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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란은 일본만 특별 취급? 타카이치 총리가 친미라도 적이 되지 않는 ‘73년 전의 결단’ / 3월 31일(화) / 다이아몬드 온라인
아직도 혼란스러운 중동 정세.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일본에 대해, 대립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란이 일본에 배려를 보이는 듯한 보도도 들려온다. 그 배경에는 단순한 외교 전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그 사건은 이데미츠코우산(出光興産)이 크게 관여하고 있던 73년 전의 일이다. (이토모스 연구소 소장 오구라 켄이치)
● 이란이 일본을 '특별 대우'하는 '어떤 사건'
2026년 3월, 타카이치 총리는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우 강한 친미 자세를 보였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미국에 아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행동이다. 당연히 미국과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란 입장에서는 일본의 이런 태도가 결코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타카이치 총리의 미국 방문 직후, 이란의 아라구치 외무장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일본 관련 선박의 통과를 ‘인정할 준비가 있다’고 발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에게는 에너지 공급과 관련된 생존 문제이며, 이란의 배려는 정말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직 상황에 진전이 없으며, 선박 통과가 전혀 예측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란은 일본을 특별 대우하는 걸까. ‘일본 국내의 평화를 바라는 반전 운동 덕분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빗나간 생각이다. 이는 이란 측의 냉혹하고 현실적인 ‘손익 계산’ 결과다.
현재 중동 정세는 긴박해지고, 에너지 수송의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봉쇄 상태에 있다. 이란의 냉혹한 손익 계산이란, 서방 국가들과의 완전한 파멸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안전밸브’ 역할을 일본이 하는 것이다.
일본은 G7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을 무력으로 식민지 지배한 역사가 없으며, 종교적 대립도 없다. 게다가 타카이치 총리가 아무리 미국에 동조하더라도, 일본국 헌법의 제약 때문에 일본이 스스로 직접적인 군사 공격의 선두에 서는 일은 없다고 이란 측은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다.
즉, 미국 동맹국 중에서 대화의 여지가 가장 많은 ‘우회로’가 바로 일본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장기화된 경제 제재로 이란의 국내 경제가 완전히 침체된 상황이다. 향후 제재 해제와 경제 회복을 내다볼 때, 고도의 기술력과 경제력을 갖춘 일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은 이란에 큰 불이익이 될 것이다. 표면적인 정치적 대립을 넘어선 차원에서, 이란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전략적으로 확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교묘한 외교 카드를 성립시키는 근본 전제는 일본과 이란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역사적 경위’이다.
과거의 기억이 단순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그치지 않고, 현대 위기에서 매우 현실적인 신뢰의 보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역사적 경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이데미츠코우산(出光興産)의 창업자이자 베스트셀러 소설 『해적이라 불린 남자』의 주인공 모델이 된 이데미츠 사조(出光佐三) 씨(1885‑1981)이다.
● '일장마루 사건'이 상징하는 일본과 이란의 관계
이란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특별한 신뢰와 친일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근본에는 1953년에 일어난 ‘일장마루 사건’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도 당시 상황은 현대의 호르무즈 해협 위기와 섬뜩할 정도로 겹친다.
당시 이란은 자국의 석유를 부당하게 독점 착취하고 있던 영국 기업으로부터 권익을 회수하기 위해, 정당한 권리로서 석유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영국은 강력한 해군을 파견해 페르시아만을 군함으로 봉쇄하고 전 세계를 위협했다. 거대한 석유 기업(국제 석유 카르텔)도 이에 동조했으며, 이란 경제는 완전히 고립되고 사람들은 질식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압도적인 무력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이란에 손을 내민 것은 일본의 민간 기업인 이데미츠코우산(出光興産)이었다.
왜 이데미츠 사조 씨는 회사가 망할 위험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배를 띄웠는가.
당시 이데미츠코우산(出光興産)은 세계적인 거대한 석유 카르텔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도 외국 자본에 장악당해 ‘12사 대 1사’라는 절망적인 포위망 속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국 안에서도 자유로운 사업이 허용되지 않는 부조리다.
이데미츠 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의 생생한 고난을 이렇게 되돌아보고 있다.
‘이데미츠로서는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흐름을 끊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결국 제품을 이데미츠에 팔지 말라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고통받고 있던 헤일란이 살짝 등장했다. (일본경제신문 『내 이력서』(9) 전후 석유 시장, 1956년 7월 19~28일 게재)
●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배가 침몰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
게다가, 강력한 영국 해군의 군사 봉쇄를 뚫고 선박을 출항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우려는 승무원의 생명이었다.
《그때도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배가 침몰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배는 좋지만 인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동 기사)
하지만 이데미츠 씨가 단순히 자사가 어려워서 이란 석유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국제적인 규칙과 정의에 대해 이데미츠 씨는 매우 냉정하고 신중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모사데그라는 사람은 민족 독립의 깃발을 내걸고 일어서는 사람으로 호감을 얻었다. 하지만 나 역시 국제 신의를 지켜야 하기에, 무턱대고 매수를 할 수는 없다. ‘제발 이란 석유를 사 주세요’라는 모사데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본인으로서 국제 신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속에 뚜렷이 다짐했기에 1년 반 동안 숨겨 왔다》(동 연재·‘이즈미 사조 나의 이력서(10) 이란에서 수입’)
이데미츠는 이란에 대한 동정만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국제 신의’를 중시하며 1년 반 동안 견뎌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이 공동 판매 회사를 설립해 이란의 석유를 사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미국·영국이 사러 간다면 내가 사러 가도 괜찮겠지”라고 확신하고, 결국 탱커·일장마루를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다.
1953년 4월 10일, 일장마루가 이란의 아바단 항에 도착하자 수천 명의 이란 시민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전 세계가 적이 되는 상황에서, 일본만이 실력으로 도와주러 와줬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비 항해를 지휘한 선장과 승무원들 역시 침몰의 공포와 싸우면서, 어려움에 처한 이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패전이 일어난 지 아직 짧고, 국제 사회에서 자신감을 잃고 있던 당시 일본 국민에게, 대영제국과 거대한 카르텔에 당당히 맞서는 일장마루의 모습은 얼마나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까.
일장마루는 석유를 가득 실어 사망지를 돌파하고, 5월 9일에 무사히 가와사키 항에 귀항했다. 하지만 격분한 영국 측은 “그 석유는 도둑물품이다”라며 트집을 잡고, 도쿄 지방 법원에 압류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데미츠 씨는 법정에서도 대국을 상대하며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영국 측 변호사는 “이데미츠 사장은 뭐라고 하는지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지만, 이데미츠 씨는 법정에 서서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이 힘 있게 선서했다.
《이 문제는 국제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끝까지 하겠다고 재판장에게 서약합니다》(동 기사)
이 ‘俯仰天地에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하늘에 대해서도, 땅 위의 누구에게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강렬한 자부심이다. 그 결과 도쿄 지방법원은 영국 측의 신청을 기각했고, 이데미츠는 완전 승소를 거두었다.
● 이데미츠 씨의 당시 결정은 일본의 '강력하고 실리적인 무기'였다
현재 일본이 친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이란에게 적대시되지 않고 관계를 개선하려는 발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란의 교활한 손익 계산 뒤에, “세계가 이란을 버리고 군사적 봉쇄로 목을 조이고 있던 시기에, 일본만이 자국의 이익과 대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국제 신의와 정의를 지켜주었다”는 압도적인 역사적 기억이 근본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외교 협상이나 입으로만 하는 평화 외교로는 쌓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존폐가 걸린 극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내민 강렬한 사실만이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국가 간 유대를 굳건히 보장한다.
일장마루 사건은 단순한 옛날의 미담이 아니다. 지정학적 위기가 지속되는 현대에, 이데미츠 씨가 남긴 ‘보답을 바라지 않는 용기와 신념’은 단순한 도덕을 넘어, 다른 나라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일본 외교의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무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얕은 감정론이나 피상적인 평화론에 도피하지 않고, 이러한 역사적 진실과 국가 간의 교활한 현실을 모두 직시하여 교묘히 미래에 활용해야 한다.
오구라 켄이치
なぜイランは日本だけ特別扱い?高市首相が親米でも敵にならない「73年前の決断」
なぜイランは日本だけ特別扱い?高市首相が親米でも敵にならない「73年前の決断」/ 3/31(火) /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いまだ混乱している中東情勢。米国との同盟を強める日本に対し、対立するはずのイランが日本に配慮を示すかのような報道も聞こえてくる。背景には、単なる外交戦略だけでは語れない歴史がある。それが、出光興産が大きく関与している73年前の出来事である。(イトモス研究所所長 小倉健一)
● イランが日本を「特別扱い」する“ある出来事”
2026年3月、高市首相はアメリカを訪問し、トランプ大統領に対して極めて強い親米姿勢を示した。見方によっては、アメリカにこびへつらっているかのように映るほどの行動である。当然、アメリカと激しく対立しているイランから見れば、日本のこうした態度は決して面白くないはずだ。
しかし、事態は意外な方向へ動いた。
高市首相の訪米直後、イランのアラグチ外相がホルムズ海峡での日本関連船舶の通過を「認める用意がある」と発信したという報道があったのだ。。日本にとってはエネルギー供給に関わる死活問題であり、このイランからの配慮は本当にありがたく、感謝すべき出来事であろう。しかし、まだ事態に進展はなく、船舶通過は一向に見通せない状況が続いている。
では、なぜイランは日本を特別扱いするのか。「日本国内の平和を願う反戦運動のおかげだ」などと捉えるのは完全な的外れである。これはイラン側の冷徹で現実的な「損得勘定」の結果だ。
現在、中東情勢は緊迫し、エネルギー輸送の要衝であるホルムズ海峡は事実上の封鎖状態にある。イランの冷徹な損得勘定とは、西側諸国との完全な破滅的衝突を避けるための「安全弁」として日本を利用することである。
日本はG7の一員でありながら、中東を武力で植民地支配した歴史がなく、宗教的な対立もない。さらに、高市首相がどれほどアメリカに同調しようとも、日本国憲法の制約上、日本が自ら進んで直接的な軍事攻撃の先頭に立つことはないとイラン側は冷徹に見抜いている。
つまり、アメリカの同盟国の中で最も対話の余地がある「抜け道」が日本なのだ。
さらに言えば、長引く経済制裁によってイランの国内経済は疲弊しきっている。将来的な制裁解除や経済復興を見据えた時、高度な技術力と経済力を持つ日本とのパイプを完全に絶つことは、イランにとってあまりにも不利益が大きい。表面的な政治的対立を超えた次元で、イランは日本という国を戦略的に確保しておきたいのだ。
しかし、そのしたたかな外交カードを成り立たせている大前提こそが、日本とイランの間に存在する「特別な歴史的経緯」である。
過去の記憶が単なる歴史の1ページではなく、現代の危機において極めて現実的な信頼の担保として機能しているのだ。
その歴史的経緯の中心にいるのが、出光興産の創業者であり、ベストセラー小説『海賊と呼ばれた男』の主人公のモデルとなった出光佐三氏(1885-1981)である。
● 「日章丸事件」が象徴する日本とイランの関係
イランの人々が日本に対して特別な信頼と親日感情を抱いている原点には、1953年に起きた「日章丸事件」があると言われることがある。奇しくも当時の状況は、現代のホルムズ海峡危機と不気味なほど重なる。
当時、イランは自国の石油を不当に独占搾取していたイギリスの企業から権益を取り戻すため、正当な権利として石油の国有化を宣言した。
これに激怒したイギリスは、強力な海軍を派遣してペルシャ湾を軍艦で封鎖し、世界中を威圧した。巨大石油企業(国際石油カルテル)もそれに同調し、イラン経済は完全に孤立し、人々は窒息状態にあった。
そんな状況下で、イギリスの圧倒的な武力と圧力に屈せずイランに手を差し伸べたのが、日本の民間企業である出光興産だった。
なぜ出光佐三氏は、会社が潰れる危険や命のリスクを冒してまで船を出したのか。
当時、出光興産は世界の巨大な石油カルテルから強烈な圧迫を受け、国内でも外資系資本に牛耳られ「12社対1社」という絶望的な包囲網の中で叩き潰されそうになっていたという。自国の中ですら自由な商売が許されない不条理である。
出光氏は自身の手記の中で、当時の生々しい苦境をこう振り返っている。
《出光としてはまずいが節を曲げないで闘かったので非常な苦境に陥った。それで最後には製品を出光に売るなという格好になってしまった。そして苦しんでいるところヘイランがぽこっと出てきた》(日本経済新聞『私の履歴書』(9)戦後の石油市場 1956年7月19〜28日に掲載)
● 「私が一番恐れたのは船を撃沈されやしないかということ」
さらに、強大なイギリス海軍の軍事封鎖を突破して船を出すにあたり、最大の懸念は乗組員の命であった。
《あのときだってまず私が一番恐れたのは船を撃沈されやしないかということだった。これは船はいいとしても人命に関することだからである》(同記事)
しかし、出光氏は単に自社が困っていたからイランの石油に飛びついたわけではない。国際的なルールと正義について、出光氏は極めて冷静かつ慎重に状況を判断していた。
《モサデグという人は民族独立の旗印を掲げて立った人で好感が持たれた。ところが私としても国際信義は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そうむやみに買付をやることはできない。「どうかイラン石油を買ってくれ」というモサデグの心持ちはよく分るけれど、日本人として国際信義を無視するようなことをしてはいかんということは、はっきり心内に言いきかせていたので一年半は隠忍していた》(同連載・「出光佐三 私の履歴書(10)イランから輸入」)
出光はイランへの同情だけで動いたわけではなく、「国際信義」を重んじ、1年半もの間耐え忍んだ。そして、イギリスやアメリカが共同販売会社を作ってイランの石油を買おうとする動きを見せた時、「米国、英国が買いにいくなら私が買いにいってもいいだろう」と確信し、ついにタンカー・日章丸を極秘裏に派遣したのである。
1953年4月10日、日章丸がイランのアバダン港に到着すると、数千人のイラン市民が熱狂的に歓迎した。世界中が敵に回る中、日本だけが実力で助けに来てくれたからであろう。
この極秘航海を指揮した船長や乗組員たちもまた、撃沈の恐怖と戦いながら、苦境にあるイランの人々のために命を懸けた。
敗戦からまだ日も浅く、国際社会の中で自信を失っていた当時の日本国民にとって、大英帝国と巨大カルテルに堂々と立ち向かう日章丸の姿は、どれほど大きな希望と勇気を与えたことだろうか。
日章丸は石油を満載して死地を突破し、5月9日に無事川崎港へ帰港した。しかし、激怒したイギリス側は「その石油はドロボウ品だ」と難癖をつけ、東京地方裁判所に差し押さえを求めて提訴した。
出光氏は法廷の場でも、大国相手に一歩も引かなかった。イギリス側の弁護士が「出光社長はなんというか信じられない」と批判したのに対し、出光氏は法廷に立ち、裁判長に向けて次のように力強く宣誓したのである。
《この問題は国際紛争を起しております。それだから私としては日本国民の一人として俯仰(ふぎょう)天地に恥じない行動をもって終始することを裁判長にお誓いします》(同記事)
この「俯仰天地に恥じない(ふぎょうてんちにはじない)」とは、天に対しても、地上の誰に対しても、一切恥じることのない正しい行動をしているという強烈な自負である。結果として、東京地裁はイギリス側の申請を退け、出光は完全勝訴を手にした。
● 出光氏の当時の決断は日本の「強力で実利的な武器」だ
現在、日本が親米的な態度をとりながらも、イランから敵対視されず、関係性を良くしようとするような旨の発信も受け取ることができるのはなぜか。
それは、イランのしたたかな損得勘定の裏に、「世界がイランを見捨て、軍事的な封鎖で首を絞めていた時、日本だけが自国の利益や大国の圧力に屈せず、国際信義と正義を貫いてくれた」という圧倒的な歴史的記憶が根底にあるからではないだろうか。
信頼というものは、一朝一夕の外交交渉や、口先だけの平和外交で築けるものではない。国家の存亡がかかった極限状態において、自らのリスクを背負って手を差し伸べたという強烈な事実だけが、何十年という時間を超えて国家間の絆を強固に担保するのだ。
日章丸事件は単なる昔の美談ではない。地政学的な危機が続く現代において、出光氏が残した「見返りを求めない勇気と信念」は、単なる道徳を超え、他国には絶対に真似のできない日本外交の最も強力で実利的な武器となっている。
私たちは、薄っぺらな感情論や表面的な平和論に逃げるのではなく、こうした歴史の真実と国家間のしたたかな現実の両方を直視し、したたかに未来へ生かしていくべきである。
小倉健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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