 이기우 신부
예수님께 있어서 마리아는 낳아주신 어머니이시면서도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함께 하는 동지이셨습니다.
생명을 낳아주셨으니 가장 가까운 혈연이시면서 하느님을 향한 뜻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셨으니,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신 셈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대부분의 가정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중에 신자가 있어도 남은 가족들은 하느님을 모른 채 살아가거나 의식적으로
무신론을 견지하는 경우도 무척 흔하고, 가족 모두가 믿음을 지닌 경우에도
각기 신봉하는 종교나 교파가 다른 경우도 있으며,
또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인 경우에도 마음까지 통하는 동지적 관계는 드뭅니다.
가족 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서 갈등을 빚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정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남편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예수마저 출가한 후에 홀몸이 되셨기 때문에,
당시 대가족 제도의 풍습대로 집안 어른을 봉양할 의무를 진 친척 형제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평생 동정 생활을 하셨고
따라서 예수님께는 동생이 없었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예수님의 형제들’이라고 불리웠던 이 친척 형제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시지도 않아서 자신들에게 부양 의무를 떠넘긴 채로 그렇다고
생활비도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여기저기 유랑전도사로
떠돌아 다니던 사촌 형제 예수를 이해하기가 도무지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천하에 없는 불효자였을 겁니다.
어쩌다 병자나 장애자를 고쳐주었다거나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 덕분에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더라 하는 소문도 들었을 법하지만,
출가 후부터 그 형제들은 예수에 대한 실망만 남았을 뿐 아무런 기대도
신뢰도 없었기 때문에 시쿤둥하게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렸을 겁니다.
그러다가 바리사이들이 퍼뜨린 악소문에는 빛의 속도로 반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는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들은 어쨌든 예수가 미쳤다는 것으로
단정을 하고는 이 참에 그 유랑 설교 활동을 때려치우게 할 요량으로
성모 마리아까지 부추겨서 쫓아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닥달하는 형제들의 성화에 못 이겨 쫓아오신 성모 마리아께서 보시니,
예수님은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황이 돌아가는 형편을 눈치채신 그분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가족”이라는 말씀을 처음으로 내놓고 발설하셨던
것이고, 오늘 복음에서 군중 앞에 나타나신 성모 마리아를 본 한 여인이 앞뒤 사정도
모른 채 부러워하는 발언을 하자 또 다시 같은 말씀을 꺼내신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대가족 혈연의 의무로 마리아를 모시고 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아서 뜻으로는 전혀 통하지 않던 친척 형제들이 떠오르셨을 겁니다.
그네들은 예수님과 촌수만 가까웠지 영혼은 물론, 마음으로도 멀었던 관계였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주는 군중, 그 가운데에서도 그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기대를 걸게 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었던 것이지요.
우리 한국 사회의 가정 현실은 이런 예수님의 기대와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합니까?
만만치 않은 과제가 많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베풀고 보호하고 배려하도록 주어진 이들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가 다 그렇지요. 가족이 서로 간에 베푸는 사랑과
배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의무와 고마운 배려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혈연은 신앙이나 정신적 뜻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각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고유한 부르심이나
카리스마를 무시할 경우에, 없어도 될 갈등이 생겨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신의 꿈을 강요하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자녀들은 각기 고유한 인격체로서
역시 고유한 적성과 취향과 꿈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부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서 만난 사이이지만,
그래서 혈연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고 뜻까지도 공유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서로가 뜻이 다른 경우가 얼마든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서로 존중하는 것이 상책(上策)인데, 서로 강요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안고 사는 하지하책(下之下策)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혈연 여부에 상관없이
하느님 말씀으로 서로 통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으며 서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서로의 인격도 신뢰할 수 있고,
함께 일을 하거나 돈 거래를 해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신용이 든든한 사람들,
그래서 신앙과 신뢰와 신용이 다 갖추어져 믿음이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이 뜻까지 함께 할 수 있으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마리아와 예수, 이 두 분의 모자관계를 목표요 모델로 삼아 닮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설사 그렇지 못할 경우에라면 뜻이 맞는 이들을 가족처럼
친근하고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지요.
혈연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지만,
나머지 인간관계는 우리가 노력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