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항사변과 독립군>. 동아일보사 발행, 신동아 통권 제45호 314쪽에서 ~ 349쪽을 다시 읽고서
굿맨(일명 A.Y.구트만, 혹은 A.Y.구타만 등 사용) , 최호림, 최고려, 테플랴코프, 박경리, 존 스테판, 하라 테루유키, 김창순, 이오키료조의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한 독립투사 이지택 선생의 진술. 동아일보사 발행, 신동아 통권 제45호 314쪽에서 ~ 349쪽.
1920년 니항사건이 한 때 자랑스러운 독립군 승리로만 알려졌고 일뽕들의 '계획적으로 모두 약탈 강간하고 죽였다'라는 국가적 선전은 개소리라고 간주된 적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이지택 선생의 신동아 인터뷰 기사 <니항사변과 독립군>은 이를 완전히 반박하셨다. 그리고
근래 1920년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구트만(일명 ‘굿맨’, 혹은 ‘구타만’ =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 러시아계로 친일 및 파시스트 활동),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 반공학자 김창순 선생의 잡지 ‘북한’ 등과 함께 1920년 니항사건과 관련된 중요자료로써 일본 야스쿠니 관련 기념관들과 한국 역사기념관 공식 도서 등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내용이다.
이지택 선생은 인터뷰 내용에서 1920년 니항사건과 1921년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조선인 무정부주의 강도떼의 비행 등을 후손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추호도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로 확인되는 진술
- 박병길, 이지택, 홍의표가 가입한 니콜라예프스크 한인회(=한민회)는 국민의회와 관련되어 있었다. (한인회는 박병길이 주도한 선인 민회로 추정되는 단체이다. 국민의회는 상해임시정부와는 다른 임시정부인 일명 ‘이르쿠츠크파’를 말한다.)
- 1920년 니항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 이전에는 군사경험이 없었다.
- 자유단은 니항사건 이전에는 무장을 한 적이 없다.
- 니항에는 일명 ‘이르쿠츠크파’ 계열이 존재하였다.
- 매우 특이하게도 이지택 선생은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의 일본 관직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 대대장, 해군 장교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군 점령지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시겠다고 많은 준비를 하신 모양입니다.
- 1920년 2월 29일 니항해방 당시 박병길, 홍의표, 이지택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 뜨래삐찐(=뜨레삐찐=일본식 발음으로는 '트랴피친' = 러시아식 발음으로는 '트리피츤')은 음주, 양조를 금지했다.
- 한인 자유단원에는 예수교인이 많았다.
- 한인 자유단원은 일본군이 죽은후 비자발적으로 트리피츤(=뜨래삐찐)의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했다. 중대장 김께샤, 중대참모 박병길, 중대선임하사 이지택
- 니항의 전주민이 니항 방어에 동원되었다.
- 자유단의 조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제2중대는 일본군의 진격을 전혀 막지 못하고 암군강 입구 부근으로 후퇴했다. (이것은 러시아 적백내전 당시 명령불복종 무단 후퇴로 추정됨)
- 사소프, 트리피츤은 조선인 부대를 신임하였다.
- 조선인들은 일본인 학살에 관계하지 않았다.
- 박병길이 주도적으로 ‘뜨래삐찐’ 체포를 계획했다.
- 뜨래삐찐은 피난간 께르비에서 니항을 다시 탈환하고, 하바로프스크까지 탈환할 계획이었다.
- 박병길과 알렉셰이(='안드레예프'='안드레예브'의 오기)가 협동하였다. 안드레예브는 혁명위원회 위원장이었고 박병길은 7명의 위원중 1인이 되었다.
- 박일리야는 한민회와 친분이 없었다. 박일리야는 한인부대의 전체 참모로 트리피츤과 함께 활동했다.
- 체포된 트리피츤은 포로 20여명을 죽인 것을 인정했다.
- 께르비에서부터 박병길을 조선인들이 노렸으나, 박일리야가 명령해 풀려났다.
- 1921년 초 박병길을 밤중에 독립군이 처형했다.
◆의문점
- 다른 독립유공자들과 달리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점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분들보다 매우 뛰어난 분으로 볼 수 있다.
- 비밀결사 ‘자유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는 일본과 러시아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박병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 '뜨래삐찐 부대내의 한인부대가 횡포가 심했다.'고 하는 내용은 주로 일본이나 러시아 백파 측 기록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 '귀순 선인', 혹인 '선량 선인'은 ‘불령 선인’과는 대립되는 인간들로서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일제의 개’로 불려지기도 했다.
- ‘뜨래삐찐’의 만행으로 니항사변이 발생했다. 트래삐찐의(=트리피츤) 고향은 니항이며, 애인 레나는 니항에서 교원이었다.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약탈, 징발하였다.
- 뜨래삐찐이 일본군에게 무기대여를 요구했기 때문에 참다 못한 일본군에 의해 니항사변이 발생했다.
- '뜨래삐찐 부대가 불을 지르고 공격하는 바람에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부영사 가족이 죽은 것이다.' 는 등의 허위 주장은 요즘 일본에서도 거의 안하지만 한국에서는 박경리 선생이나 존 스테판 계열에서 하는 말인데, 정말 믿어 보라고 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 든다.
- 박일리야가 지휘하던 조선인 독립군 부대원 100~200여명이 니항해방에 관여한 사실과 박일리야 부대원들이 니항에서 전사한 사실 등을 언급하지 않았다.
- 니항거주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군의 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심지어 친일파들도 인정한 사실인데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20년 니항사건 기간중 조선인에 대한 집단 학살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진술조차 하지 않았다.
- 박병길은 니항을 재공격한 일본군의 도움으로 트리피츤을 직접 체포하였는데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트리피츤의 단독행동으로 니항이 불탄 것은 아니며, 볼셰비키와 극동공화국 상급 부서의 동의 혹은 명령은 분명 있었다. 다만 모든 책임을 하급자인 트리피츤이 진 것이다. 트리피츤 지지자 중에서는 일부 멋지게 책임졌다는 의견도 분명 있었다.
누구처럼 '자유시 참변은 홍범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박일리야 부대원이 홍범도 부대원이고 박일리야의 부하가 죽은 것은 홍범도가 데려가 죽인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어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은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하실 분이셨겠는가..... 홍범도라면 당연히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라고 말하실 분이셨다.
홍범도 그렇게 나쁜 놈 아니었다.
- 트리피츤의 경호를 담당한 것은 조선인부대(=일명 박일리야 부대 =조선인 니항부대)였다.
- 박일리야는 일본이 경영하는 기무라 상회의 앞잡이였다.... (뭐라 할 말은 없다만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 밀정회사에 취직한 것은 박병길 등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도 허위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박병길의 비호로 박일리야가 처형되지 않았다....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 치타 정부에서 온 대표 등으로 재판관으로 트래삐찐을 심판하였다. (죽은뒤 심판한 것은 부관참시인데.... 뭔 말씀인지.. 타임머신이 왔다리 갔다리 하시면 정말 한국어 해석도 어렵습니다. 니항사건에 대해 글을 쓰는 저도 이 분이 그시대에 타임머신을 그렇게 잘 타고 다니셨다는 말인지.....)
- 수천여명 이상의 피난민들을 이지택과 박병길 등이 피난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다.
- 이르쿠츠크파와 박병길이 주도해 자유시에서 사단급 독립군 부대 편성을 계획했다. (김좌진, 구춘선, 안무, 홍범도, 허근, 이상룡, 이동휘, 한운용, 이용 등은 그냥 허수아비셨다고 말씀하시려는 모양인데... 그분들도 분명 사람이고 눈이 달려 있었다.)
◆맺는 말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혁명가 안드레예브(=‘알렉셰이’라고 오기됨, 혹은 '안드레예프') 등이 일제로 도주한 사실은 소련시대에 비밀로 감추어졌으나,
1921년 자유시참변 직후, 한국 독립군 대부분이 이미 자유시참변과 니항사건을 일으킨 안드레예브 등이 일본군측으로 도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병길이 한인 가정의 개인가정교사를 했을 수 있으나, 일본군과 백파 러시아 측 기록에 등장하는 니항에서 반일운동을 주도한 한인학교의 교사 박은 ‘박일리야’이다. 가정교사와 학교 교사는 다른 것이다.
박병길이 니항에서 일본인 허락없이 자유보라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지택 선생의 주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며, 오늘날 일본과 러시아 백파측 기록에 등장하는 ‘귀순선인’은 독립운동가로 볼 필요가 없으며 ‘불령선인’을 독립운동가로 봐야 한다.
1920년 니항사건과 1921년 자유시참변의 목격자이면서, 추호도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하시고서는
약간 거짓말을 섞으신 부분이 분명 있고, 특히 이르쿠츠크파인 최호림, 최고려의 주장과 일치되는 주장을 하시는 점을 볼 때
한쪽의 의견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할 것이다.
대립하던 다른편의 주장에 따르면, 니항 조선인 민회는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며 일본 영사관 협력단체였고, 박병길 등은 주로 일본인과 일하다가,
1920년 2월 29일 니항해방 이후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친일파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으나, 자유시에 와서의 행적은 독립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 오늘날 이지택 선생과 같은 주장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각종 도서에서도 잘 하지 않는다.
대립했던 상대방에 대해서도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하시고서는 사실과 다른 말씀도 하시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분명 사실도 있는 모양입니다.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외에도 석유개발, 금광업, 광산업도 했던 시마다 모토타로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