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정문(仁政門)
진선문을 지나면 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 왼쪽으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서있다.
인정문은 300년 조선왕조의 정사를 다루어 온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1405년 태종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으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인정문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2.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인정전과 인정전 마당(조정)은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행사를 치렀던 전각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왕세자 책봉식이나 세자빈 간택 등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1494년 연산군이 인정전에서 왕위 즉위식을 했고,
이후 1649년(인조 27) 효종, 1659년(효종 10) 현종, 1724년(경종 4) 영조, 1800년 순조, 1849년 철종,
1863년 고종도 이곳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년(180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와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으로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월대 위에 서 있으며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라 하여 평평한 돌에 도드라지게 문양을 새겼다.
답도에는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는데 봉황은 천상의 세계로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상징한다.
인정전 마당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차일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당에 미리 쇠고리를 묻어 두어 여기에 줄을 묶어 쉽게 차일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차일은 인정전 월대 위에 설치하여 의례의 주관자인 임금과 왕실 가족이 햇볕과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다.
또 차일 밖의 공간과 구별하여 행사 공간에 위계를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정전 지붕 용마루에는 대한제국 황실문장인 오야꽃 문양 다섯 개가 금동으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데,
구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정전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두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란 달과 해 앞의 다섯 산을 그린 그림이다.
주로 병풍으로 그려져 조선 시대 어좌의 뒷편에 놓였다.
- 인정전 조정의 삼도와 품계석
인정문을 통해 들어온 어도는 인정전 마당에서 삼도로 바뀌어 월대로 이어지며,
마당 나머지 부분은 박석(薄石)을 깔았다.
중앙에 조금 올라온 곳은 왕이 밟고 지나는 어도이고, 좌우 양측은 신하들이 밟고 다니는 신도로
어도와 양측 신도를 합쳐 삼도라 했다.
삼도 옆으로 정조 재위 1년(1777년)에 세운 품계석(品階石)이 두줄로 세워졌는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해 문신과 무신을 구분했다.
이렇게 인정전 앞 넓은 마당은 문.무신의 조회가 있던 뜰로,
조정(朝廷)이라하여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이었다.
중앙의 삼도(어도와 신도)와 좌우 양옆의 품계석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길엔 삼도가 있다.
가운데 길은 임금만이 갈 수 있는 어도(로)고 양측에 신도인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중앙을 양측보다 높여 임금이 다녔고, 양옆 낮은곳이 신하들이 다니는 신도이다.
인정전 앞뜰의 조정
문무백관의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의 조정(朝廷)이라고 한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정9품(正九品) 부터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1품에서 3품까지는 정(正), 종(從)으로 구분하여 6개를 세워 문무백과 12개 품계석을 세웠다.
4품에서 9품까지는 정, 종을 구분하지 않고 6개씩 12개가 세워졌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다.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이렇게 삼도를 두고 동서 양쪽에 무신과 문신이 서 있었기에 양반이란 말이 나왔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 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 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 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는데, 이것을 ‘곡배(曲拜)’라 한다.
창덕궁 인정전 외에도 경복궁 근정전 ,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에 품계석이 세워져 좌우 12개씩
24개가 놓여져 있다.
- 인정전 내부
인정전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을 두었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임금의 용상 뒤로 나무로 만든 곡병(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치는 굽은 병풍)을 쳤다.
그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이 둘러져 있다.
해,달,다섯개의 산 봉우리,폭포,파도,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무병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화려한 인정전 내부
용상 뒤로 나무로 만든 곡병과 뒤로 일월오악병이 둘러져 있다.
어좌 위쪽에는 집 모형의 당가를 만들어 장식했다.
1907년 무렵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와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현재 인정전 내부에 설치된 전기, 커튼, 유리창문 등은 구한말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왔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용상과 병풍인 일월오악도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다.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궁궐의 정전에는 한결같이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 곡병 뒤에 있다.
이 병풍은 국토를 지키는 오악(五嶽)의 신과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해와 달의 표현으로
어좌를 둘러 국토와 창생이 임금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가 경영된다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용상(어좌) 뒤의 곡병과 일월오봉(日月五峰)과 십장생(十長生)병풍
인정전의 아름다운 문살
드므
인정전 상, 하월대의 좌우로 4개소에 설치되어 있는 드므는 불귀신의 접근을 막기 위한 벽사 시설이다.
'드므'란 순 우리말로 넓적한 독을 의미한다.
목조건물에 언제 생길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해서 드므에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고 한다.
또는 불의 귀신이 궁궐에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게 하기 위해
드므에 물을 담아두었다고 한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