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실천 시대를 연 사람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비판적 기사를 가장 많이 쓴 기자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 5년간이 나의 40여년 기자 생활 중(그리고 한국 언론史上) 가장 자유스러웠다고 단언(斷言)할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과 업적에 대하여 정리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퇴임 후의 취재를 통해서이다. 비자금 사건으로 고생하고 세간의 비난이 쏟아질 때 이분에 대한 나의 평가는 오히려 높아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민주화 시대를 열었고, 공산권 붕괴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새로운 활동공간을 만들어낸 사람.’ 노태우 대통령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시대를 열었다.
한국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웠던 이들에 비하여 민주화를 실천한 이들에 대한 평가가 낮다. 요구는 비장하고 장렬하게 할 수 있으나 실천은 끈질기고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생애는 ‘성격이 운명이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분의 온유하고 끈질긴 성격이 민주주의 실천이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게 만든 게 아닐까?
안으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바깥으론 공산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대전환기(大轉煥期)에 노태우 대통령이 국가 대전략을 바로 세운 그 이득(利得)을 한국인 모두가 누리고 있으나 고마워하는 이들은 드물다. 노태우 대통령이 업적에 비하여 과소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이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갔던 이들이 담대하게 설명하지 않고, 세력화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을 가장 많이 비판하였던 내가 요사이는 가장 많은 변호를 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에선 반박되지 않는 거짓이 사실로 유통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홍보되지 않은 진실은 거짓 취급을 받거나 무시될 가능성이 있다.
음악적 감수성
노태우 대통령을 처음 본 것은 1987년 대선(大選) 때 있었던 관훈클럽 토론회장에서였고,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초 연희동 자택에서였다. 1999년에 월간조선(月刊朝鮮)에 다섯 차례 연재된 인터뷰를, 편집장이던 내가 진행하여 긴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뒤 책의 출판 관계 등으로 자주 뵙게 되었다. 2년 전엔 生家와 공산 국민학교에 다녀온 적도 있다. 팔공산 기슭에 있으나 산은 보이지 않는 마을의 맨 위쪽에 있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옛집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인격의 기본이 형성된 곳이 이 집인데, 소년 시절을 회상한 그의 수기(手記)는 정감이 넘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으로 바깥채에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書齋), 방앗간, 창고가 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 안채에는 부엌과 할머니가 계시던 큰방, 마루, 어머니 방 등이 있었다. 집은 서남향(西南向)인데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앞산이다. 해가 뜨면 앞산의 얼굴이 보이고, 해가 질 때는 앞산의 그림자만 보였다. 팔공산은 집 뒤쪽에 있는데다가 너무 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팔공산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팔공산을 보게 된 것은 집에서 멀리 나다닐 수 있게 된 후의 일이다. 집 옆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저녁 무렵 아버지가 걸어서 올라오시는 모습을 사랑채에 앉아 열린 대문을 통해 바라보곤 했다. 개울 옆길을 따라 올라오시는 아버지께선 늘 책이나 유성기판을 끼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서재로 불러 무릎에 앉히고 새로 사 온 유성기판을 틀어 노래를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도 그 방에 들어가 유성기와 책, 퉁소 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노태우 소년이 만 여섯 살이 채 안 된 1938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스물아홉 살에 별세하였다. 동생과 함께 막내 숙부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수절(守節)하면서 살다가 1999년에 90세로 별세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는 노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혼자서 부른 휘파람과 노래는 아버지를 그리는 망부가(望父歌)였을지 모른다. 이분의 음악적 감수성이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고 들려준 유성기판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대격변의 전환기(轉換期)를 덜 살벌하게 해주는 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다정한 아버지를 일찍 여읜 흔적을, 70代의 노태우 대통령 모습에서 느끼곤 하였다. 외로움의 흔적 같은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답답하게 생각할 만큼 감정 표현을 아낀다. 화를 내야 할 때도 화를 내지 않는다. 나의 짐작으론 두 가지 감정을 가슴 깊이 품고 있지 않을까 한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 김영삼(金泳三)에 대한 배신감.
한국 정치의 최고봉 6·29 선언
全斗煥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만나 보면 대체로 盧泰愚 전 대통령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1988년 여소야대(與小野大) 이후의 격동기를 가까이서 취재하였던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전임자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했어야 한국의 건설 세력이 교두보를 지켜내고 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요사이 하는 이야기는 '그때 그분이 백담사로 가지 않았으면 민란이 났을 것이다'는 취지이다. 이는 과장이고 합리화일 것이다. 당시 집권세력이 인간적 의리(義理)가 아니라 역사적 명운(命運)을 걸고 평화적 정권 이양을 하고 떠난 前任 대통령을 지켜냈다면(나는 그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 뒤의 한국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선 1995년 비자금 사건의 여파로 5.18 수사가 재개되고 全 전 대통령까지 옥살이를 하게 만든 데 대하여도 미안한 마음이 많았겠는데 문제는 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금전적으로 전폭 지원하여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그 김영삼(金泳三) 씨는 좌파적 역사관의 포로가 되어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비자금 사건이 나자 청와대 비밀금고 운운하면서 모든 책임을 전임자에게 轉嫁하였다. 그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12·12 사건과 광주사태까지 역사의 무덤에서 불려나와 관련자들이 斷罪되는 시기를 가장 고통스럽게 통과한 이가 노태우 전 대통령일 것이다. 요사이 건강이 좋지 않은 것도 이런 마음고생과 관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한다.
나는 1989년과 1992년에 월간조선에 6·29 선언의 내막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한 글이었다. 박철언(朴哲彦) 전 장관의 회고록을 읽어보니 노태우 대통령이 화를 많이 내었고, 조선일보에 불만을 전달한 과정이 소개되었다. 조선일보 경영진은 그런 항의를 받고도 내색을 하지 않아 나는 그의 회고록을 통하여 비로소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6·29 선언은 전두환 연출, 노태우 주연의 합작품이고 그 약속을 실천한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다.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2. 공명한 선거관리
3. 김대중 사면 복권
4. 국민 기본권 보장
5. 언론규제 철폐
6. 지방자치와 사회단체의 자율 보장
7. 정당 활동의 보장
8. 사회 정화(淨化)
이상의 8개항은 한국 정치사에선 매우 드문, ‘지켜진 약속’이다. 말의 힘으로써 역사의 물줄기를 벼랑 끝에서 반전(反轉)시켰다는 점에서 6·29 선언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획기적인 결단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분 측근들이 사이가 나빠진 원인 중 하나가 6·29 선언의 진짜 주인공을 따지는 싸움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제3자인 나의 視角으론 두 사람의 역할을 한 덩어리로 합칠 때 더 크게 보일 것 같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나라를 자유의 초석 위에 세우고, 지켰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나라를 키웠고,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은 나라를 잘 꾸몄다. 이런 ‘대한민국 만들기’는 민족통일이 이뤄져야 완성됨으로 아직은 과정 속에 있다. 후세 사람들은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을 지금보다는 훨씬 따뜻한 시선(視線)으로 볼 것이다.
두 분에 대한 세평(世評), 특히 먹물 먹은 이들의 평가는 가혹하지만, 역사는 제대로 알아줄 것이다. 두 사람이 이끌던 1980~1993년의 한국은 年평균 경제성장률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두 육사(陸士) 동기생은 그런 경제의 힘을 바탕으로 민주화, 서울올림픽, 북방정책을 성공시켜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몇 배로 넓히고,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주도한 전면적 민주화와 북방진출은 1948년 건국(建國), 1961년 군사혁명에 이은 세 번째의 국가개조(國家改造)이고 구조개혁이었다. 이 개혁에 의하여 대한민국은 소란하지만 활력이 넘치는, 생동(生動)하는 ‘민주·자유·번영’의 국가로 거듭 났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대선(大選) 구호대로 보통사람들이 역사의 주역(主役)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청와대를 떠났다.
아직도 제6공화국
한국의 대통령은 싫으나 좋으나, 잘하나 못하나 현직으로선 역사와 마주하고 퇴임한 후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퇴임 후 미국의 전직 대통령처럼 생활하지 못하고 감옥살이를 한 것은 당사자로선 원통한 일이었지만 세계사적 흐름에선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마지막 단계가 정권의 평화적 교체이다. 민주주의 선진국 영국에선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대장전)에 의하여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1688년의 명예혁명에 의하여 정권 교체를 피 흘리지 않고 하기로 약속하는 데 473년이 걸렸다.
한국은 1948년에서 1987년까지 40년이 걸렸을 뿐이다. 그만큼 어린 민주주의여서 실수를 많이 하지만 민주주의는 실수를 견디는 힘이 있다.
지금은 영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 크롬웰의 사후(死後) 수난 이야기가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에게 다소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크롬웰은 죽은 후 300년간 안식처를 구하지 못하였던 이다. 그는 청교도 혁명으로 집권한 뒤 현직 왕(찰스 1세)을 처형한 사람이다. 왕을 사형한 것은 영국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례이다. 크롬웰이 죽은 뒤 왕으로 복귀한 아들 찰스 2세가 맨 처음 한 일은 복수였다. 일종의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던 크롬웰의 시신(屍身)을 꺼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다. 찰스 2세는, 아버지가 처형된 날인 1월30일에 크롬웰의 머리를 잘라내 창에 꽂아 웨스트민스터 홀의 바깥에 세워 두게 하였다. 이 해골은 24년간 걸려 있었다. 1685년 이후 크롬웰 머리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고 경매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이 해골이 캠브리지에 있는 시드니 서섹스 대학(캠브리지 대학의 일부. 청교도가 세운 학교, 크롬웰이 다닌 적이 있다) 교회에 묻힌 것은 부관참시 약 300년 뒤인 1960년이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을 기초한 위대한 민주정치가 토마스 제퍼슨조차도 “자유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란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였다. 링컨은 인구 3000만 명이던 미국에서 남북전쟁을 촉발시켜, 내전(內戰)으로 60만 명이 죽게 하였다. 이 사망자는 1·2차 세계대전, 한국전, 월남전, 이라크전쟁에서 죽은 미군 숫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래도 미국인들은 링컨을 독재자로 기억하지 않고 분열을 막고 통일을 유지한 위인으로 기린다.
이런 격변에 비교하면 한국의 민주화는 최소한의 인명(人命)희생으로 성공하였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네 분의 인간됨과 마음고생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노태우 대통령을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직도 제6공화국이란 사실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문을 연 그 시대를 살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