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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하려는 사공들을 막는 바울 27:27~32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겨 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일행 모두의 생명이 보존됨 27:33~44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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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배가 육지에 가까워지자 사공들이 도망하려 할 때, 바울이 이를 알려서 막습니다. 바울은 음식 먹기를 권하며 떡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축사하고 나누어 먹습니다.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 하자 백부장이 바울을 보호하려고 그들 뜻을 막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구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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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하려는 사공들을 막는 바울 27:27~32
약속 성취의 여정에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하나님 약속을 받은 후, 곧바로 육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14일간 버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의심했을 것이고, 바울은 사람들에게 계속 믿음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에 육지에 가까워졌음을 짐작한 사공들이 거룻배를 타고 몰래 도망치려 합니다. 이때 바울은 하나님 약속대로 배가 무사히 육지에 정박하려면 사공들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알았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공들의 이탈을 막습니다. 비록 죄수와 같은 처지에 있지만, 바울은 하나님 약속대로 모든 사람의 생명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참된 지도자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사공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바울이 막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더 큰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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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모두의 생명이 보존됨 27:33~44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과 달리, 바울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신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육적 생명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한 일행을 안심시키고 떡을 나누어 주어 배불리 먹게 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34절)라는 말에서 ‘구원’은 영적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후 그들 중에 바울이 전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영적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을 신뢰하는 백부장은 죄수들을 죽이자는 군인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합니다. 결국 배는 부서졌지만, 표류하던 일행이 모두 살아서 육지에 오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바울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을 지켜 주신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조난당한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내가 공동체에서 최선을 다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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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중에 더 강해지는 이유
한절묵상:사도행전27장 31~32절
바울은 하나님 지혜로 거릇줄을 끊어 버리게 해서 모두를 살려 냅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시기, 정도, 종류 등이 다른 여러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지한 인간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기에 대한 명확한 대처법은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시 147:5). 100시간 고민하는 것보다 1시간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위기 때는 하나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전적 평안은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주님이 해결할 자원을 갖고 계심을 믿고 인내하는 데서 나온다. -제리 플레밍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나아지지 않는 상황 중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소망하며 인내하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피할 길을 찾지 않고 하나님 지혜로 구원의 길을 찾게 하소서. 저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며 제 마음과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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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입니다.
나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함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 되어 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에, 그 사랑에 늘 감사를 올려 드려야 함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열심을 내시는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히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함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주님만이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심을 잊지 말고, 허락하신 자신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분께 영광을 올려 드리도록 하자
매일매일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께 감사를 올려 드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분과 더욱 더 실제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우리의 인생도 풍랑 때문에 한없이 표류할 때가 있습니다.
고난과 환란이라는 풍랑이 우리의 삶을 이리저리로 끌고 가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바울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천국이며 이 땅에서 주어진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증거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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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의 끝을 바라본 바울은 그들에게 2주 동안 먹지 못한 것에 대해 기운을 보충하고 마지막 힘을 낼 수 있도록 권면하였고 끝까지 구원될 것으로 안심시킵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276명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며(리더자의모습)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남은 식량은 모두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을 바라보고 닻을 끊어 바람에 맡겼고
모래 언덕에 부딪혀 배가 좌초되어 배 뒤쪽은 파도로 깨어졌지만
바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고 육지로 구출되었습니다.
사람의 심장이 서면 가슴 압박과 강력한 약제, 인공호흡을 통해 평상시 인체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조치를 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 맥박이 돌아오고 정신이 깨어나면 그 강력한 처치는 더 이상 필요가 없고 해가 됩니다.
2주가 넘는 광풍과 절망적인 상황은 생명 구원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을 위한 주님의 심폐소생술이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채찍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대신하여 대신 감당하시고
생명을 드려 구원의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어가는 이들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붙들어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소망과 감사가 넘치는 역사가
새로워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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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
육지가 멀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사공들이 한 행동입니다. 1C 당시 276명의 승객에다 많은 짐을 싣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로 항해하는 배는 대형 선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배의 사공들이라면 경험도 많고, 프로 직업의식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지가 가까이 오자 슬그머니 배를 포기하고 자신들만 도망가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워낙 바다에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배가 더 깊은 바다로 끌려나간다면 살 소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을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목숨 먼저 구하는 것이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승객들과 선적된 짐에 대한 책임자들입니다. 자신들은 구조되지 못하더라도 최우선으로 승객들을 구해야 할 선원들이지요( 세월호 선장 생각남).
거기에 비해 바울은 선주도 선원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승객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거시기한 죄인의 신분입니다. 그런 그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살립니다. 사공들의 계획을 간파하고 그 사실을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린 결과입니다. 사실 사공들이 없으면 그 배의 운명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정말 큰 풍랑이 그 배를 또 지중해 한복판으로 몰고 간다면, 그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헤쳐나갈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런 제안이 없었다면 어쩌면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두 무사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넋을 놓고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노력도 한 것입니다. 그런 위기상황에 백부장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구조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바로 바울에게서입니다. 그리고 그 바울이 십 여일 뒤 다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다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혼자만 살라고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있었건만 그는 죄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배의 승객들 모두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호송하던 죄인이 도망을 치거나 반란을 꾀하거나 반항하면 즉결처분을 할 권리가 군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배가 깨짐을 알고 죄수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백부장에게 건의한 것입니다. 그 급박한 상황을 이용하여 그야말로 탈출자가 생긴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일언지하 거절합니다. 바울 때문입니다. 오직 한 사람 바울으로, 그가 감동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감동은 말로 받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진심 어린 마음에서 받은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나 혼자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이 살았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 한 사람을 보시고 275명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족, 우리 직장, 우리 마을 사람들이 살기를 소망합니다.
자기만 편하고 잘 사는 인생 심판대 앞에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내 행복만 정녕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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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예언한대로, 표류한지 십사일째 되던 밤에 한 섬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는데,
사공들이 도망하려고 닻을 내리는 체하면서 거룻배를 바다에 내렸습니다
사실 이 풍랑에 빠진 가장 결정적인 책임이 있었던 자들이 작은 희망이 보이자
가장 먼저 도망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다 안다고 다 해보았다고 그래서 다 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떠들었던 자들이 자기들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도자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
오직 여호와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118:9)
그때 바울이 즉시 백부장에게 사공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전에는 저들이 지도자였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바울을 거기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이 새어 가자 주린 지 십사일이나 되었으니 음식을 먹으라 권하고,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위로한 후에
하나님께 축사하고 떡을 떼어 먹게 하니,
다 안심하고 받아 먹고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해안 가까이 가서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거나 널조각에 의지하여 섬에 상륙하니 바울이 예언한대로 이백칠십육 명 전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사실 그날이 가까울수록 이런 일들은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나 고관이나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실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9)
그리하면 그 날에 저들이 혼돈 속에 빠질 때도 우리를 평온함으로 이끄시고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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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탄 배가 폭풍 속에 지중해에서 표류하다가 한 섬에 상륙하는 이야기입니다.
1.폭풍속에서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표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행 27:27) 폭풍이 불고 14일만에 어느 섬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섬은 멜리데라는 섬입니다. 그레데에서 직선 거리로 1000km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그러니 특이한 것은 바람이 북동쪽에서 부는 사람이었는데 배는 남쪽으로는 조금밖에 안 내려가고 주로 왼쪽으로 가면서 표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항로는 표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갔어도 그렇게 갔을 항로입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바로 아래쪽에 있는 섬입니다. 폭풍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정확히 그들의 배가 가야 하는 곳으로 인도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배가 미지의 육지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행 27:28) 밤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원들은 육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고 수심을 재보니 처음에는 37m 그리고 조금 이후에는 27m로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암초에 부딪히게 될까 두려워 선원들은 고물에서 네 개의 닻을 내리고 날이 밝기만을 바랐습니다.” (우리말성경 행 27:29)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면 배가 암초에 부딪힐 가능성이 많아 배 뒤편으로 닻을 내려 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선원들이 꼼수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은 도망칠 속셈으로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거룻배를 바다에 띄웠습니다.” (우리말 성경 행 27:30) 배가 매우 위험한 상황인 것을 알기에 그들은 배 앞쪽으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그들이 타고 도망갈 구명정을 내렸습니다. 그 때 바울이 그들의 탈출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 안에 같이 있지 않으면 당신들도 구조되지 못할 것이오.”” (우리말성경 27:31) 결국 로마 군인들에 의해 그들의 탈출이 제지됩니다. 날이 새면 배를 섬에 더 가까이 가게 해야 하는데 선원이 없으면 배를 조종할 사람이 없어 큰 낭패가 될 뻔하였습니다. 바울은 배와 선원들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날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이 배를 타고 선교를 다닐 때 선원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맞춤형 준비를 해 주신 것입니다.
2.구조
여명으로 날이 밝아 올 때가 가까이 이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배 안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무엇이든 먹어 두라고 권하며 말했습니다. “지난 14일 동안 여러분은 계속 마음을 졸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우리말성경 행 27:33) 섬에 헤엄쳐 들어가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배부르게 먹고 난 뒤 남은 식량을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 해 두었습니다.” (Ac 27:38) 여전히 파도는 심하게 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 일행이 타고 있는 배는 큰 배이기 때문에 접안 시설이 없는 땅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배의 식량까지도 다 버려서 배의 무게를 더 가볍게 하였습니다. 무거우면 바닦에 닿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던 배가 드디어 배 밑부분이 바닥에 닿아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모래 언덕에 부딪혀 좌초됐습니다. 두 물살이 합쳐지는 곳에 걸리는 바람에 뱃머리는 꽉 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고 배 뒤쪽은 거센 파도 때문에 깨어졌습니다.” (Ac 27:41) 배의 앞 부분은 모래 언덕에 부딪혀서 꼼짝을 하지 않게 되었고 배의 뒷부분은 거센 파도로 인하여 물이 들어오고 부서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된 이 순간 로마의 군인들은 자신의 몸보신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Ac 27:42) 자신들이 후송하는 죄수들이 도망을 가면 그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Ac 27:43) 백부장은 이미 바울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인들이 말하는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살리기 위해 죄수들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위급한 순간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바울에게로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결단을 내리기를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수영해서 육지에 오르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배의 부서진 파편을 잡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Ac 27:44)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다 구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파도치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 수영도 못하는 사람도 많았을텐데, 구명조끼는 당연히 입지도 않았을텐데 이백칠십육명이라는 아주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두 구조받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또한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지중해에서 1000Km이상을 표류하던 배가 아프리카 해안으로 가지 않고 정확하게 이탈리아 밑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섬에 무사히 오르기까지는 큰 위기도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폭풍보다 더 위험한 인간의 욕심 때문에 선원들이 자신들만 살고자 도망가려 하였던 위기와 군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죄수들을 죽이려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이미 다 준비를 해 놓으셨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는 어떤 것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울의 배와 선원에 대한 지식과 백부장의 바울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인하여 그 모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하고 있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더하여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구조당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어떤 것보다 더 정확하고 풍성하고 세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더 작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커야 합니다. 자신의 사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더 경험하십시오. 때로는 정확하게 분별되지 않을 때도 많지만 그러나 항상 그것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인식하면서 그 인도하심 속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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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가 가까워진 것을 알자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한다. 육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함이다. 살려고 없어서는 안 되는 식량까지 버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이것을 위해 필수적인 것조차 버린다.
나는 가장 중요한 영생을 얻기 위해 이렇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다시 모든 것을 얻는다.
생명, 즉 영생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버리지 않으면 무거워서 암초에 걸리거나 부딪혀 목적지에 정박하지 못한다.
내 안에 욕심, 정욕, 죄악 등을 가득 싣고서는 무사히 육지에 도착할 수 없다.
정박을 방해하는 무수한 암초와 모래톱이 나를 방해하기에 이것들을 피해,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배가 가벼워야 한다.
애정과 욕망을 버려서 가볍게 해야 한다. 애정과 욕망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배가 육지로 전진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함을 잊지 말자.
애정과 욕망을 버려 나를 가볍게 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것으로 나를 다시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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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가 가까워지자 사공은 배를 버리려 하고, 군인은 죄수를 처형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을 통해 모든 사람을 안전하게 상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9~44절 바울과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안전하게 상륙하게 하십니다. 육지가 보이자 선원들은 닻을 끊어내고 해변에 배를 대려고 했지만, 두 물이 만나는 좁은 해역에서 빠른 조류에 휩쓸려 배가 바닥에 처박히고 난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갈 것을 염려해서 바울을 포함한 죄수들을 다 죽이려 합니다. 다행히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고 그들을 막아섭니다. 또다시 바울 때문에 죄수들의 목숨이 살아납니다. 결국 배와 하물만 손해를 봤을 뿐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건집니다.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27장 23,24,34절).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7~32절 바울은 배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사공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해서 모두의 생명을 살립니다. 표류 14일째 되는 날 사공들은 육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 수 있는 한 가닥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몰래 거룻배를 내립니다. 276명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공들이 자기 목숨만 구하려고 배를 버리고 탈출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의 탈출을 막고 승선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 배의 참 선주는 주님이셨고 바울은 주님이 세운 참 선장이었습니다. 나도 주님의 신실한 사공으로서 내게 맡기신 사람들을 잘 섬기고 있습니까?
33~38절 바울은 삶의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떡을 떼어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영육이 모두 탈진해서 14일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며,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떡을 들어 축사하고 먼저 떼어 먹자,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어 음식을 먹습니다. 광야에서 펼쳐진 오병이어의 기적이 거친 바다에서 재현되는 듯 합니다. 바울은 비록 매인 몸이었지만 방향을 잃고 난파되는 배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선장 역할을 했습니다. 내가 말씀과 떡으로 용기를 북돋워주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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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이 지나서 결국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고 사공들이 먼저 배에서 도망하려고 거룻배를 내리려는 것을 안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사공들이 배에 있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말하자, 백부장은 그의 말을 들어 거룻줄을 끊어버리게 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정해졌어도 인간이 마땅히 자신의 책임을 감당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배에서 밤을 지새며 사람들에게 음식 먹을 것을 권하면서,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줍니다. 죄수 바울은 어느 새 이 배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떡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에 이것을 성찬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35). 누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숫자를 276명이라고 밝힙니다(37).
날이 새고 배를 육지 가까이 대는데,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갈 것을 염려하여 아예 죽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죄수가 도망을 간다면 자신의 지위나 생명도 보전하지 못하니 이런 선택은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구원하려고 이 일을 금하였습니다. 결국 276명은 바울의 예언대로 모두 육지에 상륙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누가는 놀랍도록 자세히 배의 모든 기구들과 항해에 대한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이 항해와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을까요?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전적으로 바울로 인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24절에 천사가 와서 바울에게 전한 말에 함축된 의미입니다. 의인의 존재로 인하여 세상은 심판을 면합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죄수들을 죽이려는 군사들의 시도를 금한 것도 바울 한 사람을 인하여 모든 죄수의 생명이 건짐을 받은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더 큰 교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어떤 풍랑이 우리 인생에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생에 일어나는 풍랑을 인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처럼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풍랑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반드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줄을 믿습니다. 저희도 바울처럼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될 줄을 믿고, 저희 인생과 주변과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떤 환난에도 놀라지 않고, 의연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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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광풍을 만나 표류하던 배가 육지를 만나 구조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한 모습을 보이는 바울의 모습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혼미한 사람들
광풍속에서 열나흘을 헤맸습니다.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 때 자정쯤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파도소리가 육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선원들은 혼란한 틈을 타 거룻배(작은배)를 내려 도망가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이 배 안의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날이 새어 밝아지자 배가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배가 멈추었고 배 뒷편이 깨져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에 도착해야합니다. 그 때 로마군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하여야 했습니다. 죄수들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입니다. 죄수가 호송 중에 도망가면 그 죄수의 죄를 호송하는 사람이 뒤집어 써야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위험하지만 죄수를 죽이지 않고 육지제 도달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광풍이 부는대로 바다를 헤맸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혼미해져갔을 것입니다.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도망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죄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힘든 일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혼미합니다. 서로의 이익과 서로의 생각으로 인해 혼미합니다. 혼미한 세상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우리는 혼미한 세상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할까요? 그들의 혼란에 우리의 작은 안위를 보태 조금 더 혼란스러운 세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2.바울의 꿋꿋함
바울이 탄 배는 매우 혼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혼란한 틈을 타 도망가려는 선원을 붙잡아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권하였습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바울은 혼란한 배속에서도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그가 해야 하는 일을 하나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혼란한 배에서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이사랴를 만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에서도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죽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혼란한 곳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그곳에서 우리는 꿋꿋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에도 성령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교통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꿋꿋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을 알고 기도하며 성령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세상이 어떻습니까? 세상의 변화와 혼란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무게중심을 지키고 꿋꿋하였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더불어 똑같이 표류하였습니까? 세상에서 표류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기도한 광풍의 한가운데서 바울은 꿋꿋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살결이 광풍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몸도 바람에 떠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만은 꿋꿋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광풍을 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떤 일이 있어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꿋꿋하게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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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읽어보기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열나흘 째 되어서 배는 어느 섬에 가까이 왔습니다.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미항에서 멜리데 섬까지 약 800Km 이르는 거리를 14일간 유라굴로라는 태풍에 떠밀려 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겼습니다.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바다를 이렇게 부릅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레비 섬, 헬라 사이의 바다를 가리켰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이 탄 배가 팔레스틴에서 로마로 항해하다가 아드리아해 한 가운데서 난파당했던 일을 기록에 남겨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수일간 계속되는 태풍 때문에 11-3월 사이에는 항해가 중단됩니다.
사공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이 오는 줄을 짐작하였습니다. 밤이었으므로 눈으로 보고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배가 동쪽에서 성(聖) 바울(St. Paul)만으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쿠라 곶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날 때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육지에 가까이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배에 탄 사람들이 들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삶에의 희망을 보여주는 기쁨의 소리로 들었을 것이고 그를 통해 바울의 예언이 사실로 다가옴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2절). 사공들은 물의 깊이를 재니 열 다섯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의 길은 뻗치다를 뜻하는 데서 온 말로 양 팔을 벌려서 쭉 폈을 때 한손의 중지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나타냅니다. 이 길이는 대략 1.8m로 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이십 길은 수심이 36m였다는 뜻이고 다음에 잰 열다섯 길은 수심이 27m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수심이 빠른 속도로 얕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암초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짐을 나타냅니다.
(고물로 닻을 내리고 날새기를 기다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그들은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였습니다. 닻은 배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밧줄이나 쇠줄에 매어 물에 던지는, 쇠나 나무 따위로 만든 무거운 물건입니다. 고물은 배의 뒷꼬리 부분을 가리킵니다. 닻을 배의 뒷부분 즉 고물에서 내리는 것은 보통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닻은 이물 즉 배의 앞머리 부분에서 내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배가 해변 가까이 접근해 있고 폭풍이 몹시 불어대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물에서 닻을 내려 배의 앞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람과 파도가 배를 해변쪽으로 밀어 붙이면 배의 뒷부분이 180도 앞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그 과정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현명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닻을 네 개나 내린 것은 가능한 한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고정시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도망가는 사공들을 막은 바울)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사공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러 놓고 도망가고자 하였습니다. 닻을 내려 배의 전진을 억제시킨 지금의 상황에서 밤만 무사히 지낸다면 날이 샌 후에 육지에 상륙 할 수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22-15절). 그러나 선원들이 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염려와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여 자기들끼리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물에서 닻을 내리려는 체하며 거룻배를 내려 타고가려고 했습니다.
(사공을 잡으라는 바울의 방향)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바울은 이를 군인들에게 알리자 군인들은 거룻배를 끊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상황을 관찰하다가 정확히 파악했고 분병한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물에서 닻을 내리지 않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닻을 내리려는 선원들의 행동은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그들의 도망을 저지시키도록 충고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원들이 없어져 버린다면 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상륙할 때에도 경험이 많고 노련한 선원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사공들의 도주를 저지 시키라고만 했을 뿐 거룻배를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거룻배는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면,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룻배는 다음날 육지에 상륙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들은 다음날 배를 해안에 갖다 대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고 그것은 실패로 돌아갑니다(39 -41절).
(음식을 먹고 힘을 내라는 바울)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배에 있는 사람들은 열 나흘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무렵 바울은 우선 배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곧 날이 새면 상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비상 사태에(43, 44절)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열나흘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주렸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먹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열 나흘을 주렸다는 것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기간을 지내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먹지 않고 14일을 폭풍에 시달려 왔다면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만 섭취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먹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먹는 것은 단지 주림을 해소하거나 기운을 차리게 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의 보존과 관계됩니다. 히 11:7에도 구원을 생명의 연장으로 쓰인 용법이 발견됩니다. 바울이 날이 밝은 후 상륙을 시도할 때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견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결과론적으로 지금 음식을 먹는 것은 다음날 육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43, 44절).
바울은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까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구는 구약 시대부터 전해져 왔던 격언 형식의 문구로(삼상 14:45 왕상 1: 52),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핍박받는 자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눅 12:7), 바울이 다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자신 있는 안전 보장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276명이 떡을 먹음)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떡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누구나 알고 있었던 식사 때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시 유대교 뿐만 아니라, 모든 헬라 세계에 일반적으로 식사에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바울이 축사를 하였을 때는, 명백하게 바울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의 내용이 말하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말을 듣고 다 안심하고 떡을 받아 먹었습니다. 바울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도 담대하고 평안해 보였으므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식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 하였고 절망에서 벗어나 안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22, 25절). 바울은 그들이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숫자를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음식을 먹은 후에 상륙할 것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인원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어본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요세푸스가 타고 가다가 난파 당했던 배에는 600명 가량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276명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해안을 향하여 들어감)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그들은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배부르게 먹어 기운을 차린 뒤에는 밀을 바다에 던져 버려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이전에 버린 것은 곡물을 제외한 일반 화물이었습니다. 지금 버린 것이 바로 운송하던 곡물 전부였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소중한 곡물까지도 버려야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해변 가까이에 접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거룻배도 버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헤엄을 치거나 물에 뜨는 물체에 의지해서 상륙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예언이 점점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22절).
날이 새자 어느 항만인지는 모르나 항만이 눈에 띄어서 그곳에 배를 댈 수 있는가 의논하였습니다. 28:11에 의하면 이 섬은 결코 선원들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배가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의 주항(主港)인 발레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멜리데 섬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후에 이 배가 들어간 이곳을 성 바울 만(St. Pauls Bay)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사진 해안은 평평한 모래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바울이 탄 배는 정식으로 된 항구에 배를 댄 것이 아니라 평평한 모래밭에 비상 상륙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갔습니다. 평평한 모래밭에 배를 들이대고 상륙을 시도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이제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일단 배를 고정시켰던 닻을 끊어 버렸습니다. 닻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끊어버린 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여 해안 가까이에 상륙시키려는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닻을 버린 것은 더 이상의 항해를 포기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미 앞에서는 수하물(18절), 배의 기구들(19절), 곡물(38절)을 버렸고 마침내 여기에서는 닻을 버림으로써 사람을 제외한 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22절). 닻을 끊어 버린 후에는 고정시켜 두었던 키의 밧줄을 풀어 느슨하게 했는데 이는 배가 진행할 때 방향을 조절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다음에는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여 해안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큰 돛을 버렸으므로. 여기서 사용한 돛은 작은 앞 돛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배의 고물이 깨어짐)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자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었습니다. 배의 고물이 큰 물결에 깨어졌습니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은 육지로부터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모래나 진흙과 같은 점토가 마치 사주(砂洲)와 같은 형태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물이 깨어졌다는 묘사는 배의 앞 부분이 바로 이 점토층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뒷부분은 부딪힐 때의 충격과 뒤에서 때려대는 파도에 의해 깨어져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줍니다.
(죄수들을 살린 백부장)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43a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군인들은 죄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죄수들은 쇠사슬로 묶어두는 것이 상례였고 그럴 경우 헤엄쳐 도망갈 염려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의하면 죄수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아마 곡물을 나를 때 쇠사슬을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군인들은 죄수들을 안전하게 이송해야할 책임이 있었고. 만일 죄수를 놓치거나 잃을 경우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12:18,19 16:25-18), 죄수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하여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백부장이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죄수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바울 역시 죄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3절)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부하들의 뜻을 막았습니다. 바울의 말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을 보고 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경외하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나머지 죄수들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상황이었으므로, 바울로 인해 다른 죄수들도 죽음을 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사실상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바울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24절).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 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그가 믿고 있는 신앙의 능력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로 인하여 죄수들도 살게 되었습니다.
(276명 모두가 구조 받음)
"43b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헤엄치는 사람들이 먼저 육지에 가게 하고 남어지는 널조각을 의지하여 육지에 올라가서 모두가 살게 되었습니다. 배가 좌초한 곳은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므로 백부장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을 먼저 뛰어내리게 하여 육지에 헤엄쳐가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뭍으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말대로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구원을 받았고 그밖의 모든 것은 바다에 버려졌습니다(22절).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입니다.
결국 바울 한 사람으로 배에 있는 276명이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명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통하여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리더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방향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리더는 자신을 인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행전 27장 강해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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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려는 선원들과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도 바울 사이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한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시작된 로마로 향한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인간적인 즐거움을 찾아 약간의 값을, 혹은 그 보다 훨씬 많은 값을 지불하더라도 뵈닉스로 향하기로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과 삶 가운데의 미묘한 긴장을 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미항에서 정박하든 뵈닉스로 가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믿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을 나만 잘 믿으면 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믿음은 위험한 상황인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로마로 보내주시겠다고 했으니 위험도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지 하는 생각은 믿음이 좋은 사람의 생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위험이 될 만한 길을 가려고 하는데 그냥 놓아두는 것은 결코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첨예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은 아마 놓아두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설득하려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또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혈기를 부리거나 오기를 피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작할 때의 동기가 사랑의 동기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애정 어린 충고를 무시하고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을 따라 뵈닉스로 향했던 배는 곧 유라굴로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보았지만 배는 곧 자신들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사납게 뛰노는 바람과 바다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애써 모으고 사 두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또 다시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해와 달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방향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항로를 이탈한 배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방향을 알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삶에 대한 소망이 거의 희박해지는 국면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풍랑은 계속되고 구원의 여망은 다 없어졌습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았지만 그들은 악천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계속되는 풍랑으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먹지도 못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치고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린 사람들.....
바로 이들 가운데 누구도 함께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몸이 자유롭지 못한 죄수의 몸으로 그들과 똑 같은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보다 덜 시달렸다거나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보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원망도 생겼을 수 있습니다. 이러다가 로마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비교적 많은 바울입니다. 아무리 여행으로 훈련된 바울이라고는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모두 풍랑으로 인해서 배 멀미를 심하게 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바울이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짙은 절망에 휩싸여서 삶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고 있을 무렵입니다. 뭔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살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위기의 순간에 믿음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믿음은 그 빛을 더욱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행27:23)
이 말씀은 최소한 두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줍니다. 첫째는 어제 저녁까지는 바울도 이 사람들과 똑같은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똑같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된 사람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애착과 상황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정도 역시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어제 밤까지는 바울도 이들과 똑같은 상황가운데 있었습니다. 답답하고, 암울하고.... 도대체 로마도 보겠다고는 하셨는데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도대체 왜 이러시는가... 아마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급박한 순간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두가 절망하고 힘들어 할 때 가장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 순간에도 믿음의 끈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향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저는 믿음의 사람이 사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하는 일은 모든 일이 형통하고, 다 잘되고 있을 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거두지 않고 오히려 더 불태우며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전염성을 갖게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로마까지 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바울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가장 최악의 경우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이들과 같은 풍랑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하나님은 지금 내 삶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안심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네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지금 당장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소란스럽고 죽음의 음울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는 선상입니다. 그런데 그 선상에 소망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입니다.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 바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라.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어제 밤에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대로 될 것을 믿노라”
믿음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바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구원해 주거나 뭔가 바울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어서 구원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떤 조치가 취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믿음과 삶 사이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사공들의 이기주의(27-30절)
풍랑에 휩쓸려 다닌 것이 열 나흘째 되던 날 밤입니다. 그 때도 그저 향방을 잃어버리고 이리 저리 풍랑에 쫓기고 있을 때입니다. 사공들은 본능적으로 육지가 가까 왔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비록 밤이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물결치는 소리 물살이 움직이는 상황들을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육지가 가까워 오면 수심이 얕아지게 마련입니다. 급하게 수심을 쟀습니다. 36미터였습니다. 다시 재니까 27미터입니다. 급격하게 수심이 얕아지고 있습니다. 사공들이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우선 배를 정지시켰습니다. 고물이란 배의 뒤쪽의 판판한 곳을 말합니다. 원래 닻을 내릴 때는 이물, 즉 배의 앞쪽에서 내리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앞쪽에 내리면 훨씬 위험했기 때문에 뒤쪽에 내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다가는 암초에 걸려서 파선될까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사공들이 자신들만 살겠다고 슬그머니 구명정을 타고 도망치려고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사공들은 전문가들입니다. 이 상태로 가면 분명히 배는 침몰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라도 살아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자신들이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전문가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부터 살아보겠다는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이들이 가고 나면 배를 통제할 사람들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선원들을 비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들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아마 저와 여러분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가롯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베드로의 배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이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요” 이 말은 아주 다양한 경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항상 공동체 보다, 혹은 다른 사람보다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자기중심성이 깔려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독립을 선언한 이래로 자기중심성이라는 큰 병에 걸려 있습니다. 사공들의 모습은 바로 그런 자기중심성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사공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기보다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이런 자기중심성,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고 싶을 때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31-44절)
바로 이 때 바울이 다시 전면으로 나서며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다른 사람들은 선원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을까요? 아니면 오랜 항해를 했기 때문에 바울이 먼저 알았을 까요? 어쨌든 바울은 선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인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39절부터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잘 드러납니다. 닻을 끊고 킷 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하는 일들은 선원들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백부장과 군사들은 아예 구명보트의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아마 계속되는 유혹거리를 제거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조치였을 것입니다. 너무나 지쳐 있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구명정을 타겠다고 소란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의 제지는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한 일은 또 있습니다.
날이 새 가자 여러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14일 동안이나 풍랑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미항에서 무려 800km나 풍랑에 휩쓸려 왔습니다.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50km밖에 되지 않는 뵈닉스로 향했지만 인생은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800km라니요. 저는 이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 그럴 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악의에 찬 신음 소리를 발하며 스스로 생명을 끊거나 원한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여기 인생의 행복한 인생의 신비가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그 동안 심한 배 멀미로 먹었어도 토했습니다. 체력이 너무나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명보트를 끊어 버린 상황에서 체력이 준비되지 못하면 분명히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276명을 다 바울의 손에 붙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음식을 먹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바울은 당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43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직 육지까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헤엄을 쳐서 가려면 상당한 체력이 필요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음식을 먹고 힘을 비축해 두지 않았다면 아마 탈진해서 중간에 죽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로마에 가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앞의 절망적인 상황과 지금 먹으라고 권하는 모습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로마에 보내주겠다고 했으니 나는 손 발 다 놓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은 에덴동산을 경작해야 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지금 이들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가졌다고 가만히 있었다면 안전한 곳까지 왔어도 헤엄칠 힘이 없어서 다 익사하고 말 것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풍랑에 시달린 사람들입니다. 너무 지쳐 있습니다. 뭔가를 먹고 힘을 회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의 손에 붙여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했으니 그저 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선원들의 사고방식을 따른 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바울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비록 자신도 나이가 많고 지쳐 있는 상황이지만 사람들을 독려하고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얼마나 많은 자기 부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결국 이 상황은 군사들이 죄수들에 대한 책임 때문에 죽이려고 하는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바울을 깊이 신뢰한 백부장의 호의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런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사도 바울 만큼은 꼭 살리고 싶은 것이 백부장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보여준 믿음이었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44절) 이것이 이 사건의 결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만 살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미항에 머무르자고 할 때에도, 사람들을 격려할 때에도 음식을 먹으라고 강권할 때에도 사도 바울은 자신도 육체가 늙고 힘이 들지만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죄수들이 도망칠 것을 염려해서 다 죽이자는 병사들의 의견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만약 여기서 백부장이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바울에게 감동받지 않았더라면 죄수들은 다 죽었습니다.
믿음은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약속을 져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약속만 믿고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도 헬기를 동원해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착륙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모진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피를 말리는 애굽 병사들의 추격을 경험하면서 홍해의 기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믿음은 훈련일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고난이 없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삶에는 고난과 핍박이 많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로마로 향하는 길 역시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상황을 이기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더 이상 구원의 여망이 없어서 깊은 좌절 가운데 있을 때 믿음의 사람은 소망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겨울에 항해를 하면 안된다는 단순한 상식을 무시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선원들이 없으면 배를 움직일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좌시하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체력이 약해져서 헤엄쳐 갈 수 없기 때문에 권하여 음식을 먹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우리의 삶에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결론에 다다를 수 없는 진행형의 삶을 갈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은 무엇이 옳은 결정이며 믿음에 찬 삶이 불명료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로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신앙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대 원칙이 있습니다. 믿음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치려는 선원들과 함께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사도 바울 사이에 우리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의 자리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먼저 도망치려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교회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도망치고, 삶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나만 살면 된다는 사람들... 그런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함께 살리기 위해서 힘들고 어렵지만 영향력을 끼치고 섬기고 낮아지는 그리스도인이 꼭 필요한 시대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우리의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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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사랑의 칼로 수술하시고 인생의 고름을 짜내시며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우리를 덮어 구원을 허락하시는
은혜로 인해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개며 구원 받은 자의
새생명이 영혼 깊은 곳에서 부터 흘러나와 다른 이들을 밝히고 살려내는
축복의 통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곳곳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찾아가 만나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로
넘쳐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