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여행] 전주의 자존심 전라감영..........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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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라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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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 그동안 유랑자는 몇 번의 천년고도 전주 여행에서 왜 전주엔 전라감영이 없는걸까?. 사실
몹시 궁굼 했었다. 그런데 얼마전 전라감영이 복원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뉴스를 접하고서 복
원 모습이 너무나 궁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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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주 여행에서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달려간곳 전라감영!, 조선왕조 500년 동안 호남의 정치, 경
제, 문화를 아우른 최고 통치기관으로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한 전라감영이 복원 대공사를 마치고 옛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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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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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먼저 완산경찰서 주차장을 이용하여 주차를 하였다. 만차로 이루어진 경찰서 주차장에 겨
우 한자리 차지하고는 곧장 전라감영으로 달려갔다. 한옥의 아름답고도 고풍스러운 모습을 들어낸
전라감영은 신축 건물답게 깔끔함을 앞세우며 유랑자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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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전라 감영은 1951년 6·25전쟁 당시 폭발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진후 이듬해인 1952년에 전라북도
도청사가 들어섰다. 그리고 50여년이 흘렀다. 전라감영 복원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전북도
청사 이전 계획이 확정된 지난 1996년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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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전라감영 정문이 있어야 하는데 정문없이 내삼문부터 복원이 된 부분은 다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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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부지에는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을 중심으로 전라감사 식구들의 거처인 내아, 감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관풍각,
정무를 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연신당, 보좌관들의 집무를 보던 비장청 등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된 의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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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선화당의 모습. 지금의 건물과 비교하면 웅장한 모습에서 차이가 있음을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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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복원사업은 20여년간의 준비 끝에 구 도청사가 철거된 이후인 2017년 11월 시작됐다. 구 도
청사를 철거하고 2017년 11월부터 104억원을 투입해 2년 10개월에 걸려 전라감사가 집무실로 쓰던 선
화당을 비롯해 관풍각, 연신당, 내삼문, 외행랑 등 40여 채에 이르는 전라감영 중 업무영역에 있는 핵
심 건물 7곳의 원형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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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라감영이 불타버린지 70여년의 시간이 흐른뒤 에 2020년 10월7일 전라감영 복원 기념식을 전
라감영에서 가지면서 화려하게 복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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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의 선화당과 관풍각에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옛 사진 자료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확대해 복원한 것이다.
흑백 사진으로 필획이 선명하지 않은 부분을 바로 잡았다는 후문이다. 또한 기와는 숭례문을 복원한 중요무형문화재
이근복 번와장이 전남 나주에서 전통 방식으로 구운 것들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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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의 중심건물은 선화당으로 전라감사가 집무를 보던 정청이다.‘선화당’이란 당호 또한 임금의 높은 덕을 베풀어 백성
들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정면 7칸과 측면 4칸의 약 78평 규모를 갖고 있어서 조선시대 전주부 성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전주객
사인 풍패지관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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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1884년(고종21) 전라감영을 방문한 미국 임시 대리공사 해군무관조지 클레이튼 포크가 찍은 사진
2장선화당 사진 속 현판은 오른쪽으로 15도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자문위원들은 이 사진의 촬영 방향 등을 고려해 정면에서
쓴 느낌이 들도록 필획을 일부 보강했다.
최대한 외형은 그대로 유지한 채 판각했다는 설명이다. 이 사진 속 선화당 글씨를 쓴 인물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1792년(정조
16) 선화당 중건 당시 전라감사인 정민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정민시는 조선시대 정치가로 1773년(조 49) 문과에 급제해 예조
판서·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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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뭐~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도 아니면서도 건물하나 짓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
른 것이다.
알다시피 전북라도는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국 10대 권역 중 하나의 독자 권역이었는데 경상도
출신들이 연이어 정권을 잡으면서 부터 지역 불균형 정책으로인해 수도권 과 지방의 관계에서 호남
과 영남의 대립에서 호남에서는 변방이라는 틀에 갇혀 삼중고의 홀대를 받아 왔던게 사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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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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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당 네 개의 들보는 백 년 넘은 거목이 쓰였는데, 강원도에서 난 금강송이다, 모두 37그루의 금강송이 선화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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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56개 군현을 다스렸던 곳이다. 현재 전남북도와 광주광역시, 제주
도까지 전라도에 속했다. 전라감영은 조선 500년 동안 전주에 있으면서 전라도 역사와 함께 했다. 멋
과 맛, 풍류로 상징되는 전라도 문화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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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전라감영 복원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합 관할하던 관청인
전라감영은 경상감영, 충청감영과 달리 조선왕조 500년 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전주에 자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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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전라감영이란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관아라는 뜻으로 완영(完營)이라고 많이 불렀다. 완영
이란 전주의 옛지명 ‘완산’에서 나온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복원된 전라감영은 천년고도 전주의
자긍심이자 전주를 상징하는 전라도의 심장이자 아시아문화심장터로서 자리 잡게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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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전주 감영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역사·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천년을
이왔듯이 앞으로 천년 아니 만년이 이어가는 생명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전북인 모두의 자존
심을 확인하고 또한 전주의 미래가 담긴 출발점이 되는 핵심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유랑자는 전라감영을 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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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은 구절초가 유랑자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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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각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다.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관풍각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라는 관풍찰속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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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각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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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당은 전라감사의 처소로, 1688년 전라감사 이유가 창건한 곳이라고 한다. 연신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에 공자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운듯 보인다는 의미에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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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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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는 전라감사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를 말하는데 3차례 개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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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서편부지(경찰청동) 문화시설 조성까지 포함하여 복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전라감영이 복원되면 경기전, 풍남문,전라
감영, 풍패지관(객사), 한옥마을, 남부시장과 연계하여 문화 관광 벨트를 형성하고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위상을 더 높이는 계기
가 될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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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전주에 가면 꼭 둘러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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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LK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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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4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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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라감영에 대해 잘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전주시민 올림.
감사 합니다.
이 유랑자가 전주의 여행기를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만은
어디 전주에 사시는 분들만큼 하겠습니까?,
암튼 모든것은 전주를 잘 모르는 사람이려니 하시고 저의 여행기를
사랑과 애정으로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유랑자는 전주 사시는 분들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